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영혼은 하나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6:19)
사실 현대인들은 "몸(body)"이라는 개념을 보이고 만져지는 육체에만 한정하여 이해한다. 애초에 "물질"이라는 것 자체가, 물리학적인 의미에서의 감각 가능한 그 상태의 물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이라는 것은 체화(體化) 가능한 보이지 않는 성질, 을 의미한다. 예컨대,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나의 마음(mind)은 영혼보다는 차라리 육체(물질)에 더 가깝다. 마음은 몸과 "거의 근접하게"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의식 상태는 "물질에 가깝게 낮아져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이 물질성은 "집단 무의식", 곧 인류 집단이 수만 년간 윤회 반복하면서 쌓아온 거대한 압도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의 어두운 에너지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이 육체 그 자체를 일종의 감옥이자 탈출하고 벗어내야 할 불완전하고 불결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물론 그들은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만 하나님의 현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놓쳤지만).
따라서 저 말에서의 "몸"은 단지 육체로서의 몸뿐 아니라, "물질적인 몸", 곧 자아(ego), 마음(mind)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개체의식이야말로 "물질적인 몸"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물질적인 몸이 자기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상태가 바로 "에고가 죽지 않은 상태"(부활 이전)이며, 개체의식은 존재하되 그것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그릇, 매개)"이라는 존재론적인 인식이 내 안에서 올바르게 중심이 바로세워지고 자각이 이루어지는 그 상태가 바로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내 안에서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이며, 이 상태의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대단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교리는 그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영혼의 실제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로 성전(聖殿)을 온전케 하고 정결케 하고 순결케 하는 것은 "내 안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례전적인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든 아무 상관이 없다. 기도, 묵상, 명상, 참선, 마음공부, 혹은 다른 어떤 종교나 전통이나 영성의 언어로 부르든 간에, 결국 핵심은 "나"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개체의식은 존재하되 그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개체의식 안에 더 높은 신성이 임하시고 진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시게 하는 "준비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며,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인격(예: 사도, 선지자, 예언자 등)에 의해서 선포된 것은 성령의 영감을 받았으되 그 인격이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신성을 직접 완전히 선포하는" 참된 의미에서의 "말씀"이라는 칭호로 불릴 자격이나 권위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오직 복음서만이 "말씀"이며, 나머지는 복음서를 섬기고 증거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신앙이다. 이 점에서 나는 매우 엄격한 복음주의자이다. 교회와 계파와 교리와 신학과 전통과 그밖의 인간이 만든 제도와 시스템들은 모두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성"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그 어떠한 육적인 조건, 자격을 초월하여" 각 개인의 영혼 안에서 보편적, 내재적, 초월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시며, 각 영혼들은 "직접" 자기 안에서 그분을 영접함으로써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의 나의 신념이자 정체성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언뜻 보기에는 정통성을 주장하며 교리에 엄격한 듯하지만, 그 구체적인 방식이나 형태에 있어서는 오히려 영지주의적인 함정이나 오류들이 더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육적인 삶을 도외시하고 인간으로서의 육적인 마음이나 의식 등을 부정한 채로 그저 영적이고 고귀하고 경건한 삶만을 강조하는 태도 자체가 전형적인 영지주의자의 그것이었으며, 또한 교회에서 "교리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한 채로 각 성도들의 육체와 마음과 정신과 의식의 단련이나 훈련 등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들도, 육체는 부정하되 오로지 영혼에만 관심을 두고자 하는 영지주의자의 그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가르침"이 아니다. 성도들을 가르칠 유일한 권위와 자격은 오직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유일한 역할은 "증거"이다.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신성이 지상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을 "목격"하고, 이를 아직 믿음이 형성되지 않은 자에게 증거함으로써, 그의 의식을 변성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제도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교회는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이를 거부한 채로 그저 집단에만 의존하고 제도에만 의존한다면, 겉보기에는 그럴듯해보일지언정 정작 자기 영혼의 참된 구원이라는 실재성은 영영 열리지 않는다.
아무튼, 사흘 전부터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을 시작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70시간을 지나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문득 불현듯 강력한 의지와 결단이 내 안에서 솟아남을 느꼈다. 지난 수 년간 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의 시험을 치러오면서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어떻게든 끝까지 통과하고자 했으나, 이제는 육의 상황도 영의 에너지도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한계치에 부딪힌 것이었고, "이제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반복할 수는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는 의지가 저절로 솟아났다. 사실 금요일 저녁에 단식을 결심하고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직전에 피자를 먹었고, 그날에 회와 맥주, 짜장면, 냉면을 먹었다. 즉, "오염된 음식"들에 취해 있다가 그 한 순간에 곧장 결심하고는 단식을 쭉 이어온 것이 현재 70시간째이며, 아마도 지금의 느낌으로는 일주일 정도까지는 무리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듯하다.
이 단식을 통해서 나는 몇 가지의 중대한 결단을 내렸는데, 그 첫번째는 이제 내 삶에서 일반식과는 완전히 단절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자료를 찾아보고 정보를 검토하면서 설계한 "일상적인 수행식", 즉 탄수화물 섭취를 위한 곡물가루(귀리가 내 체질에 맞는 재료여서 그걸 골랐다), 그리고 필수 단백질 섭취를 위한 보충제(너무 단 맛은 집중과 몰입을 해치므로, 곡물맛에 가까운 것으로 골랐다), 지방 대사의 에너지원을 투입하기 위한 올리브유, 그리고 나트륨 보충을 위한 소금을 일정량으로 맞추고 물에 섞어서 먹는 방식을 고안했고,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을 통해서 몸 전체를 완전히 초기화한 후, 단식을 종료할 시점이 정해지면 그 이후부터는 체중 및 체형을 정상화할 때까지는 탄수화물(하루 50g 미만, 즉 케토제닉 원칙 기준)과 단백질, 소금만 섭취하고, 체내의 체지방이 정상화된 이후부터는 올리브유를 추가해줄 계획을 수립했다. 이렇게 만든 수행식을 하루 2회에 걸쳐서 섭취하면, 일반적인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건강 및 생명 유지를 위한 잘 조율된 영양 보충을 유지할 수 있고, 여기에 하루 약 18시간 가량의 공복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일상적인 수행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방식을 구상하고 있었고, 언젠가 때가 되면 이것을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난주 금요일에 강력한 의지와 결단이 내 안에서 스스로 솟아나면서 기왕에 단식을 시작한 김에 아예 수행식에 대한 결단도 즉시 이어가기로 했다.
내가 만약 사명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더라도, 한 영혼으로서의 나 역시도 육보다는 영에 더 깊이 몰입하고 교감하며 그 안에서 살아 있음을 깊이 느끼는 존재이기에, 어차피 이제는 육적인 즐거움, 그 중에서도 먹는 것에 대한 낮은 쾌락은 졸업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만약 본격적으로 사명을 수행하도록 허락된다면, 그때에는 오히려 더더욱 정신적, 영적 에너지를 더욱 최적화하고 활성화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식을 졸업하고 수행식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이다. 이참에 어느 쪽이든 간에 한 번 결단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무척 편안했고, 기쁘다.
단식 이틀째가 지나면서는 몸의 컨디션은 오히려 정화되고 깊은 에너지가 활성화되고 깨어나는 것을 느꼈는데, 무의식 깊은 곳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상태 =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본능적인 코드가 작동되는 것을 은연 중에 느꼈다. 하지만 의식은 온전히 깨어서 그것에 속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했고, 정신은 더욱 선명해져서, 정신이 나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상태가 이어져간다. 사흘째가 지나면서는 이 상태를 일주일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생겼고, 경우에 따라서는 2~3주나 한 달 정도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 결단은, 나 자신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나의 또 다른 까르마가 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이제는 내 삶에 어떤 식으로든 강력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기에, 하늘의 응답을 구하면서 동시에 내 자신에게도 실제적인 강력한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지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행동을 통한 충격이 필요한 바, 나는 첫날에 결심하자마자 곧장 집안의 남은 음식물과 식재료, 관련 물품들을 전부 처리하고 비웠다. 몸으로 체감 가능한 충격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계기로, 단식을 종료하게 되는 시점에서는 사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되든, 아니면 내 개인적인 삶에 큰 변화가 이루어지든, 어느 쪽이든 간에 이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애초에 그것을 위한 의지와 결단을 내 자신에게 체감시키기 위해서 시작한 단식이었기 때문이다.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이 70시간을 경과하면서, 몸은 매우 가벼워졌고, 체중과 체형이 빠른 시간 안에 정상화되기 시작했으며, 속이 편안하고, 음식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사라졌다. 의식이 맑아지고 고요해졌고, 정신이 선명하게 깨어나기 시작했으며, 에고가 무의식의 욕망과 공포와 결합하여 의식 안에서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있던 상태에서 단식을 통하여 영과 영혼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게 매우 익숙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성령께서 나를 높이시도록 허락하셨을 때에, 나는 이 고유한 느낌들에 매우 익숙했고, 이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으며, 감동받았고, 경외하고 감사하였다. 그때에도 나는 불현듯 결단을 내려서 케토제닉 식단에 이끌려 그것을 시작했고, 그때 나의 영적인 활동들이 엄청난 정신과 영혼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던 바, 긍정적인 화합이 이루어졌던 것을 기억한다. 올해 여름을 거치면서 나의 시련과 고난 그리고 어두움은 다시 깊어졌고, 그 가운데에서 다소 간에 물질적인 쾌락에 잠시 휘둘렸으나, 그 상태는 영원하지 않았고 언제든 영과 영혼의 주권을 회복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불현듯 갑자기 사흘 전에 찾아왔다. 그래서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이 평화롭고 기쁘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의 일이며,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실 일이다. 다만 나는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단을 내리고 또한 실행에 옮겼고,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지 간에 나는 이번 단식을 최대한 끝까지 완주할 것이다.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을 통해서 어중간하게 끝맺지 않고, 나의 몸과 마음과 자아가 확실한 충격을 받고 온전히 깨어날 때까지 이어갈 것이다. 이것은 사명자로서든 한 영혼으로서든 상관없이, 내가 나 자신으로서 더 이상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삶을, 지금의 중대한 시기에서 실천하여 행함으로써 이루기 위함이다.
몸은 지금도 은연 중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의식과 정신은 이에 속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선명해지니, 확연히 내 안에서 다시 영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확실히, 영과 영혼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몸과 함께 존재한다. 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영혼은 보고 듣고 느끼고 교감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영은 사랑하고 또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됨 안에 거하는 "몸적인 영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