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4원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상, 4원소와 영/혼의 관계성은 다음과 같이 정렬된다 :
- 영(spirit) : 불의 원소(순수한 영) / 구름의 원소(현실화된 영)
- 혼(soul) : 물의 원소(순수한 혼) / 무지개의 원소(현실화된 혼)
구름의 원소는 모던 타로에서 공기이고, 무지개의 원소는 모던 타로에서 흙이다. 오쇼젠 타로에서는 이것을 각각 구름, 무지개로 형상화하여 좀 더 "육화된" 감각을 살렸다. 나름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본다.
이때 "순수한"과 "현실화된"이라는 말이 관념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이것은 "육화됨"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특정한 매개를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것은 성육신으로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이 예수님의 인격을 통하여 "보이는 신성"으로 현현하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순수성이라는 것은 영/혼 그 자체의 순수한 보이지 않는 본질을 뜻하고, 현실화된, 또는 육화된, 이라는 것은 그 영/혼이 어떤 매개나 질료 등을 통하여 현현했다, 나타났다, 는 의미이다.
이것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이기도 하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나"라는 개체의식을 통하여 육화되기 이전의, 문자 그대로의 보편적인 차원의 진리를 뜻한다. 그러나 보편적 진리가 그저 보편적으로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반드시 "나"라는 인격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 체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흔히 아는 불교적 가르침 중에서 다음의 유명한 일화를 떠올려보자 :
제자 : 스승님,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까,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입니까?
스승 :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무릇 움직이는 것은 네 마음뿐이다.
이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여러 불교의 교리적 개념이나 지식 등을 통하여 "마음으로(mind)" 이해하려 든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는 구조 안에서 이 말씀들을 개념적으로 정립했을 때, "안도"한다. 이것을 유심히 관찰하면, 에고는 "집단 무의식의 어두운 에너지", 곧 두려움, 공포, 불안에 의해서 구조지어져 있으며, 이것은 곧 "인식, 분별"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다시 자아/타자/세계를 "통제"하려고 하는 의도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서, 에고는 자기를 병사로 인식하고 삶과 세계를 전쟁터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피아식별이 되지 않은 어떤 지식/관념/현상 등이 나타나면, 자동으로 그것을 최단 경로/방식으로 "인식, 분별(이해된 상태)"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피아식별이 되기 전까지는 그것은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이므로, 무의식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며, 피아식별이 완료(분별된)된 상태로 전환되면, 그제서야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마음의 현상과 구조의 작동이며, 이것을 "관찰(觀)"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꽤나 깊어져야 한다. 대개 사람들은 (종교 불문하고)가르침, 말씀, 경전 등을 이런 식으로 공부하려 든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차원에서 움직인 것일 뿐, 실제로 그 말씀(진리)이 내 안에서 체화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마음은 불완전하며, 진리는 완전하다. 따라서 이런 식의 공부는 마음의 영역 안에서만 의식이 날뛴 것일 뿐, 완전한 진리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체화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경우, 이 대화의 핵심은 "움직임"에 있다고 보았다. 그 움직임이라는 것은 결국 "불안"과 "평화(평안)"의 차이다. 예를 들어 :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요16:33) 이때,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은 상태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써 원죄에 갇힌 영혼의 상태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상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된 상태"로써 소위 "천국(하나님 나라)이 임한" 상태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저 대화에서 제자는 애초에 모든 것을 "부정(어두움)"하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 분별된 상태는 옳은 것(정답), 분별되지 않은 상태는 그른 것(오답), 이렇게 전제한 후, 세상 모든 것은 "자아가 분별하기 전에는 오답인 상태"임을, 즉 "자아에게 분별되기 전의 세계는 부정한 상태"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대화에서 스승은 이미 관점 자체가 다르다. 나뭇가지와 바람은 애초에 구별될 수가 없다.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은 그저 자아의 인식이나 분별과 무관하게 실재이자 생명으로써 유유히 독립적으로 흘러가며, 그 실재(생명) 전체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 실재 안에 "들어가지 못한(=분리된)" 것은 오직 제자의 "분별하는 마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옮겨본다면 :
제자 : 주여, 저 사람은 구원을 받았나이까, 받지 못하였나이까?
스승 : 무릇 구원받지 못한 것은 너의 마음뿐이다.
번역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아무튼 간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식으로 보편적인(일반적인) 진리를 보편적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되고, 내 안에서 "체화"하여 "개인적인 것(특수한 것)"의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환 자체가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고, "때가 무르익으면 저절로 전환되는 것"에 가깝다. 끊임없이 그 말씀 하나를 떠올리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달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물의 원소는 우리 안의 어떤 "보편적(원형적) 영/혼"으로 이해할 수 있고, 구름/무지개의 원소는 이것이 이와 같이 "체화(육화)된 영/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관점에서 모던 타로, 특히나 황금새벽회의 비의적 가르침이 불과 구름의 원소, 물과 무지개의 원소 간의 연결성과 관계성을 너무 "그들만의 관점과 사고방식"으로 다소 일방적으로 구성해버리기는 했지만, 이건 타로 자체의 도구의 한계성으로 봐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황금새벽회의 회원이 되는 게 아니고 그들의 도구/이념을 통해서 보편적/원형적 진리를 내 안에서 체화하는 것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육과 영의 관계도 거의 이것과 유사하다.
- 영 : 보이지 않는 본질
- 육 : 물질(성), "보이는 것"
즉, 물질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육체뿐 아니라, 이러한 "드러난 것" 전체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마음도 물질이다. "현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영에 해당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마음도 물질이다"는 식의 설명은 상당히 낯설 것이다. 이 자체가,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물질주의적 관점" 안에 갇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주체성(주권)"과 "능동태/수동태(존재 방식)"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근본적인 "구조"의 차이 때문에, 스승의 말은 제자에게 알아듣기 힘든 선문답으로 들리고, 반대로 제자의 물음에 대해서 스승이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진리를 설명하려면 참으로 난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에 "(실재/생명/진리와)분리된 상태/구조"와 "하나된 상태/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시스템 자체가 전혀 다른 것이다. 윈도우에서 구동되는 프로그램을 매킨토시에서 작동시킬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다.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수행자는 "점진적 단계"로 공부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마음의 요소들을 이리저리 끼워맞추고 재구성하다 보면 언젠가 완전한 퍼즐을 맞출 것이고 그것이 깨달음이겠지, 하는 그 생각 자체가 애초에 완전히 틀렸다.
제자에게는 "보편적이거나, 특수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만이 정답이다. 둘 모두가 양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승의 안에서 "보편성은 특수성으로 현현되고, 특수성은 보편성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말하자면, 말씀(로고스)은 "우주 전체"에 있으면서 동시에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공부는 "구조를 전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하며, 개별적인 요소 하나하나를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분리된 구조의 핵심은 바로 "자기 의(義)", 그리고 "능동태의 존재 방식"이다.
자기 의라는 것은 곧 "내가 옳다", "내가 안다", "내가 정답이다", "내가 중심이다"...... "나, 나, 나....."와 같이, 자아를 "절대화"하는 인식 상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아 자체가 문제라고 봐선 안 된다. 자아는 엄연히 존재의 구조 안에 필요한 일부이며 없어서는 안 된다. 밥 먹고 숨 쉬고 걷고 움직이는 이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나를 "어디에" 위치시키느냐, 곧 좌표의 문제다. 주인이 아닌 것(자아)을 주인 자리(주권)에 자꾸 가져다 놓으려고 하니까, 호환이 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매번 충돌이 일어나며, 이것이 존재의 무의식적인 두려움/공포/불안의 "불안정한 진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번째는 "능동태", 즉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한다"의 사고방식/태도이다. 자기 의와 능동태는 애초에 하나이다. "나 중심(자기 의)" + "내가 한다(능동태)", 즉 능동태는 자아를 "행위자"로 보는 관점이다. 공부도 "내가 하는" 것이고, 수행도 "내가 수행하는" 것이며, 기도도 "내가 기도하는" 것이고, 기적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주권을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왜 그러한가? 기저에 "주권을 포기하면 죽는다"는 공포, 두려움, 불안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하는 것", 이것은 곧 "자기 의 + 능동태"의 구조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빛이 내 안에서 전혀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 것을 의미한다. 이 상태를 정확히 이르는 개념어 같은 게 없긴 하지만, 이것의 핵심은 "능동적 수동태"로 표현된다. 첫째, 주권이 나에게서 신에게로 넘겨진다. 둘째, 능동태가 수동태로 전환된다. 셋째, 신과 내가 분리되지 않고 연합한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신 중심의 능동적 수동태"로 부르며, "신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의 관점이라고 본다. 이 존재 상태가 완전히 체화되는 것이 곧 구원이고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일상 속의 모든 사소한 인식/체험들이 다 전부 "내가 한다"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소한 행위조차도, "내가 하늘을 본다"(자기 주권 + 능동태)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녀의 경우, "하나님께서(신 중심) + 나를 통하여(능동적 참여) + 하늘을 보이신다(수동태)"의 존재 방식이 된다.
핵심은 이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과거의 낡은 구조는 문자 그대로 "죽어야 한다." 에고의 죽음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구조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것", 곧 "신성의 부활"이다.
부활 이전의 나도 부활 이후의 나도 같은 나이고 전혀 다를 것 없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 자신이지만, 핵심은 나, 라는 존재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과 같이.
기독교든 불교든 결국 언어의 차이일 뿐, 핵심은 "본질적 전환"에 있다.
여담이지만, 내가 보기에 불교인들은 이것을 너무 "개념적으로" 접근한다. 진리는 개념이 아니다. 그 자체 살아 있는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너무 "윤리적으로(또는 법정적으로)" 접근한다. 교리는 인간의 윤리나 도덕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양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중간 어딘가에, "기독교적 불교", "불교적 기독교"..... 와 같은 그 무언가, 가 있다. 결국 이원성의 통합이며, 이것이 이루어질 때, 나보다 높이 계신 "실재"가 온전히 내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진리/생명" 안으로 옮겨오지 않고 "개념/관념"의 차원 안에 머무르면서, 개념 안에서 서로를 헐뜯고 죽이고 다투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한 모습들이 눈에 보인다. 보이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지금은 글쓰기)로써 그분의 뜻을 섬기며, 다만 성령께서 눈 뜬 맹인들 안에도 역사해주실 것임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는 수밖에는.
코앞의 현상에 집착하느라 그 너머에 실제로 계신 하나님을 놓치지는 말아야 한다. 차라리 형식은 다소 간에 내려놓고 포기하더라도 본질 그 자체에 초점을 정확히 맞추어야 한다.
어쨌든, 연금술에서 영(spirit)은 불과 공기(오쇼젠에서는 구름)의 원소로 표현된다(나타난다). 다만 애초에 연금술 상징 자체가 영을 "수직적 운동"으로 취급해버리는 서양 오컬트 특유의 어떤 영지주의적 이해 방식들을 전제하는 까닭에(순수한 영은 위에 있고, 그것이 지상에 내려오는 순간 타락한다는 식의 이원론적 사고), 연금술 상징에 근거하고 있는 모던 타로의 체계와, 다시 그것에 근거하고 있는 오쇼젠 타로의 구조 안에서의 영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살아 있는 영(Spirit)과는 좀 다르다. 불완전한 모습이 있다.
쉽게 말해, 실재로서의 영과, 연금술 상징으로서의 영은 다르다는 뜻이다. 전자는 완전하고, 후자는 불완전하다. 이것은 설명하기 힘든 차이이다. 나중에 실재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연금술 상징으로서의 영(spirit)에 집중해보자. 영의 두 원소인 불과 구름의 관계성은 긍정과 부정 두 관점에서 존재한다.
긍정적 관계 : 마음(mind)과 정신(spirit)이 수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잠재적 연결성)
부정적 관계 : 양자의 연결이 에고(ego) 안에서 분리(단절)되어 있다. (현 상태의 분리성)
사실 나는 이러한 영지주의적 관점 자체가 오늘날 종교 전반에 걸쳐서 만연해 있다고 느낀다. 기독교든 불교든 간에, 지상(세속)은 더러운 것이고 종교적 공간/장소/공동체는 신성한 것이라는 식의 구분들이 너무 많다. 주류 기독교 교단에서는 영지주의를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정작 그들이 설교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식들에서 영지주의 특유의 사고방식들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것이 참으로 슬픈 아이러니이다.
오컬트 시스템도 사실 이러한 측면들을 대부분 전제하고 있고, 이것은 내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서양 오컬트 세계에 대해 실망하고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위와 아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위가 신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래 역시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진실한 것이다. 애초에 인류와 세계가 "원래부터 구원받아야 할 자격"이 없었더라면, 주께서 어째 친히 "아래"로 성육신하셨겠는가. 따라서 아래를 모욕하는 것은 곧 그 아래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영(spirit)의 차원에서 불과 구름을 "연결"시키는 것(정확히는, 잠재적으로는 원래 하나였지만, 현재는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것을 다시 연결을 활성화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깨달음"이며, "나라가 임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애초에 "나"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께서 하실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아래", 즉 구름의 차원의 실체를 정확히 관찰하고 마주하는 것(회심)이다. 먼저 어두움을 통과해야만 빛이 보이는 법이다. 불을 끄지 않고서 어찌 빛을 보려고 하겠는가.
오쇼젠에서, 불의 원소에 속한 카드들은 "부정적인" 카드들도 있고(예: 9w - 소모, 10w - 억압 등), 긍정적인 카드들도 있다. 그러나 모던 타로의 상징에서 애초에 불의 원소 자체가 순수하고 완전한 있는 그대로의 영이라기보다, 자아 안에서 "구현된" 영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더 쉽게 말해서 이건 각 위치의 불/구름의 카드들을 연결해서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마이너 2번 카드에 해당하는 불/구름의 카드들을 보자.
불 2번 : 가능성
구름 2번 : 정신분열증
가능성 카드의 메시지는 "자아/타자의 분리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고, 정신분열증 카드의 메시지는 "분리된 이원성의 모순/갈등"이다. 해설서 본문의 메시지는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가능성 카드는 결국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자아와 타자"...... 등의 이원성이 통합되는 과정과 이로 인한 지유를 의미한다. 이원성에 근거한 인식/분별은 "통제"하려는 의도(공포, 불안)에서 비롯한 것이고, 따라서 무의식의 어두움이 내 존재와 삶을 지배하게 되며, 따라서 삶은 "어두움에 의해 획일화된 방향"대로 구속당하게 된다. 이것이 오쇼가 말하는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상태"이다. 그러나 인식/분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을 넘어서, 이원성이 곧 본래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인식/분별하는 세속적 자아가 아닌, 이원성 모두를 통합하는 더 높고 완전한 영적 자아(영)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가 삶을 인도하고 이끌게 된다. 이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았던 문들이 열리게 된다.
반대로 정신분열증 카드의 경우, "이것 아니면 저것", "정답 아니면 오답"...... 과 같은 이원적 분별의 관점을 전제하며, 유감스럽게도 자아와 타자와 세계는 이원론적 분별의 틀 안에 정확히 끼워맞춰지지 못한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이 우리 삶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의 한쪽 부분은 정답이지만, 다른 쪽 부분은 오답일 것이고,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그 일의 한쪽 측면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쪽 측면은 포기하거나 받아들여야 할 대가가 된다.
영(spirit) 안에서 불/구름의 원소가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가능성과 정신분열증의 긍정적/부정적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 긍정적 연결성 : 이원성의 양 측면을 모두 "열어둠(허용함, 받아들임)"으로써 (가능성) → 분리/단절된 것들을 극복하여 하나로 통합한다(정신분열증).
- 부정적 연결성 : 에고의 이원론적 분별에 집착하여 "폐쇄된(통제/억압된) 상태"에 갇힘으로써 (가능성) → 분리/단절된 상태가 더욱 가속화된다(정신분열증).
물론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층적인 해석들이 가능하다. "가능성은 어느 정도 열고 있는데, 정작 분리/단절/분열은 아직 남아 있는 상태"가 있을 것이고(정방향 가능성 + 역방향 정신분열증), 반대로 "여전히 인식/분별 안에 갇혀 있는데, 분리/단절/분열은 조금씩 극복하는 상태"가 있을 수 있다(역방향 가능성 + 정방향 정신분열증). 후자의 경우, 자기 안의 모순과 불안정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영(spirit)은 불 + 구름의 연결성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직관적인 메시지를 드러낼 수 있다. 이를테면, "소모(불 9번)" + "슬픔(구름 9번)"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에고는 끊임없이 통제/억압하려고 들며 이것이 소모된 상태를 낳고, 여기에서 슬픔이 발생한다(통제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슬픔). 그러나 반대로 통제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슬픔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때, 통제/억압하려고 드는 에고의 무의식적인 의도/관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절대 통제되지 않는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드는 모순", 이것이 바로 에고(ego)이며, 따라서 소모와 슬픔은 하나다.
이와 같이, 오쇼젠에서 영은 분리/분열된 상태(구름의 원소)와 통합/연결된 상태(불의 원소)가 위아래의 수직적 질서를 형성하는 구조나 체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영의 차원에서 핵심은 마음과 정신이 분리되어 있는 것을, 마음의 분열을 넘어서서 정신의 온전함(통합, 하나됨)을 회복하는 과정,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좀 더 실제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원소를 에너지로 보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다. 예를 들어 :
- 불의 에너지 : "의지", "정신"......
- 구름의 에너지 : "마음", "생각"......
다른 카드들을 가져와보자. 불 10번은 억압이고, 구름 10번은 부활(다시 태어남)이다. 연금술 상징에서 영 그 자체의 특성상 10에 가까워질수록 영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에고의 구조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즉, 마음만으로는 절대로 억압의 구조 전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불 1번, 즉, "근원", 내재적 신성이 그때 깨어나게 된다. 깨달음이 온다 : "아, 나는 마음이 아니구나. 나는 마음보다 '더' 높구나." 이것이 또한 구름 1번으로 연결되어, 의식/정신이 "마음에 집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마음을 관찰하는/들여다보는 상태"로 상승하게 된다.
구름의 에너지가 마음과 마음의 작동이라는 표면층이라면, 불의 에너지는 그 표면/현상을 일으키는 구조적인 에너지라고 이해할 수 있는 셈이다. 이 관점에서, 영에 해당하는 두 장의 10번 카드들은 "닫힘+열림"이다. 즉, 부활 이전의 "나"의 상태가 곧 무의식의 구조 안에 완전히 억압된(닫힌) 의식 상태, 소위 "꿈꾸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억압의 구조가 극에 달할 때, 마침내 마음에 집착하는 망상적 의식 상태에서 저항하려고 하는 "더 근본적인" 어떤 의식/정신의 에너지가 최초로 스파크가 튈 것이다. 이것이 점차 "진화"하기 시작한다면,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의 의식의 초점이 마음에서 영(Spirit)으로 점차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불과 구름의 원소의 관계성을 이와 같이 최대한 설명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이것은 "구조의 전환"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낡은 구조 안에 갇힌 상태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추상적으로만 보일 것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부하는 사람은 일단은 이러한 대략적인 구조/연결성을 이해한 다음, 오쇼젠 타로의 각 카드들을 불-구름, 물-무지개, 와 같은 방식으로 '연결해서' 보는 관점을 길러야 한다. 이때, '영', '혼'이라는 더 큰 차원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한 번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쉽다. 이해가 이해를 낳고, 변화가 가속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