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시간과 하늘의 시간은 다르다. 지상의 시간은 물질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하늘의 시간은 순수하고 완전한 영(Spirit)으로 인한다. 양자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글쓰기에 몰입하거나, 영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지금은 활동하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 한창 영성에 관한 강의나 수업이나 상담들을 할 적에는, 그 상태 그대로 사흘 밤낮이라도 샐 수 있겠다, 싶었고 그 느낌은 지금도 여전하다. 신앙과 영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고 교감하는 것은 내게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내게 영적인 유일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삶, 에고(ego)적인 세속적 삶이라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다. 당장 눈앞에 당면한 현실의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때에는 영이 아닌 자아가 쓰임을 받는다(세속적 삶의 수준에서는 영이 드러나야 할 일 자체가 거의 없다 - 세속의 삶의 진동수는 낮고 불안정하고 열등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자아가 움직일 때, 나의 의식은 "지상의 시간"에 구속받는다. 이것을 어떤 명확한 지식이나 개념 등으로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다르다. 지상의 시간은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정량적이며, 선형적이고 일방향적이다. 시공간이라는 "객관적"인 세계의 설정값 위에 "나(의 의식)"라는 "보다 열등한" 존재가 좌표로써 놓이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만든 철학적-인식론적 사유라고 하는 망상적 실체이다.
이 점에서, "대개 철학은 무의미한 헛소리"라고 했던 오쇼의 말에 내가 상당수 공감한다. 오쇼는 철학자들을 비난한 게 아니다. 다만 그들이 실재를 보지 못했으면서 무의식적인 관념의 틀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는 줄도 모른 채로 그것이 진리인 양 무의미한 관념적 유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번 수능에서 출제된 지문에 칸트가 포함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분이 묘했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간다.
자아는 지상의 시간만을 산다. 자아로는 하늘의 시간, 천상의 시간, 영의 시간에 가 닿을 수가 없다.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부(聖父),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 언급할 때, 거의 항상 사용하는 은유적 표현들이 있다.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Ancient One)", 그리고 "영원과 초월로 계신 분"이라는 표현이다. 전자의 경우 구약 시대의 위대했던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언급할 적에 종종 등장했던 유서 깊은 은유이며, 후자의 경우 "영원"이라는 것이 바로 "하늘의 시간(영의 시간)"을 의미한다. 영원과 초월, 이라고 하나로 묶은 까닭은, 대개 사람들이 영원성이나 완전성 등을 지상의 세속적인 시공간적 개념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초월이란 문자 그대로 보이는 차원의 현상계를 완전히 넘어선 것, 즉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한다.
대개, 기도나 묵상, 명상이나 참선 등, 종교적, 영적 수행에 깊이 몰입할 때, 의식 안에서 자아는 낮아지고 영이 드러나고 높아지며, 그때에 그의 의식은 하늘의 시간과 정렬되고 연결된다. 의식은 본래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의식은 네모반듯한 어떤 직사각형의 물체 같은 게 아니다. 의식은 형체가 없다. 의식은 에너지다. 에너지라 함은, 흐르는 것, 순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는 개념은 고정된 단일한 실체라는 망상적 관념이므로, 의식 자체와 맞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Who I am)?"에 관한 한, 이것은 고정된 단일한 실체를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드러내는 현현자로서의 순수한 의식의 근원이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에 대해서 질문 자체를 바꿀 것을 제안한다 :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누가 나인가?", 즉 내면세계에서 존재하는 무수한 층위들 가운데에서 무엇이 "최종적인 근원으로서의 나인가?"를 묻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 "나는 영이다(I am Spirit)."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자아(ego)로서의 나는 영보다 압도적으로 낮은 차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영"이라는 말은 애초에 맞지 않는다. "영이 다스리는 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나>라는 존재의 수직선의 최종적인 주권은 영에게 있으며, 그 영이 신과 하나될 적에, 영이라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때에 나의 존재는 신의 세 본성이 하나된 바, "영원성, 완전성, 창조성"의 삼위일체의 신적 본성과 연결되며,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거하는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신앙은 그저 관념적 믿음이 아니다. 신앙은 나의 보이는 몸(육)과 보이지 않는 몸(영)에 관한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고 실존적인 접근 방식이다. 마치 운동과 식단 등을 통하여 정교하게 육체를 단련하듯이, 신앙과 믿음과 예배 등을 통하여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이지 않는 몸을 관리하고 정화하고 훈련시키는 실존적인 과정인 것이다.
영은 나의 실체이자 중심이다. 나, 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영으로 말미암는다. 그리고 또한 나, 라는 존재가 존재이게끔 하는 중심 역시도 영으로 인한 것이다. 말이 어렵지만, 결국 절대적이고 유일한 중심이자 실체가 바로 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영은 나를 "넘어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나의 "영"을 대할 적에는 경칭과 경어를 써야만 한다. 나의 "영께서 계시는 것"이다. 이때 영 자체는 개체적인 것 안에 드러나 있기는 해도, 애초에 개체성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영은 본래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씨앗)이기 때문이다. 영을 이해하려고 들면 안 된다. 이는 마치 3차원 시공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5차원, 6차원, 7차원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이 가능하다.
주(主)는 영이시며, 따라서 나의 영을 통해서만 현현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곧 주께서 지상의 시간대로 임하지 않으시며 오직 천상의 시간대로 임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께서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죽음 이후까지도 전부 다 이미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이며, 또한 그분께서 내게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은 지상의 시간표대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 안에서 자아가 낮아지고 영이 드러나며 높아질 적에, 그러니까 하늘의 시간과 나의 의식이 정렬될 적에 오신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의식의 정렬"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간에서 이루어진 것은 지상의 시간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시차가 있다. 그 시차가 생각보다 굉장히 길고도 고통스러운 인내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이 갖는 상징성이다.
지상의 시간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고 열등하기에, 하나님의 영을 담아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스스로 모습을 낮추사" 우리 안에 내려오셔서 모습을 드러내신다고 한들, 애당초 3차원 시공간의 차원은 하나님의 영을 감당하기에 절대 충분한 그릇이 아니다. 이는 자아(ego)와 마음(mind)과 육신(body)이라는 우리의 보이는 몸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분께서 우리의 곁으로 가까이 내려오신다고 한들, 그래도 그분을 감당할 만큼의 최소한의 준비는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몸, 즉, 영(Spirit)과 영혼(Soul)과 "순수의식" 뿐이다. 영적 실재와 교감할 적에 영과 영혼 안에서 자유로이 흐르는 그 순수한 의식, 자각, 깨어 있음, 교감의 순간 말이다.
때가 되면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의 정화와 확장과 조율과 완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성령께서 이루시는 작업이다. 주권자는 언제나 성령이시며, 이 정화 작업은 "매우 섬세하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대개 깨어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자, 그의 정신과 의식이 억압되어 있는 자, 에너지의 밀도나 수준이 매우 낮은 자에게,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버리게 된다면 그 그릇은 정화는커녕 깨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까르마", 그러니까 어두운 에너지가 실존적으로 나의 존재를 장악하고 있던 그 어두움의 정화가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불리는 시험의 본질이다. 지상의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외면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결코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고 기뻐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가 사명과 사역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면서도 불구하고, 이토록 잔인하리만치 출정을 허락지 않으시며 오히려 나를 은밀한 가운데에 거두어들이셔서 기다리게 하시는데는 다 그만한 뜻이 있으며, 그 뜻의 본질은 "어두움을 완전히 이기시는 승리"이시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부활하실 때, 나는 나의 오랜 죄와 업과 까르마를 완전히 "졸업"하게 될 것이며, 그분의 승리를 통하여 마침내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오래 전 이루어졌던 것들이 보이는 나의 삶 속에서도 실현되게 될 것이다.
보이는 역사는 하루아침에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보이는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를 않으셨다. 그리할진대, 이 나의 외적인 삶 하나를 바꾸시는데에는 가볍게 손짓 한번이면 하루 아침에 내가 완전히 바뀔 수 있음을 이미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사실은, 보이는 삶을 바꾸기는 쉽되, 보이지 않는 나의 영과 영혼과 의식과 내면 등을 정렬시키고 조율하고 정화하고 회복하는 등의 일들은 매우 섬세하게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걸쳐서 이루어져야 하는 영적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 시험의 나날들이 영원히 지나가지 않을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것, 이미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거기에 끝은 있다. 그 끝이 마침내 다가올 적에,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먼저 보이지 않는 것이 이루어져야만, 보이는 것도 이루어질 수 있다.
보이는 것을 바꾸는데는 하루아침이면 충분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바꾸는데는 수 년,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사, 비록 내 자아의 욕심과 욕망을 들어주지 않으시더라도 나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영원히 바꾸시고자 하시니,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자녀들의 어두움을 영원한 빛으로 비추어 밝히시려는 "사랑의 의도"이심을,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어야만 한다.
하늘의 시간과 정렬하라. 모든 열쇠는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