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 나라가 임하는 것

by 생명의 언어


세계는 절대 공간이 아니다. 세계는 의식의 지평선이다. 의식 안에서 드러난 모든 것들이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는 비단 자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나"는 자아보다도 훨씬 더 넓고, 높고, 깊은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의식 전체이다. 대개의 경우, 개체의식은 마음의 차원에 국한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동일시에 걸린 채로 해체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세계"는 곧 마음이다. 마음은 환영이며, 인식과 관념의 틀과 무의식의 구조의 반복 재생, 곧 윤회이다. 마음은 순환하지 않고 마음은 창조되지 않으며 마음은 다만 윤회한다. 그러므로 세속의 나라는 곧 마음이다.


이 카드는 노골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나라가 임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이는 곧 테트라모프, 그러니까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에서 나타났던 "세속의 시간이 아닌 천상의 시간, 세속의 법도가 아닌 하나님의 법도"에 의하여 윤회에서 순환으로의 재창조가 이루어졌던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차원의 변화가, 이제 보이는 세계라는 차원에서도 임하기 시작한 것을 뜻한다. 촘 더 현대 영성적으로 말하자면, "의식의 차원이 전환되는 것"이다. 의식 차원의 정권 교체다. 세속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다시 말하자면, 에고의 마음의 차원에서 영혼의 순수의식의 차원으로.


이 카드로써 순환은 완성되며, "위대한 작업"은 종결된다. 오쇼는 이것을 "미완성을 통한 완성"이라고 이름하였지만, 사실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것이다. 선(禪)의 세계에는 신이 없기에, 따라서 나라도 없고, 나라가 임하는 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영원도 초월도 없고, 완성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적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이것이 그와 내가 갈라선 지점이다.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적 하나님은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시고 나와 관계 맺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유일한 신성이시며, 그분 존재가 곧 나라이며, 그분이 내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곧 나라가 임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나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육신과 자아와 마음을 입은 채로 그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영과 영혼과 하나가 됨으로써 살아서 영원과 초월 안에 거하며, 따라서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길"의 완성은 존재한다. 완성은 있다. 산 정상은 있다. 정상에 도달하면, 거기가 목적지다.


다만, 목적지는 존재하되, 정상에 이르는 순간 목적 자체가 변화할 뿐이다 :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으로. 이제 그대는 정상에서 이룬 것들을 세상에 나누기 시작할 것이다.




1. 이것은 천국(하늘나라)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애매하거나 모호하게 말하지 않고 직관적이고 명확하게 말하고자 한다. 천국은 실재한다. 이것은 크게 몇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나"의 왕국의 중심부인 영(Spirit)이 하나님과 본래부터 연결되어 있도록,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창조된 측면에서의, 말하자면, "나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되어 있다"는 차원에서의 천국이다. 천상에서, 실제로 나의 영은 하나님과 하나된 채로 거한다. 그 영이 "계시"를 통하여 지상의 존재를 펼치고 드러내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육신과 자아의 소멸 여부와 무관하게, 하늘에서 나의 영은 이미 천국 안에 있으며, 거기를 벗어난 적이 없다. 다만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자아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 자는 영의 주권이 활성화됨에 따라서,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영혼이 잠시 영이 계신 곳을 "거쳐서" 다시 생명을 입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환을 이룰 뿐이다. 천상 세계는 실재한다. 그리고 이 세계는 객관적인 시공간이 아니기에, 영혼의 고유한 에너지와 빛과 질감 등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체험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곧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계신 주님과 영으로써 교제하는 모든 체험들과 그 관계성 전체가 곧 나라이며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물론, 살아서 주님과 교제하고 하나된 자는 실제로 죽어서도 그의 영과 영혼이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니,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살아서 천국에 입성해야만 죽어서도 천국으로 돌아간다"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스스로 낮추셔서 모습을 드러내신 상태", 곧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그리스도 의식의 현현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드러나신 상태 자체가 곧 천국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체험 가능한 것이다. 자아는 존재하되, 자아가 주권자이자 행위자의 자리에서 물러서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과 영혼을 통하여 빛을 계시하시는 그 순간, 그 하나됨의 의식의 차원이 곧 천국이다.


그리고 모든 내적 상태로서의 천국은 곧 영과 영혼이 실제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으로서의 천상의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으로서의 실재적인 천국과 완전히 하나되어 있다(물론, 엄밀한 차원에서는 내적 천국와 실재적 천국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다만 이는 설명하기 위함일 뿐이다). 즉, 이것은 개인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이고 영적인 체험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체가 실재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은 내적 체험이 아니라 영과 영혼의 운동성과 역동성이 된다. 더 쉽게 말해서, 지상에서는 "마음이 우울하다"고 하여 "마음 자체가 변질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내적 상태"로서의 체험이 이루어지는 순간, 영과 영혼 자체가 "변환"된다는 것이다.



2. 이것은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이기도 하다. 이때의 무의식은 어두움이며, 망상적 실체로서의 에고의 의식 구조의 근원을 의미한다. 집단 무의식의 두려움, 공포, 불안의 어두움의 원형상징이 실재적인 힘과 에너지가 되어 나를 지배, 장악 기만하고 있으며 이것이 부활 이전의 자아이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표면적인 의식"은 무의식보다 더 "가볍고 작지만", 부활 이후에는 나의 영과 영혼이 무의식 전체보다 "더 높다." 따라서 자아의 표면적 의식이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나의 "상급자"인 영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불쑥 솟아올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의 상급자의 상급자인 영(Spirit)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이에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는 것을 이룬다. 나는 이것을 "나의 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눈이 들여다보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눈께서 나의 눈을 통하여 들여다보시는 것"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이르신 그분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는 구조다. 그리고 이러한 영과 영혼의 실재성과 운동성이 일어날 때, 그 자체가 이미 무의식보다 힘이 "세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무의식은 이제 의식의 주권 아래에 다스림을 받으며, 이 자체가 "죄성 그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되, 죄성이 주권적 지위를 상실한" 상태, 곧 "죄 사함 받은" 칭의인 것이다. 칭의는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의 주권적 지위가 상실되고 죄의 실제적 효력이 정지되며, 그 대신에 하나님의 법도가 내 안에서 완전한 새로운 주권으로서 군림하시고 통치하시며 실제적 효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세속의 나라에서, 무의식은 의식보다 힘이 세다. 그리고 세속의 나라의 노예들인 에고 상태의 개체의식들은 인식, 관념체계에 집착하되 그것은 곧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높다"는 죄성적 위계를 늘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거짓말"의 기준이 왜 "몸이나 마음의 상태"여야 하는가? 내 몸이 떨리고 내 마음이 불안하면 그 상태에서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된다. 이것이 세속의 법칙이다. 그런데 왜 그러해야 하는가? "상태"는 곧 무의식이 일으키는 것이며, 따라서 무의식에 의하여 일어난 것은 진실이고, 정당하며, 의식적인 정신이나 그것의 방향성보다 더 "높고 강하다"는 것이 에고적 인식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르게 본다. 몸이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든 간에, "그래서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가?"만이 거짓과 진실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본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와 악이 항상 내면에서 어느 정도 존재하는 동물이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죄 안에 머무르려고 하는 "교만과 나태의 운동성", 의도 자체가 곧 진정한 죄이며, 죄 가운데에서도 은혜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순종과 믿음의 운동성", 의도 자체가 곧 구원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사람은 불완전하여 상태에 집착하나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상태가 아닌 오직 의지만을 보신다. 의지는 의식과 정신의 운동성이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사소하고 거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어서 알아차리고 깨어나기 위해서는 기도와 묵상과 명상과 참선 등이 매우 깊어져야만 한다. "눈이 열려야 한다." 나의 눈으로는 절대 이것을 볼 수 없으며,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의 눈으로만 이것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자력 구원"의 길은 산 정상으로 오르는 초기 단계일 뿐, 결코 지고의 경지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내가 불교적 언어가 아닌 기독교적 언어를 기본적인 도구로 삼은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무의식이 의식의 주권에 순종하는 상태"다.



3. 이것은 영혼의 이원성과 상대성의 에너지로서의 영(spirit)과 혼(soul),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이다. 남녀추니의 상징이 이것을 의미한다. 내 안에서, 영혼(Soul, 에너지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서 영적 교감과 혼적 교감 둘 모두를 이룬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져 있다면 그건 그가 아직 불완전하다는 증거다.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완전하게 선포하시고 계시하신 것"이며,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완전한 몸)과 인격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완전한 몸"을 우리 안에 생명으로 받아 모실 적에, 우리들의 영적인 몸(영혼) 역시도 자연스럽게 "온전하여짐을 얻는다." 더 쉽게 말해서, 육신과 자아와 마음 등의 육적인 몸은 그 특성 자체로 인하여 불완전성과 상대성을 내포하지만, 영과 영혼과 순수의식 등의 영적인 몸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성전, 성소로써 존재하고 기능하며 이때에 완전하신 몸을 불완전한 영적인 몸 안에 모실 수는 없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니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버리는데, 결국 나의 영혼이 불완전하다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더라도 "일부만"이 드러나실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믿는 자는 "왕께 충성하는 기사(하나님과 나의 영혼 간의 남성적 교감)"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라는 영원하신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하나님과 나의 영혼 간의 여성적 교감)"이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의 글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미 짐작하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는 한, 남성성보다 여성성이 더 핵심이고, 근원이고, 본질이며, 더 높고, 더 주권적이다. 여성성이 남성성을 "부드럽게" 인도하기 때문이다. 남성성으로서의 영혼은 하나님의 뜻을 외부에 선포하고 펼치고 이루는 외적인 영역에서 주로 현현되며, 여성성은 하나님과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교감 그 자체에서 현현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내가 쓸모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나를 버리겠지만, 천상에서, 하나님은 내가 쓸모가 있든 없든 간에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 속에는 아들됨과 딸됨 모두가 포함된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딸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을 통하여 영혼이 온전하여질 적에,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 그리고 "여성성의 주도 하에" 남성성이 통합을 이루는 것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점에서 여성성은 남성성을 통하여 "주권을 가질 때", 그 진정한 빛을 드러낸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처음부터 여성성을 타고난 자는 여성성 자체에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하지만, 남성성을 타고난 자(영)가 영의 차원에서 혹독한 훈련과 실전을 통하여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을 적에, 여성성(혼)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았을 때, 바로 그 때에 여성성이 하나님 안에서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남성으로 태어났거나 남성성을 타고난 자(사실 별반 차이가 없다)는 출발선상에서 (여성으로 태어났거나 여성성을 타고난 자에 비해서)매우 뒤쳐져 있는 "열등한" 상태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익숙함과 능숙함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되 오직 서투름과 가난함 가운데에서의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시므로, 오히려 영적 세계에서는 "열등한 것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는 말씀의 비밀이다.


사실, 내가 "왕을 섬기는 기사"로서의 영과 영혼을 자주 드러내는 것은,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라는 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이며, 간혹 주님의 특수하신 명령을 은밀히 수행할 때를 위함일 뿐, 그러한 외부적인 활동이 없다면, 그분과의 관계에서 나는 기사일 필요가 없으며, 언제나 "신부"일 뿐이다. "일"이 없을 때, 나는 언제나 항구에 서서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신랑의 귀환을 기다리는 순결한 신부이며, 마침내 그분께서 문을 여시되 들어오셨을 적에 내가 오래 기다린 자의 사랑으로 그분을 올려다보며 그분의 품 안에 안기어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라는 신랑 앞에서의 신부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성(性)과 관련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본래부터 그러하다. 따라서 여성성은 이미 그 자체로 남성성보다 높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여성성의 주권적 인도 하에 남성성과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4. 이것은 또한 존재의 삼위일체 중에서 영(Spirit)이 실체화되며, 영을 중심으로 영혼(Soul)이 통합되고 정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려면, "존재 안에서 다스림의 위계가 선명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수행자들이 빠지는 함정은, 영혼이 영을 지배해버린다는 것이다. 영혼은 에너지체이며, 따라서 영혼 차원에서는 실제로 여러 신비 체험들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이 나약하고 열등한 자들은 자신들의 체험과 경험과 능력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오히려 그들의 정신이 영혼의 신비 체험에 굴복하여, 어느 순간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교만해지게 된다. 특별한 체험에 집착하고 특별한 능력과 힘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영이 타고나기를 강한 자, 순결한 자, 올곧은 자는, 신비 체험 따위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비 체험은 부수적인 것일 뿐 결국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종"이라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되, 다만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 체험은 내가 그분이 실재하시며 그분이 나에게 임재하시며 또한 나를 통하여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의식적으로 강화하는 수단으로써만 즐거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자는 영혼이 영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영이 영혼을 지도하고 다스리고 통치한다. 이것은 특히 신앙의 단계가 높거나 수행의 경지가 높은 자들일수록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순결함이 능숙함을 통치해야 한다. 바보스러움이 전문성과 정교함을 다스려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능숙함과 익숙함과 전문성이 "스스로 순결함과 바보스러움을 지극히 존경하고 경외하고 두려워하여 엎드려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마음이 있는 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게 될 것이며, 아무리 신비 체험이 많고 경지가 높다고 한들 이 마음 하나가 없다면 그 모든 신앙생활과 수행이 다 무의미하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 그분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5. 이것은 마음과 의식의 성화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중심부에서 이루어진 "부활"의 빛이, 점진적으로 외곽부까지 스며들고 물들여지기 시작한 끝에, 마침내 "일상적인 내면의 영역" 자체가 변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체험적으로는 매우 단순한데, 언어적으로는 매우 어렵다. 나의 일상적인 마음과 의식조차도 이제는 영과 영혼의 인도를 받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임재와 역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에 아주 사소한 일상적 순간들에서조차도 때때로 부활한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아주 사소한 사건과 현상들에서조차도 그분의 뜻과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전히 나는 그분의 종으로써 개체의식, 곧 에고로서 살고 있지만, 이제 에고는 주권자, 행위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며, 다만 일상 전체가 하나님 나라가 되어, 그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분과의 교제와 교강미 되는 것이다.


마음까지도 그분의 빛에 물들어가는 것, 이것이 곧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삶의 구조 전체"가 완전히 재편되는 것이다. 이제 "개인적인 목표"와 "신앙적 목표"가 별로 다름이 없어지며, "사적인 영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할 때에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속에 있을 때는 잠시 그분과 멀어져서 따로 나만의 시간과 활동을 영위하는, 그러한 세속적인 "분리"의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적인 영역 따위는 없으며, 다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해졌다가 일상적으로 돌아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의 순환만이 존재할 뿐이며, 부활한 자녀들은 임재와 부재 모두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하나님과 분리된 개체로서의 사적인 나, 개인적인 나, 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나의 직업, 나의 관계, 나의 일상 생활, 나의 삶의 목표, 나의 삶의 방식, 그 밖에 삶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지기 시작하며, 이 "개편" 과정들은 실제로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물질 자체의 운동성이 영이나 영혼의 운동성보다 압도적으로 느리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 조율의 과정에서, 세속의 삶이 영적인 삶으로 완전히 변성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부활한 자녀들은 극심한 물질적 결핍과 고난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또한 그분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자녀를 통하여 그분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나라가 임하는 것"에 관한 여섯 가지의 비밀이다.




이것으로써, 메이저 아르카나 22장의 카드들의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


당연히 아쉬움도 많고 초기의 구상과 꽤 많이 달라진 점들도 많았지만, 메이저 카드라는 큰 산을 넘은 것 자체에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마이너 아르카나, 곧 "일상 속의 신성"이기에, 다소 간에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영이 직접 드러나시기보다는 영혼이 주도하시어 글을 쓰기 시작하실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실제로 대화하고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다음 단계의 사명을 수행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하신 분들 중에서 무엇이라도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신 분들은,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언제든 내게 연락하시기 바란다.


이제 잠시 쉬었다가, 4원소 그리고 코트 카드부터 하나씩 시작하게 될 예정이다.

이전 22화Judgement : 온전한 하나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