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다. 침묵은 거의 보일 수 있고 거의 만져질 수 있는 절대적으로 명확한 그 무엇이다."
이것은 오쇼의 말의 인용이다. 내가 이 부분을 읽고 그가 확연히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아버지를 향하여 가까워지는 신성하고 영원한 길"을 걷는 영혼들끼리 누가 잘났고 못났고, 누가 높고 낮고를 따지는 것만큼 부질없고 허망한 짓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나는 오쇼의 글을 내가 깨어나기 시작한 초기에 우연히 접했고, 그 시기에 나도 모르게 깊이 묵상하면서(거의 관상기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가 그저 지식적인 이념이나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가장 순수하고 자유로운 원형에 접속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도(道)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도.
나는 여전히 육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쇼의 개인적인 행적이라든가 과거라든가 논란이라든가 이런 것은 내게 단 1%만큼의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육신은 언젠가 썩어 없어질 허망한 것에 불과하며, 자아와 개체의식은 신성과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하늘과 분리된 그 자체로서의 지상은 의미가 없으며, 오직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임하기 위한 의미에서만 그것은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진리이며, 그 진리가 한 영혼과 내면 안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며, 또한 그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가 평생에 걸쳐서 성화되어 가는 것,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성의 본질은 단순하며, 현 시대에서는 더욱 단순해야만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니 그분이 드러나실 때 결코 복잡하거나 어지럽지 아니하며, 오직 절대적으로 단순하고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
1. 진리가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 (자아가 죽는 것)
2. 진리를 사랑하여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
3. 진리의 빛으로 말미암아 내 존재 전체가 변화하고 완성되는 것. (신성에 가까워지는 것)
오직 이것뿐이다. 이것을 벗어난 그 어떤 것도 다 결국에는 무의미하며, 무엇보다 "실효성"이 없다.
하나님의 계심은 곧 하나님의 드러나심이다. 그분께는 존재와 현현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다.
전통적인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서, 이 카드는 "부활한 영의 실체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단계"이며, 이 카드 자체가 "영의 빛이 존재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모습(상태)"을 의미한다. 이것은 빛이며, 생명이며, 그 자체로 "실체변화에 성공한 완성된 영"이다.
영은 "에너지"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에너지"가 아니시며, 성령께서도 에너지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시지만, 그분 자체가 에너지는 아니시다. 나는 이에 관한 한 어설픈 현대 뉴에이지적 영성에 대해서 오히려 기존 교단보다도 더욱 엄격한 비판적 태도를 지닌다. 이에 대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데, 사람이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적인 몸(에너지체)"으로서의 혼(Soul)의 영역까지이며, 혼은 "몸적인 영"으로써 "체감 가능한" 존재의 실효성을 담보하는 근거로써 쉽게 말해 어느 정도의 단계까지 열린 영혼이라면 육체라는 물질적 몸이 사라지더라도 "나"의 존재는 계속해서 영속한다, 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에너지적인 실제적 몸으로서 이해된다. 말이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언어는 물질세계를 기준하여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천상의 세계의 존재, 사건, 현상을 가리킬 만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쉽게 비유로 들자면, 사람이 "화상회의"를 통해서 얼굴을 보인다고 하여, 그 사람이 화면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비유이지만, 나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이 이상의 적절한 비유가 생각나지는 않는다.
이 점이 내가 보기에는 절대 다수의 신앙인들이나 수행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영적 교만의 한계"이다. 즉, 신비 체험들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장(場)으로서의 혼과, 그 혼이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열렸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등급이나 위계"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함정에 빠져들게 되면 정말로 답이 없어진다. 그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며, 하나님마저도 이겨먹으려고 들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완전하게 현현하셨던 그리스도께서도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믿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적에, 그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비 체험"들을 이루셨지만(죽은 자를 살리셨고, 물 위를 걸으셨으며,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그 본인께서도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하나됨"의 근거를 그러한 외적인 기적들에 근거하지 않으셨다. "너는 (부활한)나를 본 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들은 복되다."(요20:2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1) 결국, 그분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믿는 자들의 의식을 완전히 뒤흔들기 위함"으로써의 수단과 방편이실 뿐이었다. 그러나 보라,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는 바로 그 "외적인 증거"들에 천착하여 "영적인 본질"을 외면하고 도외시하며,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만을 광적으로 믿는 교리를 표준화시켜 버렸다. 그분께서 보신다면 참으로 슬퍼하실 일이다.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역사를 이미 이루시고 완성하셨음"과, "구원의 길에 참여할 수 있는 증거와 열쇠"를 베풀어주신 것이었으며, "신비 체험과 기적과 외적 증거"들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온 세상 기독교인들이 자기 한 사람에게만 집착하고 의존하라고 하신 뜻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신 것은 "나를 통하여 너희도 나와 같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셨고,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이다.
영은 "체험"이 아니다. 물론, 영이 혼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영을 체험한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그 느낌은 곧 혼을 통하여 드러난 것이지, 영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화관 스크린을 통하여 영화를 "눈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하여 영화 데이터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펼쳐진 화면은 "데이터(영화의 원본 파일)"가 재생된 결과이며, 우리는 그 데이터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은 "영혼보다 명백히 위"에 있는 것이며, 이 단계에 이르는 순간 이미 신비 체험과 외적 증거는 그 자체로 힘을 잃는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만나는 것은 혼의 차원의 일이 아니다. 혼의 차원은 하나님을 만나는 초기 단계일 수는 있어도, "본질"이 아니며, "최종 단계"가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 중에 울고 불고 하는 것을 진정한 "영접"이라고 착각한다. 물론,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이것은 대단히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영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니, 보이는 것(혼, 자아, 육 등)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되 오직 보이지 않는 것(영)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분을 직접 만나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관념은 망상이며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영은 "실체"이다. 그리고 영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절대적으로 선명하고 명료하고 확실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언어는 이미 영을 가리킬 수도 담지할 수도 없다. 언어는 인간의 죄성적-망상적 실체(자아)로서의 의식 구조를 전제하며, 따라서 언어의 세계에서 보이는 것은 진짜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가짜, 라는 이분법적인 오류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은 "없는 채로 있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채로 보이는 것"이다.
오쇼가 말했듯이, 이것은 "절대로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며, "거의 보일 수 있고 거의 만져질 수 있는 절대적으로 선명한 그 무엇"이다. 이 표현 자체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 그렇다고 이것이 대단히 어렵거나 고차원적인 진리도 아니다. 그냥, 일상 속에서 훤히 다 드러나 있는 그 자체일 뿐이다.
이것은 "영의 감각"이며, 감각이라고 부른 것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의 육적인 감각처럼 절대로 추상적이거나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손에 만져지고 느낄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실제저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에너지가 아니다. 영의 차원이 열려야만 하며, 영의 차원이 열려야만 "정신(Spirit)"을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 그 단계에서,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분의 모든 것을 알며, 여전히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어디에 계시지 않는지를 훤히 알게 된다. 이것이 영의 차원에서의 일이다.
별 카드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영"의 에너지(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가 생명이 되고 실재가 되어 자기 존재를 통하여 흘러넘치고 모습을 드러내고 현현하게 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영으로서의 나"가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개체의식으로서의 나(에고)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진정한 주인"의 귀환을 영접하고 맞이하며 순종하는 "관찰자"이자 시종의 입장으로 물러선다. 결국 성장이란, 이렇게 깨어난 영으로서의 나, 가 에고로서의 나, 와의 "간극"을 좁하가면서 삶 속에서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다. 물론, 이 통합의 절대적인 중심은 오직 영이다.
이 단계에 이를 때, 곧 "영의 차원"이 깨어나며 실체화되기 시작할 때, 그는 자연스럽게 "에고(ego)"와 "마음(mind)"과 "물질세계(현상계)"의 진동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는 직감한다. 말은 굉장히 "거칠고 낮은 차원"이며, 오직 일상 전체에서 "은밀하게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나의 영으로써 교감하고 그 안에 몰입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완전하고 높은 차원"이라는 것을. 그 "차이"는 영의 감각으로서 매우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 단계에 이른 자는 자기 안에서의 "밀도의 차이"를 직접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물에 들어갔을 때와 차가운 물에 들어갔을 때의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것과 유사하며(이것은 사실 혼의 차원에 해당한다), 사실 이보다는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는" 것과 더 유사하다.
침묵은 신의 현존이다. 정확히는, 침묵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침묵(묵언)에 대해서, 가장 근본적으로 오해받는 것은 그것은 부정형이 아니라 긍정형이라는 것이다 :
1. 말을 "하지 않는" 것 : 원래 말을 하는 것(마음에 속는 것)이 당연하지만, 잠시 "억압하는" 상태.
2. 말을 "넘어서는" 것 : 영의 실재와 교감하고 몰입하느라 말을 "잊어버린" 상태.
둘의 차이는 비슷해 보여도 절대적으로 다르다. 애초에 이것은 "사고방식의 차이"이며, "의식 구조의 본질적 차이"이다. 보라, 세속의 사람들은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 관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부활한 자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 관점에서 전자와 후자는 결과만 같을 뿐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나의 의식이 마음과 자아의 차원에 갇혀 있는 채로, 억지로 말을 참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할 거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왜냐하면 "내가 이만큼 대단하다"는 교만을 강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리 "용맹정진"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공포와 욕망이 "현실화"되어 진짜로 신비 체험을 할 수 있으며, 그리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는 순간 그는 영영 문을 건널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진정한 침묵이란, "영의 차원이 개방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의 영으로 영적 실재(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느끼고 교감하며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것들을 지상의 언어와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그리고 표현한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자들이 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진실로 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말을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침묵이다. 침묵과, 침묵을 통한 "현존"은 명백히 다르다. 현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선형적 시간 구조 중에서의 중간에 머무르라, 는 뜻이 아니다. 현존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현재에 의식의 초점을 "가두는" 것은 현존이 아니라는 소리다.
영이 깨어나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관념이 깨져야 하며, 의식 구조 전체가 완전히 붕괴해야 한다. 이것은 오직 "성령께서만 이루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만 전적으로 집행되는 과정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닌 지상의 그 어떤 잘난 인간도 능력자도, 하늘의 그 어떤 영체도 천사도 귀신도, 감히 이 과정에 개입할 수가 없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특별함"이기 때문이다.
영을 깨어나게 해야만 모든 것이 "임계점을 넘어서며", 영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사랑"이다. 이 세상에 진리를 알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고 습득하고자 하는 수행자는 많다. 그러나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하며, 진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사랑하며, 진리와 닮아가는 모든 과정들을 사랑하는 수행자는 거의 없다. 대다수의 제자들은 스승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스승에게서 어떻게든 진리를 "훔쳐가려는" 관점에 집착할 뿐.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영"들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그 순간 자체를 사랑하며, 스승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시는" 진리 그 자체로 인하여 기뻐한다. 이것은 매우 극명한 차이이다.
알고자 하는 자에게 진리는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실 것이다.
알지 못함에도 오직 진리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진리는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 이번 주말(~11/1일 토요일)까지 1:1 유료 영성 수업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브런치에 올라온 관련 공지(<생명의 언어> 1:1 영성 수업 신청자 모집 안내) 글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