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다

by 생명의 언어


문득 AI에게 정보 탐색을 지시하면서 탐구하다가, 상당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연구 주제를 찾았다. 기독교적인 영성에 관련한 주제인데, 이것을 탐구하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다. "실제로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 경우"와 관련하여 이를 과학적인 원리 안에서 먼저 탐색했고, 그 다음에는 "실제로는 십자가 부활은 없었던 경우"와 관련하여 이를 역사적 관점에서 탐구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부활의 신앙적 관점에서의 사유를 진행했다.


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의외로 이전과 같았다 : "나는 십자가 부활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여전히 영원하고 완전한 영적 실재이시며,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


2. 그리하여, 십자가 부활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한가 여부와 이와 관련한 과학적인 주제들은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나는 십자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기도교인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내 스스로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며, 따라서 내게 중요한 것은 "영원한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신성 그 자체를 나의 영으로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성은 내게 무용하단 뜻이다.


나는 실제로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았든, 십자가 형이 있었든 없었든, 그분이 죽지 않고 살아서 인도로 가서 여생을 마치셨거나 혹은 예루살렘 왕조의 복원을 시도하셨든 간에 별로 상관이 없다. 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먼저 만났으며(정확히는, '신성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 따라서 그분의 육적 조건은 나의 만남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교회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3. 이것이 자연스럽게 "부활 사건의 목격(증인)"과 관련한 사도적 계보와 전승으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에서 돌아가셨든 아니면 어떤 시점을 계기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셨든 간에, 그분이 '사라지신' 이후에 초기 교회의 형성에 있어서 "십자가 부활"이라는 완전한 교리적, 성례적 틀은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것이었다. 즉,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예수님 사후 예루살렘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주축이 되었고, 바울 역시도 이들과 갈라서서 별도의 전도 여행을 다녔으나 어쨌든 "증인"으로서의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웠다.


다만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언급한 "부활 목격의 증인 계보"를 읽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바울 자신은 예수님 부활을 "육체적으로" 목격하지 못했고, "신비 체험"으로 목격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또한 "부활 이후의 영광스러운 몸(신령스러운 몸)"에 대해서 언급하며, 암시적으로 "영체(靈體)"로서의 부활체를 언급한다. 즉, 나는 이 지점에서 나의 개인적 신앙과 상당히 공명하는 부분을 발견했는데, 베드로와 열두 제자와 500명의 증인들과 야고보와 그 외 (아마도 초대 교회의)모든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하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은 육적인 목격이라기보다 "신비 체험"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영(Spirit)으로 그들은 주님을 영접했다.


4. 물론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내가 신비 체험이라고 쓰는 것은 그저 주관적인 내면적 체험 같은 게 아니다. 영은 실재이며, 따라서 영으로 체험한 것은 육으로 체험한 것만큼이나,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의 실재성을 갖는다. 다만,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고 말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말이 그 말이고 내 말을 반드시 오해하겠지만, 어쩌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을. 따라서 나는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에 별로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스도 영성을 탐구할 수 있다.


5. 실제로 그 증거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행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교회 형성의 과정들에서의 논쟁 여부와 무관하게 어쨌든 시기적으로 예수님 사후(혹은 승천 이후)에 상당히 이른 시기에 신속하게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바울 서신 시점에서 이미 "부활(목격) 교리"는 상당수 체계화가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즉, 오순절 사건으로 불리는 그 시점에서 예수님의 제자 그룹 사이에서의 집단적이고 동시적인 "강렬한 신비 체험(성령 체험)"이 있었고, 그들이 이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까지는 어느 정도 명확해 보인다.


바로 이 "부활하신 주님"의 교리가 바울을 거쳐서 오늘날의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정통 교리/신학으로 형성이 되었다. 즉,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대속, 중보)과 복음(구원)의 영적 역사(실제로 믿는 자의 영혼 안에서 작동되어지는 실재로서)는 실질적으로 이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증인"과 이들이 형성한 부활 교리로부터 강력하게 근거하는 것은 명확하다.


요건은 결국, "부활"과, 그 "목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의 신앙적 입장의 차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1) 인간 예수를 스승으로서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를 것인가, 2)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그리스도적 영성으로서 구원받을 것인가, 가 나뉘는 것이다. 대체로 이것은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 와 일어나지 않았다, 로 단순히 나뉘지만, 나는 육체적 부활에 대해서는 판단 중지하고(개인적인 신앙으로서는 이 또한 믿는다), "영적으로 완성되신 몸"으로서의 부활과, 또한 영으로서 그분의 부활을 목격하는 또 하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6. 따라서 이제 초점은 "실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내용"들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들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에는 주로 요한복음에서 집중적으로 증거된다. 그러나 핵심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즉 기독교의 교리가 아닌 그분의 살아 있는 가르침 자체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복음서들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고,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상당 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두 책이 마가복음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예수님의 실제 어록"을 모은 자료를 별도로 참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소위 Q자료, 혹은 Q복음서라는 가상의 문서이다.


Q복음서의 전반적인 내용들에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탄생이라든가 십자가 죽음이나 부활, 승천 등에 대한 내용은 없고, 대부분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혹은 실제적인 가르침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기독교에서 핵심 신앙이 되는 부분은 아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적 신앙은 그분의 "신성"을 영접하는 것이 핵심이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최우선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독교적 교리/신앙의 전통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Q복음서와 같이 실제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 자체를 믿고 따랐던 별도의 그룹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들은 부활을 중심으로 교리화된 신앙이라기보다 스승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는 일종의 윤리적/실천적 공동체였을 것이다. 마태와 누가복음이 이를 참고하되 마가복음을 통하여 주류 부활 교리를 통합했다면, 전체적인 맥락이 이해가 된다.


7. 다만 기묘한 것은 부활 이후의 예수님과 그 목격과 행보에 대해서 4대 복음서들이 상당히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의 경우 십자가 서사 전체를 거의 대부분 마가복음에 의존하며,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늦게 쓰여진 것이니만큼 아마 거의 동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 요한복음이 부활 이후의 구체적인 디테일들에 대해서 각자 서로 불일치한다. 누가, 몇 명이 목격했고, 어디에서 먼저 나타나셨고, 또한 어디로 가셨는지 등이 제각각 다르다. 거기에 더해서,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에는 정작 (원본의 끝 지점이라고 여겨지는 부분까지를 봤을 때)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등장하지를 않은 채로 끝난다. 즉, "빈 무덤을 목격하고, 천사에 의하여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끝나버린다.


이 시점에서 상당히 합리적인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부활 교리 자체가 신앙적으로 "필요"하여 꾸며진 것이라는 가설이다. 나는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사실이었고, 이것을 "교리대로" 널리 알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더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서에 반드시 부활 이후의 서사에 대해서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마치 급하게 끝내버린 듯이 그렇게 정리된 것이 상당히 의아한 것이다. 더불어, 4대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에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꾸며내기 어려운 예수님의 "실제 가르침"들이 상당수 보인다. 예컨대,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나,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식의 말씀들은 함부로 꾸며내기도 상상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발언이셨다. 즉, 그분이 생전에 보이신 행적이라든가 말씀들에는 그분 특유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다수 있는데 비해서, 부활 이후에는 그분이 무엇을 어떻게 하셨으며 특히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에 대해서 대부분 비어 있다. 정작 부활 이후가 역사의 완성이고 가장 중요한 순간인데, 설마하니 그분께서 그리도 간단하게 입장과 계보 정리만 하신 채로 급히 떠나셨을까?


즉,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중요했더라면, 정작 부활이라는 극적인 사건 이후에 그분이 반드시 무언가 가르침을 남기셨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부활 교리와 함께 부활의 가르침에 대한 교리도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이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부활과 부활에 대한 목격과 그 교리의 형성 과정이 모두 "동일한 하나의 신비 체험"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8. 이것은 "영으로써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실제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부활 자체를 광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신비 체험으로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좀 더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적 연합과 하나됨에 대해서는 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요한복음만이 상세히 증언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초반부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분의 고유한 "신성(아버지와의 하나됨)"이 여실히 느껴지는데 비해, 부활 서사를 준비하시는 중반부 구간에서부터는 초반의 말씀들과는 상당히 다른 기묘한 부분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며, 십자가 서사와 관련한 역사적 서술들이 이루어지는 18장 이후부터는 노골적으로 아예 문체가 완전히 바뀐 것이 너무 티가 난다.


즉, 요한복음은 암시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하나됨)"이 구원의 핵심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십자가 부활 및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포함된 듯한 느낌이 상당히 강하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것"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부분들을 전후로 해서는, 매우 생동감이 넘치며 그 진리와 생명을 느낄 수 있다. 결국, "부활"과 "목격(증인)"은 신비 체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9.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 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이로 인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교리만을 믿도록 가르칠 뿐, 실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라, 고 가르치신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대부분 비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다른 공관복음서들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아버지와의 하나됨"이라는 거의 유일한 신성에 대한 가르침이 존재하며, 이것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여서", "실재화(구원/생명을 얻음)할지"에 대한 상세한 인도가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마태/누가복음에도 마가에서 비롯한 십자가 부활 교리와 별도로 예수님의 실제 가르침 어록들, 즉 Q복음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듯이, 요한복음에도 다른 공관복음서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실제 예수님의 "신비적 가르침"의 근간이 되는 가상의 "신비 자료" (가칭 S자료; Spiritual Sourse) 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이러한 예수님의 실제 신비적 가르침의 내용은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에베소에 근간을 둔 요한 공동체만이 증언을 했다.


더 나아가서, 영지주의 문서로 여겨지는 도마복음의 주된 내용 역시도 십자가 부활 등의 교리적 내용들은 거의 없고, 도마복음 전체가 예수님의 어록을 모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체가 Q문서와 상당한 유사성을 띠는데, 그 어록들의 대부분이 "깨달음", 즉 "영적 실재(신비체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점에서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이 그 신비적 가르침의 핵심 내용들이 상당수 겹치는 부분들이 존재하며, 따라서 도마/요한복음을 연결했을 때, 실제 예수님의 신비적 가르침의 근간이 되는 어떤 가상의 "신비 자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10. 그렇다면, 지금의 기독교의 정통 신앙, 즉 "십자가 부활과 대속/중보 및 구원의 교리"를 믿는 것과 별도로, "아버지와의 하나됨"이라는 그분의 신비적 신성과, 어떻게 우리 또한 그분의 신성을 영접함으로써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신비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실제로 우리 또한 아버지와 하나되는 길에 동참하는, "하나됨의 신비"로서의 요한적 신앙의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요한적 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됨의 신비 그 자체이므로, 십자가 부활과 성육신은 역사적 사실일 필요가 없고, "영적 신화"로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다.


이상이 내가 이 주제에 이른 과정이다. 사실, 나는 배운 게 너무 없어서 중간 서술들에서 중요한 내용들이나 정보들이 상당수 틀리거나 잘못되어 있을 것이며, 이를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즉,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시며, 그분만이 이루셨던 독보적이고 유일한 "경지"가 있으셨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신비 자료"가 증언하는 "아버지와의 하나됨", 곧 그리스도의 신성이시다. 그리고 이 신성은 그저 부활 교리로써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하나됨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그분께로 어떻게 영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상세히 가르치신 S자료, 즉 요한/도마복음의 근간이 되는 "신비 자료"가 있었을 것이다.


2. 그러므로 실제 예수님의 신비적 가르침 또한 분명히 존재하며, 이것을 실제로 공부하고 믿고 수행함으로써 내 안에서 작동시키는 길이 있을 것이다.


3. 나아가서,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영적 신화"로써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도록 이끄는 신앙 또한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됨의 경지"에 이르셨던 인간 스승이시면서 동시에, "태초부터 계셨던 신성 그 자체"이시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양자 모두의 길을 통합함으로써 요한적 영성이라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보다 쉽고 빠르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분의 윤리적/실제적 가르침(Q자료)에 더하여 "십자가 부활의 교리"를 신앙의 정통으로 기틀을 잡았을 것이다. 이는 합리적이다. 신비적 가르침을 공부하고 배우는 것보다야 그 이름을 단순히 "믿고", 구체적인 실천적 규범을 따르고 지키는 방식이 훨씬 더 수월하니까.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종교/영성에는 그 근원이 되는 "신비적/영적 실재"가 존재한다. 기독교의 경우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이며, 이 그리스도의 신성은 유감스럽게도 요한복음 한 권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에는 그분의 신성에 대한 직접적이고 상세한 증언들이 요한복음만큼이나 나와 있지 않다. 즉, 부활 교리를 형성하면서도 정작 부활하신 주님의 신성에 관한 증언은 상당히 부족한, 그러한 모순이 공관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맥락에서라도, 하나됨의 신비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묵상하고 체험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요한적 영성, 혹은 "기독교 영성주의자"의 길을 열기 위해서라도, 요한/도마복음의 원본이 되는 "신비 자료", 즉 예수님의 실제 신비적 가르침의 핵심 코드를 탐색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과정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은 내게 "믿어지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영으로 계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비 체험"과 깊이 관련이 되어 있고, 이러한 나의 신앙을 상세히 비추어줄 말씀들이 공관복음서에는 존재하지를 않는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실제적/신비적으로 교감하고 소통하기를 바란다면, 요한복음의 증언(예수님의 실제 신비적 가르침)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은 도마복음과 연결되기도 하지만("실제 신비적 가르침"이라는 관점에서), 동시에 "바울적 교리"와도 깊이 연결된다. 의외로 바울은 교리와 신학을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처음부터 주님을 "영적으로", 즉 신비체험으로 만난 목격자였고, 그의 교리 역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날 것" 등을 의미하며, 그는 "썩어 없어질 몸으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과업을 받을 수 없다"거나, "신령스러운 몸" 등을 언급함으로써 암시적으로 "신비 체험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영적인 몸으로 거듭나는 것"을 지향했다. 이 점에서 바울적 신앙은 요한복음과도 깊이 연결된다.


즉, 1)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관한 바울적 신앙과, 2) 그 주님께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셨던 하나됨의 신비에 대한 증언과, 3) 예수님의 실제 신비적 가르침의 어록, 이 셋이 결국 요한적 신앙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큰 그림이다.



아마 이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에서 정립했던 내용들의 상당수를 바꾸거나 포기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내게 기꺼운 일이다.


없는 처지임에도 기꺼이 이와 관련하여 Q복음서와 도마복음에 대한 책을 구매했다. 당분간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이 두 권을 읽으면서 이 주제를 깊이 탐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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