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Soul) : 물의 원소, 무지개의 원소

by 생명의 언어


실질적으로 영적 세계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내가 권고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 "개념화하지 마라. 받아들여라."


영(Spirit)은 마음(mind)이나 자아(ego)와는 명백히 다른 차원이다. 인간의 이성, 언어, 지식, 관념, 그러한 것들은 명백히 마음이나 자아의 차원에 해당하며, 영과 자아는 우주적 에너지의 레벨에서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이것이 바로 영의 절대성, 유일성이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 곧 우리 형제들 모두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 분이시다. 그분은 인격을 넘어선 초월과 영원으로 계시지만, 동시에 인격을 통해서"만" 드러나시는 분이다. 단, 이때의 인격은 에고성, 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자아 안에 영이 들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영 안의 일부가 자아일 뿐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존재와 생명들은 영 안에서 하나이며, 자아, 그러니까 개체의식으로서의 "나"는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2:20) 나는 이것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지만(이는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의 내 개인적인 신앙임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이것은 내 안에서 자아의 주권이 죽고 그리스도께 통치를 받는 영으로의 다시 태어난 자의 내면의 구조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증언 중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 하나를 증언한 것만으로도 지상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했다.


결국 언어가 복잡할 뿐, 본질은 단순한 것이다. 내 안의 "자아성"이 죽고, "영(Spirit)성"이 부활해야 한다. 죽음과 부활, 그리고 십자가는 이 "존재 구조의 전환"의 원형적 상징이며, 가장 강력한 실재성이다. 부활한 자의 영은 이제 "나는..."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자아가 통제하고, 영이 억압받는 살아 있는 지옥이 바로 개체의식, 곧 에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영혼 안에서는, 영이 먼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영혼에게 전하며, 영혼이 빛과 에너지로 의식에게 전하면, 그것을 자아와 마음이 듣는 구조이다. 자아는 힘이 없다. 자아는 자기 위의 수많은 "상위 의지"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자아는 진실로 그들을 "본다(I See You : 아바타에서 등장한 이 대사는 상상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본다는 것은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재적인 영(Spirit)에 대해서는, 사실 관념으로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난번 글에서 말한 것처럼, 연금술 상징에서는 영적 실재로서의 영이라기보다, 자아의 층위에서 그래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실재적인 에너지/힘/빛으로서의 영(spirit)을 봐야 한다. 즉, 실재로서의 영과 에너지로서의 영이 다르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로서의 영은 정신이 관장한다. 의식과 정신의 구조가 전환되는 것, 내면에서 어두움이 죽고 빛이 부활하는 것, 정신이 열리는 것, 의식이 깨어나는 것, 그러한 모든 보이지 않는 차원의 "수직적" 구조와 체계들이 전부 다 영에 해당한다. 신성과 교감하는 것 자체는 영혼(Soul)의 일이지만, 그러한 "수직적" 교감과 연결과 관련해서도 영의 에너지(spirit)가 사용되거나 활성화된다. 말씀을 읽을 때(이때 읽는다는 뜻은 개념적 이해가 아니라 묵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음성을 들을 때, 진리를 논하거나 영적인 주제와 관련하여 대화를 나누고 소통할 때, 이 모든 순간들에서 영의 에너지가 사용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영의 에너지는 그의 정신의 "레벨"이 높은가 낮은가, 에 따라서 달라지며, 또한 그의 의식이 얼마나 열려 있는가, 등에 따라서 달라진다. 즉, 수준 차이가 난다. 저레벨 마법사가 고레벨의 의식 마법을 실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의식 구조의 전환은 단계적 상승이 아니며, 점진적 변화도 아니다. 한순간의 폭발적인 돌파, 상승, 전환이다. 그것이 영의 본질이고, 영 에너지의 본질이다. 점진적, 단계적 수행/공부는 실제로 운동케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영의 에너지를 충분히 응축시키기 위한 '반복적 작업'일 뿐이다. 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에고를 강화할 뿐, 영을 응축시키지는 못하게 된다. '의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부의 핵심은 '초점을 맞추는 것', 곧 정렬이다. 마치 운동을 할 때 근육의 어디에 자극이 들어가는지를 느끼면서 운동을 해야지 효과가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다. "내가 수행할 때 내 영이 조금씩 변화한다(높아진다)"는 느낌으로 하면, 그건 자아의 반복일 뿐이지 죽음도 부활도 아니다. "내가 수행을 아무리 해봤자 수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초점을 맞추고 정렬하기 위해서 꾸준히 한다"고 이해한 채로 접근해야 한다.


대부분 영의 에너지는 "보편적"이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영 에너지는 많이 쳐줘야 20~30% 수준이다. 평소에 독서나 정신적 사유 등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수치값이 절반 가까이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49%에서 51%가 되려면, 여기에도 "돌파"가 필요하다. "내 정신력"이 아니라, "상위 자아(Spirit)의 의지가 자아를 통하여 현현한다", 즉 "능동적 수동태"로 완전히 전환되어야만, 마침내 51%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넘어서기 전과 후는 압도적 격차가 있다. 넘어서기 전에는 "논리성, 합리성"의 구조적 한계를 절대 넘어설 수가 없다. "내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정신 안에서 구현되지 못한다." 그러나 51%를 넘어서는 순간,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를 통하여 이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와 같은,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선명한 진리가 마침내 현현하게 된다.


문제는, 영 에너지라는 게 참으로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넓게 보면 신비주의와 복음주의 간의 균형이기도 하다. 즉, 단순한 "체험" 쪽으로만 기울어져도 안 되고, 너무 극단적으로 "교리"적으로만 기울어져도 안 된다. 체험적 층위와 교리적 층위가 영 안에서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르침을 믿는 것으로써 변화하는 영 에너지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적인 영적 감각/느낌으로서의 영 에너지를 느끼고 감지하고 체험하고 받아들이고 다루는 영역들도 존재한다. 양자 모두가 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대개 영적 세계에서, 수행자나 능력자들은 어느 한 쪽으로 극명하게 치우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지나치게 신비적인 체험이나 수행만을 강조하거나(예: 氣 체험 등), 지나치게 가르침만을 강조하는 등(예: 형식주의, 교리주의, 문자주의 등), 양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성적 사유와 이를 통한 정신적 깨달음이 없는 신비 체험은 단순히 낮은 단계의 오컬트에 불과하고, 반대로 삶의 실재가 되는 체험, 흐름,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의 정신적, 지적 사유는 그저 공허할 뿐이다. 양자는 상호완전성으로 하나를 이룬다. 체험이 진리를 현현케 하고, 진리가 체험을 성화케 한다. 영 에너지는 양 측면 모두를 거느릴 수 있어야 한다. 영 에너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직관"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영 에너지 그 자체를 체화(體化)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삶 전체가 곧 하나의 질서에 의해서 구조지어져야 한다.


영 에너지에서, 불의 원소는 순수한 영 에너지 자체가 높은 차원의 정신적 각성이나 직관, 깨달음 등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상위 자아", 정확히는 자아, 라는 것은 맞지 않는데 이는 에고성을 연상시키는 측면을 어쩔 수 없이 내포한다. 정확히는, 상위 "의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위 차원에서는 인격(에고)이 의지(정신)를 지배하지만, 상위 차원에서는 그 구조가 역전된다. "아버지 자신"과 "아버지의 의지"는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의지로써 자기를 드러내시고, 동시에 아버지의 의지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로 말미암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상위 차원에서는 의지가 인격(에고)보다 더 높다. 어떤 고정된/독립된 실체로서의 존재가 별도로 있고, 그 존재 안에서 의지라는 별개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신은 의지이다."


즉, 불의 원소 자체가 "내가 통제하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이다. 영 에너지는 "내(자아) 안에(내면)" 있으면서, 동시에 "나(에고)보다 더 앞선 것(영 선행성)"이고, 또한 "나(에고)보다 더 높은 것(영 주권성)"이다. 이것을 제대로 깨달아야만 영 에너지가 그저 관념적 수준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실체화된다. 자기 안에서, "나"로서의 자연스러운 연속성을 분명하게 가지면서도 동시에, 삶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자아의 공포나 욕망대로 흔들리지 않으며 끝끝내 영이 인도하는 좁은 길, 좁은 문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자 하는, 설명할 수 없는 "나보다 앞서 있는 높은 의지"가 실제로 일어나며, 그 의지가 내 삶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이끄는 것이다. 이것이 영 에너지가 실체화될 때, 정확히는 51% 이상으로 전환할 때,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나를 넘어선 의지가, 나를 다스리고 인도한다. 여전히 "나", 밥 먹고 숨 쉬고 똥 싸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나, 내게 익숙한 과거 경험의 총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한다. 여기에, 나는,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나"가 주권자, 행위자에서 물러나서, 그저 관찰자, 동역자로써 영의 의지에 동참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영 에너지의 가장 치명적인 매력이자 동시에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충돌"이다. 위와 아래가 정렬되는 것이 곧 "부활", 거듭남이라면,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영 에너지가 억압/봉인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영 에너지가 최초로 불꽃이 일어나고, 이것이 활활 타오르면서 기존의 낡은 에고성의 구조가 무너지고, 파괴되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는" 에고의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 그 과정은 과거의 에고의 어두움의 강도나 밀도, 즉 죄성이나 업이나 까르마 등 다양한 영적 상징들로 불리는 바로 그 무의식적인 어두운 에너지들이 얼마나 깊고 단단하고 큰가, 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걸쳐서 자아의 죽음을 겪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한순간에 영 에너지가 높이 깨어났음에도, 에고의 낯고 거칠고 투박한 의식의 진동수와의 "격차", "시차(時差)"를 조율하고 통합하는 것이 길고 고통스러운 영혼의 시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부활 이전의 에고는 이미 "위와 아래가 단절되어 있는 상태"이며, "영이 에고 안에서 억압당하는 상태"이며, "반역의 상태"로써 어두움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 분리된 구조를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이 십자가의 길이다. 자기 안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의 부활과 함께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의식 구조 전체가 재편되는 길이다. 이때, 죽음은 진짜가 아닌 에고의 주권의식이 죽는 상징적 죽음이지만, 동시에 에고로서는 "진짜" 죽음이기도 하다. 내가 살 길은 없다. 나는 실제로 내가 고통스럽게 짊어진 십자가 위에 누워서 못박혀야 한다. 살 길은 없다. 내가 죽는다고 하여 부활이 반드시 따를 것이라는 기대조차도 없어질 것이다. 한때 충만했던 성령이 더 이상 나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고, 한때 내게 눈빛을 보이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던 구주께서 내게 침묵하실 것이다. 어느 철학자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던가? 아니다, 신은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다만 "침묵하실" 뿐이다. 신의 침묵이 곧 사람에게 신의 죽음이다.


이것이 공기의 원소이다. 즉, 자아라는 낡은 구조가 부서지고, 깨지고, 파괴되고, 무너지고, 좌절되고, 그러한 고통스러운 자아의 죽음의 과정들을 낱낱이 통과해야만 한다. 마음이라는 낡은 구조를 십자가처럼 짊어지고서, 마음의 죄성이 공포에 미쳐서 발악하는 그 채찍질을 맞으면서, 힘겹게 나의 자아가 죽는 그 언덕까지 가야 한다. 언덕을 간다고 해서 내가 살 길이 있겠는가? 아니다. 그 언덕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내가 짊어진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것이다. 살 길은 없다. 희망 따위는 없다. 그러나 희망 없음과 절망이 같은 뜻이 아님을 그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에고가 살아남으려는 모든 희망을 버린 그 순간, 어느 순간, 마침내 나는 언제나 신을 생각하고, 언제나 신을 느끼고, 언제나 신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볼 것이며, 수 년이 될지 수십 년이 될지 알 수 없는 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험의 한복판에서도, 단 한 순간도 나의 영이 신을 원망한 적이 없었음을, 오히려 날이 갈수록 홀로 신을 경외하고 찬양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즉, 영 에너지는 "정신"과 "의식"의 구조가 전환되는 역동성과 운동성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사실 이 이상 설명하기가 힘들다. 영 에너지는 실제로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정신과 의식 안에서만 흐르는 것이기도 하다. 영 에너지는 현실의 삶과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영 에너지가 활성화될 때, 깨어날 때, 그때 자아는 자기를 넘어선 차원의 진리와 실재를 보고 듣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즉 영 에너지로 말미암아, 마침내 자아는 "신이 살아 계심"을 자각하고, 믿기 시작한다. 그 순간, 자아는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 더 이상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는 영 에너지가 아니다. 이제 혼(soul)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차례이다. 혼 에너지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형상과 꽤 많이 가깝다. 실재로서의 혼(Soul)은 에너지체다. 이때 체, 몸이라는 것은 어떤 고정된 상태나 형상으로서의 존재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혼 그 자체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면서 운동하며, 그 운동하는 흐름 자체가 곧 실재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혼은 몸의 실체이다. 혼이 있기에,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존재에게 실재성의 직접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혼이다.


영이 실재 그 자체를 직관한다면, 혼은 체험의 층위이다. 그러나 이 체험이라는 것이, 현상계에서의 관념과는 많이 다르다. 세속적인 관념에서 체험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전선을 형성한 채로 마주보며, 객관을 감각 경험을 통해서 주관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지는 주관 안에서 재생된 이미지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상위 차원에서, 체험은 곧 실재 그 자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즉, 현상과 본질이 별개인 게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혼 에너지가 활성화될 때, 혼 에너지를 매개로 하여, 존재는 신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신의 존재를 느끼거나, 신의 음성(진동/공명 등)을 듣는 등, 그러한 신비 체험들은 그저 자아 안에서 일어난 주관적인 감정/체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자체가 곧 신성이 실제로 "드러난" 것이 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혼 에너지에 의해서 현현되지 않는 한, "미현현"된 실재는 애초에 실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본래 아버지의 의지(WILL)에 따라서 창조된 세계는 "위와 아래의 상호완전성"을 전제하며, 위는 아래를 통하여 현현하고자 하는 운동성을, 아래는 위를 통하여 완전해지고자 하는 운동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실상 실재라는 것은 상위 차원, 곧 위를 의미하며, 아래와 분리/독립된 그 자체 위, 라는 것은 애초에 "나라(아버지의 통치, 주권, 질서)"가 아니다.


이 점에서, 영과 혼 중에서 영이 무조건적인 주인공이고, 혼은 그저 영을 보조하는 수준으로만 이해되는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앞에서 영 에너지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현현되지 않은 실재는 실재가 아니다"는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성육신에 대한 관상적 체험"으로 이해해볼 것을 권유한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육신을 통하여 "현현된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셨다, 는 이 영적 신화에 대해서, 우리가 역사성과 특수성을 논하느라 정작 그 사건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성육신의 핵심은 "케노시스", 즉 신의 "의로움"에 있다. "상위 존재가 의도적으로 진동수를 낮추어서, 낮은 차원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곧 하나님만이 거느리시는 신의 성품, 곧 "거룩함", "신성함", "고귀함"...... 과 거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때, 신의 성품, 즉 "거룩함"은 오직 혼 에너지를 통해서만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성육신하셨겠지"하고, 그분의 내려오심, 자기를 낮추심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오히려 온 세상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는 마치 "축복과 은혜를 맡겨놓기라도 한 마냥", 어서 이번주 할당량에 해당하는 축복과 은혜를 달라고, 교회의 벽에 지금도 못박혀 계시는 그리스도께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리고, 심지어는 때로 협박까지 하는 모순을 보인다. 그리고는 그 주의 할당량을 다 얻어가면, 고작 돈 몇 푼 헌금함에 넣거나 그마저도 외면한 채로 우루루 다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그분의 성전은 텅 빈 채로 슬픔에 잠긴다. 그곳 어디에도, "은혜 주시는 주(主)"가 아니라, "거룩하신 나의 주(主)를 뵙고자 하는 열망과 기쁨 그 자체"로 서 있는 자가 없다. 설령 그분이 은혜를 주지 않으시더라도, "할당량"을 받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절실하고 가난한 문제들을 그분께서 끝끝내 외면하시더라도, 아무것도 아무 역사도 이루어주지 않으시되 오히려 나날이 시험만을 더하시더라도, 주일마다 그저 "나의 주를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과 사랑과 기쁨 하나로 그곳에 참여하는 순결한 혼(Soul)이, 그곳에 아무도 없다.


이것은 물론 은유이다. 당연히 교회 안에는 그분을 진실로 영접하는 수많은 헤아릴 수 없는 영혼들이 있다. 다만, 이러한 은유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내면의 실체를 들여다보라, 는 의도로써 나는 지금 이리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경외하는 자는 신을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굳이 차이라면, 지니에게는 일방적으로 명령하지만, 하나님께는 "예의상"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신이 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니까, 신이 나에게 돈도 주고 집도 차도 주고 자식들 서울대도 보내주니까, 그래서 나는 신을 믿는다, 내지는 신을 경외한다, 는 것은...... 신을 "도구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 단계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머무름은 죄이고, 운동성은 은혜이다. 나아가라. 그리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역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곧 "침묵하시는 주(主)"를 만나뵙게 된다. 그분은 내 삶에서 그 어떤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신다. 내 소원도 들어주지 않으시고, 내가 얼마나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절실히 소망하였는지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면서도, 기어코 번번히 나를 좌절시키시고, 절망시키시며, 모든 형제들을 다 떠나게 하고, 철저히 의지할 데를 부수신 끝에, 광야에 홀로 두게 하신다. 나의 주는 침묵하시는 주이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함께하시는 주이다. 금은보화와 권세와 영광은 허락하지 않으시더라도, 때때로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은 내려주시는 분이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를 이끄시는 분이시다. 바로 그리설 때, 그의 안에서 혼 에너지가 크게 깨어난다. 더 이상 욕망이라는 불투명하고 끈적거리는 것들이 없어지며, 마침내 자기 안에서 순결한 에너지 자체, 곧 "여성성"이 깨어난다. 그때, 가슴은 드디어 따뜻해지기 시작하며, 심장은 드디어 박동하기 시작한다. "숨결"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 혼 에너지가 깨어나고 활성화될 때,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치욕이고 모욕이고 슬픔이었는지를, 이 세상 그 어떤 크리스천도 알지 못한다. 성육신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치욕받으신 게 아니라, 애초에 초월과 영원으로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 많은 종의 형체"를 입고 내려오신 것 자체, 그리하여 이 땅을 밟으신 것 자체, "스스로 자기를 낮추사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 자체가 그분의 "존재 자체"에 치욕이셨고, 모욕이셨으며, 크나큰 슬픔이셨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리하셨다. 오늘날 수많은 형제들은 선지자와 예언자와 사도들의 자기를 낮춤에 대해서는 찬양하고 경배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성육신 자체가 얼마나 큰 의로움이고 사랑이고 희생이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혼 에너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과 직접 교감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그때, 그분께 성육신 자체가 곧 크나큰 사랑이고 희생이셨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성품임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혼 에너지는 "신성과 교감되고 연결되는 유일한 질료"로써 운동한다. 사실상, 사람이 신을 "보는" 것은 오직 혼 에너지로 말미암음이다. 영은 신성과 직접 정렬되는 문자 그대로의 신의 "실재"이지만, 혼은 바로 그 영적 실재가 보이는 방식으로 현현하게 하는 힘, 에너지, 원리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영 에너지와 혼 에너지는 서로를 완전하게 한다. 영은 혼을 통해서 현현하고, 혼은 영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다. 처음 글을 쓸 때에도 말했지만, 이러한 것들을 굳이 엄격하게 구별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때가 되면, 구체적인 조건/상황이 되면, 어느 것이 영에 해당하고 어느 것이 혼에 해당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혼의 경우에는 영의 "분리성"과 달리, "연속성"을 갖는다. 혼 에너지에 해당하는 두 원소는 물과 무지개인데, 오쇼젠에서 이것을 무지개로 표현한 것은 사실 신성이 물질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 상태에 대한 보편적 상징성일 것이라고 이해한다. 다만 나는 그런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썩 지향하진 않는다. 물질성은 본래 어두움이다. 정확히는, 물질성은 그 진동수 자체가 빛보다 어두움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위로 갈수록 순수하나 감추어지고, 아래로 갈수록 혼탁하나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위와 아래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내 안에서 순수한 혼 에너지 그 자체가 곧 물의 원소이며, 이러한 혼 에너지가 "육화(肉化)"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실체"가 된다. 예컨대, 깊은 관상적 체험들 가운데에서 신성과 교감하며, 그 교감과 연결이 무르익게 되는 순간, 신앙은 그저 성스럽고 멀리 떨어져 있는 무엇, 이 아니라, "나의 삶과 일상 속에서 함께하는" 것이 된다. 일상 속의 모든 사건과 현상과 체험들 가운데에서 오직 신성만이 계시며, 신성과 교감하고, 신성께 순종하는 것만이 그 존재의 본질이자 삶의 유일한 목적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육화이다. 즉, 혼은 "순수성이 육화되어 무르익고 완성됨"이라는 아름다운 구조를 갖는다. 이는 여성성 자체가 갖는 전반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영은 "수직"이기에 그만큼 영광스럽지만, 동시에 분리, 단절, 충돌, 죽음 등의 위험성도 갖는다. 그러나 혼은 "수평"이기에, 그만큼 "덜" 영광스럽지만,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의 따뜻함과 온기와 평화와 행복 등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육화"는 성화의 최종적 단계이다. 즉, 내 안에서 보이지 않는 주권의식 자체가 죽고 거듭나는 것은 영 에너지로 인한 것이며, 칭의, 곧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적 사건이며, 곧 출발선이지만, 그것은 중심에서의 전환일 뿐, 그 중심이 혼 에너지를 통하여 충분히 "현현"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성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심에서 전환되었으나 성화, 육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체화되지 못한 진리이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현현되지 못한 영은 미숙하고 열등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성육신의 위대한 진리이다.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가난한 것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라는 법이며, 이것이 높고 완전한 영의 순수한 운동성이다.


즉, 중심부의 영 에너지가 점진적으로 혼 에너지를 통하여 "존재의 외곽"까지 물들이게 되는 과정, 으로 이해하면 된다. 물의 원소는 혼 에너지의 "순수한 층위"이며, 이것은 신성과의 연결, 교감으로 인한 자신의 에너지체 자체가 정화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주로 성화의 초기 단계에서 이것은 "가슴이 열린다"는 상징으로 은유되기도 한다. 이때, 이것은 단순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그저 삭막하고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 성화의 단계에서 전에 없이 감성적이게 되며, 하나님의 성품과 동화되고 물들어가며, 낮아지기를 소망하고, 부끄러움과 자기를 낮춤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오해받더라도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는 등, 그의 내면에서의 혼 에너지가 전에 없이 충만해지고 맑아지고 따뜻해지는 과정들이 성화의 본격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때, 이 혼 에너지는 영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나를 넘어서는, 나보다 높은" 존재이다. 애초에 혼 에너지를 자아가 거느리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혼 에너지가 마음/자아의 차원에서 드러나면, 그게 우리가 소위 "감정"이라 부르는 물질이 되는데, 감정보다 상위의 차원이 바로 혼이다. 혼이 나를 이끌 때, 내 안에서 감정/감수성의 층위들은 혼의 인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변화한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체험이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내 안의 정서와 감정과 감수성들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며, 과거와는 너무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교만했던 자가 순종하게 되며, 어리석었던 자가 지혜롭게 되며, 무감각했던 자가 따뜻해지고, 냉정했던 자가 순결해지며, 계산적이었던 자가 희생하고 헌신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애초에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며, "내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혼 에너지를 통하여 영 에너지가 "현현"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때, 성화된 물의 원소들은 곧 신앙의 핵심 질료가 된다. 성화된 혼 에너지가 내면에서 늘 충만할 때, 그는 언제 어디서나, 교회 안이든 밖이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신부로서의 존재로 거한다. 이러한 혼 에너지의 체험들이 깊어지고 충분히 쌓일수록, 이것을 통하여 다시 영 에너지가 각성되고, 선명해지게 된다. 사랑을 통하여 "영광"이 깨어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자가 권위를 보이면 온 세상의 반란을 일으키지만, 사랑하는 자가 권위를 바로세우면 온 세상이 이에 순응하게 된다.


무지개의 원소는 이러한 혼 에너지가 "쌓여서" 형성된 일종의 실체화된 물질이다. 신앙의 경험들이 쌓이고 무르익으면서 마침내 내 안에서 단단한 토양을 형성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마침내 영적 실재는 "실제적인 삶"으로 현현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곧 삶의 구체적인 행위와 구조와 경험과 가치들로써, 신성이 현현케 되는 것이다. 이제 그의 신앙은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 그 자체가 된다. 그의 일상적인 삶과 그 삶 속에서의 행위와 실천들이 전부 다 "신성의 현현"이 된다. 닫힌 자가 사랑할 때, 그것은 그저 욕망과 공포의 투영, 투사, 동일시에 불과하지만, 신앙이 무르익은 자가 사랑할 때, 그것은 곧 "신성을 나누고 공유하는" 성사(聖事)가 된다. "물질이 성화되는 것", 곧 실체변화하는 것이다.


사실상 기도도 이와 같은 순서로 작동한다. 먼저, 신성과 정렬한 영 에너지가 운동하며 위에서 아래로 신성이 운동한다. 그리고 이것을 혼 에너지를 통하여 현현하여 일으키며, 혼 에너지를 통하여 현현된 신성의 빛/에너지가 물질에 투사되면서, 물질을 성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관념이 아니다. 실제로 움직이고 운동하는 힘이고, 에너지고, 원리이고, 법칙이다. 신앙을 품은 자는 더 이상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나, 나의 영이 나의 혼을 통하여 자기를 드러내며, 그때에 내가 머무르는 모든 공간들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내가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은 생명으로 화하며, 마침내 불안과 공허라는 이 세상의 어두움은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참된 진리로 실체변화하게 된다.


이로써 영 에너지와 혼 에너지는 서로 각각 독립된 채로 운동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깊은 기도와 묵상에 잠겨 있을 때, 더욱 선명해지는 영 에너지는 곧 그 자체로 혼 에너지를 성장케 하며, 신성과 생명과 교감할 때 충만해진 혼 에너지는 그 자체로 영 에너지를 더욱 선명하게 깨어나게 한다. 영은 혼을 통하여 현현하고, 혼은 영을 통하여 영광을 얻는다. 상호-운동성인 셈이다.




원소와 영/혼에 대해서는 대략 이와 같이 다루었다. 사실, 부족한 점이 한참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각각의 카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첫번째 카드는 Page of Wands, 오쇼젠 타로에서는 불의 시종에 해당하는 "놀이" 카드이며, 나는 이것을 "유희", 또는 "기쁨"이라고 부른다. 왜 오쇼는 기쁨을 혼이 아닌 영에 배치했을까? 이것은 기쁨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신 운동"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은유이며, 반대로 물의 시종에 해당하는 카드는 "이해"라고 이름붙임으로써, 이해가 정신 운동이 아니라 "감성 운동"임을 보여준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이제, 본격적으로 코트 카드의 세계로 뛰어 들어보자.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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