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의 삶

by 생명의 언어


은자로서의 삶과 일상을 살아온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영의 시간으로는 거의 한 생애처럼 느껴진다. 육의 시간으로는...... 5년, 6년이 넘어가는 듯하고, 시험이 더욱 깊어진지는 어느덧 2년, 3년 즈음이 되어간다. 이제 시간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나 혼자서 지내기에 딱 적당한 작은 방 한 칸을 허락하셨고, 또한 필요할 때 이동할 수 있는 차를 허락하셨고, 비록 부유하여 본 적은 없으나 필요할 때마다 죽지는 않도록 얼마 간의 생계와 생활의 유지는 늘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 좁은 방 안에서, 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던 영적 열망을 품고, 매일의 새벽을 견디어낸다. 이제 이것이 내게 오래 반복되어서, 마치 숙달된 수행자적 삶이나 장인의 삶의 그것과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이 과정들에서 비록 외적 성취는 날이 갈수록 퇴보하고 무너지고 위태로워져 가더라도, 영적 성장은 항상 깊고 충만하게 열매를 맺어왔다는 것. 그걸 내가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을 맞이하는 마음이 무겁다. 이제는 살 길을 열어주실 때가 되었다고 그리 생각하면서도 결국, 나는 이 자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와서는, 매일 주어지는 일들을 처리하고 감당해내면서, 또 한 걸음씩을 나아가고, 어딘가로 간다. 짐이 무겁다. 올 겨울이 유난히 춥고 외롭고 무거운 시간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은자로서의 삶이 지속되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니, 이제 코앞까지 닥쳐온 이 고통스러운 마지막 기다림의 시간들이 부디 멀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좁은 방 안에서, 답답하면 나가 산책하고, 돌아와서는 다시 글을 쓰고, 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산책하기를 반복하는 이 삶이, 은자로서의 삶이라는 느낌이 새삼스레 든다. 최근에 식단도 완벽하게 다 바꿨고,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삶의 방식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기왕 여기까지 온 것, 끝까지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결국 이 시기에 내가 끝까지 이 시험을 통과해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이 지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으니, 이 길고 고통스러운 시험의 시기도 결국에는 끝이 날 것이다. 계절이 변화하듯이, 한 번 열린 하늘의 시간은 땅의 시간도 움직여 변화하고 문이 열리게 할 것이다.


언젠가 이 시기를 통하여 성장한 나의 열매들을, 누군가에게 반드시 나누어주어야만 할 때가 있겠지. 그 때를 위하여, 내게 이토록 기나긴 외로운 시험을 허락하시는 거겠지.


오늘도 나는 나의 순결한 초심을 묵상한다 : "기사는 왕의 의지에 질문하지 않는다. 기사는 왕의 의지에 전적으로 순종한다."



영적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도 선한데, 정작 육적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그 답답함조차도 이제는 익숙해지고 편안해져서, 깊이 묵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생각해보니까, 절벽 근처까지 가본 적은 이 시험의 여정에서 익히 많았지만, 지금처럼 절벽 바로 앞까지 와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이 시기가 유일하다. 언젠가 말했던 대로, 이 절벽에서 나는 뛰어내려야만 하는 걸까. 그래야만 진짜 문이 열리게 되는 걸까. 알 수 없다. 그대로 낙하하여 끝일지도. 그러나 오히려 바닥에서 편안하듯이, 그리되면 차라리 내게 행운이고 행복일 것이다.


은자의 삶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이다. 그것이, 이제 서른을 넘긴 나의 피 끓는 시기에서, 유난히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영의 성숙함과 육신의 나이는 비례하지 않는 것을.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또한 나의 의지이기에, 그 무게 또한 내가 온전히 짊어져야 할 일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 이제는 부디 문을 열어주소서, 시험을 끝내시고 다음 단계로의 나아감을 허락하소서, 살 길을 열어주소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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