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여왕 : 나눔, 신의 의지를 이루는 것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by 생명의 언어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불의 원소의 세 번째 코트 카드는 여왕(Queen) 계급이며, 이름은 "나눔(Sharing)"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가장 먼저 오해하는 것은, 나눔이 여성적인 행위/본질이라는 착각이다. 물론 여왕은 여성성이다. 그러나 "불"의 여왕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불은 본디 순수한 영(Spirit)이기에, 영이 드러나는 인격성이 여성적일 수는 있어도, 결국에 영 그 자체는 여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곧 "영광", 그러니까 완전한 빛이 선포되고 계시되는 것을 닮아 있다. 다만 불의 여왕은, 바로 그 "영이 드러나는 모습" 중에서 세 번째이자 동시에 "권세"를 깨닫게 되는 순간, 기사에서 여왕으로 임계점을 넘기게 되는 그 순간이 바로 "나눔"으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시종과 기사는 아직까지 자신만의 힘을 지니지 못한다. "빌려온" 힘이다. 그러나 여왕부터는 다르다. 여왕/왕은 "힘을 소유하고 지배한다." 나의 힘이며, 그 힘은 곧 나의 의지를 따른다. 이때의 '나'는 물론 에고가 아니라 영/영혼이다. 영이 드러날 때, 권세가 작동하고 영광이 드러난다. 그리고 영혼이 움직일 때, 마침내 그 권세/영광이 실체화되어 현실 속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핵심은 결국 "지배"하는데 있다. "받는 것(이기심)"과 "주는 것(이타심)" 사이에는 지배력의 압도적인 격차가 난다.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곧 그것의 "정당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리다. 즉, 주권이 주는 자에게 있다. 왕이 신하에게 관직과 땅을 하사한다는 것은, 곧 이 나라의 모든 것이 왕의 소유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받기만 한다는 것은, "나는 가진 것도 소유한 것도 지배할 것도 없다"는, 영적 빈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공포에서 비롯되었고, 사랑은 권세와 영광에서 비롯되었다.


그분께서 "평안"을 주신다는 것은 곧, 그분 자신이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하나됨"의 압도적인 권세와 영광으로부터 말미암은 "빛"을, 믿는 자들 안에 부어주신다는 의미다. 이때, 믿음은 단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써 그분의 인격적 신성 전체를 영접하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 종착지가 아니라 시작점이다. 일단 믿음이 있어야만, 하늘의 권세와 영광이 내 안에 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받고 나면 믿겠다, 가 아니라, 애초에 믿어야만 받는 것, 이다.




이 단계에서, 이제 이성과 지성, 논리성, 합리성, 관념, 지식, 이론, 그러한 것들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영적 실재가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생각해보라, 불신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되, 믿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뿐더러 잘하면 엄청난 보물을 얻을 수 있다. 뭘 하라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대가를 치르라는 것도 아닌, 믿는 것 하나만을 하라는데도, "손익 계산에 더없이 밝은" 세속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단히 손해보는 짓"을 기꺼이 한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기부를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돈이 많은 사람들이야 억단위의 기부를 하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부는 기껏해야 한 달에 몇 만원 수준일 것이다. 많이 써도 10~20만원 정도일 것이다. 한 달에 5~10만원이라면 외식 두어 번, 내지는 술자리 한두 번 수준이다. 그것이 없더라도 사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즉, 기부를 해서 손해보는 것은 기껏해야 외식 한두 번, 술자리 한두 번이라는 소리다. 반면, 기부해서 얻는 물질적/세속적 이익(예: 법적/제도적 혜택 등)이나, 하다못해 심리적/정신적 이익(예: 착한/좋은/옳은 일을 했다는 보람, 심리적 위안, 정서적 안정 등), 그리고 종교나 신앙 여하에 따라서 영적 이익(예: 구원, 천국행, 공덕 등)까지, 투자 대비 엄청난 혜택을 거두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이익"에 대한 집착만 내려놓고 나면 말이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그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자 필연적인 과제다. 그 누구도 이것을 피해갈 수 없고, 누가 대신해줄 수도 없다. 그 앞에서, 악행은 도리어 짐이 되어 나를 괴롭히지만, 선행은 그 순간에 내게 평안을 준다. 그것이 종교적/영적 차원이 아니라 단순히 심리적 위안에 불과할지라도, 죽음의 공포와 불안이라는 인간의 실존적/필연적 본질 앞에서, 평생을 진실하게 살아온 자가 쌓은 정신적, 내적, 영적 확신과 믿음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나는 묻고 싶다 :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존재의 소멸이 염려되지 않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스스로 양심적으로 돌아보라. 자기를 속여서 얻을 이익이 도대체 무엇인가? 준비가 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 아닌가. 그 앞에서, 보험 드는 기분으로 고작 한 달에 한두 번, 하다못해 마음속으로 타인의 축복이라도 빌어주는 것이라도, 대관절 왜 선행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가. 특정한 종교나 믿음이나 신념이나 이런 문제를 떠나서라도, 선(善) 그 자체를 지향해서 손해볼 일은 없고, 이득을 볼 일만 많은데도 말이다.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전세계의 선진국 시민들이 한 달에 단 돈 1만원씩만 내더라도, 연간 120조에 가까운 돈이 모이고, 따라서 전 세계에서 최소한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인하여 비참하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즉시 없앨 수가 있다. 더 나아가서, 전 세계가 국방비에 지출하는 비용의 단 1%만이라도 감축한다면, 그 돈으로 전세계의 시급한 기아나 질병 등의 문제들의 상당수를 유의미하게 해결할 수 있다. 전쟁을 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없애자는 것도 아니고 선진국 시민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씌우자는 것도 아닌, 단 돈 1만원 단 1%가 아까워서 결국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곳곳에서 고통스럽고 허망한 죽음이 현존하는 것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했을진대, 여전히 "전쟁"이라는 개념이 남아 있다는 것과, 실제로 이 시대에 전쟁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얼마나 인류의 의식 수준이 미개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나의 죄이다. 나의 어리석음이고, 나의 무지이고, 나의 교만이다. 나는 인류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나는 인류의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류 집단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살인, 학살, 고문, 끔찍한 죄와 악에 대하여 나는 최소한 연대 책임을 가지며, 더 나아가서 정신적, 영적으로 더 성장한 자는 나머지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반드시 더 큰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것 또한 "나눔"의 한 형태이다. 빛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어두움을 기꺼이 나누는 것이다. 인류가 저지른 모든 죄와 악에 대하여, 나는 죄인이다. 그 죄의 일부, 혹은 전체는 전적으로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것은 논리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깨어난 영혼", "완전한 빛"이 내 안에 계시될 때, 그 순간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 땅의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죽음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누군가는 타인의 고통과 죽음을 즐기고 비웃고 조롱하고 있으며, 지구상 곳곳에서 슬픔과 눈물과 울부짖음과 상처와 원한들이 만연해 있다.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느낀다. 내가 어리석고 교만하기에, 내가 죄인이기에, 여전히 신께서 이 일들을 거두지 않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성장을 게을리 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보내는 것",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신의 권능의 가장 위대한 비밀이다. "소유권의 이전", 내지는 "계승권"인 것이다. 권능이란 곧 "의지(will)"와 연결된다.


생각해보라. 만약 왕국 안의 어느 이름 없는 거지가 온 나라를 향하여 "싸움과 갈등을 멈추고 평화를 실현하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듣기는커녕 비웃고, 모욕하고, 심지어 그 거지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러나 왕의 이름으로 온 나라에 칙령이 선포된다면 : "싸움과 갈등을 멈추어라. 평화를 실현하라. 이는 나의 의지이다." 그 순간, 나라 안의 모든 책임 있는 신하들과 귀족들은 즉시 움직일 것이며, 왕의 권세와 영광이 온 나라 안에 두루 미치매, 마침내 슬퍼하고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나의 이름은 지극히 허망하고 부질없는 썩어 없어질 것에 불과하지만, "그분"의 이름은 그 자체로 권세이자 영광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억에 달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들 안에 평화와 기쁨을 부어주고 있다. 이로써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데, 그분의 이름은 단지 "존재하기만" 해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온전히 목격한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서, 나의 이름은 언제나 부끄러움이다. 나의 이름은 불과 한 사람조차도 온전히 구원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의 이름은 나 자신조차도 구원하지 못했다. 아니, 구원은커녕 조그마한 이익 하나조차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은, 나를 구했고, 나를 통하여 이름 없는 은밀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돌보게 하셨으며, 더 나아가서 온 세상을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왕의 고귀하신 의지(WILL)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사는 자기의 이름이 아닌, 오직 왕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든다. 그 깃발 하나로 자신이 적(敵)들의 최우선 표적이 될지라도, 내 이름으로는 가망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요, 오직 왕의 의지를 따를 때, 자신도 살아남고,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더 나아가서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사는 넘어지고 좌절하고 깨지더라도, 잠시 신음을 흘리고, 잠시 고통스러워하더라도, 마침내 전열을 정비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며, 깃발을 바로세우고, 마침내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다.


인간의 의지는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온전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신의 의지는 완전하다. 그러므로 온 세상을 창조하였고, 지금도 천지만물을 운행케 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과 자비의 빛을 나누고 공유하고, 더 나아가서 인류 전체와 세계를 성화케 한다.


여기에 가장 위대한 비밀이 있다. 인간의 의지를 버릴 때, 곧 "나의 이름에 대한 집착", 즉 에고(ego)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허망한 것인지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각할 때, 자아에 대한 주권의 어리석음은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이 틈으로 "신성"이 흘러 들어오매, 마침내 영혼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신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신의 아들"이 되었을 때, 그는 깨달으리라. 어찌하여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외아들께서, 어찌하여 십자가를 져야만 했는지"를...... 세상은 특권을 누리는 자를 일컬어 신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신은, 자신의 외아들을 결국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도하셨다. 빛의 질량을 더욱 키우기 위해서는, 그만큼 어두움의 질량은 감소해야만 한다. 따라서 누군가는 그 분량만큼의 어두움을 대신 짊어져야 한다. 이것은 이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법칙이다. 그러므로 신과 하나된 자, 신성과 가까워진 자는, 그만큼 자신 아닌 타자와 인류 집단 전체의 어두움의 일부분을 대신 짊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의 의지"이다.


나눔에는 "빛의 확장"만 있는 게 아니다. "어두움의 대속" 역시도 나눔의 일종이다.




이때, 핵심은 결국 "신성"에 있다. 인간성, 곧 에고로는 어두움의 대속은 절대 불가능하다. 에고는 불완전하기에, 그런 일을 "자기 이름과 자기 능력"으로 하려고 했다가는, 그 어설픈 그릇이 순식간에 깨지고 박살이 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통하여 신께서 하신다"는 능동적 수동태, 곧 신성한 수동태로써 존재하고 살아갈 때, 나는 신의 자녀로써 신의 의지를 이루고 실현하는 통로가 되며, 신의 역사에 "동참"하는 참여자가 된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통로로써의 나를 어두움이나 높은 차원의 에너지/힘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신의 배려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의 얼굴을 직접 "목격"한 자는 즉시 두 눈이 불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빛의 공유" 역시도 오직 신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신성이란, 그저 막연하고 추상적인 힘이나 에너지, 의식 상태 따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명확한 "의지"여야 하며, 그 의지를 이루고 실현하는 구체적인 "인격"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나의 의지"를 통하여 신성이 공유되고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지와 인격이 신성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인격적 신성"에 있는 이유이다.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다 바보 멍청이라서, "인격적 신성" 따위의 유치한 신화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신을 사랑하여 자기를 버려본 적이 없는 자들은 감히 그들의 순결한 사랑과 고귀한 열망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나의 인격이 죽고, 내 안의 신의 인격과 하나될 때, 마침내 나는 없어지고, 통로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하여 신성의 "인격"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드러나며, 신성의 "빛"이 공유되고 확장된다. 그때, 나는 어두움을 호령할 권세를 얻으며, 영혼을 축복하고 죄를 사할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신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 앞의 슬퍼하는 자를 앞에 두고, "어찌하여 저 사람을 방치하느냐"며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아직까지 신을 만나지 못한 자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순간, 그대는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오직 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시어, 그에게 아들을 대신 보내셨다는 것을. "내 아들아, 가서 너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위로하고 축복하여라. 너의 이름으로 나의 의지를 이루라." 보내신 자, 그것은 곧 왕의 대리인이자 정당한 계승자로서의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실제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눔은 "권세를 드러내고 영광을 이루는 일"이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정서적/감정적 행위"가 아니다. 이 지점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순간, 선행은 곧 "고귀한 영혼만이 누리는 특권"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들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14:11)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그와 거처를 함께하리라." (요14:23)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되신 그 특유의 "하나됨의 신비"에 대한 말씀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단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의 인격이 살아서 창조주 절대자와 완전하게 하나되며,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며, 그 하나됨의 관계와 의지와 인격과 역사들을 그분 자신을 통하여 세상에 최초의 모범이자 예시이자 표증으로 보이신 것이다.


선행을 할 때, 하다못해 남을 위하여 선한 마음이라도 낼 때, 용기가 없어서 실천은 못하더라도 악에 대하여 분노할 때, 그러한 마음과 행위들을 할 적에, 그저 "인간으로서"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신의 역사에 동참하는 과정"이다. 신의 일을 행한다는 것은, 곧 신의 권세와 영광을 대리할 정당한 계승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자가 신의 일을 행한다 한들, 그것은 월권일 뿐이므로 보상은커녕 처벌만 받겠으나, 정당한 자격이 있는 자가 신의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곧 신의 권세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요, 신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 자격은 무엇인가? 바로 "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신은 "깨닫는" 대상이 아니다. 신은 오직 "사랑하여, 사랑 하나로 인하여 하나되는 분"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 신성"이다. 그리스도교의 본래의 위대한 진리이다.


우리는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없으며,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것을 열망할 수는 없다. 인간의 한계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시"가 필요하다.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 그분의 존재와 인격이 드러내셨던 모든 말씀들과 표증들과 담화들이, 그리고 그분의 모든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들이, 우리에게는 그 "하나됨의 신비"를 묵상하고, 또한 이에 하루하루 가까워지기를 소망하고 열망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인격을 통한 계시"이다.


내가 선을 행할 때, 선을 사랑할 때, 선을 열망할 때, 은밀하게라도, 작고 부끄럽게라도 실천하고자 할 때, 내 삶과 일상을 통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닮아가고자 할 때, 나는 그저 인간적인 윤리나 도덕 따위를 실천하는 게 아니다. 신의 일을 행함으로써, 신의 정당한 계승자요 대리인이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높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고 부활하셨던 그분과 사랑을 통하여 하나되는 과정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나눔은 나약한 자들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그분의 권세와 영광을 선포할 유일하고도 정당한 자격을 지닌다. 그리고 그 자격은 세속적이거나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것 따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열망하는 마음 하나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다 나의 형제들이다.


그리고 나의 형제들은 모두가 다 강하다. 강하므로, 우리는 오직 빛을 나누고, 어두움을 나눔받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자녀로서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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