집단성이라는 환영
14(temperance)와 15(devil)는 서로 연결되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일반적인 상징적 의미로 표현하면 :
14(temperance) : 정화, 양 → 질, 육 → 영
15(devil) : 물질화, 질 → 양, 영 → 육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이해를 돕기에는 수월할 것이다. 13(death)을 통하여 변환이 완료된 시점에서, 영혼은 실체변화의 실질적 과정을 거친다. 그 이전까지는 일종의 "준비 과정", 예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4는 영혼의 불순물을 걸러내어 순수한 에센스만을 추출해내는 과정이며, 이것은 14의 그림의 상징에서 산 정상의 케텔을 향하는 길이 직접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과정이 단순히 수평적-양적 과정이 아닌, 수직적-질적 과정임을 파악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14의 정화는 결국 "에센스"를 만드는 과정이며, 이는 인간 존재의 변성 과정에서의 "영화(靈化)"를 의미한다. 의식의 초점이 영으로 전환되며, 존재의 중심으로서의 영이 다시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완료된 순수한 영을 다시 물질 속에 투여하는 과정이 바로 오늘의 15, 즉 "악마"의 상징성이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그림의 상징을 보면, 몇 가지의 주요한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속 악마는 양 손을 대각선으로 펼치고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As above, So below)"를 의미하며, 영과 육의 관계성을 상징한다(물론 전통적인 오컬트에서는 프렉탈 구조의 상징성도 내포한다). 그리고 이 상징은 마법사와 교황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로써 우리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 추론해볼 수 있다.
먼저, 이것은 "위(천상)"와 "아래(지상)"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위(천상) : 하늘, 본질, 근원, 순수, 이상, 영(Spirit), 수직, 초월, 영원......
아래(지상) : 땅, 물질, 현상, 사건, 에고(ego), 마음(mind), 수평, 유한성, 상대성......
사실 이런 식으로 개념들을 쭉 펼쳐놓고 나열한 것을 무작정 외우거나 학습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 다만 지금은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이때, 위와 아래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문장이 바로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며, 이것은 다른 말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 나타난다. 즉, "아버지의 뜻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루어진다)"를 뜻하며,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존재 안에서 실재가 되게끔 구축하고 실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관계성은 다음과 같다.
1. 위와 아래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2. 위와 아래는 하나이며, 연합한다.
3. 위와 아래는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면서 동시에 합일한다.
4. 위는 높고, 아래는 낮으며, 위가 아래를 통치하고, 아래는 위의 통치를 받는다.
5. 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며, 위의 이루어짐 없이는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6. 아래와 분리된 별개의 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아래를 통해서만 위에 이를 수 있다.
7. 아래 가운데에 위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낼 때, 아래는 위를 통하여 완전해진다.
8. 그러므로 위는 아래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아래는 위를 통하여 완성된다.
사실 이 규칙들은 개별 항목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체가 하나의 "역동성, 통합, 하나됨"이다. 다만 그 하나됨 자체가 높은 차원이기에 낮은 차원의 언어, 지식, 관념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파편화, 부분화가 필요하다. 본래 진리란 그러한 것이다. 입체세계에서의 구(毬)를 평면세계에서 설계도로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이 구를 여러 부분들로 나누고 분절하고 자르고 파편화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며, 오직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바로서야만 이루어지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 위와 아래의 관계성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되돌리는 힘이 바로 저 유명한 히브리서 11:1 말씀,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이며, 이것은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
1. 인간 존재는 위보다 아래를 더 바라고 원하고 욕망한다.
2. 인간 존재에게 위보다 아래가 더 중요하고, 높다.
3. 인간 존재에게 오직 보이는 것(아래)만이 실체이며, 보이지 않는 것(위)은 실체가 아니다.
4. 믿음은 인간 존재 안에서 양자의 위계를 완전히 전환하는 것이다 : 믿는 자는 아래보다 위를 더 소망하며, 아래보다 위가 더 중요하고 높으며, 믿는 자에게 아래는 환상이요 위만이 실재이다.
이때, 이러한 위와 아래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포함된 세 장의 카드, 곧 마법사(1), 교황(5), 악마(15)는 이 관계성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보여준다. 먼저, 마법사의 경우에는 "의지력(Will)"이 곧 존재 안에서 "질서와 구조"를 전환하는 의식적인 과정임을 뜻한다. 쉽게 말해서, 히11:1의 가르침을 자기 존재 안에서 의식적으로 이루어내는 과정이며, 자신의 믿음의 의지적 힘을 이용하여 위(신성)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래(물질, 현상)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실질적 구현의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마법(Magic)"의 실재이다. 즉, 마법은 특별히 이단적인 것도 비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통치"를 나의 존재와 삶 속에서 의식적인 원리와 법칙으로 구현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또한 교황은 이러한 "상위 차원"의 원리, 법칙 등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인도하는 과정이며, 이것이 곧 "성례전"으로서의 교리, 전통, 의례 등으로 자리잡게 됨을 의미한다. 좀 더 쉽게 말해, 마법사는 자기 존재 안에서 "나"의 구조를 전환하는 것이고, 교황은 "집단성"을 통하여 상위 차원의 원리와 법칙을 구현하고 계승하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가톨릭의 교리는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영적 원리이기도 하다. 즉, "신성이 지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집단적인 교리, 체계로 구축하여, 이를 각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공유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재, 인도"는 반드시 "신성의 힘이 지상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것(Hierophany)"을 목격한 자의 증언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악마(15)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몇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
1. 열화(劣化) : 위의 본질이 아래의 현상 안에 구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손실"이 발생한다.
2. 현실화 : 보이지 않는 실재를 "보이는 차원"에서 구현하는 힘, 과정, 원리, 법칙 등을 의미한다.
3.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왜곡, 변질, 타락 등으로서의 죄와 악을 의미한다.
결국 이 또한 "하나"이다. 악마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긍정적 측면(현실화, 모습을 드러냄)과 부정적 측면(열화, 필연적 손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이때 우리는 죄와 악의 개념에 대해서 이전과 사뭇 다른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죄와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며, 오히려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질서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위 차원과 하위 차원, 그리고 양자의 관계성과 질서와 원리와 법칙,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주권)"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통치)" 안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는 "은혜(복음의 성취;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내 안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의 본질이 구현되는 과정에서의 필연적인 열화, 혹은 "빛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두움이 있어야" 하는 배경이 되며, 악은 "신성(그리스도)"이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한 존재의 필연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은 "완전하고 영원한 빛"이시며, 이 자체가 이미 현상계의 존재의 틀을 넘어서 계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현상계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기(임재) 위해서는 반드시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요소"로서의 죄와 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현상계"라는 게임의 규칙 안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구현 불가능한 특별한 존재(신성)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규칙 바깥의 예외(죄, 악)"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죄와 악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1) 죄는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의 일부이며, 2)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어두움 안에 종속당하는 것이 아닌, 어두움을 통하여 빛을 인식하며, 어두움을 배경으로 하여 빛으로 가까이 나아가려는 운동성이며, 3) 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며, 4) 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존재의 역동성으로서 이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악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만든 개념으로서의 선악은 망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라는 선이 드러나시기 위한 필연적인 이원성의 한 축으로서의 악은 실존적인 것이고 실재적인 것이다.
물론, 악 자체는 가능한 피할수록 좋다. 이는 인간 존재로서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나쁜 것을 피하고 싶고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된 바, 이 "현상" 자체를 문제시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오히려 순종이 아닌 반역이 된다. 인간으로서 나는 자연스럽게 공포와 욕망을 갖고, 욕구를 가진다. 이 현상(상태)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되, 다만 중요한 것은 "존재의 운동성", 곧 "의지의 방향"이다.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두움에 천착하고 집착하며 그 안에 안주할 것인가, 의 문제라는 것이다. "교만"이 없다면 "순종"도 없다. 마음에서 교만이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죄성적 구조이며, 오히려 그렇기에 "현상계의 규칙을 벗어난 예외적 존재"로서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과 영혼 안에서만 직접 모습을 드러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교만을 순종보다 "더" 높이 취급하는 것, 순종보다 교만을 더 사랑하는 것, 곧 "의지"의 방향 그 자체는 실제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매우 중요한 이해 중 하나이다.
죄는 "상태"에 있지 않다. 죄는 "방향성"에 있는 것이다.
또한, 악마는 "마법의 삼각형"으로써 연인 카드와 유사한 특성을 공유한다. 연인 카드의 상징성이 결국 "진리의 삼각형", 나의 존재의 영과 혼이 합일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다, 는 것을 의미할 때, 이러한 "빛"은 오직 내 안의 "어두움"의 구조를 통해서만 현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욕망"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도 귀결된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와의 합일이 "가장 높은 차원의 사랑"이라면, 육체적 욕구(예: 식욕, 성욕, 수면욕 등)나 그에 대한 이끌림(욕망)은 "낮은 차원의 사랑"이며, 이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낮은 차원의 사랑이 나의 존재 안에서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낮은 차원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운동성(의도)은 죄가 된다. 중요한 것은, 낮은 차원의 사랑의 체험이 없다면, 그 에너지가 상승하여 높은 차원의 사랑의 현현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절대 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죄 자체를 죄악시하며, 더 넓은 관점에서 물질세계와 물질계에서의 나의 "낮은 차원의 삶" 자체를 부정하려고 든다. 이것이 전형적인 "성(性)"에 대한 억압과 죄악시로 연결되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욕망이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며 오직 경건하고 이상적이고 순결한 태도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간중심적인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자체가 영지주의적인 함정에 농락당하는 것이다. 욕구가 없다면 사랑도 없다. 욕망이 없다면 열망도 없다. 공포가 없다면 평화도 없다. 쾌락이 없다면 기쁨도 없다. 낮은 차원의 욕구/욕망의 체험은 곧 "상승"하여 높은 차원의 사랑을 열게 만든다. 이것이 또한 중요한 원리이며, 다만 "낮은 차원의 욕구/욕망으로서의 체험"은 필연적으로 물질성에 대한 타락, 그러니까 집착, 왜곡, 변질을 낳게 된다. 이는 물질적 체험/경험 자체가 지닌 기본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 안에서 1) 어두움을 비판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2) 이를 받아들이되, 3) 이에 안주하지 않고 높은 차원(어두움에서 빛으로)으로 나아가려는 운동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다.
오쇼는 이 카드를 "조건화"라는 이름으로 설명했다. 이것은 사자와 양의 은유로 설명되는데, 매우 아름답고 탁월한 은유이다. 이때 사자는 영(Spirit)이며, 대개의 경우 "부활 이전"의 존재를 에고라고 부른다. 이때, 에고는 개체의식이며, 이 자체도 매우 신중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개체의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며, 개체의식에 대한 "집착"이 문제인 것이다. 즉, "나"라는 에고 자체는 자연스러운 존재의 일부이며, 영과 영혼과 의식을 담는 물질적 몸(그릇)이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다만, "종이 주인의 자리를 넘보려고 하는 것"과, "종이 주인을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죄이며, "자기가 죽지 않은 상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 개체의식은 "단일한 개인"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개체의식을 "개인적인 존재"라고 착각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개인성"이라는 것은 1)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안의 진리로 인해서만 존재하며, 2) 이것이 아닌 바깥의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 존재의 고유성과 완전성을 회복한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절대 다수의 개체의식들은 "실체 없는 망상"이다. "나는 누구인가(WHO I AM)?"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초심자들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공허함"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들, 관념들, 지식들, 옳고 그름의 분별들, 그 기준들과 분별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과 타자와 세계에 강요하고 억압하려는 사고방식과 태도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자 내가 주인이라고 여기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답하지 못하며, "나"라고 설명하는 모든 것들(예: 과거의 기억, 경험, 사고방식, 성격, 성향......)은 죄다 "바깥으로부터 강제로 학습당한 것"들이며,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온 나의 고유한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뼈아픈 통찰이다. 에고의 본성은 교만이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여기며 지금껏 살아왔는데, 정작 그 높음의 근거를 자기 안에서 찾아본 결과, 죄다 바깥에서 훔쳐와서는 제멋대로 재구성한 것들일 뿐, 온전한 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에고는 개체적인 것처럼 보일 뿐, 개체성이 아니다. "집단성에 대한 동일시"이다. 즉, 불특정 다수로서의 집단, 군중, 세력들을 "나"라고 착각하여 동일시하며, 개체로서의 나는 그 집단의 "이름 없는 수많은 부품들 중의 하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실체이다. "망상적 실체"이며, "죄성적 구조"이다. 이것은 말로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지식에 대한 집착은 앎과 이해에 대한 집착이며, 이는 통제에 대한 욕망과 통제되지 않음에 대한 공포에 근거하는 죄성의 강화를 낳을 뿐이다. 늘 깨어 있으라, "나"의 존재가 대단한 것도 우월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나"라고 믿어왔던 이 존재가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개하라. 에고로서의 나의 존재와 삶은 온통 "집단성과의 동일시"라는 죄성적 구조 안에 자리매김해 있으며,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어두움의 원리 안에 지배당하고 있다.
"나-임"을 발견하는 순간은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의 의식의 초점이 상승하는 순간이다. 나는 몸이다, 에서 나는 자아/마음이다, 로...... 그리고 이것이 다시 나는 의식/무의식이다, 에서 나는 영과 영혼이다, 로......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그때, 여전히 개체의식 자체는 남아 있지만, 개체의식에 대한 집착은 "힘이 빠지며", 내 안에서 과거의 나를 넘어선 무언가가 해방되어 현현하기 시작할 것이다. "진짜 주인"이, "상위 차원"의 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삶에서, 가짜 주인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들 때, 오직 고통과 괴로움만이 반복될 뿐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없다. 삶의 가장 깊은 어두움의 순간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가짜 주인의 폭정과 폭압에 순순히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상황을 통제해야만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그에게 주권을 스스로 넘겨드리는 것이다. 이 의식적인 자각과 전환의 과정들은 결코 쉽지 않으며, 이것은 "가면 속에 감추고 있는 죄"의 실체를 온전히 정면으로 마주하고 통과할 적에만, 가면 너머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죄가 없다면 은혜도 없다. 욕망이 없다면 열망도 없다.
다만 어두움에 안주하지 말되,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향하여 가까워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 이번 주말(~11/1일 토요일)까지 1:1 유료 영성 수업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브런치에 올라온 관련 공지(<생명의 언어> 1:1 영성 수업 신청자 모집 안내) 글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