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 : 영원에 대한 사랑

by 생명의 언어


태양(19, Sun)은 메이저 아르카나의 "위대한 작업"의 절정의 순간이며, 무의식까지도 완전하게 통합(18)해냄으로써 완전한 신성이 인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나타낸다.


내가 감히, 이에 대하여 규정하고 정의할 수가 없으며, 이것을 단 1%라도 목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로써 이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고귀한 것인지를, 태양의 빛을 동경하고 열망하는 반딧불이의 마음으로 진실로 고백하고 증거할 수만 있을 뿐이다. 나의 언어는 지식이 될 수 없다. 지식은 곧 진리이며, 진리는 본래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정하신 그분의 위대하신 의지이기에, 인간은 감히 지식을 "창조"할 수가 없다.


경외하라, 왕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었으니. 경외하라, 모습을 드러내신 왕께서 그 고귀하신 첫 음성을 선포하시었으니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 (요14:6) 아, 이것은 지상의 언어가 아니다. 세상에 속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곧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의 영원과 초월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며, 그분의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불멸함을, 그분을 경외하고 찬미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영원토록 내재하실 것임을 선포하는, "신성 그 자체인 말씀"인 것이다. 이것을 영접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로 이를 수가 없고 언어로 규정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오쇼는 마침내 태양 카드를 "순수함(Innocence)"이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참된 순수함은 전혀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라, 세속의 온갖 때를 묻힌 노인이 다시 그 순수성을 되찾은 끝에, 천지만물 안에 주(主)께서 영원히 계심을 깨달으매 일상 속의 모든 평범한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과 더불어 그분을 영접하는, 그 눈빛과, 그 눈빛을 통하여 드러나는 영(Spirit)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1. 이것은 신성과 인격의 통합이다. 에고(ego)는 인격이 아니다. 그것은 어두운 에너지에 의하여 구조 지어진 망상적 실체, 환영, 환상, 어리석음, 오만함, 교만함, 욕망, 공포의 설계와 프로그램의 작동일 뿐이다. 그것은 딱히 "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을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나"라는 인식, 개념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망상에 대한 집착이 깨지지 않은 "꿈 꾸는 상태"에서만, "자신이 꿈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만 실체로서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참된 인격은 영이며, 그 영이 개체성을 온전히 회복함과 동시에, 영이 신성을 영접하고 영이 신성과 하나가 되니, 마침내 영은 독립성과 개체성을 회복하면서도 "나"가 아니게 되매, 오직 신성만이 온전한 인격으로써 모습을 드러내시는, 그러한 "통합되고 완성된 자아", 참된 자아, 영원하고 불멸한 자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지상의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것은 이름만 "자아"일 뿐, 망상적 실체로서의 에고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고귀하시고 영원불멸하신 분께서 요한복음에서 자기를 이르신 바, "나는...이니(I AM)"의 선포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실 적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고 하신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을 온전하고 완전하고 영원히 이루신 분은 오직 이 지상에서 단 한 분 뿐이시다. 비록 그분은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아주 짧은 시간 머무르셨지만, 이로 말미암아 그분의 신성은 오늘날에도 완전한 인격으로써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영과 영혼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고 함께하시고 그들을 아버지께로 이끌고 계신다. 이것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철학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존재하는 영적 실재이다. 실재가 아닌 것은 실재성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미 실재인 것은 스스로 실재성을 드러내고 선포한다. 에고로서의 인격이 아닌, 신성이 영을 통하여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신 영적 자아, 이것이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이며, 그 이름은 곧 신성 그 자체이니, 그것은 단지 글자나 말이나 발음기호가 아니라 정말로 실재성을 가진 보편적, 내재적, 초월적 신성이다. 그분의 신성은 곧 그분의 인격과 같으며, 그분의 인격은 곧 그분의 신성과 마찬가지이다. 인격은 애초에 개체의식이 아니다. 인격은 애초에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인격은 현상계의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과 상대성의 한계 안에서 전선을 구축하고 서로를 총칼로 무장하여 마주대하고 있는 교전 중지 상태의 주관과 객관 중의 안쪽 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따위 것이 아니다. "인식, 관념의 틀"을 완전히 깨부수고 버리지 않으면, 경고하건대, 완전한 신성을 결코 영접할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다가설 수도 없다. 인격에 대한 참된 이해가 바로 신성에 가까이 이르는 길이다. 인격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빠르고 안전한 길은, 인격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집착과 망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다. 그 욕망과 공포를 온전히 내려놓고, 고귀하신 분 앞에 내어드려라. 그것을 제물 삼아서 그분께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아프고 가장 쓸쓸하고 가장 고귀한 제(祭)를 올려라. 향을 피워라. 에고는 곧 인식과 분별이며, 이는 통제와 억압이니, 주체성과 행위자로서의 에고의 죽음을 받아들여라. 자기 자신의 장례식을 자기의 이름으로 치러내라. 그리할 적에,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존재는 실체가 아니게 될 것이며,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위의 허망한 분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에고가 얼마나 무력하고 공허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그 에고가 평생에 걸쳐 집착해왔던 언어, 지식, 관념이라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신성 그 자체가 되신 인격과, 그 인격이신 분께서 선포하신 신성 그 자체이신 말씀과, 그 모든 것들의 권세와 영광 앞에서...... 얼마나 지독하게도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얼마나 지독하게도 무의미하고 공허한 환영이요 망상에 불과하였는지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또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아, 나는 태어나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구나. 지금껏 평생을 꿈꾸면서 살았구나. 지독한 악몽 속에서 살았구나. 나는 이 꽃잎 하나, 나뭇잎 하나, 돌멩이 하나에 대해서조차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구나. 그런 주제에 언어, 지식, 관념이라는 지극히 부질없고 허망한 것들을 머릿속에 우겨넣고 그것의 틀 안에 자아와 타자와 세계를 집어넣고 통제하려고 평생 미쳐서 날뛰어왔구나. 에고가 박살날 때,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박힐"(갈2:20) 적에, 그 장례식의 애도 기간 동안 나는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게 될 것이나, 기뻐하라, 그 애도의 길을 온전히 통과해낸 자에게만, 자기의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고 자기 손으로 끌고온 십자가 위에 내가 못박히게 된 자에게만,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그분 안에 영원히 거하는 참된 생명을 또한 내가 허락받게 될 것이니, 나는 새로워질 것이며, 거듭날 것이며, 내 안에 영원불멸한 생명으로 자리잡은 "부활의 희망"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현현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만이, 신성을 비인격성으로서 이해하려고 든다. 나는 그러한 어리석음 앞에서 이제는 침묵한다. 그리로 걸어가라. 그리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여기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터이니. 말리지 않는다. 그리 헤매는 여정 또한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교감하며 관계 맺는데 있어서 반드시 의미가 있을 터이니. 다만, 신성은 완전한 인격을 통해서만 완전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 때의 인격은 "자아" 따위의 허망하고 무의미한 개체의식이 아니며, 내 안의 신성이 영을 통하여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영원불멸한 영적 자아이다.



2. 그러므로 오쇼가 설명한 순수함 역시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비록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영역까지는 발을 들이지 못하였으되, 다만 순수함이라는 것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며, 또한 때 한 번 묻혀본 적이 없는 갓 태어난 아이의 순수함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 역시도 알았으며, 그것은 다만 평생에 걸쳐서 에고에 집착하고 에고 안에 갇혀서 오염되고 왜곡, 변질되어 온 의식이, 자기 안의 영과 영혼이 깨어나며, 마침내 신성이 인격을 통하여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그러한 위대한 통합의 순간이자 그 결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비주의나 오컬트 따위보다도 순수함이 압도적으로 더 높다. 동서고금의 그 어떤 비의적 가르침이나 특수한 수행법 따위보다도 순수함이 압도적으로 더 높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나 교리나 신학 따위보다도 순수함이 압도적으로 더 높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비 체험이나 계시나 환영 따위보다도, 이 세상의 그 어떤 특별한 영적인 능력이나 힘이나 기적 따위보다도, 순수함이 압도적으로 더 높다. 그 순수함은 "죄 없는 완전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며, 그분 자신께서 우리들의 영과 영혼과 의식 안에서 온전히 그 "빛"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 속의 존재, 사건, 현상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영접하고 경외할 적에, 그 경외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앞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할 적에, 그 마음은 나의 의로움 따위가 아니며,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시매 종의 형체를 가지사" 모습을 드러내신 것일 뿐이다. 결국, 완전한 인격은 "주체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수동태"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수동태적 주체성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 안에서는 모순이고 말장난일 뿐이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실재이다. 순수함은 "에고"가 아니다. 에고의 소유도 아니며, 에고의 능력이나 본성도 아니다. 다만 에고라는 틀을 통하여 드러난 인격과, 인격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신 완전한 신성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는 시종일 뿐이다. 수행자들이 반드시 명심하고 뼈에 새겨야 할 진리는, 그 어떤 신비 체험이나 환영이나 계시나 특별한 능력이나 힘 따위에도 절대 마음을 두지 말고, 수행정진하여 얻을 내세적 구원에 대한 화려하고 웅장한 약속이나 이를 기록한 경전 따위에도 마음을 두지 말 것이되,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현존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진리 그 자체를 경외하고, 모습을 드러내시는 생명을 경외하며,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임재하시는 위대하신 신성이자, 그 신성이 인격으로써 내게 오시고 관계 맺으시는 바로 그것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내가 참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쫓아다니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특별함을 쫓지 말아라, 다만 평범한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 계신다.



3. 인격이 완성되고 통합될 적에, "세속의 법도"는 존재 안에서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하나님의 법도"가 새롭게 칙령으로 선포되니, 이것은 영원불멸한 실재이다. 이 영원불멸한 법도에 따라서 통치가 이루어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며, 나라가 임하는 것이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일이다. 살아서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하나님의 법도란 무엇인가? 바로 "순수성의 주권의 회복"이다. 에고 상태일 때, 가장 주요한 특징은 자기 안에서 어른이 아이를 무시하고 경멸하고 억압하고 부리고 통제하고 다스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못했을 때,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했을 때, 그 특징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른은 교만함이요, 아이는 순결함이다. 내 안에서 어른의 본성이 어린아이의 본성을 흉포하고 잔인하게 채찍질하고 학대하고 억압한다. 그 채찍의 이름이 바로 언어, 지식, 관념이다. 또한 그 학대와 억압이 바로 인식과 분별이다. 아아, 이를 어찌하랴! 나는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것을 지켜본다. 신성한 여사제(High Priestess)가 왜 침묵하는지 아는가? 내가 이것을 말하여도 너희가 이를 듣지 않을 것이고, 듣는다 한들 믿지 않을 것이고, 믿는다 한들 관심이 없을 것이며, 관심을 갖는다 한들 자기 존재 전체를 걸고 절실하게 이를 구하지 않을 것이며, 구한다 한들 행하지 않을 것이며, 행한다 한들 마침내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서 주여 주여 하면서 섬김을 받을 생각이 없다, 다만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줄은 알겠다." (요5:41-42) 내가 참으로 가슴 아픈 심정으로 거듭해서 말한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의 순결한 첫경험이었고, 처음으로 피를 흘리는 순간이었으며, 아프지만 고결하였고, 슬프지만 너무도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드디어 지식이라는 망상을 내려놓고 실재를 영접한 순간, 나는 그 "첫 사건"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며, 그 사건 하나로 말미암아 순수성을 경외하고 영접하는 내 영과 영혼의 자세는 지금의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결코 무너짐이 없다. 모든 수행자들은 그놈의 "인식, 분별"의 틀이, 언어, 지식, 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도 허망하고 또 허망한 것인지를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에고라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있는지를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한다. 오쇼가 인용하기를,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겐지스 강의 화장터에서 3개월을 지내다 오라고 하셨을 적에, 그 제자들은 매일 같이 시체가 불에 타고, 불에 타다 만 시체들이 강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볼 것이며, 인간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모든 희로애락들이 결국 그 앞에서 지독하게도 공허하고 허망한 것임을 철저하게 깨달을 것이다. 이것을 참으로 영접한 제자는 어느 순간 눈빛이 달라지게 된다. 그는 이제 허망한 것을 구하지 아니하되 오직 영원한 진리를 구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제자는 스승을 영접하는 눈빛이 달라지게 된다. 제자는 스승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지식은 허망한 것이다. 아직 에고가 죽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가장 정확한 기준이 바로 "지식에 대한 집착"이다. 내가 책 읽고 경전 공부하고 말씀 공부하고 훈련하고 터득한 것들, 그것을 기준 삼아서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주권을 쥐고 통제 억압하려고 들며, 타자를 무시하고 내려다보려고 하는 바로 그 시선, 그 의도, 그 자체가 지독한 죄성임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한 자녀의 안에서, 순결함은 왕이시며, 전문성과 능숙함은 왕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기사이니, 기사는 언어와 지식과 관념이라는 무기와 갑옷을 차려입고 단칼에 거짓된 모든 것들을 베어 없앨 힘을 거느렸으며, 기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순결하고 순수한 어린아이이신 왕을 베어 죽일 수 있겠지만, 부활한 자녀의 영 안에서 기사는 결코 왕 앞에서 그러한 마음을 단 한 찰나도 품지 않으며, 기사는 언제나 왕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왕께서 명령하실 때까지 결코 자세를 풀지 아니하며, 설령 기사 자신의 눈에서 왕이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들, "기사는 왕의 의지에 질문하지 않는다, 기사는 왕의 의지에 전적으로 순종한다"고 맹세하였던 그의 초심을 심장에 새기면서,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나 왕께서 하신 모든 사소한 몸짓과 표정과 말들까지도 다 고귀하고 의로운 뜻이 있으실 것이다" 하며 왕을 진실로 경외하게 되니, 그는 마침내 "내가 이해하였는가 이해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왕의 의지에 내가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 하는 것뿐이다." 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부활한 자녀의 영은, 경전 공부하고 책 읽고 여러 특별한 영적 능력들과 힘들을 지닌 고등한 수행자들은 초개와 같이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꿰뚫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녀의 영은, 어느 이름 없고 평범한 영혼이 그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말미암아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순간에, 이를 목격한 순간에, 그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영접하게 될 것이며, 진실로 감동하고, 크게 기뻐하고, 경외하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감히 그의 존경과 경외를 받을 자가 경지 높은 수행자들이나 스승들 가운데서 아무도 없으되, 오직 "거룩하신 분의 이름" 앞에서만 그가 진실로 엎드려 경외하매, 그가 경외하는 분께서 어느 순간에 임재하시는지, 그리고 누구를 사랑하시어 누구 곁에 임재하시는지를, 그는 다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문성과 능숙함을 길 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보듯이 하며, 신비 체험과 특별한 영적인 재능과 능력과 힘과 기적들과 이적들 따위를 시장 바닥에 버려진 똥막대기 보듯이 하되, 오직 평범함 가운데에서 은밀히 임재하시는 가장 고귀하신 분, 그 한 분만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설명이 아닌 은유로 이른 까닭은, 이것은 지식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기에 오직 은유로만 전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하여 부활한 자녀들은 존재의 목적이 완전히 전환된다 : 무의미하고 허망한 생존의 연속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에 동참하며,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고 역사하시는 것, 그분의 뜻과,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 이 하나만이 나의 영의 존재 이유가 되며, 영혼의 살아 있음이 되며,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아니하되 오직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법도로 사람을 판단하고 분별하지 아니하되 오직 내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위대하신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의 법도로 말미암아 사람 안의 순결하고 진실한 영혼만을 보니, 이제 그는 분별하지 않되 다만 기뻐할 뿐이며, 이제 그는 인식하지 않되 다만 찬양할 뿐이다.


영적 세계에서, 믿음은 곧 실재성이다. 이것은 간단한 이치이므로 가장 초보적인 수행자들도 다 알아야 하는 것이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비 체험이 잦은 자, 특별한 영적인 능력이나 힘이 있는 자들은, 그들의 능력과 경험으로 말미암아 자꾸만 복잡하고 관념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식과 분별 안에 갇히며, 마침내 자기 안의 두려움, 공포, 불안의 힘에 휘둘리게 된 끝에,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다. 특별함에 대한 집착의 끝은 결국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일을 행할 적에, 반드시 성령께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전적인 믿음, 절대적인 믿음, 그 믿음 하나만을 완전하게 의지하는 자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또한 함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니, 그분의 권세와 영광 앞에서 비추어 밝혀지지 않을 어두움과 어두운 에너지와 어두운 실체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적인 인식과 분별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 지배당하지만, 순결하고 바보스러운 믿음은 가장 위대하신 "힘"께서 임재하시는 하나뿐인 통로가 된다.


이것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인격이다. "영적 자아"이다. 전문성과 순결함의 통합, 능숙함과 바보스러움의 통합이다.




오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단 하나의 단순함을 얻기 위해서, 그대는 나머지 모든 것들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그의 말은 참으로 옳다. 이어서 나는 말하고자 한다 :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아닌 나머지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도 "가지고" 싶고, 세상과 세속적인 것들도 가지고 싶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이루어질 수 없다. 언제나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정답은 정해져 있으며, 그 정답을 선택하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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