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말과 행(行)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언어는 주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그러니까 "침묵 가운데에서 정신이 드러나고 영이 깊어질 때" 이루어진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영이 주도하는 일이다. 가장 깊은 신비체험 가운데에서의 고양감 등도 결국에는 영에 의하여 구조적이고 입체적이며 실재적인 언어로 드러나게 된다.
언어는 깊고, 넓고, 고요하다. 나를 통하여 언어가 드러나지만, 정작 내 것은 아니다. 진리와 신성에 대해서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쓰지만, 정작 그것을 내가 이해하지 않았고 학습하지 않았다. 자아가 글을 쓰는 것과 영에 의하여 글이 흘러나오는 것은 완벽하게 다르다. 그 고유한 감각은 선명하다.
그 순간에, 써야 할 글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나의 영은 이것을 듣고, 언어로써 드러낸다. 그러므로 모든 영의 글들은 창작이 아닌 증언이다.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하는 것. 이것은 또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다. 즉, 사명이다. 진리는 허락된 자들에게만 허락되어지는 것이며, 진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허락된 데에는 개인을 넘어서는 신의 뜻이 있는 것이다. 진리는 독점되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증언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글쓰기는 사명의 결을 띤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은 결국 하늘의 진리를 각자라는 고유한 통로를 통하여 드러내어 밝히는 과정이다.
그러나 말은 다르다. 언어로써 자유로이 흘러나오는 진리들의 절대 다수는 말로써는 허락되지 않는다. 언어는 입체요, 말은 평면이기 때문이다. 입체를 평면 위에 늘어놓으면 현학적인 말장난이 된다.
언어가 영이 주도한다면, 말은 영혼이 주도한다. 그래서 음성과 말을 들으면 그의 영혼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아의 말과 영혼의 말은 다르다. 자아의 말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어둡지만, 영혼의 말은 이타적이고 사랑을 실천하며 빛과 온기를 나눈다.
영혼은 순결하다. 따라서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은 영혼에게 무용한 것이다. 결국, 영의 진리는 영혼의 에너지에 의하여 지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를 지배계층으로 타고나서 한평생을 고생 한 번 해보지 않고 운이 좋아서 성공한 주제에, "노력하면 모두가 성공한다"는 진리를 말해봤자 그것은 실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기나긴 삶의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결국 끝까지 시험을 통과하여 성공을 이룬 사람이, 허락된 순간에 허락된 자리에서 "노력은 배신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적에, 그의 영혼의 빛에 의하여 영의 진리는 실재화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그 빛은 공유되며 확장된다.
영혼의 말은 단순하다. 결코 복잡하지 않다. 내가 말을 한다, 가 아니라, 영혼이 나를 통하여 자기를 드러낸다, 고 이해해야 한다. 그 순간은 분명히 감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어떠한 진실한 이끌림과 공명과 울림에 의하여 저도 모르게 사랑을 말하고 빛을 말하게 되는 그 순간과, 그 순간에 행해진 말들이 있다.
영혼에 의하여 말해진 모든 말들은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은 모든 말들은 비록 그것이 자아의 눈에 "율법을 어긴 것처럼" 보인다 한들, 신께 용서받으며 심지어 신의 영광이자 기쁨이 된다. 나는 이것을 이미 익히 여러 번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오직 영혼의 빛으로 사랑을 공유할 적에,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물러나며, 두려움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의하여 허락받으며, 용서받으며, 사랑받는다.
영혼은 홀로 있을 적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영혼이 말로써 드러날 때는 오직 하나, 타인에게 빛을 나누고 공유하고 전파할 때 뿐이다. 즉, 사랑을 실천할 때. 영혼이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한다. 가슴을 열고, 자기의 영혼으로써 상대의 영혼을 진실로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영혼은 자기를 낮춘다. 영혼은 낮아져서, 그와 눈을 맞추고, 심지어 그를 올려다보며 경외한다. 그리할 적에, 영혼의 빛은 더욱 크게 공명하여 온 세상의 어두움을 능히 밝힌다.
그리 들을 적에, 정확히는 "영혼을 통하여 영혼과 공명할 적에", 어느 순간에, 내 안에서 도저히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그 강렬한 이끌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담대히, 그러나 겸손하고도 경외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전하여라. 그 말이 바로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말씀이시다.
세속에서, "해야 할 일"이란 건 책임이다.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해야만 하는 일, 이라는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나 신 안에서 영과 영혼이 하나될 적에, 책임은 곧 그 자체로 기쁨이 되며, 따라서 책임,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은 곧 열망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사명이다. 물론 짐을 지는 일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힘겹다.
"이 세상에 가벼운 짐은 없으며, 이 세상에 가벼운 십자가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하였듯이, 영혼이 빛을 발하는 그 순간에, 영혼은 저도 모르게 불쑥 사랑으로 나타나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자비심으로 기도하고 실천하게 된다.
언젠가 나는 어떤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분들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분들은 각 사람들의 전생의 업보와 까르마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그의 잘못을 가르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내가 의문이 생겼다. 진실로 능력이 있다면, 그를 바꾸어주면 그만이지 않은가? 진실로 힘이 있다면, 그를 이끌어주면 그만이지 않은가? 진실로 먼저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라면, 그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그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면 되지 않는가? 그리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는 일은 신께 기도드리면 될 일이지 않은가.
영혼의 사랑으로 보건대, "비판"은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영혼의 시선에서, "해야 할 일", 즉 사명은 딱 하나뿐이다. 잘잘못을 가리고 상대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어쩌고, 그 모든 것들은 결국에는 다 신 앞에서의 핑계이고 변명일 뿐이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홀로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아버지의 뜻을 들으셨을 적에, 그분 자신이야말로 그 장본인 된 입장으로서 얼마나 억울하고 할 말이 많으셨겠는가? 그 누구보다도 "타인을 심판하고 잘잘못을 가릴" 능력과 힘과 지혜를 모두 다 거느리신 분이셨음에도, 그분은 그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하셨으며, 침묵 속에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그분의 뜻을 알려주셨다.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타인을 대신하여 그의 짐을 지는 것.
따라서 실천 앞에서 내가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뿐이다 :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한 영혼의 고통과 슬픔과 상처와 어두움을 대신 짊어지는 일인가? 그를 대신하여 내가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를 지는 일인가? 이에 따라서 그 실천이 "아버지의 뜻"인지 아닌지가 결정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채찍은커녕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손가락에 찔려도 그 고통으로 하루종일 아파하는 존재다. 그리 사랑으로 기도하고 실천할 적에, 그의 영혼을 통하여 신께서 드러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은 곧 내 영혼이 신과 하나되는 것이며, 이것이 곧 구원이고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니, 결국 사랑을 실천하여 행함은 나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영은 언어로써 증거하고, 영혼은 사랑으로써 나누며, 자아는 대신 희생함으로써 실천한다.
진리는 단순하다. "아버지의 뜻"은 결코 복잡하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그분의 깊은 뜻을 알아들을 만큼의 수준이 전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은 결코 우리에게 어려운 진리를 가르치지 않으신다. 그것이 허락된 경우는 이 세상에서 아주 드문, 선택받은 소수의 영들뿐이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가, 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가, 이며,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실천하여 행하게 되며, 그 실천으로 말미암아 다시 진리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대개 언어와 말과 행(行)이 모두 이와 같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