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이 끝난 밤부터 오늘 하루 동안에는 수행식(액체 형태의 영양 보충)만 실시했다. 정교하게 설계된 영양 보충이었지만, 4일간의 엄격한 물과 소금만으로의 단식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아직 덜 깨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액체 형태로 몸에 흡수가 쉽게끔 충분히 에너지원을 투여해주었음에도 낮 동안에는 계속해서 몸이 적응하고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잠에 들지 못하는 늦은 새벽, 산책을 하러 집을 나섰는데, 공기가 매우 차가웠고 문득 첫 '배고픔'이 느껴졌다.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갈망은 아닌데, 이제 몸이 깨어나서 활동하면서 영양분을 원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랄까. 먹지 않은 채로 밤을 샐 수 있었지만,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 같아서, 편의점에서 구운 계란 4개와 제로콜라를 구매했다. 수행식의 원칙 하에서 허용 가능한 범위의 야식이었다.
그리고 첫 야식을 먹었는데, 놀랍게도 계란을 1개만 먹어도 배고픔이 가시는 게 느껴졌고, 2개째를 먹자 배부름이 느껴졌다. 4개와 제로콜라를 다 먹자 마치 든든한 식사를 마친 것 같은 '포만감'이 느껴졌다. 확연히 단식을 거치면서 위가 줄어든 것이 체감되었다. 그리고 몸이 음식들을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고, 무엇보다 단촐한 음식들이었지만, 계란을 찜기에 쪄서 덥히고 콜라를 잔에 따르는 그 과정들과, 그리고 계란을 소금에 찍어서 첫 입을 먹었을 때,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에서 자연 속 인간으로서의 기쁨과 행복과 활기가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야식을 잔뜩 주문해서 먹어도 물리적인 허기만 잠시 가시게 할 뿐, 포만감도 만족감도 없었는데, 이제는 계란 4개와 콜라 한 잔만으로도 "이렇게 호화스러운 야식을 즐겨도 되나" 싶을 만큼의 "불량스러운" 기쁨과 즐거움이 샘솟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했다. 단식의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보상을 나 자신에게 허락했고, 이제부터 새로운 회복과 활성화의 단계로 접어든다는 것을 몸과 무의식이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에도 당분간은 일반식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루 2회 수행식을 진행하는 것으로 모든 식사를 대체하되, 원칙에 부합한 간식들은 오히려 종종 섭취해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계란을 삶아서 냉장고에 보관한 뒤, 간단하게 덥혀서 소금에 찍어 먹거나, 견과류를 구비해뒀다가 적정량을 먹는 것이다. 둘 다 수행식의 원칙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간식이다.
지금은 내 삶의 실제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전환기이며, 이제 머지않았음을 직감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다. 그리하여 문이 열린다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게 된다면, 내 삶은 이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것이다. 행복의 초점을 이제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망에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테니까. 적절한 시기가 온다면, 나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써, 생선회 한 접시에 기분 좋게 증류주 한 잔을 걸치는 일탈을 허락받을 날이 오겠지.
나의 몸은 영혼이 거하는 집이고, 영혼은 영이 거하는 성전이며, 영은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성소이니, 결국 몸을 돌보는 일은 "성의 심층부"로 향하는 직접적이고 강력한 일상적 수행이 될 것이다.
육적인 삶과 일상과 분리된 특수한 영적인 수행이나 훈련, 체험 등에 대해서 나는 매우 크게 비판한다. 무슨 에너지를 다룬다든지, 뭘 운행시킨다든지, 기적을 일으킨다든지...... 그러한 것들은 물론 의미 있는 것들이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자신 존재 안에서, 나의 내면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육의 삶을 받아들이고 충실하되,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은밀히 행하고 이루어가는 것이다. 모든 수행과 훈련은 그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상 속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동료와 지인과 대화하면서 자기를 내려놓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일, 삶의 슬픔과 아픔 속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고, 그분과 함께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 그러한, 어떤...... 일상적 수행.
나는 육적으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영적으로도 특별한 권세를 부린다든지 전생을 본다든지 기적을 일으킨다든지 이러한 것도 전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이지만, 내가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은 딱 하나, 딱 하나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무엇으로 인하여 기뻐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
어떤 이가 쓴 글을 읽었다. "당신은 하나님을 아나요?" 나는 답한다. "아니요, 모릅니다. 나는 그분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그가 이어서 묻는다 : "당신은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나요?" 나는 답한다. "아니요, 알지 못하므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 "하나님을 어떻게 아나요?" 이에 나는 답한다. "비록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분께서 나로 인하여 기뻐하신다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언제나 그분을 느끼고 그분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 삶이고, 내 삶의 방식이다. 나는 이것을 매우 사랑한다. 나는 여전히 신을 알지 못한다. 전에 안다고 믿었지만, 결국 내게 남은 것은 믿음이다. 믿는 것, "온전히 믿는 것"...... 나는 어리석다. 나는 무지하다. 나는 가난하다. 그러므로 똑똑하고 현명한 자들의 물음에 대해서, 가난한 자가 영리한 척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의 에고의 죄성이 불처럼 날뛸 적에, 그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분을 사랑하는 나의 영혼이 문득 답을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께 사랑받고 있어요." 에고는 영리하고 능숙하며, 영혼은 순결하고 천진난만하다. 세속의 사람들은 에고가 영혼을 종으로 부리지만, 부활한 자녀들의 안에서 영리한 자는 순결한 자를 섬기고, 능숙한 자는 천진난만한 자에게 봉사한다.
이번 단식과 수행식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앞으로의 과정과 결과와 무관하게, 다시 내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어서 자유롭고, 평화롭고, 기쁘다. 어두움 속에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언젠가는 이리 되어야 할 일이었고, 언젠가는 이리 되돌아와야 할 일이었음을 한 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밝든 어둡든 간에 늘 나의 영혼이 내 안에 영원히 계신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고 열망함으로 말미암아, 느닷없이 그분께서 "이제 시작하라"고 하셨을 때, 즉시 순종하였다는 것, 그 과정이 비록 너무도 고통스럽고 아프고 외롭고 쓸쓸하고 허망할지언정, 부끄럽고 못생기고 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 언덕에서 홀로 의롭고 고귀하게 십자가 지신 그분처럼은 절대 할 수 없더라도, 못생긴 채로라도 어떻게든 순종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이리 또 한 차례 성화에 한 걸음 나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문득 기뻤다.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고, 굳이 특별한 것을 계획하고 행할 필요도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 그것을 다만 결심하여 행하면 될 뿐이다.
다만 그 결심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 내게는 없는 의지와 용기와 힘을 그분께서 주시는 때를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일이지만.
※ 이번 주말(~11/1일 토요일)까지 1:1 유료 영성 수업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브런치에 올라온 관련 공지(<생명의 언어> 1:1 영성 수업 신청자 모집 안내) 글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