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 변환(Transformation)

낡은 허물을 벗고

by 생명의 언어

메이저 아르카나 13번에 대해서, 오쇼는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상징으로 이를 설명한다. 이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서 이 카드는 죽음(Death)이며, 전통적인 죽음 카드의 상징적 의미(키워드)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


1. 종결, 끝.

2. 전환, 변환.

3. (변환 과정에서의)필연적인 충격.


이것은 또한 전형적인 연금술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연금술의 "위대한 작업", 그것은 곧 평범한 금속을 신성한 황금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이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뉴턴이 연금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것을 매우 어리석다고 소위 "과학적 관점"에서 비웃고 무시하고 모욕하지만, 그것은 곧 그들 자신의 존재와 영혼과 영에 대하여 그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지를 역으로 증거하는 꼴이다. 연금술은 본래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3차원 시공간의 물질세계에 한정된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법칙과 원리들의 일부만을 규명할 수 있을 뿐이나, 연금술은 "인간의 영혼을 완전한 신성과 하나되게 하는 것"을 지향하며, 그 자체가 신비주의이자 오컬트이다. 따라서 <변형>이라는 키워드는 메이저 아르카나 전체 과정 중에서도 특히나 연금술적인 상징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 할 수 있겠다.


죽음과 관련하여, 세속의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들이 있다. 그 첫째는 죽음이 "완전한 끝"이라는 착각이며, 둘째는 죽음 이후에 "자신의 존재가 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 공포, 불안의 망상이며, 셋째는 이 모든 탄생과 죽음과 삶이 "단순한 우연과 확률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되 다음의 진리를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다.


1.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여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여름으로, 아침에 깨어났다가 저녁에 잠들며, 다시 아침에 깨어나는 것과 같은, "전환"의 과정일 뿐이며, 그것은 "순환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다.


2. 완전한 무(無)에서 완전한 유(有)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뿐이다. 그러므로 신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들은 창조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되, 다만 순환의 흐름과 질서에 따라 주기적으로 형상이 "전환"될 뿐이다. 죽음 이후에도 나는 소멸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나는 "변화한다."


3. 이 세계는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물질은 "창조된 세계의 최외곽"이고, 보이는 세계(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영혼, 의식, 신성)가 더 높고, 크고, 깊다. 현현세계는 "보이지 않는 차원"이 "보이는 차원"을 다스리고 통치하도록 되어 있으며, 이것은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Ancient One)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율법으로 말미암는다. 이로부터 그 어떤 존재, 사건, 현상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대는 물질을 "자각"하는가, 아니면 물질을 "믿는가?" 과학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의식 구조와 과학 그 자체와 과학에 대한 맹신은 제각각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되, 과학적으로 사고하지도 않고 과학적인 의식 구조도 갖추지 못했으며 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되 과학에 대한 집착과 맹신과 아집은 누구보다도 강한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자신이 신 앞에서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를 알지 못한다. 나의 영적 성장이 아직까지 너무도 부족하고 가난한 바, 나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오만함까지도 긍휼이 여기고 인도할 만큼의 자비심과 인내심은 갖추지 못하였다. 그리 살려거든, 그리 살아라. 다만 그리도 추종하는 그 물질이라는 것, 인간의 육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지면 썩어 없어질 부질없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며, 집 앞 마트 정육점에 진열되어 있는 돼지고기나 소고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며, 특별히 신성하지도 고귀하지도 유의미하지도 않은 것이다.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외면한데 대한 대가는, 오직 나 자신이 치르는 법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 영성과 영적 성장과 진리에 대한 추구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여 진리를 깨달은 자들은 죽음과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리하지 않은 자들은 부질없고 허망한 목숨을 연명하다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과 오만함이 불러 일으킨 공허함과 무의미함과 쓸쓸함과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게 끝까지 기만당하고 농락당하다가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장하면 살 것이고, 성장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변형은 곧 실체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가장 깊은 신비적 차원이며, 어떤 의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해되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가톨릭의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는 단지 물질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실체변화된 것이며, 이것을 나의 몸 안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내 안으로 실제로 모시는 과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나는 이 개념을 확장할 것을 제안한다 : 영적 성장과 변화와 완성은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나의 영과 영혼과 의식을 "실제로 변화하게" 만든다. 이러한 실체성이야말로 영성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관념으로서의 철학을 완전히 넘어서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실체가 되지 못하는 진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의 영혼을 실제로 변화하게 만들지 못하는 가르침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는 언젠가 누군가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조금이라도 선한 방향으로 순환케 하는데 공헌하고 있지만, 추상과 관념에 불과한 진리는 세계에 아무것도 공헌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영을 망상적 관념 속에 갇히게 만들며 영혼을 깨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심지어 공허한 진리는 "왜곡, 변질, 타락한 진리"보다도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어두움의 진리들은 "반면교사"로써 영혼들을 빛으로 인도하게끔 하는 "기준점"이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계를 순환케 하는데 공헌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 "실체가 아닌 것들은 죽은 것보다도 못한 것"임을.


이러한 실체변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물질성" 자체에 제한된 것이거나, 물질적 차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소위 "눈에 보이는" 기적을 목격하고 싶어한다. 이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빛이 어두움에 가리우매 이를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어두움 앞에서 두려움, 공포, 불안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곧 공포와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존재의 최외곽", 변두리일 뿐이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변화들은 다 "보이지 않는 중심부"에서 일어난다.


존재는 일종의 "나라"이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나 제도 등은 모두 수도권, 그러니까 "중심부"에서 더욱 활발하게 집행되며, 중심부에 가까울수록 좋든 나쁘든 간에 더욱 활발하게 여러 변화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방이나 외곽에 가까울수록 좋든 나쁘든 간에 변화는 더뎌지며, 정체되며, 마침내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존재라는 왕국에서, 왕이 사는 수도는 곧 영이며, 수도권은 영혼과 의식이며, 외곽과 지방은 마음과 자아이며, 심지어 물질(육신)은 "군사분계선 직전"이다. 즉, 물질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할 수 있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심부"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심부(영, 영혼, 의식)를 외면하고 외곽(마음, 자아, 육신)에 집착한다. 이 사고방식, 곧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보이지 않는 것은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무의식적인 태도들은 특정한 분야나 영역을 넘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의 거의 모든 상황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의식이 깊어지고 영이 열리게 되면, 서서히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실체"들이 관찰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은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작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죽음 이후에 영속할 자기의 영과 영혼에 대해서는 무방비로 방치한다. 아니, 오히려 자기의 마음과 의식과 영혼 안에 온갖 쓰레기들과 잡동사니들을 집어던지고, 짓밟고, 더럽힌 채로 무방비하게 방치한 탓에, 그 문을 열면 지독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외곽을 외면하고 중심부에만 집착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수도권 포화가 이루어지며 온갖 문제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적 사고의 폐단이다. 다만,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다. 현상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하면 나머지를 포기해야 한다.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떠나보내야만 한다. 이러한 "선택"의 관점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우선순위"를 기준하여 바라볼 것인가,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고전 15:50)


의 구절의 본질적인 의미이다. 부활은 영의 차원에서의 역사이며, 육적인 차원에서의 결실과 열매들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이미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요6:63)고 하셨다. 육신의 부활은 없다. 사흘째 되는 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사 제자들이 그분을 목격한 것은 "영화된 신령스러운 몸"이셨지, 썩어 없어질 부활 이전의 육신이 그저 "복원"된 것이 아니었다. 고로 자녀들에게 약속된 내세의 영생이나 부활 역시도 "영의 몸(실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 점에서, 변형은 곧 "본질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변화, 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다른 차원의 본질로의 근본적이고 영원한 전환, 을 의미하는 것이다. <변화>와 <변환>은 받침 하나의 차이이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실재이다. 즉, 썩어 없어질 유한한 물질의 몸에서부터, 물질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 신령스럽고 영화로운 "영적인 몸(실체)"으로의 근본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전환, 이 바로 부활이며,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교리가 드러내는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진리이다.


나는 물론 이것을 기독교인으로써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며, 자유로운 몸으로써 주님을 영접하고 교감하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지만, 지면상의 한계로 인하여 지금은 말을 줄이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의미한 논증을 사랑하지 않으시며, 오직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데 필요한 글과 말과 언어로 인해서만 기뻐하실 것이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


1. 변환은 A(육신, 물질)에서 B(영혼, 영)로의 전환이다.

2. 이 전환은 한순간에 단 한 번 이루어진다.

3. 한 번 전환된 것은 영원히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영적 성장)의 목표는 아주 단순해진다. 바로 "변환"이며, 불완전한 차원(물질성)에서 완전한 차원(영성)으로의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전환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믿는 자의 영과 영혼이 "실체변화"하는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본질적 변환"은 오직 영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이자 본질 그 자체가 바로 영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수평적-양적 차원에서만 성장할 수 있을 뿐, "실체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변환은 오직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사건"이다.




중심부에 해당하는 영(Spirit)은 "변환 이전"과 "변환 이후"로 나뉘어진다. 사실 이런 식의 구분과 접근과 이해는 영의 차원에서는 다 부질없는 것이지만(영은 애초에 개체의식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다), 초심자들을 인도하기 위한 이해의 방편으로 이리 씀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변환 이전은 "어두움에 종속, 지배, 장악"당한 상태이며, 자아(ego)를 "나의 존재의 중심이자 주인(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망상적 실체"이다. 이 차원에서, 망상은 그저 꿈이 아니라 "실체를 갖는다." 꿈속에서 괴물에게 쫒길 적에 그것이 "실체 없는 망상"이라는 것은 깨고 난 이후의 일이지, 아직 꿈속에 갇혀 있을 때(실체변화하지 못했을 때)에는 그것은 엄연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 "실체의 여부는 물질성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물질성은 실체의 일부일 뿐, 본질이 아니다.


영적 세계에서 통일된 언어나 개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을 "에고(ego)"라고 부른다. 즉, 개체의식이라는 망상이 실체로써 존재를 지배, 장악, 기만하고 있는 의식 구조를 말한다. 이것은 "하위 차원", 곧 낮고 열등하고 불완전하고 어두운 차원이다. 이 차원에 갇혀 있을 때,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의식의 어두움과 죄와 업과 까르마 등의 "하위 차원의 법칙"들에 지배당한 채로, 똑같은 꿈을 수천, 수만 번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위 차원에 갇힌 존재의 삶은 "예측 가능하다." 그에게 점술과 역학은 "실제로 작동하는 것"이며, "실체"이다. 그의 존재가 법칙과 원리보다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신앙적으로 "아직 내가 죽지 않은 상태"이며, 이것은 정확히는 "영이 전환되지 못한 상태"이다. 영의 전환은 곧 "주권", 곧 "나는 누구인가(Who I am)?"라는 질문에 대한 의식의 초점, 곧 동일시이며, 이때 개체의식이 곧 자아와 타자와 세계의 주인이자 왕이자 지배자, 통치자라는 강력한 망상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존재를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곧 "아직 자기를 죽이지 못한 상태(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상태)"이며, "아직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한 상태"이다(마16:24).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를 알기는 어렵다. 그것은 매우 미묘하고 깊은 영의 신비이며, 엄밀히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 "에고가 죽지 않으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는다." 물론 그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시지만, 성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순종"이다. 그것은 복종이나 굴복이나 억압이 아니다. "태양의 주권적 질서 안에 지구가 스스로 들어와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고로, "나(ego)는 죽었는가?"라는 질문은 신앙의 결실과 성취의 정도를 점검함에 있어서 매우 가치 있는 유용한 기준이다. 이때의 나, 라는 것은 곧 "교만의 죄"를 뜻한다.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 모든 존재를 자기 발 아래에 두려는 욕망, 자기의 뜻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집착, 그 뜻에 맞지 않는 나머지 모든 것들을 제멋대로 통제, 억압해도 된다는 망상, 그러한 것들이다. 내 안의 존재의 깊은 곳의 죄성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길에서 믿는 자가 짊어지는 "자기 십자가"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 십자가를 지는데 있어 매우 도움이 되는 개인적인 체험 하나를 공유하고자 한다. 에고가 죽기 직전에, 가장 깊은 곳의 죄성이 발악을 하게 되는데, 이 죄성의 최후의 발악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1. 억울함.

2. 수치심.


이것은 가장 교묘하고 교활하게 감추어져 있는 죄성이다. 억울함이란 "(나는 원래 절대 틀리지 않는 존재임에도)내가 옳음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교만이며, 수치심이란 "(나는 본래 세상에서 가장 높은 존재이나)터무니없이 낮은 위치에 놓여 있다"는 교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믿는 자의 에고가 죽어야만, 그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믿는 자에게 "수치심과 억울함"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잔인한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신다. 믿는 자에게 억울한 일이 자꾸만 생기며, 믿는 자가 올바르고 의로운 일을 행하였음에도 비웃음 당하고, 모욕당하고, 조롱과 놀림과 노리갯거리가 되게 만든다. 이것은 그의 죄성이 깊을수록 또한 그 정도가 높고 클 것이다. 이것은 에고에게 있어서 죽음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것이다. 에고의 본성은 곧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에게 있어서 "자기를 낮추는 것"과, "(자기 손에 쥔)통제권을 남에게 넘기는 것"은 죽느니만 못한 공포스러운 존재론적 불안을 야기한다.


영어 깨어날 적에,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변명하려 하지 않고, 소리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기 마음에서 불처럼 일어나는 미쳐 발광하는 죄성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고,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오직 살기 위해서, 오직 살아서 이 시험을 끝까지 통과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찾고 의지하게 된다.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가까워질 적에, 그는 인정받지 못하였음에도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따르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은밀히 행하며, 그 슬픔과 아픔과 눈물들 가운데에서 오롯이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며, 그분을 통하여 "변화한다." 그 과정은 "고요한 지옥"이다. 겪지 못한 자들은 알지 못하는 십자가, 진실로 십자가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걷지 못한 자는 "가장 깊은 성소(Sanctum)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은밀히 교제하는 기쁨"을 알도록 허락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자녀이자 제자"라는 표증은 눈에 보이는 십자가 목걸이나 반지 같은 게 아니라, 몸에 새긴 타투 같은 게 아니라, 자기의 영혼과 심장애 새겨진 "영접하는 자의 마음가짐" 이 하나뿐이다. 내게 이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자기의 가난함과 모자람과 부족함에 대하여 진실로 부끄러워할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이를 핑계나 변명 삼지 않되 오직 부끄러움을 발판 삼아서 더욱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닮기를 열망하며, 그리 성장해 나아가고자 하는 기쁨으로 물들어가는 마음.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원한 "표증"은 바로 부끄러움을 통한 열망과 기쁨이었다.


영은 열쇠이다.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 천국은 곧 하나님 나라이며, 그것은 곧 "아버지께서 임재하시는 것"이자, "아버지와 나의 영혼이 하나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임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며, 내가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영혼(Soul)이 최고 수준까지 성장했더라도, 영(Spirit)이 "변환"되지 못하는 한, 그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것이다. 실체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의 수평적-양적 차원에서의 불완전한 성장일 뿐이며, 얼마든지 어두움 앞에서 다시 과거와 같이 기만당하고, 지배당하고, 능욕당할 수 있음이다. "양"에 집착하지 말라. 자기 안의 죄와 업과 까르마를 "몇 퍼센트" 줄였는지 따위를 신경쓰지 말라. 다만 자기 안의 가장 깊은 중심부, 단 하나의 열쇠, 그 열쇠를 온전히 여는데만 집중하라. 그것이 영이며, 영이 죽고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성장이 다 무용하다.




영이 깨어날 때,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의 변환을 야기한다.


첫째, 자기 안의 어두움(죄)이 빛(은혜)으로 "실체변화"한다. "상태"와 "의지"는 다르다. 영혼의 상태는 여전히 죄에 속하여 있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의 마음은 어두움이 있다. 고통도 괴로움도 죄도 악도 여전히 있다. 상태는 그대로다. 다만 "의지"가 달라진다. 그 어두움을 자각할 적에, 그것에 나의 의지가 속지 않으며, 오히려 그 어두움으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워지고자 하는 사랑과 열망과 충성이 일어난다. 이것이 "죄가 은혜로 전환되는 것"이다.


둘째, 윤회가 성화로 전환된다. 윤회란 "망상적 실체" 안에 갇힌 채로 그 어두움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로 무의미하게 자기 의식/존재 안에서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꿈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는, 제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다 부질없고 무용하며, 오히려 윤회를 반복할수록 죄성은 압도적으로 커질 것이다. 그러나 영이 깨어날 적에, 자기의 "업과 까르마"는 곧 (이를 통한)영과 영혼과 의식의 성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업이 깊을수록 성장도 깊어지며, 까르마가 단단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단해진다. 이것은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다.


셋째, 영혼이 개화(開花)한다. 존재의 수직선에서, 영혼은 영보다 "아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영혼의 단계는 씨앗과 새싹과 꽃으로 나아간다. 꽃은 영혼이 가장 활짝 피어난 상태, 영혼이 가장 아름답게 열린 상태이며, 이때, 그의 존재의 "고유성"이 온전함을 얻는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가장 "실존적인" 응답은 바로 이 차원에 있다. 영혼의 개화는 크게 보면 사랑이며, 그 사랑의 결과 향기와 형상과 분위기와 에너지는 모두가 다르다. 모두가 다 고유하게 아름답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 삶이 허락된 것은 단 하나 : 영혼의 개화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꽃을 피우기는커녕 새싹조차도 피우지 못한 채로 죽는다. 그러나 영이 깨어날 때, 영혼의 개화 과정은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급속 성장"한다. 압도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폭발적으로 꽃을 피운다.


넷째, "구조"가 완전히 전환된다.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소유에서 공유로, 욕망에서 자비로, 두려움/공포/불안에서 사랑으로...... "구조 전체"가 완전히 거듭난다.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적에,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자녀로서 그의 존재는 신의 현현의 "통로"가 된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 이것이 신성한 수동태이다. 이것은 실체이다. 나의 영(Sprit)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SPIRIT)이 영원히 흐르게 되며, 이때에 그의 존재는 감히 어두움 따위는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그의 존재의 "깊이"는 압도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낡은 허물 안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면, 안전하겠지만, 썩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허물을 벗고 용기 있게 성장하기를 선택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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