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불안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다. 이는 현실에서 일어난 불안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머지않아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러한 불안이 사람에게 더욱 큰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일어난 것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이 본래 더 두려운 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 안에 거하면 불안함이 없다, 불안한 것은 신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옳을 뿐, 자비롭지는 못하다. 신 안에 거하는 법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은 어찌해야 하는가? 신 안에 거하는 법을 가르치더라도 이를 이루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은 어찌해야 하는가. 선천적으로 영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들만이 신 안에 거함으로써 평화를 얻되, 선천적 조건을 타고나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신에게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인종차별주의"라고 나는 확신한다. 백인이 흑인보고 미개하다고 하는 것이나, 영적으로 타고난 자가 영적으로 타고나지 못한 자에게 비판하고 심판하려 드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 다른가.
오늘날 도처에 정보가 넘쳐흐르고 있다. 유튜브만 보아도, 신의 뜻을 말하는 자들과 진리를 말하는 자들이 한 트럭이고 넘쳐난다. 이에 나는 단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말이 그럴듯한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를 보지 마라. 오직 그의 말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 하나만을 보라. 아무리 옳은 진리를 말한다고 한들 이로 말미암아 심판하고 고통을 주고 면박을 준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서툴고 모자라다고 한들 그가 사랑을 품고, 사랑을 말하며, 사랑으로 인하여 말하고, 또한 사랑을 이루고자 할 적에, 그것은 이미 진리이다.
사람은 옳을 수 없다. 절대적인 의로움은 오직 완전한 존재로 인하여 가능하되, 사람은 그 존재와 본성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옳음이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것, 고요한 것을 말하며, 그것은 곧 영원한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영원한 것은 완전한 것으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의로움, 즉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신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의(義)의 분별이 허락되지 않았다.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사랑의 분별"이다. 그에게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사랑아 있더라도 그 사랑이 진실하고 순결한가, 이기적이고 교만한가. 그것만이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다. 그 본질상, 의로움은 자기를 높임이고 사랑은 자기를 낮춤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사랑할 때, 사람은 그 어떤 이익도 대가도 얻지 못하는 그 어리석은 사랑 하나로 인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기를 자처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는 마땅히 나에게로 오라, 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니 "마땅히 내가 너의 곁으로 가겠다", 가 참된 사랑이다.
그리하여 성육신은 신의 성품과 본성을 우리에게 열어보인다. "완전한 사랑", 신은 권좌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는 마땅히 나에게로 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믿는 자들이 다 아는 그대로, 그분은 외아들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마땅히 너희의 곁으로 가겠다"고 하셨고, 천상의 권좌를 비우시고 종의 형상을 가지사 우리 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품"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신의 성품을 사랑하여 닮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다.
거듭 말하지만, "신은 상태를 보지 않는다, 신은 오직 의지만을 보신다."
참된 의지는 소망이다. 소망은 바라는 것이다. 비록 내 마음이 악(惡)하더라도, 그 가운데에서 내가 선(善)을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 그것이 의지이다.
옳음은 교만이고, 따라서 자기를 높이며, 그러나 스스로 완전하지 않기에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강제로 낮추려고 억압한다. 그리고 타자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배타성이며, 이는 곧 진리에 대한 독점으로 나타난다. "나만이 진리이고 나 아닌 다른 자는 다 가짜"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이 진리는 곧 지식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끊임없이 "사실(fact)이냐, 아니냐?"를 묻고, "진짜냐, 가짜냐?"를 묻는다.
나는 묻고 싶다. "하나님을 눈 앞에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믿겠나이다", 빌립의 심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스스로에게 돌이켜보라, 그 순간, 예수님이 "진짜로"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준다 한들, 그가 믿었겠는가? 그때에는 그는 "지금 나타나신 분이 진짜라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질문의 형태를 바꿀 뿐이다. 신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한들, 그때는 신을 믿으려는가? 그때는 그 증명 자체를 의심할 뿐이다.
유일성은 완전성이고, 완전성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완전한 것은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이비는 "나만이 진리이니 너희는 다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니, 나에게로 오는 모든 이들을 다 구원하겠다"고 하셨고, 심지어 그들이 오지 않으니 그들 곁으로 가셨으며, 그럼에도 구하지 않으니 결국 십자가를 지기까지 했다. 거듭 말하지만,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치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다. 나는 확신한다. 만약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나를 외아들로 지정하시고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준다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분처럼 하지 못할 것이다. 내 안의 죄성이 미쳐서 발악하여 그 권세를 손에 쥐고 자기를 파괴하고 타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며 마침내 세상을 멸할 것이다.
사랑은 오직 유일성과 완전성이 하나가 된 신의 온전한 성품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다만 인간 존재 안에서 "신의 성품이 드러날 적에", 그때에만 자유가 있다. 신의 사랑으로 본다면, 모든 진리는 다 능히 이해된다.
중요한 것은 초점이다. "내가"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를 "통하여" 신께서 드러나실 적에, 바로 그때에 신을 통하여 나의 어두움이 비추어 밝혀지는 것뿐이다. 나를 내려놓고, 그저 통로가 되어라. 나를 "통하여" 진리와 신성이 흐르도록 내맡겨라. 물론, 숱한 연습과 훈련과 "소망"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안이 없는 완전한 평화를 체험할 것이다.
불안은 나의 오랜 까르마이다. 비록 내가 그를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나는 그를 인정하며, 그가 나의 여정의 중요한 파트너임을 인정한다. 그의 존재를 내 안에서 "허락"한다.
나는 불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나 자신이 커다란 불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불안에 대해서 알아야 할 첫번째 진실은, "실체 없음"이다. 불안은 실체가 없다. 눈앞의 수많은 "트리거"들을 없애거나 제거하거나 해결하고 나면 마음의 불안이 없어질 거라고 믿지만, 어리석다. 하나의 트리거가 해결되면 불안은 또 다른 트리거를 찾아서 고리를 걸 뿐,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윤회다.
두번째 진실은,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불안에는 근거도 없고 원인도 없고 심지어 이유마저 없다. 그저 불안 그 자체가, 끊임없이 트리거를 바꿔가면서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왜" 불안한가, 를 따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이해"함으로써 잠시 편안해진 것 같지만, 그건 "불안에 대해서 알았으니 이제 불안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에고적 교만에 의한 일시적 휴전일 뿐이다. 그 효력도 길지 못하다.
세번째 진실은, 나의 힘과 의지로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심지어 애를 쓸수록 더더욱 불안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불안하기에 통제하고 억압하려 들며, 통제/억압은 무의식적 공포에서 비롯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을 해결하려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공포의 압력이 더더욱 커지며 따라서 눈앞의 불안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렇다고 불안을 방치하면, 불안은 제멋대로 날뛰며 여러 트리거들을 찾아서 폭탄을 설치한 끝에 수천만 개의 시한폭탄들에 둘러싸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의 선택이 없다. 왼쪽을 가도 죽고, 오른쪽을 가도 죽는다.
참으로 막막하지 않은가. 참으로 절망적이지 않은가. 감정적인 그러한 절망이 아니라, 적의 실체를 알면 알수록 더더욱 이 전투에서 승리할 가망 자체가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나는 이 전투에서 지금껏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내가" 승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내 설계대로 내 힘대로 내 능력대로 해서 해결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불안이 더욱 커지고 문제가 최악 직전까지 악화되었을 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삶을 살아왔기에, 어떻게 불안에 맞설 수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이것을 기꺼이 공유하고 나누고자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불안을 해결하는 열쇠의 이름이 진리이다. 진리는 Truth, 즉 "진실"이며, 이것은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진리는 무슨 특별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너무 익숙해서 놓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또 뻔한 소리 하겠구나" 하면서 다시 절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심하라, 누구보다도 내가 관념적이고 공허하고 뻔한 말을 싫어한다. 그래서 선문답하지 않고 명확하게 말하려 한다.
첫째, 맞서려 하지 마라. 이는 무기도 갑옷도 없이 맨몸으로 중무장한 군대에 맞서는 꼴이다. 저항할수록 고통만 더 커질 것이다. 저항할수록 불안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만 갈 것이다.
둘째, 해결하려 하지 마라. 불안을 "해결"할 필요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원인이 없기에 해결도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안 그 자체와, 불안으로 인한 괴로움은 다른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괴로움은 불안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그 강박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그냥 받아들여라. "죽어라"는 의미이다. 저주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불안이 이끄는 부정적인 결과를 차분히 정리해보는 것이다. 불안하여 걱정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면 결과적으로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되겠다고 받아들여라. 저항하고 싸워서 절대 이길 수가 없다면, 그냥 죽으면 된다.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불안하다면, 그냥 길거리에 앉으면 된다. 아니, 그냥 그렇게 될 것이다.
넷째,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마라. 고통을 거부하고 제거하려고 하니까 더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고통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게임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에도 고통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때에 고통은 쾌락의 재료가 된다. 불안은 정신의 고통일 뿐, 아무리 불안해도 내가 죽거나 다칠 일은 없다. 그러니 그냥 마음의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충분히 고통스러우면 된다.
다섯째,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라. "해결하라"는 뜻이 아니다. 심지어 "노력하라"는 것도 아니다. 불안을 그냥 거기 둔 채로, 시간이 계속 흘러가듯, 아무리 불안해봤자 결국 1분 1초는 계속 흘러가는 그 기계적인 흐름대로, 불안한 채로 계속 쉼없이 나아가라. 불안한 채로 내일을 맞이해라. 불안한 채로 앞으로 나아가서 그 결과를 확인하고 받아들여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내가 불안해 했던 그것은 결국 올 것이며, 실제로 오면 막상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으니, "완벽한 행복"이 없듯이, "완벽한 불행"도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부활"을 기억하라. 내 힘으로 움켜쥐려고 하지 말고, 흐름에 맡겨라. 이때 흐름이란 신성이고 진리이다. "겨울이 영원할 것 같더라도 결국 봄은 온다." 아무리 춥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봄이 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따라서, 죽음(불안한 채로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을 맞이한 이후에는 반드시 부활(결과를 받아들이고 자유와 평화를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언제"의 문제일 뿐, 불안은 언젠가 반드시 끝날 것이고, 자유와 평화는 반드시 올 것이며,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여정에서 배운 것이다.
당면하고, 마주하고, 나아가면, 결국 문은 열린다. 길은 열린다.
"불안하지 마라"는 틀렸다.
다만 "불안한 채로, 계속 쉼없이 나아가라"가 옳은 것이다.
그리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소망을 품은 가운데 신이 함께하셔서 보호하시고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