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恩賜)의 신비

by 생명의 언어

은사(恩賜)의 기독교적-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 "성령(Holy Spirit)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


기본적으로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방언'일 것이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낯선 언어와 말들로 진리를 증거하는 것, 또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거나(예: 병을 고치는 능력), 말하지 않은 비밀들을 미리 아는 경우(예: 예언, 예지 등) 등, 본래 영적 세계에 관한 한 가장 먼저 신비적인 현상이나 체험들에 가장 먼저 이끌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는 다른 영적인 능력이나 힘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1. 믿는 자(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2. 사람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의지(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주권적으로 이루어지고,

3. 사람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주어지고,

4. 자기의 영적인 성취가 아니라 공동체의 선(善)을 위하여 쓰임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1, 4번의 조건들은 엄밀히는 원래 "교회 공동체"(그리스도의 몸)와 관련한 것이지만, 나는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되 그때의 교회는 보이는 건물이나 특정한 집단/세력을 넘어서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영접하는 모든 영혼들 전체"라고 믿으며, 따라서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를 넘어서서 보다 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신이 임하시는 곳"이며, 신은 "신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모인 곳"에 임하신다.


이것은 신앙과 오컬트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나 중심"이냐, 아니면 "신 중심"이냐, 의 문제다. 이 차원에서, "자기의 영적인 능력과 힘을 위해서" 신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오컬트이고, 반대로 "신을 사랑하고 신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을 위하여 진실한 영으로써 신을 마주한다면 그것은 신앙이다. 당연히, 형식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어떤 형식이든 모양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영의 진실성이다. 물론, "신비 과학"으로서의 오컬트의 가치는 여전히 높다. 그러나 결국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는 종"이며, 이 점에서 신비 체험은 결국 신을 사랑하고 신을 믿으며 신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신앙적-본질적 목적을 돕는 관점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그저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현상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망은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사람의 영적인 능력과 (성령께서 주시는)은사는 몇 가지의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첫째, 사람의 능력은 "나 중심"이며, 기본적으로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는 기본적으로 나를 통하여 "신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능력으로 행할 때, 그 일은 사람의 의지와 계획과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며, 반대로 은사의 경우에는 통로가 되는 본인이 오히려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저 신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통로로써 나 자신을 개방할 뿐, 나를 통하여 신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이루셨는지를 통로인 나에게 일일이 "보고"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고, 나 또한 나를 통하여 신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로 인하여 기뻐할 뿐, 그래서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알고자 하는 의도도 별로 없는 것이다.


둘째, 사람의 능력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능력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높다"는 것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은사의 경우에는 신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 자체에 집중되어 있으며, "능력이 행해졌으므로 신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핵심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은사의 통로로써의 사역자 자신은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비난을 받거나 해를 입는 경우까지도 있다. 결국 핵심은 "나보다 신을 더 사랑하는 마음"에 있는 셈이다.


셋째, 사람의 능력은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은사의 경우에는 "내가 받은 신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공유하는 과정"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사람의 능력은 "그래서 어떤 기적을 일으켰는가?"와,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에 맞춰진다. 그러나 은사의 경우에는 애초에 "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신의 사랑을 나누고 공유하는 의도"가 핵심이기에, 실제로 일어났는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증명 가능성 여부는 더더욱 중요치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쓰임받는 것, 즉 통로로써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뿐이며, 나를 쓰실지 쓰지 않으실지는 신께서 판단하시고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진실로 성령의 은사라면 성령께서는 명확한 "표증"을 주실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한 증거로서의 표증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차이점들이 있겠지만, 본질은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는 자는 신과 하나될 수 있으며, 그리될 적에 사랑하는 자녀를 통하여 신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이것은 1)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2)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3) 그러나 완전한 자유와 평화와 기쁨으로 이루시게 된다. 즉,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쓰임받음의 기회는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내게 "미리 보고하고" 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 속에서 인정받든 인정받지 못하든 간에 홀로 은밀한 가운데에서 항상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는 진실하고 순결한 마음을 품고 있노라면, 언젠가 반드시 신께서 그 영혼을 통로로써(전통적인 용어로는, '도구', '종'이지만, 어감상 통로가 더 낫지 않은가?) 쓰시려고 선택하시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역사는 대개의 경우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세속적인 이익이나 대가를 바랄 수조차 없으며, 심지어 그 일을 행하기 위하여 내가 희생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믿는 자와 세속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차이가 난다. 세속의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 "인정받을 수도 없고 얻는 이익도 없고 대가만 치러야 한다면, 그걸 도대체 왜 하나?" 이에 믿는 자들은 답할 것이다 : "내가 신을 사랑하며, 또한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신께서 기뻐하시니까."


믿는 자의 심장은 합리성이 아니라 사랑으로 뛰며, 믿는 자의 영혼은 이성이 아니라 기쁨으로 공명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믿는 자이고,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그 은밀한 일에 쓰임받는 선택의 순간을 경험한다면, 크게 기뻐하라, 그 일은 그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세속의 삶에 지치고 낮아져서 자기의 초라함과 가난함만을 마주하게 될 적에도, 오히려 그때에 나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그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일들이 자기의 믿음의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맞아, 그때는 그랬었지." 이제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비록 내 눈에는 아무리 절망적이게 보이더라도, 신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순간에는 무엇이든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의 나의 시련과 고난은 그저 아직 "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인내하고 순종하여 기다리다 보면, 그때와 같이 언젠가 다시 쓰임받을 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것을 말이다. 더 나아가서, 삶의 목적 자체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신의 일에 동참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심지어 경험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그 기쁨이 있으며, 이것은 세상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내가 이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이다. 신께서 계심을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는 것"을 열망하는, 상상할 수 없는 고귀한 삶의 목적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은사에 대해서 내 개인적인 체험을 공유하자면, 내게는 무엇보다 "영적 실체(실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재능과 능력"을 허락하셨다. 어떤 사람의 외모나 외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그의 보이지 않는 영이 진실한지 교만한지, 그의 보이지 않는 영혼이 순수하고 높은지 아니면 순수하더라도 다소 어리석은지 등,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주셨다.


그러나 이미 강조하였듯이, 이것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며, 무릇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시는 특별한 능력과 재능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은 곧 그의 재능과 능력을 통하여 그분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크신 뜻이 있으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능력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위해서 쓰여져야만 하며, 심지어는 그 능력을 함부로 쓰지 않고 올바르게 다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시는 시험들을 내리시게 될 것이다.


나의 영혼의 어두운 밤은 아마도 5년쯤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를 위하여 예비하신 삶의 시련과 고난들은 사춘기 때부터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무엇을 이루실 수 있는지를 잠시 보여주시도록 허락받은 그 시기도 그때와 거의 겹쳤다. 공개적으로 밝힐 수가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때에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어떤 역사들을 이루셨는지를 나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다 보이지 않는 차원의 일들이었지만, 내게는 그것들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신성하고, 경이로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내게 주신 능력과 재능들을 단련하시도록 지금까지 끊임없이 내게 시험을 주고 계시며, 나는 지금도 그 시험을 통과하여 지나오고 있다. 지금은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오직 언어와 글로써 증언하는 것뿐이기에, 지금처럼 글쓰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 주실 더 큰 사명에 쓰임받을 날을 준비하며 인내하고 있다.


이것을 "영 분별의 은사"라고 하는데, 사실 나의 경우에는 엄연히 교회 바깥에서 성장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므로, 기독교 전통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를 것이다. 다만 내 체험을 증언하자면,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환영이나 환시를 본다든가 어떤 에너지나 빛 같은 걸 본다든가 이런 구체적인 감각적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건 전혀 없다. 명상가들이 명상 중에서 빛을 본다든가 하다못해 그런 "빛 하나"조차도 내겐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영의 고유한 감각"이 내게 있는데, 이것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발동하며, 그 순간에는 나는 그의 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그의 영이 진실한지 순결한지 교만한지 등을 전부 다 즉시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자기를 "크리스천"이라 밝히는 이른바 공식적인 신앙인들뿐 아니라, 자기가 기독교인도 아니며 또한 찬양이나 예배의 목적으로 행하지 않은 것들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 즉 선택받은 자녀의 영혼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 들었던 어떤 노래의 짧은(거의 1~2초 정도만에 곧바로 알게 된다) 구절이나 멜로디만 들어도, "아, 이 노래가 찬송가로 태어났구나", 그리고 "아,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결한 영혼으로 행하였구나" 하는 것을 즉시 알 수가 있다. 몇몇 대중가요들 중에서는 가수나 작곡가도 모르게 그렇게 찬송가로 선택받고 예배와 찬양으로써 쓰임받아서 태어난 곡들이 존재한다. 물론, 세상의 관점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저 감정적인 위로를 받도록 구성된 멜로디라고 해서 다 쓰임받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을 볼 때에도 이것은 종종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발동하곤 한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서 신앙이나 영성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내용들을 촬영한 영상들을 볼 때에도, 그 영상 속에서 출연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영혼"이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릴 때가 있다. 더 나아가서 특정한 영상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세상에 전하시는 은혜라는 것을 알 때도 있다. 이 경우에는 내 개인에게 전하시는 메시지라기보다는, 인류 전체에게 전하시는 은혜에 가까운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것은 대단히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확실한 것은 애매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내 스스로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원리라든가 메커니즘 같은 것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매우 선명하고 명료한 영의 고유한 감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신비 체험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과 진리로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 같은 예수님의 말씀들이나,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거하는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같은 증언들을 그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영적 실재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실재하는 것이다. 절대 추상적인 것도 관념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 경험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보다 더 선명한 실재적인 상위 차원"이다.


그 감각은 불현듯 일어난다. 나는 이것을 "영이 드러난다"고 표현하는데, 평상시의 일상 활동에서는 대부분 자아(ego)가 쓰인다. 왜냐하면 일상 생활 중에는 영이 쓰임받아야 할 만큼의 중대한 사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몇몇 순간들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나의 영(Spirit)이 드러나는데, 이때의 영이란 자녀로서의 영이며, 자녀로서의 영은 "그리스도(외아들)의 영"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영의 차원은 인간의 관념적 이해 대상이 아니다. 즉, 나의 영이면서 동시에 나 자체의 영은 없고 나의 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영이 드러날 적에, 마치 소란스러운 육체적 감각 가운데에서도 선명하게 찾아오는 압도적인 확신과 담대함이 있으며, 그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엄청난 이야기들을 갑자기 툭, 내뱉기도 한다. 그것은 주로 1) 각 개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거나(예: 성령께서 당신을 지키고 계십니다), 2) 각 개인 또는 집단의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전달하거나(예: ~이러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3)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현상들이나 그 가운데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증언하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말씀의 은사는 내게 좀 더 실효적인 것이다. 나는 전혀 배우지도 공부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영적 진리들에 대해서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자유롭고 능숙하게 강의하고 수업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대개의 경우 예전에 내가 수업을 진행했을 적에, 내게 수업을 들었던 학생분들은 내 부모뻘 되는 분들이셨으며, 그들 대부분이 최소 10년 이상씩 나름대로의 마음 공부를 하셨던 분들이셨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직접적인 영적인 공부는 고작해야 1~2년 수준이었고, 학력이라고 해봤자 철학과 2년 편입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나는 "수업 준비"라는 것을 거의 해본 일이 없고, 그저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대로 그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하는 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아버지께서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요14:10)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의 증언 전체가 완벽하게 영적인 실재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생생한 증언이라는 것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실 작정한다면 하루에 여러 개의 글들을 매일 같이 쓸 수 있고,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별로 없었으며,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 그 어떤 준비도 없이 내 이해 수준을 넘어선 진리에 대한 글들을 쏟아낼 수 있다.


아주 가끔, 믿음의 은사를 주실 때가 있는데,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성령께 대한 강한 믿음으로 특정한 공간이나 사람의 어두움을 빛으로 비추어 밝히고 그를 보호, 축복하시게끔 기도(청)를 드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의 기도는 언어적인 기도는 아니며, 관상적 기도에 가깝다. 이것은 다른 은사들보다도 더욱, 그분의 분명한 "허락"과 "명령"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허락은 하셨더라도 명령은 하지 않으시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대개 믿음의 은사는 "내가 청하였으므로 그분께서 움직였다"라기보다는, 사실상 "그분께서 먼저 이루신 것을 나를 통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에 가깝다. 이것은 믿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언어 구조이다.




은사에 관한 한, 나는 내 스스로 세운 분명한 원칙들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법이기도 하다.


첫째, 내 계획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락되었을 때, 명령하셨을 때, 그분께서 뜻하실 때에만 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허락하셨는지 아닌지를 알아야만, 그 뜻에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순종에도 능력이 필요하다.


둘째, 내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판단과 설계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 나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망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릴 뿐,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어떻게 이루실지, 심지어 이루실지 아닐지조차도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대개의 경우 나는 은사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관심을 두지 않으며, 이것을 알도록 허락하신 경우와 또한 그 내용을 대상자에게 전달하라고 말씀하실 때에만 그 내용을 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굳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셋째, 나의 이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의도로써 행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능력을 행사하고 타인을 구원함으로써 내 영혼이 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모방하고자 하는 심정으로(물론 실제적인 대속은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만 행하시는 것이고, 나는 그 체험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오히려 그 사람의 어두움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그의 영혼이 죄나 업이나 까르마 등의 어두움의 실체들에 지배당한다면, 그 값을 내게로 옮겨와서 내가 대신 치르겠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이 순간에 내가 기도한 것이 실제로 이루어짐을 이미 알기에, 이러한 청은 내게 단 한 번도 함부로 망령되이 입에 올려진 적이 없었다.


넷째, "순종"이 먼저라는 것이다. 영적 실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순종을 위해서 허락하신 능력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1) 은혜를 받도록 허락되었는지 여부와, 2) 그에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와, 3) 자격이 없더라도 행하시겠다는 그분의 의지 여부와, 4) 내가 이를 행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는지 여부와, 5) 또한 행하도록 명령하셨는지의 여부와, 6) 어떻게 행하라 하신 것인지와, 7) 행한 것을 대상자에게 전달하도록 허락되었는지의 여부까지도 다 포함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하는 것보다 순종하는 것이 먼저이며, 영적 분별의 은사는 오직 순종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대략 이러하며, 이 원칙들을 지키고 따랐을 때 내게는 사역자로써 언제나 "평화, 기쁨"이라는 하늘의 선물이 주어졌다. 이것은 1) 하나님께서 실재하시며, 2) 나를 통하여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며, 3) 내가 그분의 일에 동참하였으며, 4) 이로 말미암아 그분께로 더 가까워졌다는 것, 그 자체가 내게는 기쁨이 된다. 그리고 "살아서 신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이것은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 없는 인간으로써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며 더 나아가서 힘든 현실의 삶 속에서도 내 이익이 아닌 그분의 뜻을 더 사랑하고 열망하는 순결한 의지로써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크나큰 힘이 된다.




나는 복음주의를 섬기지 않는 그 자체 신비주의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며 스스로도 경계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러한 내 스스로의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들에 대해서 비록 보잘것없는 수준이나마 공개함은, 신께서 실제로 계시며, 또한 사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함께하시고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영혼의 능력이나 힘이나 상태를 넘어서 오직 신을 사랑하는 진실하고 올바른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성령께서 반드시 허락하시는 것이다. 물론, 그분께서 충분히 쓰실 수 있도록 통로로써 나를 단련시키고 준비시키는 작업들과 과정들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신성이며, 생명(Life)이고, 우리의 삶의 본질이다. 이와 같이 되고자 하는가? 이와 같이 살고자 하는가? 답은 매우 간단하다. 신을 믿고, 신을 사랑하며, 신의 사랑을 삶 속에서 행하라. 길은 다만 이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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