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아르카나의 여정이 후반부에 이를수록 점점 더 힘겨워져만 간다. 처음 자신만만하게 시작하였던 길은 이제 드높은 산맥의 정상을 향하여 가까워지면서 고통스럽게 내딛는 한 걸음, 또 한 걸음이 되어간다. 칼날 같은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나는 새삼스레 이미 알고 있었노라고 믿었던 진리를 또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안다고 믿는 자에게, 아버지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 것이며, 오직 아버지를 모른다 고백하면서도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에게만, 아버지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실 것임을. 그리하여 이 길의 끝이 가까워져만 가는 과정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은 심판이 아닌 고백과 증거임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그 낮아짐이 이제 편안하고 기쁘다.
인류 최고의 지성을 지녔던 자,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라고 불리는 자, 신탁으로 이르기를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일컬음 받은 자, 그러한 자조차도 결국 그 자신의 지혜를 통하여 이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경지는, "나는 안다"가 아니라, 결국 "나는 모른다"였다.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겨우 아는 것, 그것만이 인간에게 허락된 산의 정상이다.
진실로 이 길을 걸으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안다고 믿었고, 또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대하여 안다고 믿었으며, 나와 함께하셨던 성령께 대하여 안다고 믿었으나, 이 길을 힘겹게 걷고 또 걸으면서 내가 새삼스럽게 여러 차례 확인하는 것은, 나는 모른다는 사실뿐이며,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며, 내가 그분께 대하여 안다고 믿었던 것이 그분의 임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한 것인지만을 새삼스레 재차 확인하는 것이되, 다만 내가 진실로 이 삶의 순간들 가운데에서 영으로 계신 주님을 영으로 계신 그대로 사랑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이지 않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것, 전혀 인도받지 못하며 성령께서도 이제 나를 버리시고 떠나셨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내가 이미 성령의 보호와 인도와 이끄심 하에 있음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것......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하나만이, 이 여정의 걸음 걸음들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점점 더 확실해지고,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지식은 점점 더 허망해져만 갔고, 날이 갈수록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과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허망하디 허망하고 또 허망하고 허망하되, 다만 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 하나만큼은 처음부터 진실하였고 또한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이 시험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점점 더 그 진실함이 깊어져만 가는 것이었다. 부족하나마 사명을 힘써서 수행할 적에, 아무도 나의 수고와 나의 무거운 짐을 알지 못하되 다만 그분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것만을 내가 기뻐하며, 그 사명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홀로 쓸쓸하고 외로운 방 안에서 작은 불 하나 켜놓고 그저 침잠할 적에, 내가 그분의 임재하심만큼이나 결국 그분의 부재하심마저도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또한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사랑을 통하여 하나됨을 이루었으니, 이 하나됨으로 인하여 내가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빛이 계심과 그 빛이 나와 함께하심으로 담대할 수 있었고, 또한 내 능력과 힘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그분의 권세와 영광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행할 적에 모든 것들이 능히 가능할 것임을 진실로 다 믿음으로 인하여, 그분께서 물 위를 걸으라 하시매 내가 떨리는 심정으로도 물 위로 발을 내딛었고, 어두움을 정화하라 하시매 내가 떨리는 심정으로도 진실로 그 뜻을 따랐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라는 게 있다면, 굳이 말하자면, "믿음", 그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실 적에, 그분의 이름으로는 능히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음을 진실로 믿는 그 믿음, 그리하여 내 삶이 아직 어두움 가운데에 있을 적에는 다만 내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와, 또한 정화되지 못한 부분들과, 부족함과 모자람들이 있기 때문임을, 고통스러운 인내 가운데에서도 믿고 또 내일의 한 걸음을 나아가는 것, 이것만이 내가 능히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심판", 이 두 글자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증언하고자 한다. 내가 이에 대하여 올바르고 진실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그분께서 함께하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1. 심판이란 "징벌적 개념"이 아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오해하는 부분을 풀어야만 한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간에, 절대 다수의 인류에게 신의 심판이라는 건 대개의 경우 징벌이며,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인간을 벌하시는 신의 절대적인 권능, 그러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전능하신 분께서 굳이 인간을 벌하셔서 무엇 하시겠는가?" 이것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지 못한다. 어중간한 권세를 거느린 자는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를 벌주고 심판하고 죽이려고 들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권세, "한 음성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문자 그대로의 압도적인 영광을 거느리신 분께, 벌주고 파괴하고 죽이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너무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죄 지은 영혼을 영원히(이 말 자체가 너무도 인간적인 개념인 것이다, 선형적-수평적 시간선 상에서의 우측 끝점의 무기한 연기, 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적 개념인 것이다) 지옥불 같은 것에 떨어뜨리고 가두어서, 그분께서 얻으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을 것이며, 얻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리하심으로써 그분께서 과연 무엇을 이루실 수가 있겠는가? "아버지의 의지(Will)"가 곧 아버지 자신이시며, 따라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 바, 그 말씀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것일진대, 과연 죄 지은 자를 평생 방치했다가 죽고 나서야 하늘로 불러들여서는 줄세워 심판하고는 지옥불 같은 것에 영원히 고통받게 또 다시 방치하는 일을 하심으로써, 과연 어떤 "하늘의 영광"을 이루시겠다는 것인지를,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눈으로 보건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 지은 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는 죄에서 근거한 망상적 개념인 것이다. "어두움의 원형상징"인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어찌하여 죄인가? 그것은 "내가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거나 이러저러한 상태가 되면, 하나님은 나를 벌주시거나 상을 주실 것이다"하고,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권세"를 감히 함부로 제멋대로 빼앗은 것이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나 자신을 심판하는 교만의 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인식, 분별", 곧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의 선악의 분별을 행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인간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은 "완전한 존재"라는 근원적인 교만의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를 하나님과 같이 여기기 때문에 자신은 완전해야 하며, 그 완전함의 주체적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는 가장 은밀하고 교활한 죄성적 구조이다. 이것을 보려면 기도와 묵상이 매우 깊어져야만 한다. 심판은 벌주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은, 현현우주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따라서 현현우주의 모든 창조물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이때의 완전함이란, 창조된 것이 창조하신 분과 동등하다는 교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은 창조하신 분과 연결되어 있다, 는 뜻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들은 창조하신 분의 성품을 닮아 있으며, 또한 모든 창조된 것 안에서 창조하신 분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된 것을 "부족하다, 모자라다, 악하다" 하여 벌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하신 분의 영원하고 완전하신 권세와 영광"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다. 그분께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들은 이미 "그분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모습대로 온전하게" 지음받은 것들이다. 심지어 죄와 악마저도 그러하다(이에 대해서는 15 해설에서 참고). 그러므로 그분의 심판은 "징벌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심판은 오직 "구원하시는 것"에 있다. 이것이 유일한 심판이며, 하나님의 심판이시다.
2. 이어지는 맥락에서, "심판"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상의 의미로서의 칭의(稱義), 그러니까 법정적 판결로서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재성을 또 다시 인간의 인식과 관념 안에 가두는 짓이다. 물론 나는 집단화된 종교의 틀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스템과 규칙과 교리가 필요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것들 자체를 진리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은 진리가 아니다. 다만 "필요할" 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종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믿을 뿐이다. 내게 있어서 심판이나 칭의, 성화 등은 법정적 판결문을 낭독하는 것이 아니며, 존재론적, 현상학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재적 변환의 과정이며, 이는 오직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순결한 영의 눈으로 영적-현상학적-해석학적 관점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쉽게 말해, 심판은 구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구원은 오직 "실재적인 것"이지, 관념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같은 맥락에서, 믿음을 통하여 교리가 내 안에서 실재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불완전하고 육적인 관념의 파편일 뿐이지,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받아 모심으로써 영원히 사는 생명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실재화되지 못한 이상, 구원은 교회 다니고 교리 공부하고 신학 체계를 이해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찬양 하고 예배한다고 하여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오직 믿는 자의 안에서 "실재적으로" 믿음,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나는 교리나 신학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를 체계화하기 위한 인간적인 필요일 뿐이지, 그 자체로 진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온전한 영 안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이지, 집단적이고 관념적인 틀을 통하여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무엇으로써 뜻을 전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는 이에 대해서 대단히 크게 경계하며, 반대한다. 교회는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다. 오직 교회를 통하여 여러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었을 때에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공동체라고 일컬음받을 수 있을 뿐이다. 목회자는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목회자도 감히 그 자체로 신성할 수 없으며, 죄 없는 완전한 인격으로써 그 자체로 신성하셨던 분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셨다. 모든 목회자들의 일은 그러므로 각각의 영혼들이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은밀하게 교제하는 것을 강제로 중지시키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서는 자기가 대신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오직 자기 자신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실재하신다, 살아계신다, 함께하신다"는 진리를 먼저 목격한 자로써, 곁에서 응원하고, 격려하고, 돌보고, 대신 짐을 져주고, 대신 십자가를 져주면서,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일이다. 교회와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고백과 증거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신앙이다.
공부는 필요하고 또한 중요하다. 성경을 읽는 것, 개념을 이해하는 것, 지식을 학습하는 것, 교리나 신학을 배우는 것, 모두 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는 오직 말씀이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이며, 이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하나님의 외아들께서 신성의 빛으로 내 안에서도 부활하시고 또한 권좌에 앉으셔서 정당하신 통치를 이루시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사건"이자 "역사"인 것이다. 심판은 이 최종적인 사건, "최종결론"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역사이다. 믿음은 개념 학습이 아니다. 믿음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믿음은 최종적으로는 가슴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이해해야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이해와 믿음은 별로 관련이 없다. 더 노골적으로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세상적인 지식을 더 사랑하는 위선자들을 살살 달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필요악 같은 것이다. 집안에 누워서 아무리 머릿속으로 자전거 타는 상상을 하고 연구를 해봤자 영원히 자전거에 능숙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직 자전거를 직접 만져보고, 타보고, 넘어지고, 울고, 또 울고, 그리고 마침내 자전거에 능숙해졌을 때의 그 바람을 가르고 나아가는 자유로움과 해방감, 기쁨, 그러한 모든 순간들을 자전거와 함께하였을 때에만, 마침내 자전거에 능숙해질 수 있는 것이며, "자전거와 하나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이 지식적인 것이 되면 안 된다. 신앙이 형식적인 것이 되면 안 된다. 신앙은 오직 실재적인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배우고 학습하고 정의하고 규정하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삶과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별로 관련이 없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을수록" 더 애틋하고 사랑이 깊어지는 법이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후에, 신랑이 전쟁터로 끌려갈 것임을 신부가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할 적에, 매일 새벽에 별을 보면서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리고 오지 않을 것을 머리로 알면서도 당장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항구에 나가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그 신부가 과연 사랑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 보라, 신부에게 신랑이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며, 신랑이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을수록, 계시지 않을 수록, 더욱 신랑에 대한 사랑은 애절해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실재 안으로 들어감, 의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실재하시므로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사랑 아닌 것으로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3. "세계관"은 가설적인 것이다. 오직 내 안에서 실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실재적인 것이다. 기독교라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하여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결국 구조와 형식일 뿐이며, 그것들은 결국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안내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자, 무덤덤한 자, 오히려 하나님보다 세속을 더 사랑하고 세속적인 것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 넘쳐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수록 더욱 그분께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간절해지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수록 오히려 이를 명분 삼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이 만든 세속적인 것들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여서는 마침내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바, 결국 신앙이 집단화되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만약 내가 이 말을 불과 한 세대 전에만 했더라도 나는 아마도 어딘가로 잡혀갔거나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내가 이러한 말을 한다고 하여 그 누구도 나를 끌고가서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다. 이에 내가 고귀하신 신앙의 선배들의 영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렇기에 오히려 나는 더욱 과감하고 단호하게 "위험한 진리"들을 말할 수밖에 없다. 교리와 신학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오직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는 믿음이 아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실재적으로 교제하는 것, 그것이 믿음일 뿐이다. 나라로부터 결혼 지원금 등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서로 합의하고 결혼을 하되 각자 생활하는 것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부르지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축복 따위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제멋대로 합의하고서는 계약을 맺고 얻을 것들만 얻는 것을 위선이라고 부르지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그 자체로 기독교 세계의 구조와 틀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필연적이다. 그것은 "쓸모 있는 것"이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이지도 않고, "유일"하지도 않으며, "실재적"이지도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보다 "결코 더 높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영이 하나님을 처음에 알고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을 돕는 초기 단계의 학습일 뿐이다.
4. 자아(ego)는 세속이라는 세계관에 속한 "게임(망상) 속 캐릭터"이다. 에고는 딱히 개인적인 것도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개체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적이다. 그것은 인식과 관념 안에서는 개체이지만, 사실은 구조적인 것이며 집단적인 것이며 무의식적인 것이다. 집단성과 자기를 동일시한 끝에, 실체는 없으면서 실체인 척하는 텅 빈 구조물이다. 개인적인 것인 척하는 집단적인 것이다. 쉽게 말해, 에고는 "사기"다. 물론, 우리는 육신을 반납하고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육신을 입고서 게임 속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세속은 그 자체로 불결하지도 악하지도 무의미하지도 않다. 오쇼는 이 카드를 "환영의 초월"이라고 명명했다. 환영은 개체의식이라는 망상적 실체를 의미하며, "초월"은 그 자체로 신성을 은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영의 초월이란,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망상적인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로 인해서만 사는 그분의 자녀로서의 참된 자아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이것이 심판이며, 심판은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며, 부활이 바로 구원이며, 구원이 곧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며, 천국이 곧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곧 하나님 자신께서 내 안에 임하시는 것이니, 결국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모습을 드러내시고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언제나 교제하고 교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심판이요 구원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르신 바, 망상적 자아고 죽고 참된 자아로 거듭나는 이 과정은 "초월과 영원으로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시지 않으시며, 심판의 권세를 오직 아들에게 다 맡기셨으니, 이는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으되 오직 한 영혼과의 실재적이고 개인적이고 은밀한 교제와 교감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격이시며, 또한 인격"이셔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영원히 아버지와 분리된 채로 초월로 계신 머나먼 곳의 초월자, 절대자를 그저 숭배하기만 하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신성이 완전한 인격을 통하여 각 영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며, 그분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십자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곧 내 안에서 영적 사건으로서 실재가 되고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은 "비인격적 원리" 따위가 아니라, 반드시 "인격이시며, 인격으로써 현현하시며, 인격으로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것이다. 심판은 과거의 망상적 인격(자아)이 죽고, 내 안에서 참된 자아(그리스도의 인격)가 드러나며 주권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명심하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부활하신 것이 끝이 아니다. 부활하신 그분을 내가 "영접하고", 그분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7)고 세 차례나 물으실 적에(3은 삼위일체 하나님, 곧 신성을 뜻한다), 첫번째로 나의 자아가 답하되 "당신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채로 당신께 충성하겠나이다"하고 답하며, 두번째로 나의 영혼이 답하되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진실로 사랑합니다"하고 답하며, 세번째로 나의 영이 답하되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고 답할 적에, 마침내 에고가 쥐고 있던 주권이 내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넘어가며, 그분께서 권좌에 앉으사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 아버지의 법도대로 말씀을 선포하시고 정당하신 통치를 이루시니, 이제 나(에고)는 그분을 사랑하는 영혼과 그분을 열망하는 영의 지시, 명령을 받는 충성스러운 종으로써 내 안에서 위계가 전환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 하는 능동적-주체성이라는 죄성적 환영이 완전히 깨어지며, 마침내 "나는 내 안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충성된 종이다" 하는 수동적-주체성이라는 완전히 은혜로운 새로운 존재-구조로 거듭나게 된다.
5. 지옥은 없지만, 지옥 "체험"은 있다. 벌주는 심판은 없지만, 벌주시는 심판을 당하는 "체험"은 있다. 이것은 죄 가운데에서 영혼을 영원히 살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시고 은혜이시다. 온몸에 병이 들었을 적에, 의사가 칼을 들고 병든 부위를 잘라내는 것과 같으며, 그때에 환자는 "벌을 받는 듯한" 고통을 실제로 느끼지만, 의사는 심판자가 아니되 오직 살리고 치유하는 자이며, 의사가 칼로 환자를 베는 일도 심판이 아니되 오직 살리는 일이듯이, 모든 것은 같은 이치이다. 죄는 어두움이고 은혜는 빛이되, 다만 어두움 쪽으로 너무 깊어진다면 그를 살리기 위하여 강렬한 "수술"이 필요하며, 그러한 차원에서의 "체험"은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체험 그 자체와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사랑, 사랑, 사랑 뿐이시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랑의 뜻일 뿐이되, 다만 우리에게 대개의 경우 그분의 뜻은 "쾌락과 즐거움과 편안함"보다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의 성장"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에고 자체가 세속의 세계에 구속당한 캐릭터이며, 세속의 세계관은 빛이 아닌 어두움의 법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술하고 본래의 영혼과 영의 빛을 회복하려면, 수술 과정도 깊어질 수밖에 없음이다.
업이나 까르마나 윤회 역시도 다르지 아니하다. 업은 구속이 아니며, 다만 아버지께서 계신 천상에서는 어두움이 없이 스스로 비추어 밝히는 영원한 빛만이 있으나, 현상계에서는 어두움에 의존해서 빛이 드러날 수 있기에 이러한 이원성과 상대성을 통하여 빛이 드러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어두움, 그 관계를 의미할 뿐이다. 빛과 어두움의 순환과 흐름, 그것이 업이며, 이 흐름이 어두움이 아닌 빛에 의하여 "다스려질" 적에, 그것은 임재와 부재의 영원한 순환이며, 죄와 은혜의 상승과 하강인 것이다. 빛이 드러나는 순간만큼이나 그 빛을 빛나게 하는 어두움 역시도, 그분 안에서 온전하여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업을 제거하거나 파괴하거나 정화하려 하지 않으며, 업의 흐름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까르마는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으로 나아가려는 영혼의 운동성이며,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버지를 찾지도 그리워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윤회는 이미 유죄 판결 받은 이후의 징역살이 따위가 아니며, "실수하고 또 잘못하더라도 영원히 용서하시고, 영원히 다시 기회를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언약이다. 결국, 말로 설명하는 것은 다 부질없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온전하여질 적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영성과 전통들은 다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통합되고 연합될 것이다.
6. 심판은 "국적 변경"이기도 하다. 세속의 나라의 노예로서의 에고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속 가운데에서도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순결한 영과 영혼으로서 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속 가운데에서의 신성의 드러남과 물들어감"이다. 나라는 "내적 상태"이면서 동시에 "실재성"이기도 하다. 이것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마음은 "인식 안에 갇혀 있는 것"이지만, "영혼"은 내적 체험이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에 퍼져 있으며 우주 전체와 하나되어 있는 거대한 에너지체 그 자체이기도 하다. 두려움, 공포, 불안 등의 하위 감정들은 마음 "안"에 갇혀 있는 것이지만, 경외, 감동, 열망, 기쁨, 사랑 등의 상위 감정들은 "시공간 전체에 드러난 것"이며 안과 밖을 초월한 것이다. 정확히는, 안이 밖을 다스리는 것이며, 안이 밖보다 더 높아지고 확장된 것이다. 이것이 나라이다. 나는 지금 세속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받는 자녀로서 살고 있는가. 전자는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여도 배부른 노예일 뿐이며, 후자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일 것이다.
7. 그러므로 심판은 결국 구원이며, 구원은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의 회복"이다. 심판은 내 안에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또한 하나님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이제 신과 나의 관계성이 단절되고 왜곡, 변질된 필멸자 대(對) 불멸자가 아니라, 아버지 대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인격으로써 내 안에 영원히 계시고 또한 나 역시 영으로 계시고 드러나시는 주님을 영으로써 교제하고 사랑하고 함께하니,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의 신성이 내 안에서 완전한 인격으로써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모든 영혼들은 다 이 길을 언젠가는 가야 한다. 그리고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사건"이 바로 심판이며, 이것은 생에 생을 거듭하여 이어지는 것이다. 한 번 이루어진 것은 시간의 종결을 넘어서서 영원하다. 언약은 영원한 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카발라적 세계관을 거부하며, 오직 심판은 "단 한 번에 단 한 순간에 절대적으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영혼들이 죄와 사망이라는 게헨나에 갇혀 있을 적에, 이로부터 깨어나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온전하여짐을 얻는 것, 이것이 심판이다.
이것을 어떻게 얻는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이리도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틀림없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된 수행을 하고 엄청난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성취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것을 이루는 길은 아주 쉽고 단순하다. "그 이름을 믿는 것." 내 안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이 하나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하나로 인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적 하나님은 비인격적 신성이나 원리, 법칙 따위가 아니시기에, 자력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종교나 영성들과 다르게, 그분을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가장 쉽고 자비로우신 길만을 열어주신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하나가 결국 심판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