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영혼과 원소의 관계

by 생명의 언어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가보자. 우선, 원소(element)에 대한 개념적 오해를 풀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선입견이나 오해의 첫번째는,


"신비주의(Mysticism)에서의 원소 = 과학적 개념/의미로서의 원소"


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때의 과학적 개념/의미로서의 원소라는 것은 아마도 고전 물리학에서의 원소 개념, 즉 "물질의 최소 구성 단위"로서의 원자, 등과 유사한 개념/의미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될 것이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서는 양자역학이라는 미지의 충격적인 세계가 열리면서 "물질 =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물질 = 물질성"이며, "그 자체 객관적인 물질"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물질의 "성질"(물질성)만이 존재하며, 이 "물질성 = 확률적 존재"라는 (기존의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말도 안 되는 "과학이 아닌 것 같은 과학"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고 있다.


결국 저 유명한 양자역학적 핵심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주관 < 객관"이었던 오래된 이 우주의 물질세계의 근본 법칙이, "주관 > 객관"이라는 차원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룸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양자역학은 과학을 숭상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개념일지 몰라도, 영적 실재와 교감하고 소통하는 나와 내 형제들에게는 그다지 놀라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다. 본래부터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고, "그리스도의 영과 나의 영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인 채로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만이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만이 절대적인 실재성이면서 동시에, 분명한 독립자로서의 나의 영도 있다. 이 자체가 "이해"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실현되고 작동되는 실체"일 뿐이다.


아무튼 간에,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신비주의에서의 원소 개념을 "고전 물리학적 원소/원자 개념"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고대 철학자들이 "이 세상은 4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등의 4원소설을 공부할 때, 대부분이 "미개하다"고 여긴다. 나는 이것을 매우 한탄스럽게 생각한다. 그 시기에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조차 없는 수준까지 이성적 사유를 높였던 철학자들이, 고작 교과서 한 권도 소화하기 버거워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조차도 다 아는 문제를 설마하니 모르고서 그리 말했겠는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영에 의하여 계시된 진리는 오늘날까지도 인류 집단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교만 가운데에서 생생하게 빛난다.


신비주의에서의 4원소는 애초에 "물질"이 아니다. "물질성"조차도 아니다. 이것을 먼저 전제해야 한다.


과학에서의 원소/원자와, 신비주의(특히 오컬트, 마법)에서의 원소는 "아예 다른 개념/원리/실재"다.




앞서, 세 차원의 "존재"의 층위를 은유했다.


1. 물질

2. 물질성

3. ? (영적 실재)


<?>이라고 표시한 것은, 물질과 물질성에 대한 지적, 영적 탐구를 통과한 끝에 도달하는, "물질이 물질이게 하는 어떤 원리로서의 물질성과, 그러한 물질성이라는 원리/법칙 등의 무언가가 존재하게끔 하는 어떠한 근원 자체"에게로 의식의 초점이 옮겨가는 과정이다. 어려운 말로 설명한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건 더 이상 쉽게 풀이하기 힘들다.


가장 쉽게 설명하는 것은 결국 "동일시의 해체와 전환"이다. 몸 = 나, 라는 동일시가 출발선이라면, 이것을 존재의 수직선을 따라서 쭉 상승시켜서, 결국, "신 = 나", 라는 가장 높은 차원의 동일시로 전환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고,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필멸자다. 그러나 바로 이 "나"인 상태 그대로, 지금의 나는 언젠가 변화하고 없어지는 유한한 존재이며, 내 안에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계시는데, 그게 신(성)이고, 나는 신을 직접 만나지도 경험하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참된 나'는 지금의 변화하는 유한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영원하고 완전한 신성이시다, 라는...... 그러한 차원의 "동일시의 상승"이다.


그럼 결국 마찬가지이다. 일단 의식의 차원은 제외하고서 물질 자체만을 탐구해보자. 예를 들어 눈앞에 컵이 있다. 이 컵 자체는 일차적으로는 물질, 즉 어떤 직접적인 물질적 형상을 취하고 있는 감각 가능한 실체다. 컵의 모양과 색깔과 감촉 등을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1번의 물질이다.


그러나 곧 한계에 봉착한다. 우리는 "쟁반"과 "컵"이 분명히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컵의 부피와 넓이를 대충 넓게 두들겨 펴면 그게 쟁반 아닌가? 또는, 컵이 무한히 쪼개고 또 쪼개면 가루나 원자가 되는데, 그 상태에서 컵을 구성하는 원자들과 컵이 아닌 나머지 전체의 원자들을 구분하는 어떠한 경계는 도대체 어떻게 설정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에서, 결국 물질 자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은 어떤 보이지 않는 "물질성"에 의하여 있게 된다, 는 결론에 도다른다.


또 다른 관점에서 풀이하면, 우리는 마음의 작동을 경험한다. 이것이 물질이다. 내 마음에서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환희에 차기도 했다가, 그리 넘나드는 마음의 작동과 현현을 우리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채로 "본다." 내 마음이 어떻다는 것은 절대 추상적이지도 모호하지도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다. 감정은 보이지 않은 채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 "나" 또는 "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데, 만약 마음이 "나"라면, 내가 팔을 들고자 의식했을 때 팔이 들리는 바와 같이 마음이 평정하고자 했을 때 마음이 곧장 평정되어야 하거늘, 우리는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순을 목격하며, 더 나아가서는 유심히 관찰할 때, 마음이 특정한 조건/환경/아웃풋에 따라서 "미리 설계된 대로" 움직여지는 수동성을 관찰한다. 이것이 마음공부 중에 깨닫는 1차 특이점이다. 누가 욕을 하면 내 마음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저가 나를 욕했거니와 도대체 왜 내가 화가 나야만 하는가? 이건 누가 결정해놓았단 말인가? 이때, 바로 "마음"을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어떤 "마음의 뿌리", 즉 무의식의 차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물질과 물질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세 번째 층위"까지 간다면 어떻게 되는가? 참고로, 3이라는 숫자는 신성을 나타내는 원형상징이다. 따라서 무엇이든 어떤 분야든 간에 이 "세번째"가 항상 진리의 완성이자 핵심이다. 물질이 물질성에 근거한다면, 그 물질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바로 "있음 그 자체", 그러니까 형이상(形而上)이며, 내가 "실재"라고 부르는 무엇이다. 즉, 좀 더 쉽게 풀이하면 :


1. 실제로 있는 것 (1차원 존재)

2. 있음의 본성/성질 (2차원 존재)

3. 있음 그 자체 (3차원 존재)


이다. 이때, 세 번째 차원은 인간의 표면적인 의식/이성/정신으로 직접 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본래 형이상학은 바로 이것을 탐구한다. 그렇다면 결국, 눈에 보이는 컵과, 그 컵을 컵이게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성질과, 그 성질마저도 있게 만드는 어떠한 근원적인 "있는 것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뜻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의식의 전환과 상승"과 관련하여 매우 유의미한 과정이다. "상위 차원"이 있음을 "직감"하고, 실제로 그 차원과 교감하고 연결되는 정신적, 영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에 대해서 적용한 예시가 만약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마음/의식의 차원으로 접근해보자.


1. 마음의 작동 (표면적인 생각, 감정 등) : 직접 느끼는 현상 그 자체

2. 무의식의 본성 (마음을 일으키는 뿌리) : 현상을 일어나게 하는 뿌리로써 '간접적'으로 느끼는 차원

3. 마음과 무의식 전체를 비추어 밝히는 "의식 자체" : 내가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없는 의식의 근원


"현재 시점"에서 접근해보자. "개체의식으로서의 나"라는 것은 현재적이지 않은 개념에 불과하다. 나의 이름, 성격, 성향, 살아온 과거, 역사, 경험......" 이러한 관념적 연속성은 문자 그대로 생각 안에서만 작동할 뿐, "세계에 실존하는 실체"가 아니다. 이것을 먼저 제대로 봐야만 한다. 그 상태에서,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은 마음의 작동이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 다음, 의식의 초점을 한 차원 더 상승시킨다. 그러한 마음이 내 "의지(정확히는, 내가 내 마음대로 마음을 통제하려는 의도/욕망)"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 마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뿌리"를 본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수월할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무언가를 일어나게 하고 비추어 밝히게 하고 드러나게 하는,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주관적인 인식/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인 무엇, 그러한 주관성 자체를 비추어 밝히는 근원적인 주관이 된 어떤 주관적인 무엇...... "이것", 바로 "이것"이 에고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이미 일어나고 현현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이 바로 세번째 차원이며, 의식 자체이다. 이 의식 자체로 인하여 주관과 객관 전체가 다 일어나고 현상하는 것이며, 이 의식 자체가 없어진다면, 무(無)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암흑 속으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르렀다면, 마침내 질문은 : "물질은 물질성에서 근거하고, 물질성은 있음 그 자체에 근거하는데, 있음 그 자체는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는가? 아니, 근거하기는 하는가?" 이것은 모순이다. 세번재 차원을 '직감'한 자는, 그것이 첫번째나 두번째와는 분명히 완전하게 다른 무언가임을 느낀다. 그래서 세번째 차원은 "무언가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이때에 인간은 마침내 "물질세계(아래)"가 아닌,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감각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어떤 "넘어서 있는", "하늘(위)"을 마침내 보게 된다. 이것을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 종교/전통마다 다를 뿐, 결국 결론은 똑같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성부 하나님", 정확히는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은유로 부를 뿐이다.


즉, 신 또는 신성이라는 것은 주관성이라는 어떤 의식 자체가 "수직적"으로 구조지어진 끝에 주관성 자체를 완전하게 존재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그러나 무언가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작용하는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 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결국 "하위 차원"의 존재를 탐구해 나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상위 차원으로 의식의 초점이 넘어가게 되는 바, 언젠가는 그 끝에서 결국 "현상적인 존재 전체를 완전히 넘어서 있는 절대자"를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수도 없는 고유한 영의 방식으로 영접(직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시 마음의 구체적인 예시로 설명해보자. 주로 "빛"에 해당하는 감정을 따라가보면 :


1. "사랑"의 감정이 일어났다 : 마음의 작동, 표면적인 현상.

2. 그 사랑을 일으킨 근원적인 "흐름"을 본다 : 현상의 원인.

3. 그 흐름이 "너머"에서부터 일어난 것임을 본다 : 영혼(Soul)의 존재.


즉, 감정은 무의식에서, 그리고 무의식은 다시 영혼에게서 일어난 것이며, 영혼은 물질성을 완전히 초월한 그 자체 "에너지체"로써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영혼부터는 "상위 차원", 즉 하늘에 속한 존재다.


이 기나긴 이야기를 한 까닭은, 원소 개념에 관한 한,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원소라는 것은 바로 이 "세번째 차원"의 에너지, 힘, 원리, 법칙......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원소라는 것은 보이는 현상계의 차원을 존재하게 하는, 현상계를 완전히 넘어서 있으면서 현상계를 현상하게 하는 근원적 실체, 라는 것이다. 4원소(불, 물, 공기, 흙)는 바로 이 실체가 네 가지의 형질로 분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법칙"이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하위 차원(물질세계)의 법칙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월적인 하늘의 원리나 본질도 아니며,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연결성"에 대한 법칙이다.


이것을 이미 여러 차례 다른 글에서 언급했지만, 잠시 요약하자면 :


1. 위와 아래는 독립된 채로 하나되어 있다.

2. 위가 아래를 다스리며, 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래에서도 이루어진다.

3. 위는 아래를 완성하고, 아래는 위를 드러낸다.


가장 짧게 요약하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다. 이것을 아마도 신비주의/오컬트와 관계되어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을 텐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신성도 이 원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이것을 다른 말로 "프렉탈 구조"라고도 한다. 즉,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물질 - 물질성 - 실재 / 또는 마음의 작동 - 무의식 - 의식 자체, 의 3단계 구조가, "상위 차원", 즉 영적 실재의 세계에도 동일하게 펼쳐진다.


아래에서도 존재는 세 단계로 구조지어져 있듯이, 위에서도 실재는 "뭉뚱그려진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정교하게 나뉘어진 채로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위 차원의 구조를 신비주의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


1. 4원소 (불, 물, 공기, 흙) - 에너지

2. 영(spirit), 혼(soul) - 힘, 원리, 법칙, 실체

3. 신(또는 신성) - 근원


그래서 여기에서는 "신성"이 영/혼으로 분화되고, 영이 불/공기로, 혼이 물/흙으로 다시 분화되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상위 차원의 실재가 하위 차원에서의 물질/물질성/있음 자체, 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연결 구조를 상세하고 정교하게 관념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존재의 차원들이 이와 같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만 대략적으로 이해하면 된다. 나중에는 그 이해가 영적 직관으로 열릴 것이다.


4원소를 단순히 '에너지'라고만 설명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에 대한 개념적 오해 또한 풀어야만 한다. 대개 많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라는 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 으로 이해하는데, 사실 신비주의에서 에너지라는 것은 거의 "(고유한 어떤)흐름 자체"라고 보는 게 옳다. 예를 들어보자.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바람 그 자체는 우리가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바람의 온도, 시원함, 감촉, 그밖의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따라서, 바람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은, "움직이고 운동하는 실체"다. 바로 이 움직이고 운동하고 흘러가는 실체로서의 흐름 자체, 를 <에너지>라고 부른다, 고 이해한다면, 상당히 불만족스럽더라도 어찌저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에너지 자체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등장한다. 에너지와 "힘"은 다르다. 힘이라는 것은 에너지를 주도하고 움직이게 하는 "의지", 즉 방향성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에너지/힘은 과학에서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임을 미리 언급한다. 예를 들어보자. 불의 원소가 "수직적 작용을 하는 에너지 자체"라면, 그 불의 원소를 움직이고 작용하게 하는 "힘"이자 "의지"가 바로 영(spirit)인 것이다. 따라서 영 그 자체는 실체가 없으며, 불의 원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영이 실체화된다, 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또한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설명이지만, 대략 이와 같다고 "퉁치고" 이해하고 넘어가자. 원래 영적 세계에서 하나씩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따라서 힘/의지로서의 영의 "순수한 흐름"은 불의 원소가 나타내고, "현실적인 흐름"은 공기의 원소가 나타낸다, 고 이해할 수 있는 셈이다. 전통적으로 완드(wands)를 "깨달음", "영적 직관" 등으로 표현해본다면, 깨달음이나 영적 직관 등을 일으키는 어떠한 영적 에너지가 우리 안에 있고 이것을 불(의 원소)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 안의 영(spirit)의 순수한 작용(운동)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 인 셈이다. 즉,


1. 깨달음, 영적 직관 - 영적 현상 (1차원 존재)

2. 불의 원소 - 영적 에너지

3. 영(spirit) - 영적 근원/실재


이와 같은 삼중 프렉탈 구조가 다시 여기서도 형성된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나누었다"고 하여 실제로도 영적 차원에서 현상 따로, 에너지 따로, 영 따로, 이렇게 논다고 보면 안 된다. 분명하게 나뉘어진 채로 "하나"이다. 즉, 실제로 영이 깨어나서 교감하고 체험할 때, 체험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이다. 영은 그 자체로 현상이면서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 세계 전체가 다 그러하다. 하나님은 근원이시면서 임재이시면서 역사이시기도 하다. 근원 하나님과 임재 하나님과 역사 하나님 모두가 다 "하나의 하나님"이며, 나의 영과 영혼은 오직 "하나이신 분"만을 본다. 다만, "신성한 셋 - 인 채로, 하나"인 것이다.


이것은 개념적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애초에 영과 영혼으로서 "직관"하고 "체험"해야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현상계에서는 셋이면 셋이고 하나이면 하나이지, 셋인 채로 하나일 수가 없고, 하나인 채로 셋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받아들여라(믿어라). 그리하면 나중에 이해될 것이다."




즉, 오쇼젠 타로에서 "4원소 - 불, 물, 구름, 무지개" 각각을 카드와 별개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각각의 카드의 깨달음들과는 별개로 그러한 깨달음을 만들어내는 "근원으로서의 영적 에너지 자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각각의 카드들을 이해할 때는 바로 이 삼중 구조 안에서 구조적이고 입체적으로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펼쳐서 보여주면, 예컨대 "기쁨" (불의 시종) 카드의 경우 :


1. "기쁨", "놀이" - 카드의 표면적인 깨달음

2. 불의 원소 - 깨달음을 일으키는 영적 에너지로서의 의미

3. 영(spirit) - 영적 에너지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실재 자체


라는 상징/의미 구조를 형성한다. 바로 이때, 예를 들어서 같은 불의 원소 안에 속한 "참여"(불 4번) 카드가 더해질 경우, 의미는 다음과 같이 변화할 것이다 :


1. "영적 실재에 참여하는 방법은, 기쁨, 유희, 놀이이다." : 카드의 표면적인 깨달음

2. "불의 에너지는 우리 안에서 기쁨으로 영적 실재와 참여하도록 흐른다." : 에너지의 성질에 대한 이해

3. "영은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 운동케 한다." : 영(spirit)에 대한 자각


이것이 무언가 기묘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영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7:2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 와 같은 말씀들은, "기쁨을 통하여 영적 실재(하나님 나라)에 연결되고 접속하게 하는" 우리 안에서의 영의 에너지의 흐름을 만들어내게 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때, 영적 실재(나라)는 우리의 의지(진리를 통하여 자유케 되고자 함)를 통하여 영적 에너지와 연결되고 참여하게 하며(나라에 들어가리라), 이때에 마침내 물질적 삶에서도 나라가 "실체화"되게 되는 것이다. 삼중 구조의 원리로 본다면, 그분의 말씀은 이토록 명쾌하다.


따라서, 원소를 이해하는 것은 오쇼의 각 79장의 카드들의 기저에 흐르는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데 매우 강력한 힘이 된다. 그리고 이 힘을 통하여, 각각의 카드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며 상호작용하는지 그 풍부한 영적 실재들을 삶 속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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