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mperance : 영혼의 정화

성부께로 이르는 직선의 경로

by 생명의 언어

Temperance라는 단어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


1. 혼합된 상태의 질료 중에서 순수한 에센스만을 추출하는 과정.

2. 서로 다른 두 에센스를 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과정.


그리고 1에서는 필연적으로 "불순물", 그러니까 불필요한 요소들이나 오염, 왜곡, 변질, 타락한 부분들을 강제로 제거하고 탈락시키는 과정이 이어지게 되며, 이것을 바로 "정화"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정화라는 말 자체를 무언가 순수하거나 낭만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는데, 실은 이것은 순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것들을 즉시 제거하는, 아주 냉혹하고 무자비한 외과수술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폭탄에 맞아 생명이 경각에 달한 병사를 살리기 위하여 과감하게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절단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의미에서 1과 2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1이 완료된 이후에 자연스럽게 2가 이어지게 된다. 엄밀히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했지만, 나는 창조라는 단어를 결코 함부로 망령되이 써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창조는 신의 언어이자, 신의 권능 그 자체이다. 사람이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1은 정화, 2는 성화라고 불러야 적절치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나는 교회 바깥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일 뿐,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크리스천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들은 기존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으로서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 성장의 과정을 "신앙"이라고 불렀을 때, 신앙의 본질이 바로 Temperance라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


1.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모든 것들의 제거, 정화, 회복.

2. 나의 존재(몸, 마음, 자아, 무의식, 의식, 혼, 영...... 을 전부 포함하여)의 "불필요한 요소"들을 철저히 걸러내고, 나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완성된 아름다움으로" 조율해가는 과정.


이때, 중요한 것은 이 과정들이 믿는 자가 주체적으로 진행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을 거느리시고 통치하시는 과정이다. 오직 성령께서 이 작업을 진행하시며, 믿는 자는 물론이고 현현우주의 그 누구도 이 과정에 함부로 개입하거나 관여할 수가 없다.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정화의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잔인하리만치 길고 지난하고 고통스럽다. 그 과정은 각자의 영혼마다 서로 다른데, 이는 각자의 영혼의 상태(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세를 진단하듯이)가 다르기에, 먼저 외과수술을 진행하여 악성종양을 잘라내고 제거하며, 그 다음에는 직접 투약하여 몸의 시스템을 다스리고, 약을 처방하여 회복을 진행하는, 어쨌거나 그러한 총체적인 존재의 정화, 성화 과정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각 영혼들이 제각각 다른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서 "큰 틀"로서는 집단과 공동체가 도움이 될지언정, "신앙의 현장"에서 부딪히고 마주하는 문제에 관한 한,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사람도 집단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홀로서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길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평화는 "모든 조율이 완료된 영의 최상의 아름다움"으로서의 결과물이다. 지금까지 운동이라곤 전혀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제 헬스장을 다니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트레이너들과 같은 근육질의 아름다운 몸매를 갖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이라 부르기에도 뭣한, 지독한 어리석음과 오만함과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제대로 다룬 적도 통제한 적도 훈련해본 적도 없는 자가 그저 교회 다니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영성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그의 영혼이 "최상의 아름다움"대로 조율될 리가 없는 것이다.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과정이 이어질 것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질 것이다. 무언가가 분명히 변화하고는 있는데, 성령께서는 당사자에게 결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권을 거느리시고 통치하시는 분께서 "아랫사람"에게 굳이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길은 오직 "침묵 가운데에서 끝까지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시험의 유일한 답안으로서, 우리가 답안지에 써서 제출해야 할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그 "순종"이라는 것은, 머리로 개념으로 지식으로 알기에는 쉬울지언정 몸으로 체험으로 의지로 이루는 것은 지독하게 힘들고 무거운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리 나아가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며, 그리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의 영적 성장의 길을 걷는 영혼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나의 형제들에게 말하고 싶은 바, "우리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치 영적 성장을 시작할지 시작하지 않을지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마치 호텔에 가서 룸서비스를 시키듯이 그렇게 내가 주권을 쥐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천만에, 성장하면 살 것이고, 성장하지 못하면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냉정한 진실. 나는 이것을 숨기고 감추려 하지 않는다. 각 종교나 전통마다의 가리키는 이름이 다를 뿐, 결국 하나의 진실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살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그 안의 죄성으로 인하여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 반드시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자기 안의 번뇌와 고통과 괴로움을 넘어서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그 번뇌의 불꽃이 산처럼 커져서 자기 영혼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 유일한 길이고, 다만 그 길을 먼저 걷기로 결단하느냐, 아니면 미적지근하게 망설이다가 기회를 다 놓치고서는 뒤늦게 신을 원망할 것인가, 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성령께서는 내 사정을 기다려주지 않으신다." 이것은 또한 학생들이 스승 앞에서 명심해야 할 일이다. 그 어떤 종교나 전통을 불문하고, 깨달은 자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 신을 만난 자에게 영적 인도를 받을 기회, 진리를 알고 신을 만날 기회는 삶에서 결코 여러 번 찾아오지 않는다. 마치 시장 바닥에서 물건 고르고 흥정하듯이 그리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정이야 당연히 각자가 다 존재한다. 이 세상에 사정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다만, 자기의 사정을 핑계 삼고 변명 삼아서 영적 성장의 유일한 기회를 저버리고 외면한다는 것은, 결국 사정을 핑계삼았을 뿐, 그 자신이 성장하고자 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왜 성장하지 않으려는가? 성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가? 자신의 현 상태가 얼마나 처절하고 처참한 지경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자기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자기 스스로 아름다움보다는 추악함을, 은혜와 축복보다는 원죄와 죄성을, 빛보다는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말이 지나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


"성장하면 살 것이고, 성장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정화의 과정에서, 이것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걸러내는 과정"으로 중점적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현대에서 인공지능을 훈련시키는 과정과도 유사한데, 만약 자율주행 자동차가 새로운 유형의 사고를 냈다고 가정하자. 이때, 기술자들은 인공지능을 가상의 해당 장면/상황 속에 집어넣은 다음, 그 안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낼 때까지 영원히 반복하게 만든다. 그 인공지능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영원히 되풀이되는 상황 속에서 결국 단 하나의 답을 찾아서 제출해야만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


1. 심판의 권세는 시험을 치르는 영혼에게 있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시험의 합격 여부를 결정하시고

2. 그 결정을 내리실 적에 인간적인(육적인) 노력이나 성과 등은 전혀 보지 않으신다는 것.


사실, 이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잔인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할 적에, 대다수의 믿는 자들은 그 사랑을 인간적인 수준의 사랑으로 오해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정확히 말하자면 :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살리시기 위하여 서슴없이 나의 에고를 죽이시는 분"이시다. 시험을 치르는 자녀는 어리석은고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버지를 원망하나, 그 원망을 듣더라도 자녀의 영혼을 "온전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의 에고와 육신과 마음을 죽이고 깨뜨리고 낮추게 하여 그분의 의로우신 뜻을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삶의 시련과 고난이라는 시험을 치를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앙이다. 십자가를 지는 과정은 당연히 각 사람마다 무섭고, 두렵고,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서로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뭐가 어렵냐"고 너무도 쉽게 타인의 고통의 무게를 재단하고 심판하려 드는 죄성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면, 하나님께로서는? 그건 유감스럽게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이해하신다 한들, 그렇다고 하여 시험을 취소하시거나, 줄여주시거나, 대체해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험의 목적은 명확하다.


1. 나의 영을 올바르게 중심을 바로세우는 것. "영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2. 나의 영혼을 순결하고 아름답고 충만하게 회복, 정화하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을 닮아가는 것."

3. 나의 영과 영혼을 영원히 살리시기 위하여, 나의 에고를 잠시 낮추시는 것.


영은 존재의 중심이다. 영의 차원의 거듭남은 단순하다 : "1인칭 능동태"의 죄성적 "존재-구조"에서, "신성한 수동태"의 은혜로운 자녀로서의 "존재-구조"로 시스템 전체가 완전히 재구성되는 것이다. 1인칭 능동태는 곧 "내가 한다, 내가 해야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의 통제, 억압 중심주의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내면의 불안과 결핍에서 비롯하며, 이는 다시 집단적인 무의식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에서 근거한다. 그러나 신성한 수동태는 곧 "신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이며, 이는 곧 신과의 연합이기에, 그것은 사랑에서 근거하며, 사랑은 '온전함'이요 '완전함'이기에 더 이상 통제하고 억압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며, 따라서 마침내 빛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 곧 사랑과 자비를 지상에서 확산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존재-방식이 된다.


영혼은 일종의 "에너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빛을 실제로 닮아가고, 물들어가는 것이다. 차갑고 냉정하던 자가 따뜻하고 선한 마음을 내며, 남의 아픔과 슬픔에 무감각하던 자가 진실로 타인의 고통에 눈물 흘리게 하시며, 오만하고 고집스럽던 자가 자기를 낮추는 겸손 앞에서 크게 회개하게 하시니, 이 정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를 절실히 사랑"하게 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니, 이 영혼의 "물들어감" 자체가 곧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완성되게 하는 것이다. 이 영과 영혼의 조율과 회복, 완성의 과정 전체가 바로 성화이다. 정확히는, 영이 거듭나는 것은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사건으로서의 칭의요, 영혼이 신을 닮아가고 신에게 가까워져가는 것은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성화이다.


범죄자가 감옥 안에서 성경책을 들고서는 "나는 구원받았으니 그걸로 됐다"며, 피해자들 앞에서 기만적인 태도를 취하는 크리스천들이 유감스럽게도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경고하는 바 : "영의 차원의 칭의는 육의 차원의 성화로 반드시 완성되어야 하는 바, 칭의를 받았음에도 육의 차원에서 사랑과 자비로써 완성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창고에 처박아두고 방치하고 외면한 교만과 나태의 죄로써 그 영혼이 심판대에 설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합당하다 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합당한 것은 아닐 수 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신 것은 사람이 보기에도 당연히 합당하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때로 하나님의 기준에 속하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빛이 성화된 한 인격을 통하여 흘러나올 적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빛을 감지하고, 그 빛에 이끌리고, 그 빛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열매를 맺었는지 여부는 "그가 머무르는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의 어두움을 빛으로 비추어 밝히고 있는가?"의 기준으로 명확히 알 수 있는 법이다. 부족함이 있다면 부끄러움과 열망으로 기도할 일이지, 그저 인간이 만든 형식과 절차 따위를 거쳤다고 해서 정말로 하나님께 칭의받은 줄 착각하며, 심지어 칭의받았다 하더라도 평생에 걸쳐 성화되는 진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외면하는 오만하고 교만하고 나태한 자들이 이 세상에 유감스럽게도 적지 않은 것을 본다. 그 죄는 양들의 것이 아니요, 양들을 잘못 인도한 자들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용서하시되 그들을 잘못 이끈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한 영혼 안에서 이루실 적의 몇 가지의 원칙들이 있다.


1. 시험의 경과와 완성과 결실 등을 전혀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으신다. 이는 곧 "앎 = 통제욕(주권에 대한 집착)"이며, 이를 철저히 낮추시기 위함이다. 그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끝까지 시험을 통과할 것을 인도받는다.


2. 시험에서 그분이 특별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없다. 이 시험의 답안은 이미 정해져 있다 : "하나님께서 때가되었다 하실 때까지, 전적으로 순종하고 끝까지 따를 것." 이 하나만 계속해서 이어간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이것은 매우 큰 자유이면서 동시에 가장 무거운 과제이기도 하다.


3. 시험의 모든 과정들에서 그는 철저하게 보호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영혼이 어두움에 해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의 에고는 정화와 성화를 위하여 육적인 고통, 마음의 고통, 자아가 부서지고 낮추어지는 고통을 겪을 것이며, 그 고통은 비록 실체가 없으나(시험을 위하여 주어진 가상의 것이지만) 이를 통과하는 자에게는 실제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실제로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담대함을 견지해야 한다.


4. 시험의 모든 과정들은 오직 철저히 성령께서 감독하시며, 성령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감히 이 과정을 참견할 수 없다. 만약 다른 수단과 방편으로 이 시험을 축소시키거나 건너뛰게 하거나 생략하게 하려는 꼼수와 편법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성령께서는 그의 교만을 낮추시기 위하여 기존에 있던 시험에 더욱 무거운 시험을 얹으실 것이다. 순종이 가장 빠르게 시험을 통과하는 길이다.


5. 하나님은 진실로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아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즐기는 아버지"가 아니시다. 이에 성령께서는 절대적으로 "최단 시간 안에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정화, 성화를 이루실 것"이며, 우리는 비록 우리들의 눈에 이 과정이 무의미하게 지체되고 연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늘 이것을 믿고 또한 따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고하건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자기 안의 죄성이 불처럼 일어나서는 미친 듯이 발광할 것이다. 본래 이 시험은 바로 그것을 정화하기 위함이다.


6. 시험의 과정들에서 "육적인 소망"은 철저하게 깨뜨려지고 부서진다. 가족, 친구, 지인, 일, 직업, 꿈, 이상, 비전, 심지어 영성과 신앙마저도, 모든 것들이 다 철저하게 부서진다. "나를 높이기 위한 것, 내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것"에 초점이 맞춰진 모든 개인적인 소망들은 철저하게 부서진다. 이제 조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으면, 어느새 그분께서 "피도 눈물도 없이" 한순간에 다 거두어가실 것이다. 그 압도적인 절망 앞에서, 그는 그저 무너져서 울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 성령께서는 보이는 것들은 주지 않으시되, 그가 끝까지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은혜와 축복과 생명"은 언제나 가득 부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언덕에서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자, 아버지께서는 외아들에게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질 수 있는 힘"을 허락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오쇼는 "통합"이라는 카드의 이름을 통하여, "중심이 있기에 바퀴가 순환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지만, 직접적으로 체감하기는 사실 어렵다. 이것을 그리스도적으로 번역한다면 :


"나의 영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나의 영은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이 현현우주의 그 무엇도 감히 나의 영을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함부로 해하거나 건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생에 생을 건너서 체험하는 모든 것들은 그저 업이나 까르마의 반복으로서의 윤회가 아니며, 징벌적인 개념으로서의 윤회가 아니며, "이미 그분 안에서 하나된 채로, 영원히 그 하나됨을 체험하는 것", 곧 영혼의 유희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번 생에서의 에고적인 모든 어두움들은 그저 한 생애에서의 일시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그것이 "즐거운 한여름밤의 꿈"임을, 그 꿈은 언젠가 그분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깨어나게 될 것임을 안다.


죽음의 순간에, 자녀들의 곁으로 성령께서 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기나긴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난 것처럼,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이다. 햇빛이 찬란할 것이며, 따스한 봄 향기가 부드럽게 감싸안을 것이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이며, 나비들이 춤을 추고, 새들이 지저귈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나의 영혼은 그분 안에 안기어 안식할 것이며, 그분과 함께 거닐다가, 밤이 되면 다시 잠에 들 것이다. 그분께서 나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으시며, 내가 홀로 잠드는 순간이 무섭지 않도록, 비록 꿈을 꿀 적에 그분을 잠시 잊더라도 그분마저도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님을, 끝까지 내게 속삭이실 것이다.


이것은 관상이면서 동시에 진실이다. 거듭 말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사실(fact)보다 은유가 절대적으로 더 높기 때문이다. 이것을 온전히 깨달은 자는, 자기의 존재가 "중심에서부터 영원하고 완전하게 신과 하나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의식의 초점을 그 중심부로 옮길 적에, 그에게는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자유와 평화, 기쁨이 언제나 흐르게 될 것이다.


에고는 꿈이요, 영혼은 실재이다. 나의 영혼은 지금도 그분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산다.


이것은 자녀들에게 허락된 언약이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영원한 축복과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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