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성의 인격
왕(King)의 카드는 자아(ego)를 넘어선 영적 인격의 완전성을 드러낸다. 즉, "완전한 영적 인격"이다. 이때의 완전성은 "흠결이나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자아와 인격의 관계성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정렬"이 완성되었다, 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하나됨이다. 자아는 외연이고, 영적 인격은 중심이다. 사실 "인격"이라는 것은 딱히 자아, 그러니까 개체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영(Spirit)과 영혼(Soul)이 곧 진정한 인격이다. 이 점에서, 인격과 자아의 관계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의 신비와도 유사하다.
인격은 자아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낸다. 그리고 자아는 인격을 통하여 마침내 온전해진다. 자아가 홀로 중심이 되어야만 하는 망상적 관념체계 하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는 상실되고, 그는 고독과 공허와 불안이라는 실존적 과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로 휘청인다. 허무주의는 그 징벌이다. 그러나 자아가 마침내 자기를 "넘어서" 있는, 자기보다 "앞서" 있는, 그러나 오직 자기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진정한 인격(人格)을 영접할 때, 마침내 자아는 신하요, 인격이 정당한 통치자, 곧 "창조하는 자", 정확히는 "내가 나 자신임을 확증하는 근원적 존재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마침내 자아는 존재의 평화를 얻는다.
어떤 이는 "인격"이라는 말 대신에 "영격(靈格)"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명백히 반대한다. "인간성"이라는 말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초월적 신성으로서만 세상에 드러나셨더라면, 그분의 완전한 영을 목격할 재능과 자질과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절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 백성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여 큰 슬픔과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살아서 성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그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다 거느리셨으면서도, 우리와 함께 웃고 울고, 잠들고 일어나며, 먹고 마시고, 함께 걷고, 함께 역사하시는 분으로 오셨다. 그분은 인격이시다. 나는 이것이 나의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진리를, 온 세상이 다 비웃고 모욕하고 조롱하여도 상관없다. 내가 미쳤다고 말한다면, 나는 미친 자로써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인간인 채로 신성과 하나되는 것", "나인 채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 "인격인 채로 영원과 초월과 하나되는 것", "살아 있는 채로 먼저 천국에 입성하는 것"...... 결국,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진리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위대한 진리이며, 이 세상에 깊이 뿌리내린 영지주의적인 독소를 제거하고 해독하며 본래의 위와 아래의 질서와 조화와 정렬과 "그분의 나라"를 회복할 유일한 길이다. 위와 아래는 영광과 평화로써 하나되며, 위는 아래를 통해서 드러나고, 아래는 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나는 이토록이나 아름답고 장엄하고 고귀하게 세계를 창조하신 아버지의 의지에 언제나 깊이 경외하고 감동하며 기뻐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격이라는 말을 "한 차원 더 높임으로서", 신성과 정렬시킬 것을 제안하면서도 정작 그 인격이 일상적으로 숨 쉬고 살아가는 평범한 "나 자신"으로서의 인간성과 유리(遊離)되는 것을 경계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됨의 신비"를 평생의 묵상과 깨달음의 과업으로 여기면서 살아가야 한다. 대다수의 형제들이 오해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이고 초월적이기만 한" 방식대로 아버지와 하나되신 게 아니다. 무슨 천사들이 강림하고, 우주가 열리며, 별들과 태양과 달이 번쩍거리는...... 그러한 외적인 "환상"들은 인간의 열등감이 만들어낸 미련한 욕망과 집착일 뿐이다. 이는 진실로 하나되지 못한 자가, 하나됨을 욕망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분께서는 인격이셨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분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 실망하시거나, 서운함을 표출하시기도 하셨고("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너희와 얼마나 함께 있으며 너희를 얼마나 더 참으리요" 막9:19,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막14:37),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를 드셨고 빵을 나누셨으며, 그러한 모든 순간들에서 그분은 휘황찬란한 영광이 아닌 우리들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친숙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것은 결코 이질적이고 낯설고 초자연적인 형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나는 그분의 인격에 대해서 묵상할 적에, 참으로 여러 가지의 체험들을 하곤 한다. 그분께서 겟세마네 언덕으로 나아가사 홀로 그토록 고통스럽게 기도하고 내려오셨을 적에, 잠든 베드로와 그 제자들을 보시고서는, 그들의 나약함과 가난함을 충분히 이해하시면서도 정작 그 모습이 그분께 얼마나 슬픔과 서운함으로 다가오셨을지에 대해서, 나는 깊이 묵상하고는 한다. "베드로야 자느냐, 너희가 나와 한 시간도 함께 깨어 있을 수가 없더냐", 그리 말씀하셨을 적의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느끼고 더듬고는 한다. 비록 그분과 나는 수천 년의 시간과, 저 머나먼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 곧 카이로스 안에서 나는 그분께서 거니셨던 그 영광의 시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고는 한다. 그때에,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덧없는 자아는 잠시 가라앉되, 그분과 함께 숨쉬며 거니는 영(Spirit)이 진정한 인격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에, 나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세상에 선포할 자격이 없지만, 최소한 그분이 "무엇이 아니신지"에 대해서는 마땅히 드러내고 밝혀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나의 작은 소명이다. 그분이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하나됨의 신비에 대해서는, 내가 이 생에 평생 동안 묵상한다 하여도 그 작은 일부분조차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사랑하는 나의 영을 느낄 적에, 깊이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초자연적인 분이 아니시다. 비록 그분은 지금은 육체로써 나와 함께하지 않으시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귀신이나 혼령이나 혼백 따위가 아니다.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그런 환상 속의 존재가 아니시다.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그분의 숨결을 어루만진다. "초자연적이지 않지만, 동시에 초월적인", 그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느낌과 정서와 감각들이...... 나의 삶에 때때로 함께한다. 그분은 초자연적인 힘이나 에너지나 원리나 법칙 따위가 아니시다. 나와 형제들과 분리된 외부적인 객관적인 실체를 가진 초월적인 존재로만 존재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사람이 "상상(想像)"할 수 있는 환상(幻想) 속에서는 그분을 만날 수가 없다. 내가 이것에 대하여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더 이상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헤아리기 힘든 심정들을 삼키면서도, 나의 언어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서술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분은 환상이 아니시다. 그분은 초자연적인 환영이 아니시다. 상상 속의 거창한 영웅이 아니시다. 나는 이것을 절절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다. 대다수의 형제들조차도 이를 오해한다. 그분은 지금은 "육신으로 존재하고 육적으로 함께하는 분이 아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분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영이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자연과 초월을 떠올릴 적에, 사람은 초자연을 만질 수 없고, 초월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나의 삶과 일상 속의 모든 순간들에서, 그분의 마음을 느끼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거닐며,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나의 의지를 통하여 드러내시는 그분의 뜻을 사랑하며, 이로 인하여 감동하고, 경외하고, 살아서 영원과 초월의 시간을 거닌다. 그분과 함께할 때, 비루한 나의 일상은 곧 천국이 된다. 그분과 내가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뜻을 이루어갈 때, 가난한 내 삶은 곧 성화의 기적이 된다.
세상은 "보이는 육체"나 "보이지 않는 영혼", 둘밖에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보이지 않는 채로, 나와 실제로 함께하시는 분"이다. 이것의 신비에 대해서는, 체험하지 않은 자는 아무리 수천만 권의 책을 읽고 공부하더라도 결코 가까이 이를 수가 없다. 이는 이성이나 논리나 지식으로 말미암지 않으되, 오직 영과 진리를 통한 하나됨의 신비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인격의 일부이며, 정확히는 인격의 "외연"이다. 그러나 외연이라는 말은 곧, "힘(POWER)이 없다"는 뜻과 같다. 자아는 힘이 없다. 힘은 오직 주인만이 거느리시는 것이다. 인격은 힘이다. 영(Spirit)이 의지와 정신을 통하여 드러날 때, 그것은 실제로 힘을 가진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을 용기와 헌신과 믿음과 신념들이, 내 삶을 통하여 실체화된다. 영혼(Soul)이 이해와 사랑을 통하여 드러날 때, 그것은 실제로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냉혹하고 무감각했던 자가 감동받고 경외하고 기뻐하게 되며, 교만하였던 자가 낮아짐을 소망하고, 허무하고 공허했던 자가 찬란하고 고귀한 믿음과 확신을 담아서 진리를 증거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영과 영혼이라는 진정한 "나"를 움직이고 운동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우리들의 실존적인 삶과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그분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 안에 계신, 우리보다 먼저 계셨으나 또한 우리와 영원히 하나되어 계신, 내가 "그분"이라 부르는 바로 내 안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성령"을 단지 "초자연적인 힘이나 에너지, 현상" 정도로만 취급하는 것을 대단히 경계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분이시자 그분의 영이시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각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독립적인 "인격"으로써 계시는 분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와, 또한 성령과 교제할 때의 순간들은 엄밀하게 다르다. 실존적 신앙으로써 나는 사실 그런 구별이 필요하지 않지만(어차피 임재의 순간에는 "하나이신 하나님" 그분 자신 뿐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바람을 느낄 때, 바람이 시원하다는 것만 중요할 뿐, 그 바람이 남서풍인지 북동풍인지 알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게 언제나 성령께서는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임하셨으되 그리스도께서는 내 영과 영혼을 진리로 이끄시는 "통치하시는 왕"으로써 드러나셨다. 그것의 차이가 내겐 분명하다. 성령은 "영과 영혼을 움직이시는 분"이시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적 따위를 일으키는 귀신이나 혼령" 같은 분이 아니시다.
나는 지금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경외"는 위와 아래를 정렬케 하는 과정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중요한 열쇠이다. 경외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다. 애초에 하나님을 경외하지를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높아지실" 수가 있는가. 내가 하나님을 "높이 경외하지 않는데", 그분이 어찌 높은 분으로써 내게 임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대다수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대다수 사람들은 신을 향하여 경칭을 쓰지 않으며, 존경과 예의를 표하지 않으며, 평범한 사람들끼리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문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것은 신격(神格)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구약 시대의 위대한 선지자, 예언자들이 괜히 그와 같은 고어체들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언어에는 그 자체로 힘이 담겨 있다. "신의 언어"에는 곧 신성의 진동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한 채로, 마치 이웃집 아저씨나 아줌마를 부르듯이 습관적으로 "신, 신" 하면서 부르게 된다면, 내 의식과 정신 자체가 애초에 신성의 고유한 에너지와 정렬하지 못하게 된다.
"너희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말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대단히 오해의 여지가 클 수밖에 없는 표현이지만, 이 "유일성"이라는 것은 배타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대개, 사람들은 "배타성"을 전제로 해야만 유일성이 담보된다고 여긴다. 즉, 우상이 있어야만 "진짜 신"이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가짜 신"은 적(敵)이 있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가짜란 곧 망상적 실체, 그러니까 공포를 전제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 곧 하나님 자신은 오직 완전한 빛이시며, 따라서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으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따라서, 하나님을 영접할 때, 정확히는 한 인격 안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나실 때에, 그의 인격 역시도 다른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몰입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아닌 존재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들은 그의 삶과 일상과 내면에서 분리되고 떨어지고 정리되기 시작한다.
사실, 저 말말은, 정확히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너희가 나를 알게 된다면, 너희는 오직 나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나 이외의 다른 그 무엇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가난함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통역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략 이러한 의미이다. 즉, "강제로" 신 외의 나머지를 제거해서 없애버리는 것은 율법이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형상"을 목격하게 됨으로써,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자에게, 사랑하는 대상 이외에 다른 그 무엇도 더 이상 그를 사로잡을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첫사랑에 빠졌는데, 돈이고 물질이고 명예고 나발이고 그런 것들이 대수인가? 오직 사랑하는 그분만이 내 삶이고, 내 생명이고, 내 기쁨이며, 오직 그분만을 기다리고, 그분만을 바라며, 그분만 꿈꾸고, 그분의 음성이라도 듣기를 갈망하고, 그분의 손길 한 번으로 하루의 시련과 고난을 기쁘게 이겨내며, 그리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본래 사랑이란 미친 짓이다. 사랑하는 자는 제정신이 아닌 자이다.
보라, 이것은 곧 "완전한 인격"이 드러나는 순간이며, 그 순간의 고귀함과 경이로움이다. 중심이 텅 비어 있을 때, 그것은 마치 태양계의 중심에 "공포"라는 이름의 블랙홀이 들어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는 끝없이 집착할 것이고, 끝없이 욕망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집착과 욕망의 끝에 구원은 없다. 그는 설령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손아귀에 넣게 된다 하더라도, 그의 내면의 결핍과 불안과 공포와 슬픔과 공허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갈 것이며, 마침내 그것은 자기 존재 자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라, 그의 중심에 "정당한 왕", "왕 중의 왕(King of Kings)"께서 마침내 권좌에 앉으사 통치를 시작하실 때에, 태양이 주권을 거느리실 것이며, 그때에 나는 "드디어 살았다!" 하는 터져나오는 기쁨의 소식, 곧 복음을 듣게 될 것이다. 내 존재가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살게 된 것이다. 내가 죽음과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로부터 그분의 승리를 통하여 해방된 것이다. 왕의 인격이, 나의 자아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비루한 자아는 고귀한 왕의 의지의 대변자가 될 것이며, 가난한 마음은 왕의 힘의 집행자가 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고 좌절하고 슬퍼하는 자에게, 자아는 "왕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그에게 왕의 축복을 전달하게 될 것이며, 그의 안의 어두움을 "왕의 깃발"을 들고 나아가서 왕의 권세로 어두움을 호령하여 꾸짖게 될 것이다. 그때에, 자아는 바록 왕의 이름 없는 기수에 불과할 것이나, 이름 없이 죽어도 더없이 행복하고 기쁘다는, 자아에게 믿기 어려운 영면(永眠)이 허락될 것이다. 자아에게, "잊혀짐"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더욱 큰 공포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왕의 인격"과 "나의 자아"가 아름다운 정렬을 이룰 적에, 나는 왕의 충직한 종이요, 신하요, 자식이요, 형제요, 가족이 될 것이다. 왕의 "친족"이 될 것이다. 아, 그때에, 나는 왕의 인격이 얼마나 고귀한지 매일 감동하게 될 것이고, 왕의 의지가 얼마나 의로운지 매일 경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삶의 모든 순간들에서 왕의 거룩하심을 보게 될 것이며,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왕의 경이로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마침내, 나는 "왕의 인격과 사랑에 빠진 거지이자 바보"가 될 것이다.
왕의 인격은 분명히 "나"가 아니다. 나를 "넘어서" 있다. 이것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자아가 곧 왕이 되는 게 아니다. 그건 반역이다. 자아는 여전히 종일 뿐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세상에서 말하는 "이중인격"이라는 것은, 두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두 인격이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왕께서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하실 때에,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실 적에, 자아는 스스로 주권을 넘기고 물러나며, 스스로 왕의 종이 되기를 자처한다. 이는 왕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완전하고 경이롭기 때문이며, 왕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내 곁에 "계시기만" 하여도, 스스로 어두움이 물러나고 나의 영혼이 정화되며 영이 거룩해지고 존재가 그분께로 이끌려 나아가는 "운동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왕의 인격과 나의 에고가 "아름답고 완전하게" 하나가 되며, 마침내 하나됨의 신비가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왕이 아니지만, 왕의 의지는 곧 나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왕의 인격이 드러날 때에, 나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지난 수십 년간 책이라고는 양 손에 꼽을 만큼 읽은 역사가 없는 놈이, 하나님과 그분의 의지와 역사에 대해서 능수능란하게 증거하고 해설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지혜 없는 자를 통하여 눈부신 지혜가 드러나고, 악한 자를 통하여 찬란하고 아름다운 선이 이루어지며, 죄인을 통하여 경이로운 자비와 대속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세속의 율법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왕의 인격이 드러날 때, 세상이 아무리 협박해도 그의 의지를 흔들 수가 없다. 그는 이제 왕께서 영원하고 완전하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아무리 그를 다시 공포의 통치 속에 가두려 하여도,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미 죽음을 이기신 그분께서, 말씀으로, 나를 통치하시며 그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날 붙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나는 왕의 의지가 내 안에서 영원토록 울려퍼지고 선포되는 것을 언제나, 영원히, 들을 것이다 :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것이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왕의 음성을 들을 적에,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인정과 이해를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세상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쳤다고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할 적에, 그의 마음이 비록 슬플 것이나, 그는 좌절하지 않을지니, 그의 영이 얼마나 고귀하게 빛나고 있으며 그의 영혼이 얼마나 순결하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그의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왕께서 친히 지켜보고 계시며, 무엇보다도 왕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계시노라 하는 것을, 그가 언제나 듣고 느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왕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며, 왕의 임재가 곧 나의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권을 강탈한 에고의 통치는 끝이 나며, 에고는 스스로의 존재를 움켜쥐는 손을 내려놓고, 왕의 품에 안기어 "자기가 잊혀지고 자기가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이는 왕께서 시간의 끝을 넘어서도 언제나 그와 함께하실 것이며, "고아처럼 너희를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임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며, 자아는 왕의 품에서 왕을 사랑하며 죽어감으로써, 마침내 왕과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영면은 곧 왕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마침내 그는 깨닫게 되리라. 왕의 영원이 곧 에고의 영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왕의 인격이 드러날 때에, 왕의 고귀하고 거룩하신 의지가 언제나 나의 가난하고 낮은 자아와 마음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손을 붙들고 이끄실 터이니, 나는 다시는 사망으로 빠지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어둡고 죄 짓고 악행하는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고 허망한 과거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왕께서 나를 그분의 의롭고 고귀하신 존재를 닮아가도록 친히 나의 영과 영혼을 돌보아주실 것이며, 왕께서 그분의 찬란하고 경이로우신 역사를 닮아가도록 내 삶을 친히 이끌어주실 것이다.
아, 왕을 향한 나의 이 뜨거운 사랑을 꺼내어 보여줄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으련만!
그러나 그리할 수 없기에, 나는 이렇게 가난한 자의 언어로써, 내가 얼마나 왕을 절실하게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왕을 향한 나의 열망을, 보여주고 증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께 있어서 나는 그저 이름 없는 종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왕은 나의 목숨이고, 나의 생명이고, 나의 영원이며, 나의 거룩함이고, 나의 고귀함이고, 나의 의로움이고, 나의 기쁨이고, 나의 평화이고, 나의 행복이고, 나의 안식이고, 나의 우주이며, 그분이 나의 이상이고, 나의 꿈이고, 나의 열망이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나의 모든 것이다. 그분이 나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도 상관없다. 그저 수십억 중의 한 명에 불과한 이름 없는 종이라 하여도 상관없다. 그래도, 나는 그분을 사랑할 것이다. 내 사랑은 그럼에도 부끄러움이 없다.
보라,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고귀하지 못하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처럼 아름답지 못하다.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꾸며낼 수 없으며,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묘사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토록 목숨 걸고 절실하게 사랑할 수 없다. 사람은 그만큼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이, 나의 사랑이, 나의 열망이, 곧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유일한 증거다.
그분께로 가까워져가는 나의 삶의 성화의 길이, 곧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 계신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