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 무의식의 통합

by 생명의 언어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서 달(Moon)의 핵심 키워드는 '무의식, 혼란, 동요, 군중심리' 등이며, 오쇼젠 타로에서는 전생(Past Lives)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지점에서,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 기존의 종교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았던 점들에 대하여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밝히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를 명심하기 바란다 : 물질세계와는 달리 영적 세계에서 "정해진 법칙"이란 건 없으며, 각자의 영혼들과 영들마다의 고유한 차원들이 있고, 그것들은 제각각 독립적인 채로 서로 하나되어 있다. 영적 세계는 애초에 인간의 지식이나 인식, 관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는 2차원 존재가 3차원 입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글 역시도 당연히, 한 사람에 의하여 쓰여진 글일 뿐이며, 사람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진리가 될 수 없다.


다만,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1. 전생은 실재한다.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실제" 전생, 그러니까 영혼이 여러 차례의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며 서로 다른 육체와 자아를 입었던 생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교나 영성, 전통 등에 따라서 수 차례에서 수십 차례 정도의 윤회를 반복한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수천 년에서 수만 년 이상 윤회하였다고 보기도 하며, 한 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계속해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보는 관점도, 살아 생전의 업보에 따라서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지 못하거나, 혹은 "열등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정답은 없다. 아무도 죽어보지 않았고 아무도 다시 태어나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신비 체험들은 "지금"의 생에서 육신을 입은 채로 "가상의" 체험을 한 것일 뿐, 그 체험이 실재라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전생의 "기억"이다. 이것은 조금 다른 개념인데, 과거생 그 자체와, 과거 생의 "기억"이 무의식에 저장된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전생 그 자체보다는 전생의 "기억"이 현생의 육신과 자아와 마음에 영향을 준다. 기억이라는 것은 고정된 데이터값이 아니라 진동이나 파동, 에너지와 유사한 형태로써, 그 생에서의 특정한 사건, 상황 등의 "데이터값" 안에, 두려움, 공포, 불안 등의 (주로)어두운/해소되지 못한 감정/정서 등의 에너지가 "저장"(사실상 억압)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억"의 조각들이나 단편들이, 현생에서의 사건/상황/조건 등과 맞물려서 특정한 분기점이 되면 "스파크"가 튀면서, 현생에서의 마음이 아닌 과거생에서의 그 해소되지 못한 상태의 기억/감정 에너지들이 "은밀히" 자아와 마음을 장악하게 된다. 단순히 예를 들어서 특정한 장소/공간에만 가면 이유 없이 슬프다든지 그러한 식이다(예: 노을 지는 바다만 보면 이유 없이 슬픈 것). 사실, 존재의 수직선의 상위 차원으로 전환되지 못한 상태의 에고는 현재로부터의 마음의 작동보다는 과거생의 기억들이 일으키는 생각/감정들이 더 많으며, 그 비중은 최소 50%, 최대 70~80% 이상 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평균적인 자아와 마음과 무의식은 생각보다 꽤나 "낡아"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오쇼의 표현이나 언급들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셋째, "무의식적인 어두운 에너지"로서의 까르마, 이다. 사실은 이것이 실체다. 실제 전생은 있든 없든 어차피 현생을 기준으로는 지나간 것이니 무의미하고, 전생의 기억은 현재의 자유롭고 온전한 마음과 자아, 의식을 되찾기 위한 성장의 과제로서는 유의미하되, 까르마라는 것은 무의식적인 어두운 에너지로서 "나"가 절대로 통제할 수 없고 자각할 수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 요즈음 대중들에게 유행하는 값싼 싸구려 오컬트/신비주의(예: 특정 영상이나 음악을 들으면 까르마가 정화된다는 등)에서의 설명과는 달리, 유감스럽게도 "실체"로서의 까르마는 어지간해서는 정화는커녕 건드릴 수조차도 없다. 까르마를 정화하겠다고 수행하는 것은 대부분은 집단 무의식의 어두운 에너지(근원적인 어두움의 실체 : 여러 종교들에서 원죄, 죄성, 업, 까르마 등으로 부르는 바로 그것)를 매우 만만하게 보았거나, 혹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까르마는 "개별적"이지 않으며, 집단적이고, 그것도 전 인류가 그 무의식 안에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이것이 "개별화"되는 과정에서의 일종의 개체의식마다의 고유한 알고리즘이나 프로그래밍 등이 바로 "개인 무의식", 곧 전생의 기억에 의하여 자아, 마음, 의식이 구조화되고 작동되는 것이다. 뭐라 부르고 설명하든 큰 틀 자체는 거의 비슷하다. "전체"가 "개체화"된다는 것.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첫째의 전생에 관심을 둔다. 전생의 "내용"을 궁금해한다. 그러나 그건 알아봤자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다. 내가 전생에 어떻게 태어나서는 살고 죽었는지를 이제 와서 알아서 무엇에 쓰려는가? 공부의 본질은 결국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부질없고 허망한 것에 메달리지 마라. 그보다는 현재의 나의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구속하고 억압하고 오염시키는 "적"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초점을 맞춰라. 그리하면 우선은 둘째의 전생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셋째의 전생으로 초점이 넘어가게 될 것이다.



2. 공포는 실체화되는 것이다. 공포는 그저 막연한 환상이 아니다. "물질화" 가능하다. 어두운 에너지는 그저 막연한 에너지 상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식 속의 무의식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의 어두운 에너지와, 집단성의 구조(이른바 원형상징; 근원적인 공포에 대한 상징들은 인류 집단 전체가 동일하게 공유한다)와, 해당 특정 문화권 등의 고유한 집단성의 코드(예: 서양에서는 악마, 동양에서는 귀신 등) 등과 정교하게 맞물리면서 "프로그래밍"을 짜고, 마침내 개체의식이 개별적인 "투사기"의 역할을 함으로써 3차원 시공간 속에서 실제적인 존재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복잡하게 말했는데, 쉽게 말해서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공포가 사람을 통하여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어두운" 존재들은 근원적으로는 "환영"이면서 동시에, "진짜로" 존재한다. 사탄도, 악마도, 악령도, 귀신도, 또한 그와 유사한 공포의 원형상징들도 다 실재한다.


유감스럽게도(이 말을 참 자주 쓰게 된다) 절대 다수의 대중들은 자신들의 마음과 의식이 갖는 진정한 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대단히 무방비하다. 마음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며, 마음에서 어떤 생각/감정들이 올라오든 간에 전혀 통제하지도 관리하지도 조율하지도 않은 채로 무방비하게 외부로 방사하고 투사한다. 그렇게 방사된 에너지는 특정 시공간 속에 지속적으로 쌓인 끝에 특정한 임계점을 넘어사게 되면 "좌표", 그러니까 개체의식 자신에게로 회귀하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업보"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어두운 사건들은 다 이 맥락이다. 이것은 마치, 아주 위험한 나라 안에서도 대단히 위험한 골목에 무방비로 산책을 다니는 것과 같다. 언제 잡혀가서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짓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대단히" 운이 좋았을 뿐이거나, 혹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자체가 어차피 시간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골목에서 그리 산책하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결국 그리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종교나 영성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지는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자신의 내면이나 마음을 계속해서 "관리"해야 하며, 여유가 된다면 자기의 의식과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에 노력을 쏟아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상상 이상의 정교하고 거대한 "무의식-어두움의 프로그래밍"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게 될 것이며, 그 안에서는 그 무슨 짓을 해도 일시적일 뿐, 결국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집단의식은 "의식적인 인격적 실체"에 거의 가까운 무엇, 이다. 소위 빅브라더인데, 그것은 다만 이것을 너무 단순하게 부른 말이고, 집단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주체적으로 움직이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작동시키고,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무엇, 이다. 이것은 거대한 하나 안에서 각 집단군 마다의 고유한 하위 분과적 존재들로 나뉜다. 사실, 적당히 부를 말이 없어서 설명하기가 까다롭다. 예컨대 회사로 친다면, 대기업 회사 전체 규모의 집단적 사념체(일단 이렇게 부르겠다)가 있고, 그 아래의 조직/분과별 그룹마다의 사념체들이 있다. 이것은 각 사람들이 인식을 하든 못하든, 원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는 체계다. 대개는 "집단성과의 동일시"란, 자아와 마음과 의식이 이 집단성의 체계 안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뜻한다.


물론, 모든 사념체들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작용들도 존재하고(예: 순수하고 진실한 종교나 영성 집단, 그룹), 잘만 이용한다면 영적 성장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결국 이 자체가 사념체에 불과하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집단성과의 동일시는 반드시 해체된 이후, "신성과 연결된 의식"으로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본질적인 "재설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계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무작정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묵상을 하는 등의 행위들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특별히" 상위 차원으로부터 특수한 목적(주로 영적인 사명)을 수행케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보호, 인도를 받는 인격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먼저 "방어적인 마법(Magic)"부터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부정적인/어두운 에너지들이나 사념체들, 혹은 그러한 존재들이 자신의 내면이나 의식, 자아, 마음, 영혼 등에 간섭하거나 영향을 주는 것을 "끊고", 분리하고,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는 법 말이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니며,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실제적인" 변화와 성장이 필요하다. 헬스장 운동기구 앞에서 기도만 한다고 전혀 운동을 하지 않은 초보자가 갑자기 수십 킬로그램짜리 기구를 들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물론, 걱정하지 말라. "특별히" 상위 차원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인격들은 그만큼의 더 무거운 시험을 치른다. 그러므로 차라리 평범한 수준으로 태어나는 것이 백 배 이득이다. 자기 자신의 성장만 신경쓰면 되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히는 존재의 삼위일체 중에서 "신성한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아래의 중간계의 삼위일체(영, 영혼, 순수의식) 중에서의 영혼(Soul)을 의미하며, 이것이 다시 지상계의 삼위일체(spirit, soul, body)로 구현된다. 그리고 몸(body)은 다시 자아(mind), 마음(mind), 몸(물리적인 육신)으로 구성된다. 눈치챘겠지만, "3", "삼각형"은 신성 그 자체이자 신성한 코드이다.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다. 사람의 육신이 수명을 다해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당연히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1회성"으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형태가 변화할 뿐이다. 그 중에서도 "고등한" 생명들은 존재의 수직선을 따라서 오르락내리락 순환을 반복하며, 이것이 생(life)이고, 죽음의 순간에 "의식"은 영혼에게로 전환되는 것이 본래의 존재적 설계이다. 이 상태는 "꿈 꾸는 상태"와 유사하다고 이해하면 쉽다. 즉, 깨어 있는 표면적인 의식 상태인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꿈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하기가 어렵듯이, 사후에도 그러하다고 이해하면 쉽다는 맥락에서다. 아마도 이 맥락에서 자각몽이 생명의 중요한 코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쪽으로는 잘 모르고 또한 관심도 별로 없다(꿈은 결국 꿈일 뿐).


다만 앞서 말한 "어두운 에너지의 프로그래밍(구조)"은 육신이 있든 없든 간에 동일하게 작용한다. 그리하여 본래 영혼(Soul)은 에너지체로서의 "나"이며, 이것은 영(Spirit)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써, "최상위의 영"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각각의 독립된 치외법권이나 마찬가지다. 이게 창조주께서 "신의 형상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다. 다만 집단성과의 동일시, 그리고 사념체나 어두운 에너지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사후에 의식의 초점이 전환된 상태에서, 영혼은 "열등한(성장하지 못한)" 인식 안에 갇힌 탓에 여전히 어두움의 원리나 법칙에 지배당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특정한 시공간에 묶이거나", 혹은 "더 강한 서열"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것 역시도 가능하다. 물론, 곧바로 "의식 전환"을 이룬 이후 상위 차원으로 복귀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것은 일정 단계 이상의 의식적 성장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물론, 영혼이 "실제로" 지배당하는 건 아니다. 영혼 자체는 영의 다스림 하에 속하며, 영은 "하나님과의 직접 연결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다만 "열등한 의식" 그 자체도 결국 영의 자유의지 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는 그 무의식적인 어두운 코드에 의하여 사후에 지배당하는 "체험"을 하시도록 허락하시되, 다만 그 영혼의 실체 자체는 보호하실 것이다.


다소 간에 무서운 이야기는, "죄"라는 것이 생각보다 꽤 무겁다는 것이다.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 는 것을 좀 더 세부적으로 분석해보면, 어두움의 에너지의 프로그래밍이 자아 안에서 구조화되고 반복되는 차원에서의 윤회나 업보가 기본적으로 해당하며, "기준치를 벗어날 만큼" 심각한 죄나 악을 저지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의식 상태일 경우, 사후에 실제로 영혼 그 자체가 해를 입을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지옥에 가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다. 다만 고유번호 자체가 "삭제"당하는 수준의 일은 거의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영체들이 어둡고 무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빛의 존재들도 당연히 있으며, 그들은 "열등한 의식" 안에 갇힌 영혼을 일깨우기 위하여 도울 것이다. 물론 최선책은 살아 있을 때 성장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 선업을 쌓고, 선행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착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자기 이익은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남을 돕는 일에 관심을 두고, 그냥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대로 그리 살면 된다. 이것이 실제로 사후에 얼마나 큰 "재산"이 되는지는, 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의 재물을 하늘의 창고에 쌓아두라" 하신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살아서 신성과 완전히 하나되신 "완전체"의 인격을 통해서 선포된 모든 것은 말씀이며, 말씀은 전부 다 실체를 갖는다. 이것은 고차원적인 신비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비유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실제이다. 이것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의 기본은 이해가 아니라 믿음이다. 당연한 맥락으로, 평생 남 돕는 일에 관심도 없고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살다가 죽은 영혼 곁으로, 빛의 존재들이 굳이 오려고 하겠는가? 그들도 "향기롭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영혼들을 좋아한다.



5. 꿈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꿈은 육신이 잠시 "대기모드"가 되어, 영혼이 지상보다 영적세계에 조금 더 가까워진 현상이다. 이것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어야 하는 까닭은, 순수한 에너지체인 영혼이 육신 안에 "담기어져" 있는 그 상태 자체가 영혼에게 상당한 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물질성은 매우 둔탁하고 느리고 불투명하고 끈적거리는...... 하여튼 그러한 속성에 가깝다. 따라서 영혼은 하루종일 무거운 옷을 입고 있다가, 잠들 때에서야 잠시 쉬는 것이다. 물론, 깨어 있을 때의 의식 상태는 꿈에서의 영혼에게도 영향을 준다. 부정적인 생각을 자주 하면 당연히 영혼은 잠시 쉴 때조차도 부정적인 체험을 해야 한다.


다만, 깨어 있을 때와 잠들어 있을 때, 는 엄밀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어느 쪽이 "진짜"인지를 기준하는 것 자체가 에고적 관념일 뿐이다. 물질화되어 있을 때와 순수한 에너지체로서 존재할 때, 로 구분하는 게 차라리 낫다. 다만 이 역시도 의식의 초점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진다. 꿈인 상태더라도 어두운 에너지에 지배당한다면 "꿈인 채로 현실에 더 가까운" 속성을 지니게 되고, 깨어 있더라도 마음과 의식이 순수하고 맑고 투명하다면 "현실인 채로 꿈에 더 가까운" 속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 의식의 초점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6. 무의식은 애초에 집단적이다. "개인 무의식"이라는 건 엄밀한 의미에서는 없다. 집단 무의식이 각 개체의식을 지배하는 "코드, 프로그램, 구조, 설계"가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소승에서 대승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이며, 오히려 대승이야말로 진정한 소승이라고 봐야 한다. 집단 무의식 전체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결국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그 안에 일정 부분이라도 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던 분은 인류 역사상 몇 명 계시지 않으며, 그분들은 거의 반쯤은 신화적인 영웅이나 전설에 가깝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의 신성한 비밀이다. 하나님은 "인류 집단"을 위하여 나에게 시험을 내리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나"이시며, 오히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류 집단 전체를 "이용"하실 뿐이다. 결국, 의식 자체가 집단성에서 개인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표현이 마음에 안 들지만, 달리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7. 무의식 속에는 온갖 괴물들이 "실체화"된 채로 존재하거나, 혹은 "잠재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수행이나 특수한 영적 의식 중에서 드러나는 것들은 그 자체로 실체이면서 동시에 본체는 "어두운 에너지"이다. 상징은 어두운 에너지가 실체화되는 "좌표"이다. 그러므로, 절대 함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방비하게 무의식을 건드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 점에서 현대의 어설픈 싸구려 오컬트나 신비주의가 불러 일으킬 위험성에 대해서 매우 크게 염려가 된다. 경고하건대, 그 무슨 신비롭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주술이나 예언이나 오컬트 따위에 관심을 두기보다, 차라리 누구나 다 아는 그 뻔한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여 행하는데 집중해라. 그것이 오히려 그따위 것들보다 훨씬 더 "위계"가 높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으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비유이면서 동시에 영적 세계의 실체이기도 하다.



8. 사실, 무의식 자체보다는 의식이 더 중요하다. 깨어 있는 그 흐름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소리다. 무의식은 "상태"이고, 의식은 "의지"에 가까운 무언가이다. 내 마음이 우울하다 하더라도 밝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울함은 마음의 상태이고 밝아지려는 노력은 의지(Will)에 해당한다. 둘 중에서 위계가 높은 것은 당연히 의지다. 의지는 정신에서 비롯하며, 정신은 영(Spirit)이고, 영이 의식을 통하여 에너지로서 실체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상태를 보시는 게 아니라 영혼의 "의지"를 보신다. 애초에 그분께 상태가 무슨 소용이 있나? 어둡다면 밝히실 것이고, 지저분하다면 정화하실 것인데. 그분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시다.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에게나 상태가 중요하지, 완전하고 영원하신 분께는 상태가 아니라 의지가 더 중요하다. "흐름과 순환의 방향성"이 바로 의지다. 더 쉽게 말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 거냐,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 거냐, 의 차이다.


상태에 집착하면 할수록 주술과 예언과 사이비에 농락당한다. 어두운 영체들은 바로 이것을 매우 좋아한다. 상태에 집착하여 의지가 어두움에 지배당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빛의 영체들은 상태보다 의지에 초점이 맞춰진 순결한 영혼들을 더 좋아한다. "부끄러움"은 상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를 영혼의 올바른 방향으로의 운동성으로 전환케 하려는 작동방식이다. 부끄러움이 열망으로, 열망이 기쁨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기쁨은 영혼의 현상이고 열망은 영혼의 운동이며 부끄러움은 발화점이다. 제발, 상태에 집착하지 말라. 내 마음이 어둡든 밝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영혼이 높든 낮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특별하든 평범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높은 자에게는 더 큰 시험을 주실 거고, 낮은 자에게는 가벼운 짐을 주셔서 균형을 맞추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지이다. 그리고 이 의지도, 유감스럽게도 강한 자의 강한 의지보다는, 약한 자의 서투르고 간절한 떨리는 미약한 의지를 더 크게 기뻐하시며 그에게 임재하시는 것이 성령의 의지이시다. 성령께서는 가장 높고 강하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께는 힘의 "차이"가 별로 의미가 없다.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의 의지나, 미약하고 가난하고 평범한 영혼의 약한 의지나, 그분께는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다. 그분께 중요한 것은 의지의 순결함, 진실함, 진정성, 그리고 간절함과 절실함이다. 모두, 능숙한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압도적으로 더 유리한 것들이다. 따라서 오쇼는 메이저 19번에 순수성(innocence)을 배치했고, 이것은 매우 적절하다. 진정으로 높은 경지는 능숙함이 아니라 가난함이고 순결함이고 천진난만함이다.



9. 그러므로 무의식을 정화하고 빛으로 나아가는 비법은 매우 단순하다 :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라. 일상 속에서 감사하고, 나보다는 남을 위하며,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여 행하며, 선을 행하는 자들을 진심으로 축복해라. 진리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되 속되고 허망하고 어두운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말며, 삶 속에서 자기의 마음에 늘 선함과 진실함과 겸손함이 흐르도록 하며, 일상 속에서 또한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며, 그리 사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그 진리가 가장 위대한 진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로 말미암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내가" 통합하는 게 아니다. 나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몰라야 하며, 관심도 없어야 한다. 다만 나는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할 때, 나도 모르게 성령께서 나의 무의식을 "통합해주실" 것이다.


사람의 능력과 힘과 재주로 하나씩 작업하여 바꾸는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이루시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을 것 같은가? 그리고 그대는 어느 쪽을 받기를 원하는가?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이다. 이제 그저 선택하여 행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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