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실재를 은유한다. 재미있는 것은, 언어의 구조와 밀도에서 실재와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차이를 실제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이 신성과 교감할 때 체험하는 것들, 내가 "상위 감정"이라 부르는 것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기쁨"이 있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마음의 현상으로서의 쾌락이나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 안에 빛이 스며들고 비추어 밝히어지는 그러한 "운동"이다. 한겨울에 밤새 추운 바람에 벌벌 떨면서 집 안 침대 구석에 웅크린 채로 밤을 지새우다가, 어느 순간 아침이 되어 바람이 잦아들고 따스한 햇빛이 창문을 비치매 그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과도 유사하다. 바로 그 순간, 이전까지의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으며, 영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흔들림 없는 절대적인 평화와 고요함과 빛의 일렁임과 반짝임과 온기를 느낀다. 이러한 것을 "기쁨"이라는 단순한 언어로 부르는 것은 사실 부적절하다.
다만, 이 영적 실재로서의 기쁨에 관한 한, 영어 단어 joy는 지나치게 "직접적인"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치우쳐진 느낌이 강하며, 한국어 "기쁨"이 그보다는 좀 더 내밀한 것에 가깝다고 나는 느낀다. 물론 이건 한국인으로서의 내 주관적인 인식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반대로, "순종"에 관한 한, 한국말 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의 그 위대한 "전환"의 순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느끼며, 영어 단어 Surrender가 훨씬 더 영적 실재로서의 순종을 더 잘 담아내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위대한 신성 앞에서 진실로 항복하고 엎드리는 그 전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말 중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없는 듯하다.
이처럼, 영적 실재를 은유하는 수단이자 도구로서의 언어에도 "구조와 밀도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말을 즐겨 사용하는지, 평상시의 정신과 의식 안에서 어떠한 언어들이 흐르는지에 따라서, 그의 영과 영혼이 성장할지 정체/퇴보할지가 결정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언어는 의식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언어와 말을 바꾸는 것은 의식 구조를 전환케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하고 강력한 "의식(Ritual)"이 된다.
이것을 제일 쉽게 옮기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등의 긍정적 일상어들을 주문처럼 외고 다니라는 그런 조언이 되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조언들이 너무 평범하고 진부하기 때문에 코웃음을 치고서는, 연금술이나 카발라나 마법(magic)과 같은 비교적, 비의적 가르침 들에 대해서만 눈을 반짝인다. 그러나 어찌하랴, 나는 황금새벽회가 결국 그들의 뜻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고 또한 그들이 추구했던 비교적 가르침이 세상을 바꾸지도 자기 자신들을 바꾸지도 못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힘(권세)은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 속에 이미 깃들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진실로 이해하고 믿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내 마음과 태도와 의도일 뿐이다.
평상시에 남을 욕하고 험담하고 저질스럽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말이나 언어들을 입에 담고, 또한 그러한 어둡고 악한 생각과 의도들을 마음속에 붙잡아두고서는, 주문이나 좀 외우고 몸에 부적이나 좀 지닌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 진실로 자신을 돌보아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언어가 의식 구조를 결정하고, 의식 구조 안에 영혼이 깨어나며, 영혼이 깨어남으로 인해서 힘이 발현되는 것이다. 어두운 의식 구조에는 어두운 힘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밝은 의식 구조에는 빛의 권세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법이다.
평소에도 마음이 정결하고 차분한 자, 자기 마음의 어두움을 경계하고, 늘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며, 예의를 지키고,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려는 의도를 품고, 신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기도하고 묵상하고, 글을 읽고, 지혜의 언어들을 늘 곁에 가까이 두는 자. 그에게는 이미 빛의 권세가 함께함이니, 이는 성령께서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시니,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손에 넣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행해야 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는 이미 자명한 일이다. 다만 이것을 원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며, 알기만 할 뿐 실천하여 행하지 않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혼(Soul)은 힘이 아니다. 영혼은 에너지다.
둘은 거의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 매우 다르다. 힘은 의지(Will)에서 비롯된다. 의지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이루실 적에, 그것은 "빛이 있으라"는 그분의 의지 자체가 완전한 힘으로써 현현우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한 결과이다. 결국, 의지 자체가 힘이라는 것이다. 의지는 그저 "뇌의 작용" 따위가 아니다. 그건 물질적 몸이 전부인 줄 아는 어리석은 물질주의자들이나 하는 착각이다.
의지는 "이루는 것"이다. 의지는 창조이다. 따라서 진정한 힘은, 곧 영(Spirit)과 연결되어 있다. 영은 그 자체로 고정된 영원한 실재 같은 게 아니다. 영원하되, 언제나 운동하는 힘이다. 영원히 운동하는 힘, 영원히 창조하는 힘이다. 영이 따로 있고, 영의 "행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영 자체가 곧 운동이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곧 의지이시며, 그분의 의지 자체가 곧 전능함(힘)"인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쉽게 설명하려고 해도, 사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현상계에서는 이것과 정반대로 "분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음 자체"와, "마음의 작동(예: 생각, 감정 등)"이 별도라고 여긴다. 마음은 일종의 그릇이자 틀로써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그 마음이라는 바탕에서 온갖 생각, 감정 등의 파도들이 일어나며,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과 마음의 작동이 별개라고 느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마음 자체는 없다. 그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작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현상이며, 현상을 지배하는 "고정불변한 실체로서의 자아"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공부의 첫걸음이다. "그 자체 실체"는 하위 차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 고정불변한 실재"는 오직 상위 차원에만 존재한다.
같은 예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신 자체"와, "정신의 움직임(예: 사고, 사유, 판단... 등)"이 서로 다르다고 여긴다. 나의 정신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불변의 실체이고, 그 정신 안에서 나의 가치관이나 사고, 사유, 철학, 관념, 인식, 분별...... 등의 정신의 "작용"들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신 자체와 분리된 정신의 작용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에고의 속임수다. 에고적 작용을 정신이라고 착각할 뿐. 진정한 정신(Spirit)은 곧 영이다. 영은 그 자체가 곧 운동성이다. 영이 따로 있고, 영의 작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천상의 영 그 자체와, 3차원 시공간 속에서 펼쳐진 "나"의 안에 투영된 영의 에너지로서의 현상은 다른 것이기는 한데, 아무튼 개념적 이해의 차원에선 그러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와 같은 말씀들을 남기셨을 때, 절대 다수의 교인들은 이 말을 예수님이라는 특정한 "육적인 인격"으로만 한정해서 이해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만약 예수님이라는 특정한 육적인 인격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면, 그분께서 지상에 계셨던 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그 짧은 시기에 그분을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은 아무리 많아야 수만 명을 넘지 않을진대, 그 시대를 제외한 나머지 미래 세대들은 그분의 육적인 인격을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가? 이 자체가 오류이다. 그 말씀은 곧 그분의 신성이 의지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부활 이후에 그분은 "영화로운 몸"으로써 완전한 인격으로, 신성으로, 영으로 계시며, 우리가 영접하는 그분은 "영으로 계신 주(主)"이시다. 결국 핵심은, "영은 스스로 움직이며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다만 대개의 경우, "성장이 덜 된" 인격은 영의 운동성과 제대로 된 조화, 일치,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마치 시스템은 매우 낡고 불완전한데, 그 안에 최신식 프로그램을 다운로드받고 활성화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매우 큰 잡음과 오류들을 일으킬 것이며, 이에 높고 완전한 영은 낮고 불완전한 육의 제한과 한계로 인하여 살아 평생에 대부분 그 진정한 운동성, 힘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로 사그라들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영접하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죄 없는 완전한 인격"으로써 그분의 신성(말씀)이 스스로 의지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실 적에, 아무런 제한도 오류도 없었다, 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앙의 차원이며,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다만 설명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영은 그 자체로 운동이며, 영의 운동이 인격을 통하여 드러날 적에, "창조의 힘"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부활 이전의 영은 "죄에 구속된 상태"로써 어두움에 지배당하고, 내 안의 신성을 영접함으로써 "거듭난" 영은 곧 하나님의 현현의 통로가 되어 빛의 통치와 계시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정신, 의지, 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이때, "정렬"이 이루어졌을 때, 영은 곧 "힘(지배력)"을 발휘한다.
이 모든 것을 매우 쉽게 설명하면 :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이다. "말하는 대로 된다"는 류의 말들을 우리는 너무 익숙하고 진부하게 여기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지를, 온갖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지식의 홍수 속에서 처절하게 싸움을 한 끝에 "평범한 일상 가운데 계시는 가장 위대한 힘"을 영접하게 된다. 이것이 "돌아온 탕아"의 은유가 가리키는 영적 실재이다.
영은 힘이며, 진정한 힘은 오직 의지로 인해서만 발현되며, 의지는 곧 정신에 의해서 운동하며, 정신은 곧 영 그 자체로 인한 것이니, 결국 힘은 영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이 "거의" 내지는 경우에 따라 "전혀" 깨어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그 영을 담는 "성전"으로서의 자아와 마음과 육신은 매우 심각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이 오류와 차이는 심각한 불안정성을 만든 끝에 언젠가 반드시 터지게 될 시한폭탄이 될 것이다.
반면, 영혼은 에너지로서의 몸이다. 에너지는 힘이 아니다. 에너지는 다만 "실재"를 만들어내는 질료이다. 예를 들어보자 : 전기 에너지가 전구라는 물체에 흐를 적에, "빛"이라는 실재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전기 에너지 그 자체는 스스로 움직이지도 운동하지도 않는다. 다만 설계(의도)된 대로 "흐를" 뿐이다. 이때, 바로 이 설계가 영(의 운동성)이며, 영을 통하여 영혼이라는 에너지가 흐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영이 영혼을 통치(다스림)한다"거나, "영혼을 통하여 영이 모습을 드러낸다"와 같이 표현한다. 물론 둘 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달리 은유할 적당한 말이 없다.
영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영혼이라는 실재가 더럽고 불완전하고 막히고 닫혀 있다면, 애초에 영은 자유로이 운동할 수가 없다. 아니, 온전한 영혼 안에서만 참된 영이 깨어나는 법이며, 온전치 않은 영혼 안에서는 영은 깨어나지 않는다. "왕을 영접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왕께서 행차하시는 법"이다.
이 맥락에서,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보다도 더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말할 적에, 이는 영혼으로 인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과의 "연결" 자체는 영으로 인한 것이지만(통로), 그 영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영혼이라는 실재가 "흐르기에", 우리가 초월과 영원으로 계신 완전하신 분을 불완전한 물질적 몸 안에 있는 채로 체험하고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영혼이 없다면 영은 그저 관념으로 남을 뿐이다.
영의 운동성이 영혼을 통하여 자유롭고 온전하게 흐를 적에, 마침내 영은 3차원 시공간 안에서 "실제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 나는 이 맥락에서, 물론 개인적인 신앙이지만, 죽은 자를 살리거나, 병자를 치유하거나, 혹은 물질적 법칙을 넘어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능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그만큼 영이 완전해야 하며, 영혼이 온전해야 하며, 또한 영과 영혼을 현현케 하는 의식과 정신과 인격 모두가 완전해야 한다. 그러한 경지까지 도달하신 분은 인류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 "통치 구조"를 온전히 이해하고 또한 어느 정도 연 사람은, 더 이상 어두움의 권세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안에 이미 영이 계심을 알지 못한다. 그 영이 깨어나는 순간, "절대자"로서의 신과 직접 연결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절대자의 권세 앞에서, 그 어떤 어두움조차도 단 한 순간도 그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실재이다. 믿음이 온전할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하고 힘 센 어두움의 실체들조차도 감히 함부로 그를 흔들지 못한다.
그리고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가장 순수하고 온전한 에너지"인 영혼 자체가 흐르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다수 사람들은 어두움을 두려워한다.
물론 그들의 두려움을 나는 이해한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은 마음과 자아와 무의식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며, 아무리 경지가 높다 하더라도 무서운 것은 여전히 무섭다. "마음의 현상"으로서의 생각과 감정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증언하니, 영이 하나님과 진실로 하나될 때, 영혼이 하나님의 빛에 온전히 물들어갈 적에, 나의 존재 전체가 "전능하신 분"께 올바르게 정렬되어 흐를 적에, 나는 어두움 따위를 두려워해본 역사가 없다. 요즈음,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까닭에 또 다시 주술과 예언과 사이비가 설쳐대는 것을 본다. 빛을 영접하지 않고 어두움을 우상숭배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이 감히 함부로 그들이 진리를 다 알고 있는 양 사람들을 기만하고 현혹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볼 적에 아직까지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렇게 홀로 글을 쓰면서 증언하는 일뿐이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 가면 그곳에 귀신들의 잔치가 벌어지며, 거기서 어떤 어두운 것이 묻어올지 알 수 없으니 소금을 뿌리라느니, 팥을 뿌리라느니 그러한 말들을 한다. 물론 나는 그러한 오컬트적 방편들을 이해하고 또한 그 자체가 효력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효력이 10%라면, 내 안의 영혼은 100%의 에너지이며, 나아가 나의 영은 1000%의 지배력이고, 그 영을 통하여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무한대이시다. 그런데 감히 그 "빛의 권세" 앞에서 고작해야 20~30%를 넘지 않는 어두움의 실체들이 함부로 설쳐댈 일이겠는가? 나는 장례식장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물론 아무때나 내 마음대로 갈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때에만 그곳에 가서 나의 일을 한다. 그때에, 그분의 명령에 따라서 그 자리에서 그분의 뜻을 행할 적에, 나는 어두움 따위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니, 이는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고 그 어두움에 고통받는 영혼과 생명들이 평화를 얻는 "그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자리에 내가 동참할 수 있음이 내게 너무나 큰 영광이고 기쁨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귀신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의 어두움 가운데에서 그분께서 그 시공간에 임재하시기 위한 통로로써 나를 내어드리며, 또한 그 어두움을 나를 통하여 정화하시도록 기도한다. 또한 나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서 사람 안의 어두움들과 특정한 시공간 안의 어두움들을 나를 통하여 "정화"하도록 행했던 경험도 갖고 있으며, 그리할 적에 내가 지금까지 그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나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빛의 지배력"은 나날이 강해져만 간다. 사람을 살릴 적에, 영혼을 구원할 적에, 나는 어두움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증언하니 : 이것은 내게만 특별히 허락하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영과 영혼은 모든 사람 안에 다 있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원하고 구하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능히 다 나와 같이, 아니 나보다도 더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어주시리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란지를 잘 안다. 그런 나조차도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고 영접함에 따라 이러한 은밀한 능력과 힘과 지혜들을 허락받았다. 하물며 성실하고 진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분께서 얼마나 더 큰 능력과 힘과 지혜들을 내리시겠는가.
영은 지배력이다.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다. "나를 통하여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힘이시다. 내 힘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흐르는 힘이다. 이 차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나를 통하여 온전히 그분께서 흐르실 적에, 그 빛은 어두움을 능히 압도하며, 어두움 따위를 전혀 두려워할 일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어두움을 연민하게 될 것이며, 어두움을 빛으로 비추어 밝히고자 하는 확신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전구를 통하여 전기가 흐를 적에 빛이 밝히어지며, 그 순간에 전구가 어두움을 두려워할 일이겠는가. 오히려 전구는 담대함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빛으로 비추어 밝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그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이어트를 하는데도 3개월, 100일은 해야 한다고 하거늘, 하물며 영혼을 정화하고 영을 일깨우는 일이야 오죽하겠는가. 그것은 수준이나 단계나 성취와 상관없이 평생을 이어가야 하는 일이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다. 무엇을 가졌으면 무엇을 잃어버리게 됨이고, 높아지면 낮아지고, 태어나면 늙으며, 소유에는 부재가 따른다. 나는 다만 물질과 세속의 것들을 허락받지 않았고, 또한 내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그분께서는 내게 넘치도록 영혼과 영의 축복과 은혜들을 부어주셨다.
내가 이것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함은 내 자신이 높아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장차 평생에 걸쳐서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고, 영혼과 생명들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하여 그들이 빛 한가운데로 인도받으며, 마침내 그분 안에서 새로이 거듭나는 것들이 내게 유일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바라고 원하면 이루어진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므로.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바라지 않고, 아무도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밑져야 본전인데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다만 나는 더 많은 영혼과 생명들을 살리고 빛으로 인도하게 될 날을 늘 기다리고 준비하고 열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