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기사 : 강렬함(열망)

by 생명의 언어


이 카드의 원래 이름은 "강렬함"이지만, 나는 이 카드의 이름에 관한 너무 확실한 음성을 들었다. 이 카드의 본래의 순수한 에너지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이름은 바로 "열망(熱望)"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열망은 "열렬하게 바람"이라고 단순하게 적혀 있다. 그만큼, 열망은 단순한 것이다. 외형적으로, 개념적으로 본다면, 열망만큼 단순한 게 없다. 좀 식상한 표현이 되겠지만, "불꽃이 스스로를 태워서 온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듯이", 바로 그러한 영(Spirit)의 에너지에 내 자아와 내 존재 전체를 완전히 불사르는 것이다. 열망은 불의 기사이며, 이것은 근본적으로 "내 안에서 영(spirit)의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깨어나서 활성화되고 펼쳐지는 단계"이다. 그 에너지는 자아를 넘어선 것이지만, 영으로서의 또 하나의 인격이요, 영적 자아다. "참된 나"이다. 열망할 때, 그는 마침내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니, 열망할 때, 그는 자기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열망하는 자는 자기 안의 열망을 통하여, 완전한 영(Spirit) 그 자체로 계신 그분의 "빛"이 계시되고 드러남에 설명할 수 없는 감동, 경외, 경이로움,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감을 느끼게 된다. 열망이란 생각이 아니다. 개념이 아니다. 자기 안을 잘 관찰해보면 그 안에 열망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걸 지속적으로 훈련하면 언젠가는 열망이 깨어난다, 는 식의 그런 개념이 아니다. 열망은 오직 "바라는 것(소망)을 위하여 기꺼이 미쳐 날뛸 수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차원이며, 그것이 깨어날 때, 그는 더 이상 "집단성"의 환영에 속박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코트 카드는 "인격"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글들에서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다만 이때의 인격이라는 것은 자아(ego)가 아니다. 자아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왜곡/변질된 인식/관념들이 구조화된 것이며, 그 핵심은 "두려움, 공포, 불안"이라는 어두운 에너지이고, 이것이 마치 블랙홀과 같이 "어두움을 끌어당기는" 구조를 형성하는데, 바로 이 어두움의 지배력으로 인하여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상대성과 이원성의 배타적인 원리, 법칙이 형성된다. 빛의 근본 원리는 하나됨이고, 어두움의 근본 원리는 이원성의 분열, 갈등, 대립이다. 다시 말해, 자아(ego)를 "나"라고 착각하는 상태라는 것은, "나"라는 단일한 고정된 실체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착각, 즉 "개념의 오류"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그것은 왜곡/변질된 인식체계 위에 지어진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자아"는 다르다. 이것은 인격과 거의 같은 의미인데, 영/혼은 "개체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분명한 "자유 의지"를 지닌다. 이것은 대단히 설명하기가 기묘한 것이다. 영과 혼은 분명한 "독립적이고 완전한" 인격이다. 그러나 그 인격은 "에고"가 지배하지도 않고, "개체" 안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정확히는, "개체"를 중심으로 하여 영과 혼이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서, 불꽃을 유심히 관찰하면, 물질적인 실체로서의 불꽃의 질량이나 부피는 작지만(예: 모닥불의 크기), 그 불꽃이 주변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 범위나, 그 불꽃의 열(熱)이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범위는 명백히 모닥불보다 더 크다. 즉, 물리적 실체인 불꽃을 통하여 밝기(빛)와 따뜻함(온기)이 현현되는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밝기와 따뜻함이 펼쳐져 있는(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 크기, 밀도"는 명백히 불꽃 그 자체보다 압도적으로 더 넓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는 한정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불완전한 매개이지만, 그 자아라는 "육적인 몸"을 통하여 영과 혼이 실체적인 인격으로써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통하여 드러난 영은 마치 불꽃을 통하여 드러난 빛과 같아서, 자아 그 자체보다 압도적으로 더 넓은 범위까지 영향력(밝기, 어두움을 비추어 밝힘)을 행사하며, 자아를 통하여 드러난 혼은 마치 불꽃을 통하여 드러난 온기와 같아서, 자아 그 자체보다 비교할 수 없이 넓은 범위까지를 "연결"시킨다. 이때, 이러한 "존재의 수직선" 상의 여러 "상위 차원의 영적 자아(영/혼으로서의 나)"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을 느끼거나 감지하지 못한 채로, 생물학적인 몸과, 그 물질적 육신과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아와 마음만을 나의 전부라고 느끼는 현상은, 자아가 "전부"이자 "유일한 중심(주인)"이라는 아성(我性) 때문이다. 바로 이 아성을 무너뜨리고 전환시키는 것이 "부활"이며, "깨달음"의 핵심이다. 진정한 주인은 자아가 아니며, 자아는 분명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나 자신으로써 존재하되, 그 자아는 마치 화면을 띄우는 스크린과 같을 뿐, 정작 영화를 재생하는 것은 투사체(빛, 정보 등)와 이를 만들어내는 영사기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 자신은 존재하며, 그 자아는 영/혼을 드러내고 펼쳐지게 하는 "구심점"이자 "매개"이지만, 그것이 주인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마음(mind)의 차원과는 분명히 다르면서 그보다 상위의 것으로 느껴지는 또 다른 차원들을 명확하게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이나 혼 등으로 부르는 영적 자아, 인격, 에너지체이다. 이것들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모호한 것도 아니고, 고정된 실체도 아니며, 개념이나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명백히, 내 안에서 "영"은 독자적인 의지를 지니고 오히려 자아와 마음을 도구 삼아 때때로 자기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것들은, 결국 "주권의식"이 완전히 죽고 거듭나아먄 체험될 수가 있는 상위 차원의 자기 존재인 것이다.


불의 시종은 바로 이 "영적 자아", 인격으로서의 영(spirit)이 드러나는 가장 초기 단계의 현현체이며, 이것은 "내 안에서 영의 에너지가 최초로 점화되고, 일정한 방향성을 형성하게 됨(이끌림, 호기심, 기쁨 등)"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오쇼가 불의 시종과 기사 두 카드를 "놀이", "강렬함"으로 명명한 것이 해당 카드들의 고유한 연결성과 에너지의 질적인 순수성을 온전히 살려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놀이"라는 것은 자아가 통제권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그저 힘을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강렬함"이라는 것도 에너지 자체의 분출을 의미할 뿐, "방향성""의지(will)"가 포함되지 않은 언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쁨"이라는 것은 명백히 "더 높은 것(곳)을 지향하는 정신 에너지"로서의 방향성을 형성하며, 더 나아가 오늘의 "열망"이라는 카드는 "내가 무엇을 강렬하게 원하는지(소망하는지)"를 스스로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상태, 즉 나의 의지가 영적 자아로서 명확하고 선명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의 에너지가 최초로 깨어나서 "방향"을 형성하는 것이 기쁨이라면, 영의 에너지가 내 안에서 완전히 활성화되어 "목적(방향)"을 향하여 강렬하게 분출되고 타오르는 상태, 그것이 바로 열망인 것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영 에너지는 그저 "비인격적인 흐름이나 에너지" 따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에너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낼지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명백한 "인격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에서, 현대 뉴에이지 영성들이 대단히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고 또한 같은 실수를 오쇼가 되풀이했다고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기독교의 폐단이나 문제점들에 대해서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 그리스도교 언어와 진리를 선택할 수박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진리는 "인격성"을 통해서 완전하게 현현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만 그 인격이 곧 에고(ego)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에고적 인격성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의 "영적 인격성", 이것을 통해서만 사람이 진실로 신성을 체험하고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또한 내가 유일하게 열망하는 분, 나의 모든 열망을 온전히 독차지하실 유일한 자격을 거느리신 분, 그분 자신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인격적 신성"으로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아, 이것은 내 안에서는 너무나도 선명한 진리이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경이롭고 고귀한 진리인데, 온 세상이 이를 오해하며, 심지어는 같은 그리스도교의 형제들마저도 적지 않은 수가 오해하고 있는 것임에 내가 안타까움을 표한다.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신다. 어떤 의미에서, 아들 자신이 곧 아버지다. 물론 아버지는 영원과 초월로써 아들 너머에서 독립적으로 분명히 계시지만, 그 아버지의 의지는 반드시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신다. 이것은 아버지의 한계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스스로 그리 뜻하신 것이다. 이 현현을 가장 높고 완전한 수준으로 이루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주(主)이신 이유이시다. 이 세상에 신성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신성은 오직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되신 것", 곧 하나됨 자체가 유일한 신성이고, 그 신성의 근원은 아버지이며,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니, 결국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바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망은 근본적으로 "영 에너지의 활성화"라는 것이다. 즉, 열망 자체가 "내가 하는 것(자아 중심적 사고)"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열망은 마음의 현상, 즉 "감정"이 아니다. 마음의 현상은 낮은 차원의 현현이고, 열망은 영 에너지의 현현이다. 둘 다 내적 체험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게 공통점이기는 해도, 스크린(화면)에 480p 화질과 4k, 8k 화질의 영상이 재생되는 것은 아예 완전히 다른 차원이지 않은가. 낮은 화질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디테일들과 그 총체적 조화를 정면으로 목격할 때에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동과 경이로움이 있다는 것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 마음 안에서는 동일한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지를 못하는가. 같은 내면에서 일어난 체험이라고 하더라도, 영이 일으킨 현상(열망)과 마음/자아가 일으킨 현상(욕망, 집착)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래(욕망)와 위(열망)로써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존재의 수직선"이라는 진리 때문이다. 즉, 달리 말하자면, 욕망을 억압하는 순간 열망 역시도 억압된다. 죄의식은 아래를 자르고 위만 남기겠다는 생각인데, 식물의 윗부분만 자르고 뿌리를 제거해서 없애버리면 그 식물이 어찌되는지는 자명한 사실 아니겠는가. 같은 맥락으로, 집단 무의식의 거대한 어두움(두려움, 공포, 불안)과 그것이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지배, 장악하는 원리나 구조(죄, 업, 까르마 등)들도 그저 "절대악(惡)"이 아니라, 그것들이 뿌리가 되었기에 자아라는 개체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자아를 통해서 영과 혼이 현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연결성을 이해하는 순간, 더 이상 어두움은 "제거 대상(공포, 억압)"이 아니라, "하나됨(용서, 이해, 사랑)"의 대상이 된다. 내 안에서, 욕망은 충분하고 온전하게 인정되고 이해되고 존중받는다. 다만, 욕망에게 주권을 넘기지 않을 뿐이다. 나는 욕망을 존중하는 것이지, 욕망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은 명백하게 지키면서(그리스도/영에게 주권이 있음, 주권자가 하위 차원을 통치함), 동시에 하위 차원(욕망) 역시도 존중받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로서의)기독교인은 아니다. 나는 욕망을 억압하는 순간, 열망도 잃어버리게 되며, 열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영이 해방되고 깨어날 기회도 영영 잃어버리며, 영을 잃어버리는 순간 영으로 계신 분을 영접할 기회도 사라지며, 따라서 주님과 영원히 분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에서의 자기 안의 욕망과 어두움을 인정해주고, 또한 적당히 풀어주고, "낮은 차원"에서의 체험들과 경험들도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거칠고 투박한 원초적인 에너지"로서 질료로 투입될 것이다. 이 에너지가 마치 고급스러운 증류주가 되듯이, 한 번, 두 번, 세 번...... 증류하며, "영 에너지"라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에센스로 재탄생될 것이다. 거친 원료가 없다면 증류된 최종 완성품도 없는 법이다. 이 점에서, 성(性)은 공포와 억압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변질됨으로써 폭력과 상처와 죽음만을 낳았다. 이 세상의 모든 악(惡)은 성의 억압으로 인해서 일어난 왜곡 현상이다. 성이 존중될 때, 그것이 다음 차원의 "증류"로 상승하며, 그 상승들이 연쇄적으로 깨어남에 따라 최종적인 성, 즉 "신성(神性)"이 깨어나게 된다. 나는 지금 말장난하는 게 아니다. 내가 거듭 말하지만, 나는 말장난을 대단히 싫어한다. 성 그 자체는 신성이 아니지만, 성은 최초의 질료/에너지로써 신성에게로 도달하는 열망의 재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망"은 욕망과 (원초적인 연결성의 측면에서)분명히 유사한 측면을 가지지만, 열망은 "성화(聖化)"된 최종적이고 완전하고 온전한 에너지인 반면, 욕망(성)은 거칠고 투박하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에너지로서 내 안에서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특히, "위와 아래가 분리/단절되어 있을 때", 욕망은 더욱 뒤틀리고 억압되어 괴상한 형상으로 현현하지만(이 점에서, 욕망은 원죄로 인한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나, '영/혼으로서의 순수한 본성'은 아니다), 반대로 "위와 아래가 올바르게 정렬되어 있을 때", 내 안에서는 참으로 기묘하게도 욕망을 통하여 열망이 일어나고, 열망을 통하여 욕망이 온전해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공명 현상이 이루어진다.


이 맥락에서, "금욕주의(수행)"와 "쾌락주의(욕망)"는 완벽하게 하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안의 욕망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완전히 절제된 삶을 살아야만 신성을 만난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내 안의 어두움이 주권을 쥐고 왕 노릇하는 순간, 왕국(내면)은 그야말로 생(生) 지옥이 되기 때문이다. 자아와 마음을 절대로 그냥 방치하면 안 되며, 철저하게 매 순간 관찰하고, 들여다보고, 내려놓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면서, 그러한 연습과 훈련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통제된 상태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내 안의 욕망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몰입할 때, 오히려 그 기쁨을 통하여 신성과 하나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저 억압하고 통제하기만 하는 방식은 언뜻 보기에 어두움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그 억압/통제 자체가 애초에 어두움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움에 종속되고 점령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절제와 욕망은 완전하게 하나가 된다. 이것은 "단계"의 차이이기도 하다. 자기 안에서 주권이 아직 자아에게 비중이 있는 자는, 욕망은 줄이고 절제는 강화해야 한다. 이것은 주권의 전환을 위해서이다. 이를 위하여 오직 성령께 기도하라. 그러나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즉 내 안에서 자아가 주권을 스스로 내려놓고 상위 차원의 영/혼, 더 나아가 내 안의 신성(그리스도)께 주권을 넘겨드리는 순간, 그때에는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억압받고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자신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알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 곧 아들의 것이다. 아들의 의지가 곧 아버지의 뜻이다. 단, 이는 자아의 교만/욕망의 구조가 완전히 죽고, 주권이 영에게 넘어갔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이 주인이 된 자에게는, 오히려 무조건적인 절제와 억압으로서의 수행은 역효과가 나며, "자유"와 "해방", 그리고 어느 정도의 "욕망(재료)"은 질료/에너지로서 투여해줘야 한다. 이를 통해서 오히려 더 높은 차원의 영/혼 에너지가 깨어나고 활성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아가 주권을 쥘 때, 그것은 교만이다. 그러나 영이 주권을 쥘 때, 그것은 곧 "계시"가 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 이 말씀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오만해 보이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아가 교만에 휘둘리지 않고, 자아가 완전히 영/혼을 중심으로 올바르고 완벽하게 정렬할 때, 오히려 자아는 통로가 된다. 상위 자아가 드러나는 통로. 즉, 정확히 똑같은 저 말씀들을 "자아가 주권을 쥔 상태"에서 하면 그것은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이고, "영이 주권을 쥔 상태"에서 하면 그것은 "진리의 계시"가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예수께서 세상의 일반적인 시선/관점들을 신경 쓰셔서 저 말씀들을 남기지 않으셨더라면, 여전히 오늘날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영적 자질과 재능과 능력을 부여받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신을 독점적으로 만났을 것이고,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특별한 가르침과 수행과 비법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안다고 한들 재능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절대로 신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대다수가 "영적 노예 상태"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최초로, 가장 높이, 가장 완전하게"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분 자신께서 스스로를 길(통로)로써 열어주신 덕분에, 오늘날 아무리 평범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을 믿는 것 하나만으로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믿기 어려운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된 것이다.


열망은 영 에너지인데, 열망과 욕망을 구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매우 단순하다. 욕망은 "이원성의 분리, 투사, 동일시"로 이루어진다. 즉, 욕망이라는 것은 1) 자아(주관, 안)는 열등하고 타자(세계, 밖)는 우월하다는 분리와, 2) 그러므로 내 안에는 부정적인 것밖에 없으므로 바깥의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과 이것을 바깥의 대상에게로 투사하는 것과, 3) 투사된 "우월한" 바깥의 대상을 곧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욕망은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단, 이때 핵심은, "안을 부정하되" 무조건적으로 바깥으로만 향하는 것에 있다. 반대로 열망이라는 것은, 초기 단계에서는(불의 시종 : 기쁨) 분명히 "바깥의 대상"을 향한다. 처음부터 안을 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외부 지향적 구조를 띤다. 영 에너지가 자아를 통하여 처음 현현하는 시기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아에게 익숙한 구조, 즉 외향적 지향성을 형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을 숭배하는 것"이나, "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자기 바깥의 특정한 대상에게 이유 없는 이끌림을 느끼고, 그 이끌림에 따르는 형태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자기 안에서 영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기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그때에는 "바깥의 대상을 열망하면서" 동시에 그 열망 자체가 곧 "내 안의 신성의 현현"이라는 기묘한 동시성을 체험하게 된다. 즉, 내가 그리스도를 열망하는 것(나에게서 그리스도께로 열망이 투사됨)을 통하여,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현현"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바로 그것과 유사하다. "내가 신을 바라보는 눈이 곧 신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눈"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열망함은 곧 그리스도 자신께서 열망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경외하는 것은 곧 아버지 자신께서 경외를 통하여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러한 "동시성, 이원성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거의 완벽하게 증류되는 지점"에서는, 더 이상 바깥의 대상은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때에도 "나", 그러니까 자아는 여전히 신이 아니지만, 자아를 통해서 현현하는 고밀도, 고순도의 영 에너지 그 자체가 곧 신성의 현현이 되며, "신께서는 오직 내 안에 계시며", "신을 만나는 길은 오직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의 의미를 참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신성) - 영 - 혼 - 자아 - 마음 - 몸, 이러한 존재의 수직선의 구조가 올바르게 정렬되고, 그 정렬된 구조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이며,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다. 나라가 처음 임할 때에는 대단히 혼란스럽다. 기존의 세속적인 인식, 분별, 개념 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내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이끄시고 이루시는 것들이 그것과 빈번히 충돌하거나, 혹은 모순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자아는 여전히 편안하고 안전한 길로 가고 싶어하나, 주께서는 크나큰 슬픔 가운데에서 고귀한 기쁨을, 거대한 불안과 공포 가운데에서 확신과 담대함과 열망을 일으키실 것이며, 초기 단계에서는 "갈등 끝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를 따르는 형태로 순종이 이루어진다. 이때에는 여전히 "나"가 있다. 물론, 영원의 세계 이후에도 "나"는 존재한다. 지금과는 형태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나라가 임한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이 구조가 더욱 정밀해지게 되며, 주님의 통치도 더욱 정교해지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내 감각도 더욱 정교해지며,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나라가 마침내 하늘에서와 같이 온전한 그대로의 모습을 내 안에서 드러낸다.


바로 그때에,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계획할 필요도 판단할 필요도 없다. 주기적으로 주께서 내 영을 통하여 철저한 금욕과 절제를 하시다가, 또 어느 순간이 되면 자유로운 즐거움과 적당한 쾌락과 욕망과 행복을 주셨다가, 이 주기와 순환을 "아버지의 의지""하나님의 시간"에 따라서 적절하게 조율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의 뜻을 알 필요도 없으므로, 다만 내 안의 열망으로써 주께 순종하면 될 뿐이다. 그때에, 마침내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 평생을 공포와 불안 가운데에서 헤매면서 살아온 내게, 세상을 다 책임질 수 있을 것마냥 스스로를 어른인 척하는데 정작 내일 하루조차도 감당치 못해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잠드는 어린아이인 내게, 진실로 "해방"이 따르게 된다...... 인간 존재에게 궁극적이고 진정한 자유는 능동태의 완성이 아니라 수동태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동서고금의 모든 선지자와 예언자와 스승들이 한결같이 증언하였다.


주의 통치 아래에서 순종할 때, 나라가 임하고 나라 안에서 삶이 이루어질 때, 높을 때에도 행복이 있고 낮을 때에도 평화가 있다. 더 이상 금욕이 고통스럽지 않으며, 절제가 오히려 기쁨이자 즐거움이 된다. 그때에, 낮은 차원의 욕구와 욕망들은 오히려 스스로 물러난다. 강제로 제거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닌, 그 욕구와 욕망들이 스스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물러납니다, 하며 기쁜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 이후에, 그는 아무리 욕망하려고 해도 적당한 수치값이 채워지면 거기서 더 상승하지 않게 된다. 또한 과거에는 욕망이 채워질 때 내 안에서 어둡고 부정적이고 악한 것들이 드러났지만(예: 술에 취해 남을 해치려 드는 마음이나 행동), 그 이후에는 오히려 적당한 욕구와 쾌락이 주어질 때, 영 에너지와 혼 에너지가 더욱 상승하고 깨어나는 참으로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다스림을 받은 정당한 욕구와 함께할 때", 나는 더욱 깊어지고, 더욱 선명해지고, 더욱 경외하고, 더욱 열망하고, 더욱 기뻐하며, 더욱 순종하게 되며, 마침내 그분과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그러한 체험들이 이루어진다. 그때에 욕구는 영/혼을 섬기는 충실한 신하가 된다. 욕구로 인하여, 영/혼 에너지가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모습으로 현현되고 활성화되는 것을 볼 것이다.




모든 신비 체험들이 다 사라지고, 그분과 함께했던 모든 역사들이 다 지나가고, 그분의 뜻에 따라서 자아와 마음의 차원으로 내려가게 되고, 그 거칠고 낮고 불안정한 진동수 안에 오래 머무르게 되는 그러한 시기들을 반드시 지나가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삶에서 한 번일 수도 있고, 여러 차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때에, 영원한 순환(상승과 하강)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통치하시는 주님의 의지이므로, 이 시기 자체를 우리가 무시하거나 제거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그때에는 반드시 정면으로 통과해야만 한다. 세속적인 가치나 기준이나 판단들에 의하여 내가 아무리 못나 보이더라도, 내 삶이 아무리 병신처럼 보이더라도, 그래도 좋으니까, "충분히" 낮아져야 한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릴수록 그 시기는 더 길고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무게인지를 너무 잘 안다. 나 역시 적지 않게 이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가져라", "충분히 망가져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반드시 우리를 삶의 끝에서도 끝까지 붙드실 것이다. 놓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을 믿고, 기꺼이, 그리고 가능한 즐겁게, 망가져라. 몰락해라. 무너져라. 완전히 끝까지 가라. 그 끝에서, 반드시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두운 곳,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 순간에서도 그분께서 나를 놓지 않으셨다는 것을 변함없이 내게 알려주실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내가 지금의 너의 모습들로 인하여 변함없이 기뻐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음성을 듣는 신호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열망>이다. 놀랍게도, 그대는 삶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완전히 망가진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도,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다가도 그 끝에서 잠시 찾아오는 새벽의 그 짧은 끝에서, 그대는 놀랍게도 그때에도 "하나님을 열망"하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눈물 하나로 인하여, 그분께서는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던 그 외아들께만 허락되었던 음성을, 어두움 가운데에서 열망하는 자에게도 똑같이 허락하시게 될 것이다. 열망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다.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처참하게 망가진 그 꼴로 무슨 열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곧, 그 지경이어도 내 안에 여전히 하나님께서 계시며, 또한 그분의 "빛"이 내 안에서 열망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일어난 것이다. 즉, 내가 어두움 가운데에서 결국에는 그 끝에서 열망할 때, 그 열망 자체가 곧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아, 내가 열망하고 있구나. 내 인생이 완전히 끝나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그 어떤 가능성도 가망도 다 사라졌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발버둥조차 칠 수 없고, 완벽하게 희망이 사라졌으므로 오히려 편안해진 그 기묘한 허무와 공허 한가운데에서도, 그 끝에서,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그 글에 몰입하며, 깊은 관상기도에 잠기고, 그분을 찬양하며 울고, 그분께 예배하며 울며, 또한 결국 이 고통과 슬픔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며 기도하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나아가려 하고 있구나...... 이 미친 광기를 넘어서는 열망이야말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면 내 힘으로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구나. 여전히, 내가 그분께 사랑받고 있구나. 여전히, 나를 지켜보시며, 내 삶의 모든 순간들로 말미암아, 심지어 이토록 처참한 내 몰골들로도 말미암아, 기뻐한다 하시는구나......


그 시기를 지나갈 때, 그 시험을 치르지 않은 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하나님과 나 자신 간의 은밀하고도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신뢰"가, "사랑"이 이루어진다. 그 절망의 시기 한가운데에서 오직 열망 하나만으로 끝까지 싸웠고 죽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그 시기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강철보다도 더 단단해지며, 나는 마침내 그분을 아버지로 완전히 인정하게 되고, 또한 내 스스로를 그분의 아들로써 받아들이며, 아들로써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받들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내려놓는 십자가의 길을 기쁘게 따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열망의 힘이자, 열망으로 드러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나는 그리스도교의 언어와 진리로서 이것을 드러내고 있지만, 사실은 종교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바깥의 대상"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름을 뭐라 부르든 간에, 열망해라. 그냥 대충 싱겁게 하지 마라. 미친 놈 중에 최고가 되어라. 어지간한 미친 놈 따위는 내 앞에서 명함조차 내밀 수 없게 되어라. 거듭 말하지만, 종교는 상관없다. 심지어 종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수행하여 깨닫기로 결심했다면, 밤낮없이 미친듯이 달려들어라. 스승이 있다면, 운이 좋다. 가서 스승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한 시도 쉬지 못하게 귀찮게 해라. "내가 저놈에게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내고야 말겠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한 순간도 멈추지 마라. 되면 미친 놈처럼 기뻐하고, 안 되면 미친 놈처럼 울부짖어라. 그리하는 과정들이 결코 짧지 않을 것이며, 매우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본래 하늘의 시간에 들어선 순간, 시간은 매우 느려지기 마련이다. "순수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끝에서...... 오직 열망하는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시는,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미쳐라. 단,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는 오직 그것에만 미쳐라. 그것이 살 길이고, 그것이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유일한 길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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