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 영적 현상들

by 생명의 언어


인터넷에서 다소 간에 재미있는 것을 봤다. 일종의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관념적 질문인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 "사람의 눈(Eyes)은 하나일까요, 둘일까요?"


나는 그럴듯하게 돌려 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영적-현상학적-해석학적 방법론"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먼저 말하자면, 이 질문 자체가 오류다. 눈(Eyes)이라는 건 언뜻 보기에 하나의 단일한 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1) 실제 물리적인 물질적 몸으로써의 눈과, 2) 눈이라는 "관념"과, 3) 해당 관념을 가리키는 언어와 글자/말(사실 언어와 글자는 엄밀히 다르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동일시된다고 쳤을 때), 4) 이데아(idea)적 관점에서의 단일하고 완전한 실재로서의 하나인 눈과, 5) <나>라는 자아의 정신(의식) 안에서 인식/분별된 것으로서의 눈 등이 서로 다른 실체로써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눈>이라는 중심축 안에 구조지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을 묻는가, 에 따라서 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질적 몸을 묻는다면 눈은 두 개이며, 눈이라는 관념을 묻는다면 여러 개일 것이며(예: 물체로서의 눈, 상징적인 눈 등), 언어와 말은 여러 개일 것이고(관념이 여러 개이므로), 이 연장선상으로 나머지도 다 그러할 것이다. 결국 넓게 본다면, 물질적 몸으로서의 눈과, 비물질적 원인 내지는 요소, 대상으로서의 눈,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질문이다.


이 자체가, 인간의 의식과 정신이 "평면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적군과 아군, 주관과 객관, 물질과 비물질 등으로 이원화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보이는 것만이 실체라고 믿는, 전형적인 현상계에서의 상대적이고 이원적인 구조 안에 갇혀 있으며, 실증객관주의와 유물론과 물질주의적 사고 등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선문답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아니 비단 선문답을 포함하여 모든 압축적 영적 아포리즘들은 결국 "정신의 평면적 한계"를 깨부수는 필연적 과정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는 평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는 "나"라는 존재의 신성한 수직선에 따라서 수직적-다층적으로 펼쳐져 있으며, 이 구조 안에서 "상위 차원은 하위 차원을 통치하고 다스린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며, 신의 뜻이고, 그 자체 진리이다. 따라서 영성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 진리로부터 예외일 수 없으며,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간에, 과학적 사고를 지향한다고 하여 이 진리로부터 예외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과학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그가 중력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나 내가 "영성을 믿지 않으면, 영적 현상은 내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마치 "나는 중력을 안 믿어, 그러므로 중력의 영향을 나는 받지 않아."라고 주장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 상태가 되면, 평면적 의식 구조는 "열등하고 불완전"하기에, 자아는 자기를 넘어서 있는 "실체"들, 영이나 혼, 에너지, 어두움으로부터 말미암은 영적 실체들(각 종교나 전통 등에서 죄, 업, 까르마 등으로 부르는 것들과, 사념체 등과 같이 구체적인 실체를 가진 인격화-실체화된 어두움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지배, 장악, 기만당하게 된다. 이것은 "존재 자체의 수직적 위계" 때문이다. 즉, 정신이 열등하면 손쉽게 그 열등한 정신보다 우월한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하는 다수의 어두움들로부터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나의 "보편적 복음주의"는 그저 교리에 대한 지적인 믿음만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일상 속에서 아무런 의식적, 정신적, 영적 훈련 없이 그저 형식적인 행위 등을 반복하거나 주문 따위를 외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실제적인 훈련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나는 "실천적 신비주의자"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자기 마음과 의식을 무방비로 내버려두고 방치한다. 마음 안에서 어두움이나 공포, 욕망 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으며, 직장에서든 출퇴근길에서든 여하튼 어두운 에너지들이 지배하는 시공간 속에 있을 적에, 자기의 정신이나 의식을 전혀 방어하지 않으며, 의식의 초정믈 잡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마치 위험한 범죄자들이 드글거리는 골목길에 아무런 무장도 호위도 최소한의 방어 대책도 없이 맨몸으로 철없이 돌아다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물론 평면적 의식보다 입체적 의식이 무조건적으로 더 높다고 볼 수 없긴 하나, 최소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분은 평면적 존재 안에서는 현현하시기가 어렵다. 이것은 그분의 능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현상계에서의 존재들이 그만큼 너무 열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입체적 구조를 전제로 해야만 그나마 성육신적 현현이 가능해진다. 신앙은 자기 의식과 정신을 입체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이며, 믿음은 그 실질적 동력(힘)이다.


따라서, 신을 믿지 않거든, 차라리 신비주의자나 오컬트주의자라도 되는 게 낫다. 그것마저 하기가 싫다면,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의 어리석고 오만하고 순진한 모습들이라도 성령께서 너그러이 받아주셔서, 도처에 눈을 번뜩이고 있는 어두움의 실체들로부터 그를 보호하시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어리석음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무지에 교만과 욕망과 공포가 함께하는 순간, 무지는 죄가 된다.




영이 바로서지 않은 채로 영혼이 열리기만 한 것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귀신을 본다거나 영적 에너지를 느낀다거나 환영, 계시 등을 체험한다든가, 어쨌든 영혼이 "열려 있는" 상태가 무언가 대단한 줄로 착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차라리 에고가 무의식적인 방어막을 작동하여 그것들을 "보지 않기로 결단"하는 상태보다도 오히려 더 열등한 것이다. 에고의 방어막이 시스템적 오류를 일으켜서는 자기를 넘어서 있는 어두움의 실체들을 인식하되, 그것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신처럼 숭배하는 그러한 "노예 상태"에 전락한 것이다.


영혼이 열린 것과, 영혼의 힘이 강한 것은 별개다. 대개, 각 나라나 문화권에서의 토속 신앙이나 무속들은, 영혼이 열리기만 했을 뿐, 영혼의 힘을 체계적으로 강화하는데 대해서는 대부분이 무지하거나 무방비하다. 애초에 외부적인 물체나 형식적 의례 따위를 통해서 영적 보호 등의 효과를 "의존"하려는 사고 자체가, 영혼의 힘이 약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내가 묻지 않을 수 없다 : 귀신이나 악마가 무서워서 부적을 쓰고 십자가를 목에 걸 것이라면, 차라리 어찌하여 자기 안의 영혼의 힘은 그리도 무시하고 간과하는가? 더 나아가서는, 바깥의 그 어두움의 실체들을 그리도 두려워할진대, 어찌하여 성령께로 말미암아서는 두려워할줄 모르는가? 이 자체가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영혼이 열리기만 한 상태는, 대부분은 그의 의식 구조가 평면적임으로 말미암아 무의식적인 어두움들의 지배 하에 놓인 "노예 상태"나 다름이 없다. 그 상태에서, 그의 의식과 무의식은 철저히 어두움에 구조지어져 있으며, 어두움이 돌고 도는 윤회의 상태에 빠져 있다. 그 상태에서,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고, 그들이 섬기는 신은 어두움의 신들이며, 그것들은 인간의 영혼보다 "높다." 유감스럽게도 두려움에 빠진 자에게 그 어두움의 지배력은 더욱 압도적으로 증가하여 영항력을 행사한다. 두려움은 어두움의 권세다. 그러하므로, 동서고긍믜 수많은 경전에서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1)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2) 그리고 무엇에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를 깨닫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영성 훈련은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첫째, 의식 구조를 확장시켜야 한다(평면에서 입체로). 둘째, 영혼의 힘을 강화하고, 영혼을 열고,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이 자체가 어차피 사실상 다 같은 것이다). 셋째,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영(Spirit)을 강화하고 바로세워야 한다. 최종적인 목적이자 가장 중요한 본질은 영을 강화하는 것이다. 영은 나의 존재의 중심이자, "신과 직접 연결된 통로"이다.


영이 강한 자들은, 어두움의 실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적인 마음에서야 멀쩡하게 길을 걷다가 괴상한 것들이 튀어나오면 놀라기야 하겠지만, 무의식적인 공포, 불안으로서의 어두움의 권세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두움의 권세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영혼이 순수하고, 열려 있고, 힘이 강할 적에, 그 영혼은 깨어난 영의 통치 아래에 있으며, 그때에 그 영혼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감히 바깥의 어두움의 실체들 따위는 건드리지도 못할 만큼의 강력한 "빛의 지배력"을 행사한다. 말하건대, 사람의 안에 있는 영은 하나님의 빛이 임하시는 통로이니, 그 영이 깨어나서 그 안에 빛이 흐를 적에, 감히 그 어떤 어두움들도 능히 비추어 밝히어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사람의 안에 있는 영혼은 빛의 에너지이니, 그 영혼이 온전할 적에, 아주 미약한 반딧불이와 같은 불빛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빛이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대로 어두움이 언제나 빛을 두려워하기 마련인 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므로, 영혼은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기를 희망하게 될 것이다.


영을 강화하면, 영의 통치 아래에서 영혼은 저절로 깨어나고 성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의식을 강화하고 영혼을 정화한답시고 설쳐봐야, 영은 자연스럽게 깨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계적 상승"이 아니라, 처음부터 최상위 통로를 완전히 열어젖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을 강화하고 깨어나게 하는가? 무슨 특별한 수행이라도 해야 하는가? 물론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행하면 된다. 1) 항상 깨어 있을 것, 2) 마음의 중심을 잡을 것, 3) 어두움에 속지 않고 빛으로 향할 것. 다 아는 것 아닌가. 일상 속에서, 하루를 살면서, 이 간단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 된다.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단순하고 간편하고도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신앙"이다. 특정 종교적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신과 연결되라"는 것이다. 신과 연결되는 방법은 신을 믿는 것이며, 신을 믿는 것은 신에게 관심을 갖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방법은 별로 상관이 없다. 뭐든 다 좋다.


그리하여 점차 페이지(Page)에서 나이트(Knight)로 나아갈 적에, 그는 어느 순간 "임무"를 하달받게 될 것이다. 신께서 이제 기사를 보내시어 어두움의 전선에서 다른 영혼들과 생명들을 지키고 보호하시게끔 그를 보내실 것이다. 그때에 그는 그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의 이름으로 서게 될 것이며, 그분의 이름은 곧 그분의 권세요 영광이니, 그것은 이 세상 그 어떤 영적인 에너지나 힘 따위보다도 더욱 압도적인 강력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사가 경험을 쌓아서 여왕(Queen)이나 왕(King)의 반열에 오른 순간, 그는 이제 더 많은 기사들을 양성하고 가르치고 내보내서 세상의 어두움을 빛으로 비추어 밝히는 일에 능히 자신의 경험과 연륜과 역량을 쏟게 될 것이다.




무지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교만은 죄이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죄다.


죄를 지으면 다른 무엇보다도, 어두움으로부터 지배당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피해는 자기가 입는다. 현실에서, 고작해야 천원짜리 하나도 아까워서는 할인을 찾고 쿠폰을 찾으면서, 어찌하여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불러 일으킬 보이지 않는 "손해"들에 대해서는 그리도 무방비할 수 있는지를, 자기 스스로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기에 나는 그저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언젠가 때가 이르면, 나는 이제 여왕이 되어 많은 초심자와 입문자들을 기르고 돌보고 양성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겠지. 그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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