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시종 : 기쁨

by 생명의 언어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서, Page of Wands(이하 Pw)는 숲(영) → 성(혼)을 직선으로 올곧게 바라보는 인물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이는 순수한 이상, 본질, 철학, 형이상학...... 등, 영에 해당하는 순수한 에센스를 세상에 공유하고 전파하려는 불의 운동성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순수한 영, 즉 불의 원소가 가진 본질적인 운동성이 "영을 세상에 현현하는(드러내는) 것"에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즉 하늘의 이상은 땅의 현상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현현하는 의도, 목적을 그 본질상 품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땅과 분리된 그 자체 독립적인 하늘은 없다." 이 때문에, 모던 타로에서는 완드(Wands)는 "철학, 형이상학"이면서 동시에 "노동, 운동, 활동"을 동시에 의미하는 독특한 위 - 아래의 연결성을 지닌다.


이것은 영적 세계의 근원적인 이원성으로서의 영(spirit)과 혼(soul)을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가, 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색깔 상징으로 배치한다면, 서양 오컬트에서도 영을 남성성, 즉 이상이나 본질, 형상, 에센스 등을 드러내고 펼치려는 강렬한 "창조"의 운동을 드러내는 운동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고, 동양에서도 같은 의미로 "양"을 드러나는 현현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영성에서는 드러내고 펼쳐지는 양적 측면에 영을 배치하고, 수렴하고 받아들이고 응축하는 등의 음적 측면에 혼을 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나는 이러한 영 / 혼 이해는 너무 "인간 중심적인" 사고라고 본다. 인간의 의식은 근본적으로 "안에서 밖을 지향하는" 관점을 지닌다. 즉, "내가 - 대상을 - 인식한다"는, "공격적"인 의식 구조를 근본적으로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그 한계상, 전통적인 영 - 혼 이해는 자아(ego)의 주체적인 관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점을 전환한다면, 오히려 영은 "드러나지 않은 순수한 근원, 본질"로서의 음적인 고요한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혼은 생명력, 살아 있음, 열망, 기쁨, 사랑 등의 실제적인 에너지, 힘 등의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영 / 혼 이해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간 중심적 인식체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오히려 혼을 통해서 영을 지향하는, 즉 자신의 내면과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생명력과 교감하고 이를 통하여 사랑, 열망, 기쁨 등의 혼의 에너지를 활성화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영의 고요하고 깊은 세계를 점차 깨달아가는 그러한 지향성이 인간 존재의 "완성"적 측면에서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점에서 오쇼젠 타로는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를 별다른 비판적 재구성 없이 거의 완전히 그대로 가져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Pw의 기본적인 상징성을 전제로 하여 오쇼젠 타로의 기쁨 카드를 이해해야 한다.


Pw (웨이트) : 순수한 영(철학, 형이상학)을 세상에 공유하고 전파한다(혼).

불의 시종 : 기쁨(오쇼젠) : 의무/책임이 아닌 순수한 자기 표현으로서의 정신 운동.


이렇게 연결해서 본다면, 오쇼젠 타로에서 순수한 영, 즉 불의 원소는 자기 안의 "창조적 에너지"이며, 이것은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 공포, 불안의 어두운 정신 구조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유롭고 순수한 자기 표현과 창조적 정신 운동을 통해서만 활성화되고 깨어난다, 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쇼젠에서는, 영의 운동성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자기 표현으로서의 의지(will)"에 의해서 최초로 점화(点火)된다, 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해설서 본문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운동(예: 축구)을 좋아한다고 가정하자. 세속에서는 토너먼트를 거치고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1등에겐 명예와 특권을, 나머지에겐 좌절과 실망과 상실을 강제한다. 이것이 열등감, 죄의식 중심의 세속적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운동을 좋아한다면 목적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그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운동을 즐기면 된다. 경쟁하지 말고, 함께 자유롭게 축구를 하면 된다. 이때, 자신 안에서 무언가 다른 차원의 에너지가 깨어난다."


불의 에너지는 이 점에서 유심히 관찰하면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영은 정신 활동이니, 예를 들어 글쓰기를 가정해보자. 세속에서는 글쓰기는 "특정한 의도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의무, 책임으로서의 측면이 대부분이다. 학교에서의 과제나 직장에서의 업무의 연장선이다. 이 경우, 글쓰기라는 활동 자체는 행위자에게 큰 의미가 없다. 그저 기한 내에 정해진 분량/기준대로 완성해야 할 결과물이 중요할 뿐이다. 따라서 이 경우 행위자의 정신/의식은 글쓰기라는 현존하는 활동 자체가 아닌, "언젠가 완성해야 할 미래의 결과물"과, 그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등의 생각/관념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마음(mind)의 차원, 즉 폐쇄적이고 생명력이 없는 생각, 관념의 영역을 일으킨다. 영혼은 억압당하고, 기계적인 마음만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때,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관점에서는 목적을 달성하고 의도대로 성공했다고 여길지 몰라도, 내면에서 그의 영혼은 점점 더 상처를 받고 다치고 억압당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의무, 목적"이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 행위자가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나 영감을 그 어떤 외부적인 제약이나 억압도 없이 순수하고 자유롭게 글쓰기로 표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그의 정신/의식은 외부의 그 어떤 방해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창조 행위"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마음(mind)의 차원은 줄어들거나 감소하고, 혼(soul; 감성, 감수성, 교감, 느낌, 체험, 몰입 등)과 영(spirit : 정신, 사유, 직관 등)이 더욱 상승하고 깨어나고 활성화된다. 보라, 같은 "글쓰기"라는 행위임에도 정신/의식의 초점이 어디에 가 있는지에 따라서 내면에서 운동하는 에너지의 종류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사회 생활을 해야 하므로, 오쇼의 말마따나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자유롭기만"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과제를 해야 하고,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주어진 외부적인 제약이나 억압, 통제를 일정 부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영역들에서의 생각, 관념들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조율하는 것이 바로 마음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다만, 오쇼는 "마음에게 전적으로 주권을 넘기지 마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도구로 사용하되, 주인은 어디까지나 영/혼이어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내면의 구조/상태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마음을 쓰는데는 익숙하지만, 영이나 혼을 쓰는데는 매우 서투르다. 이것은 인류 집단이 지금까지 사회/문명을 형성하면서,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전략적으로 영/혼을 억제하고 마음과 자아를 크게 의존하도록 방침을 정했고 이를 교육을 통해서 계승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들은 인류 집단이 지구상의 다른 생물들이나 종족들에 비해서 빠른 시간 안에 크게 발전하고 번영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 인류의 방침과 교육과 계승으로 인하여, 역사가 흐를수록 집단 안의 개인들의 영혼은 더욱 억압되었고, 마침내 현대에 이르러,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음의 좁디좁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인식/관념 안에 갇혀서는 평생을 감옥 안에서 살아가다가, 한 번도 감옥 바깥의 세계를 체험하지 못한 채로 허망하게 죽는다. 현대인들의 절대 다수가 이것에 대해서 그 어떤 문제의식도 위기감도 느끼지 못한 채로, 오히려 종교나 영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소수를 "돌연변이"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그만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내면에서 영/혼이 크게 억압받고 있으며, 상처 받고 왜곡/변질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오쇼는 이 카드의 이름을 "놀이"라고 지었지만, 나는 <노는 것>의 본질이 곧 "창조(자기표현)"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창조란 "정신 운동"이며, 이것은 영(Spirit)과 깊은 관련이 있고, 영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순수한 운동이 바로 <즐거움>, 즉 "기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 카드의 이름을 "기쁨"이라고 부른다. 기쁨이란 감정이 아니며, "정신의 운동"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큰 부류 안에 모든 종류의 내적 체험들을 전부 다 뭉뚱그려버리는 잘못된 습관이 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영역(마음, 정신, 의식, 내면... 등)에 대해 무지한 인류의 전형적인 왜곡/변질된 인식/관념이다. 세속에서 감정이라 부르는 것은 대부분 마음(mind)의 차원에 속한 현상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마음과 자아는 집단 무의식의 두려움, 공포, 불안의 어두운 에너지를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으므로, 마음의 작동은 100% 어두운 결과물만을 생성한다.


즉, 실제적으로 우리가 "감정"이라 부르는 것들의 대부분은 예를 들어 : 슬픔, 분노, 열등감, 죄의식, 억울함, 수치심, 욕망, 교만...... 등이며, 쉽게 말해 어두운 감정들의 절대 다수는 마음에 속한다.


그런데 언뜻 감정의 형태에 속하기는 해도 감정을 넘어서 있는 내적 체험들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 사랑, 기쁨, 헌신, 열정, 열망, 자유, 몰입......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감정의 형태로 표현되기는 해도, 그 현상의 근원 자체가 마음과는 전혀 다른 상위 차원(영, 혼)에 근거한다. 바로 이것을 내가 "상위 감정"이라 부르는 것이다. 상위 감정들 중에서는 영(spirit)에서 일어난 것들이 있고, 혼(soul)에서 일어난 것들이 있다.


예컨대, "고요함", "이해", "자각", "현존"...... 등은 영의 상위 감정이다. 그리고 "영원", "초월"...... 등도 놀랍게도 관념이 아니라 영의 상위 감정의 가장 순수한 형태에 속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 "창세 이전", "영원"...... 등은 인간중심적인 세속적 인식/관념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이러한 영의 상위 감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반대로 "사랑", "열망", "기쁨", "자비", "희생", "겸손"...... 등은 혼의 상위 감정이다. 마찬가지로 "생명"이나 "에너지" 등은 관념이 아니라 혼의 상위 감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마음의 작동으로서의 "생각"과 "감정"이 서로 다르다고 이해한다. 생각은 정신이, 감정은 마음이 일으킨다고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데, 실제로는 "정신"은 없다. 정확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식 구조 안에서 진정한 정신인 영(spirit)은 거의, 또는 전혀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억압되어 있다. 따라서 그때에는 표면적인 의식의 일부, 즉 마음만이 작동한다. 이때, 마음 안에서 작동된 것들은 다 뭉뚱그려져 있다. 생각과 감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거의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교만함(내가 옳다)", "분별심(옳고 그름 등을 따지려 듦)" 등은 생각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건 "열등감", "죄의식", "슬픔", "두려움", "공포", "불안"...... 등의 감정의 형태의 어두운 에너지들이 일어나면서 우리가 그것을 생각의 형태로 착각했을 뿐인 경우가 많다. 지식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예시로, "과학" 그 자체와, "과학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과학 그 자체는 지식이자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론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어떤 우월한 자기 바깥의 대상과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안의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하는 마음의 작동에 대부분은 자각 없이 기만당하며, 그 결과 과학 그 자체에는 관심도 없고, "과학적인 사고 = 우월함"이라는 자기 안의 욕망에 휘둘리며 그것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이때, "과학주의적인 사고, 논리, 관점"은 실상 생각이라기보다 열등감, 죄의식 등의 어두운 감정 덩어리에 더 가깝다.


이것은 깨달은 자에게는 매우 쉬운 이야기인데, 깨달음/자각이 없는 이들에게 설명하려면 꽤나 난감한 주제이기도 하다. 마음의 차원에서, 언뜻 생각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대부분 감정이고, 감정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대부분 생각이다. "분노"는 생각이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 이것이 곧 분노다. 그러므로 감정을 해결하는 것은 "인식을 바꾸는 것"에 있다. 이처럼,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물론 반대로, 생각을 전환하는 것은 "감정을 해소하는 것"에 있다. 즉, 대인관계에서 상대가 자기만의 주장이나 논리로 나를 공격하거나 끊임없이 충돌하려고 들 때, 언뜻 그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나 의식 상태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해소되지 않은 어두운 감정 덩어리"들에 가깝다. 이 경우, 그의 감정 에너지를 해소해주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과거의 생각/논리 등을 손쉽게 포기하거나 전환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인간 존재의 실체가 이러하다. 우리는 대부분 자아와 마음의 차원에서조차도 지극히 무지하고 어리석은 채로 평생을 열등한 의식/정신 안에서 갇혀 살아간다.




기쁨은 "영의 상위 감정"이다. 이것은 그저 감정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내포하는데, 가장 먼저 오쇼가 설명했던 대로 "순수하고 자유로운 정신 운동"이다. 외부적인 제약이나 억압, 강제성 없이 있는 그대로의 체험이나 행위 등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자기를 표현하고, 창조적인 활동들을 펼쳐나가며, 그 몰입된 상태에서의 정신 에너지 자체이기도 하다.


기쁨은 "위로 상승하고자 하는 정신 운동"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특정한 주제/분야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들이 전부 "상위의 진리/진실/가치 등을 추구해나아가는 순수한 정신적 이끌림"이다. 대개의 경우 기쁨을 통해서 영이 깨어나고 활성화된다.


이것을 알면, "범사에 감사하라, 매 순간 기뻐하라"는 성경의 가르침도 다른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긍정적인 상황에서야 당연히 감사와 기쁨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부정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어떻게 감사하고 기뻐할 것인가, 에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쁨"이라는 것을 "마음의 차원에서의 감정"으로만 이해한다. 그런데 마음은 본래 어두움에 속박당한 채로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 따라서 바깥의 어두운 현상이 마음에 입력되면, 마음은 어두운 결과(두려움, 공포, 불안 등)를 출력한다. 이 자체를 우리가 어찌할 수 없고, 강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보다 더 깊은 영의 차원이 깨어나고 활성화될 때, 어두운 상황 가운데에서 마음은 여전히 어둡지만, 정신이 깨어서 주어진 상황을 그저 "분노, 거부, 억압, 부정......" 등의 낮고 열등한 마음의 사고방식으로만 취급하지 않고, 이것을 자신의 정신적, 영적 성장을 위한 의도된 시련, 고난, 시험 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때에, 오히려 그는 신을 만나고, 신성을 체험하며, 마음이 어두운 가운데에서 영은 더욱 순수하게 깨어나서 상승하며 움직인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기쁨", 즉 영의 정신 운동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등의 가르침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마음의 감정"으로만 이해하면 당연히 모순이 일어난다. 마음과 자아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상대가 내게 욕을 하면, 마음은 분노와 화를 일으키도록 본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설계된 것을 내 맘대로 바꿀 수가 없다. 바뀌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이 깨어날 때, 그는 진리(감추어진 진실)를 이해하게 된다.


상대가 내게 욕을 했다. 이것은 이미 일어난 현상이다. 그런데 내가 분노와 화를 일으키고 상대에게 욕을 하면, 마음에서 일어난 어두운 에너지들은 전부 다 어디로 가는가? 그 어두운 에너지를 느끼고 체험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이다. 따라서, 이미 일어난 사건에 굳이 더하지 않아도 될 어두움을 스스로 짊어지는 어리석음을 자처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을 진실로 이해하면, 그때에 영은 놀라운 생각의 전환을 일으킨다. 만약 원수를 의도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면? 상대가 내게 보낸 어두운 에너지는, 내가 일으킨 사랑과 용서의 빛의 에너지에 의해서 보낸 스스로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또한 나는 그 어두운 에너지 가운데에서 빛을 일으킴으로써, 나 자신의 정신적, 영적 성장이라는 보너스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진실로 이해하려면 영이 깨어나야 한다. 마음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의 생각과 영의 사유/이해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영이 이해하면, 마음은 여전히 화가 나지만, 그 화 가운데에서 놀랍게도 영으로 말미암은 이해, 허용, 내맡김, 내려놓음, 자유, 해방...... 등이 가능해지게 된다. 오히려, 상대의 마음과 자아의 구조와 상태가 훤히 들여다보임에 따라, 그가 얼마나 어두운 에너지에 속수무책으로 지배, 장악, 기만당해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어 나중에는 정말로 그를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영이 깨어나고 상승하려는 정신 운동이 곧 기쁨이다. 이것은 "신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인간 안의 영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운동성이며, 불의 원소의 가장 순결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움직이면 내면의 어두움이 더욱 강해진다. 이것은 당연히 죽음과 사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살 길은 영을 자각하고,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영은 마음의 작동과 다르다.


예컨대, 마음은 "생각"에 집착한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에도, 마음으로 글을 쓰면 자꾸만 "개념"을 따지고 "분석"하고 "구조화"하고 "앎(이해된 상태)을 소유"하려고 집착한다. 이 자체가 마음의 어두운 에너지다. 이해하려는 의도를 버려라. 다만, 이해되든 이해되지 않든 간에, 책을 읽는 행위 자체, 그리고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고유한 메시지들과 그 문장과 언어와 말들의 뉘앙스와 의미와 가치와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몰입하라.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그것들이 나를 통하여 펼쳐지도록 내맡기고 허락하라. 그때, 내 안에서 "신성한 수동태"가 깨어나게 될 것이다.


영이 깨어난다면, 자아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아의 차원을 넘어서 있는 영의 진리가 자아를 통해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다. 나는 분명히 내가 쓰는 모든 글들에 대해서 모른다. 나는 이 정도로 수많은 글들을 쏟아낼 만큼의 능력과 힘과 지혜가 없다. 이 정도로 정교하고 깊고 넓은 영적 세계에 대한 개념들과 진리들을 알 만큼 내 능력이 대단하지도 않다. 그러나 영이 깨어날 때, "나를 넘어선 이해가 나를 통하여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해한다"가 아니라, "이해가 나를 통해서 일어난다." 문장의 구조가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이해"할 필요가 없고, "자아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마음과 자아는 스크린에 불과하다. 마음보다 높은 차원, 영과 혼이 깨어나도록 허용하고, 영과 혼에게 자꾸만 초점을 맞춰라. 처음에는 잘 안 될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지금껏 수십 년을 영/혼을 억압하고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로 방치했는데, 어디 하루 이틀 노력한다고 될 일이겠는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나 자아는 서서히 내려가고, 언제나 초점이 내 안의 영/혼에게 맞춰지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는 영을 실제로 느끼게 될 것이고, 혼을 실제로 느끼게 될 것이다. 영혼이, 신성이,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대 자신이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뻐하라." 이로부터 모든 창조가 이루어진다.

금요일 연재
이전 06화혼(Soul) : 물의 원소, 무지개의 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