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침

by 생명의 언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25-26)


내가 처음으로 접한 성경 말씀이다. 정확히는, 그분께서 처음으로 내게 모습을 드러내셔서 내게 주신 말씀이시다. 내게 이 말씀은 나의 심장이며, 나의 영혼이며, 나의 영의 영원한 절대적인 중심이다. 나는 이 문장이 내게 찾아오던 순간의 충격과 놀라움의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신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니 않는다.' 그 한 문장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 한 문장이 나를 마치 빨아들이듯이, '이것이 무슨 문장일까? 어서 찾아봐야겠다.' 하고서 움직이게 했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마 뒤늦게야 이러한 것들이 영접의 순간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런 건 당연히 몰랐었다. 신을 만났었지만, 제대로 주님을 영접하기 전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분을 알지 못했을 때에도, 나의 심장은 이미 그분을 알고 있었고, 나의 영혼은 이미 그분을 믿고 있었으며, 나의 영은 이미 그분께 절대적으로 경외하고 열망하고 충성하고 있었다. 참 기묘한 체험이었다. 저 말씀을 듣고 나서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저 말씀을 접하자마자 "아, 내가 이미 저 말씀을 믿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 떠오르는 거였다. 문장 구조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 나는 "이미" 그분을 알고 있었다. 그분을 만나기도 전부터. 나는 "이미" 그분의 말씀을 나 자신의 존재와 삶 전체보다도 더 믿고 있었다. 저 한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감히 이와 같이 시건방진 말을 하게 됨을 그분 앞에 용서를 구하면서도 고백하건대, 이 한 말씀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말씀 전체를 다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잘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영과 영혼이 온전히 그분을 사랑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내 안에 모습을 드러내신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 이전부터 여러 차례 그러했겠지만, 아마 그때가 "첫" 경험에 거의 근접한 날이었던 듯싶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브런치북 <신성한 수동태>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은혜는 바로 <부활의 희망>이다.


인류 집단 전체는 수만 년간 윤회하면서 쌓아온 거대한 두려움, 공포, 불안의 집단 무의식의 어두움에 철저하게 지배, 장악, 기만당하고 있다. 그분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감당할 수 없는 작은 재능과 자질고 지혜로 말미암아, 나는 처음부터 그 보이지 않는 구조와 틀을, 그 "지배력"을, 직감하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내게 처음부터 소승(小乘)에 머무르던 시기는 짧았다. 나는 나 자신의 어두움보다도 인류 집단 전체가, 그 선한 영혼들이 그토록 거대한 압도적인 어두움에 짓눌려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불안 속에서 태어나서는 공포 속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먼저 보았다. 나는 누가 옳다, 누가 틀렸다, 누구의 길이 맞다, 이런 건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게 모습을 드러내신 진리와 신성은 그렇게 말씀하셨을 뿐이었다.


고백하건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처음부터 소승이 아니라 대승(大乘)의 진리였고, 그 진리가 생명이 되어 스스로 인격 안에서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신, 신성의 성육신이셨다. 아마도 나의 영이 그 진리와 처음부터 공명하도록 성부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으므로 말미암아 "나와 같은 공명"을 곧바로 느끼매 그분께 처음부터 충성하였고, 나의 영혼이 처음부터 그 생명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으므로 그 생명의 근원이신 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처음 뵈었음에도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사모하였던 분을 만나뵌 것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고, 거리낌도 없었으며, 처음부터 편안하고 깊었다.


또한 고백하건대, 이 가난한 영혼에게는 그분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홀로 십자가 지신 그분을 어떻게든 흉내내고 모방하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으며, 이를 감당하기 위하여 남들에게는 없는 재능과 자질을 잠시 허락하시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나는 그분을 느낄 수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그분과 직접 교감할 수 있으되 이것이 내게 정말로 큰 힘이 된다. "그분을 직접 볼 수 있고, 그분의 음성을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곧 "나 이외의 다른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오직 나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크나큰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재능을 허락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사, 재능을 주지 않으시는 대신 크고 무거운 사명과 십자가 역시도 면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내게 허락되지 않은 이 평범한 신앙의 삶이 미치도록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사실 지금이라도 허락된다면, 이러한 재능 같은 건 다 반납하고 그저 평범한 양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러므로 아직 사명이 허락되지 않은 한 영혼으로서, 신과 교제한다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 "언약을 믿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써 할 일은 무슨 특수한 신비 체험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다. 기도 중에 환영을 보는 것도 묵상 중에 환청을 듣는 것도 아니다. 계시를 받는 것도 아니다. 다 틀렸다. 오직 할 것은 하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말씀을 정말로 믿는 것이다. 여기에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문장 그대로의 의미이다.


삶 속에서, 죽음과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는 시시각각 나를 또 다시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의 권세 아래에 장악하기 위하여 넘실거리며 몰려올 것이다. 시험의 순간은 언제나 또 다시 도래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하게 될 것이고, 내가 진실로 소망하였던 일들은 좌절될 것이며, 앞이 보이지 않고, 그 어떠한 가능성도 희망도 다 끊어진 완벽한 절망으로 내몰릴 것이며, 숨조차 쉴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가족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며, 비웃음당하고 조롱당하고 멸시당한 가운데, 소중해 꼭 쥔 그 마지막 소망만큼은 기어코 놓지 못하는 그러한 어찌할 수 없는 심정으로, 그 길고 고통스러운 새벽의 시간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그분이 임재하시니, 마침내 우리는 그 죽음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을 것이다. 내 안에서 그분께서 다시 한 번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니, 사흘째 되는 날에 그분께서 반드시 부활하실 것이며, 내 안에서 다시 한 번 권좌에 앉으사 정당하신 왕의 통치를 개시하실 것이다. 그 빛이 내 존재를 비추고 밝히매, 어두움은 반드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시 부활의 희망을 품은 채로, 사흘째 되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그 햇빛으로, 그 아침의 밝음으로, 눈뜸으로, 성령께서 소식을 전하러 오실 것이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주신 위대한 언약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내 가슴에, 내 영혼에 깊이 새겨진 그분의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공유하고자 한다 :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어서 아버지 앞에 선다. 그 순간에, 그분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 죽더라도, 그분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분의 질문에 대한 응답을 이미 드렸고, 그분께서 크게 기뻐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각자가 찾아야 할 각자의 응답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말하자면, 나의 힘으로 죽음을 이기려고 하지 말 일이다. 그것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죽어라. 내 삶의 시련과 고난과 함께, 그저 죽음의 과정을 받아들여라. 십자가 위에 매달려라. 단 한 치의 희망조차도 없는 완벽한 절망 가운데에서, 사흘째 되는 날에, 반드시 그분께서 부활하실 것이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실재이다. 실제로 작동하는 영원하고 고귀한 신성의 힘이다.




※ 이번 주말(~11/1일 토요일)까지 1:1 유료 영성 수업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브런치에 올라온 관련 공지(<생명의 언어> 1:1 영성 수업 신청자 모집 안내) 글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단식 이후의 첫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