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의 시작
머리와 가슴이 있다. 머리는 이성, 지성, 합리성, 논리, 관념...... 등이고, 가슴은 영혼, 감성, 감수성, 직관, 몰입, 영성...... 등이다. 가슴은 여성성이며, 혼(soul)의 깊고 순수한 에너지가 흐르는 곳이며,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성전 내부의 지성소로 향하는 입구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중요한 진리가 있다.
①. 머리(관념)으로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말은, 곧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②. 가슴(영혼)으로 겨우 조금 이해했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는 뜻이다.
가슴의 1%가, 머리의 100%를 압도한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진리이다. 이것은, 여성성의 개화(開化)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가슴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성이 있는 것"이다. 가슴이 열리는 순간, 마침내 그의 자아(ego)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균열이 가기 시작하며, "나"의 존재가 해방되어 얼음이 녹고 강물과도 같이 흘러가기 시작하며, 존재는 마침내 생명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가슴을 통한 이해"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여성성이 높은 자는 "본래부터 여성성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의 소중함과 절실함을 알지 못한다. 원래 당연한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본래부터 남성성이 높고 여성성이 억압되었던 자의 내면에서 여성성이 단 1%라도 열리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반딧불이를 목격한 것과 같이, 크나큰 경외와 경이로움과 압도적인 감동을 느끼며, 그것은 그의 영혼 전체를 뒤흔든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과도 같다. 바로 그 1%가, 굳건하고 높았던 남성성의 나머지 99%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파괴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드높은 남성성의 권위를 포기하고 내려놓고 떠나보내면서까지, 이제 겨우 싹을 틔운 여성성이라는 새싹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걸 수 있겠는가. 바로 그 새싹을 위하여, 그 소중한 생명을 위하여, 지금까지 쌓아왔던 지식과 논리와 이성과 합리성과 언어와 관념과 철학과 형이상학과 이로부터 말미암은 나의 의지와 나의 우주 전체를, 완전히 다 내려놓을 수가 있겠는가......
남성성이 강하다고 하여 무조건 여성성의 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압도적인 굳건한 남성성에 질식당하여, 대다수의 경우에는 여성성은 한평생 전혀 새싹조차 움트지 못한 채로 땅(무의식) 속에서 썩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의 극소수는 마침내 새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생육하여, 너무나도 경이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더 나아가서 나무가 되며, 열매를 맺고, 모든 이들이 쉴 수 있는 생명의 뿌리가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성이 열리게끔 지음받은 경우에는, 그 열린 여성성의 혜택을 누림으로 인하여 남성성이 높은 자들보다 더 편안하고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겠으나,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산 정상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난제이자,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단 1%의 씨앗, 그 하나, 그것이 제대로 싹을 틔울 것이라는 보장조차 없다고 해도, 그 일말의 가능성을 위하여 나는 다시 되돌아가더라도 내 모든 것을 걸 것이다. 가슴이 열리지 않은 채로, 머리로, 지식으로, 관념으로...... 살아가는 삶은, 몸은 살아 있으되 영혼이 죽은 것이며, 실질적으로 죽느니만 못한 상태로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절실하게, 깨달았다. 눈앞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 그 꽃을 볼 적에, 나의 자아는 여전히 "꽃의 이름이 무엇이며, 이 꽃의 특성이 어떠한지......" 따위의 "관념"을 따져 묻는다. 정작 나의 눈앞에는 생생한 꽃의 향기와 색깔과 그가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그토록 생경하고 아름다운 "실재"가 펼쳐져 있는데도 말이다. 여전히, 나는 이 죄성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본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마침내 나는 "가슴"의 위대함을 목격한다. 일상 속의 평범한 순간 순간들이, 하늘과 구름과 별들이, 그 눈부신 "경이로움"이...... 내 영혼을 뒤흔들고, 나의 영을 눈뜨게 하며, 나의 존재 전체를 경외와 경이로움과 감동과 기쁨과 환희로 공명하게 한다. 그때에, 나는 마침내 "관념"을 내 손으로 내려놓고,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 이 눈앞의 살아 숨쉬는 생생한 실재와 교감하고 손잡고 춤을 추기만을 원하는 것이다. 이토록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이름"이, "관념"이, "언어"가...... 얼마나 지독하게도 허망하고 또 허망한 것인지를,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자아의 교만을 깨뜨리는 것,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감히 말하건대, 차라리 전세계를 정복하는 일이 훨씬 더 가능성이 있고, 훨씬 더 쉽고 빠르다. 전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나의 자아를 깨뜨리고 부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더욱 어렵다.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오직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자아가 죽는 과정은 크나큰 슬픔과 공허를 정면으로 정직하게 통과해서 나아가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날 적에, 마침내 나는 죽고, 내 안의 "생명"이신 진정한 주인, 곧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실 것이다.
"순종"은 여성성이다. 그러나 참으로 신묘한 까닭은, "남성적 여성성"이다. 순종에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종류가 있다. 이것은 :
①.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순종이 가능했던 경우.
②. 자아의 교만과 남성성의 권위를 타고났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경우.
전자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쉽고 편안하다. 그 또한 귀한 것이다. 그는 스스럼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지독한 내면의 전투를 치러내야만 한다. 자아에게 있어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곧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남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죽음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후자였고, 후자 중의 괴물이었다. 나의 입에서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주인(主)"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험의 과정이었는지를, 아마도 주께서는 아실 것이다. 남성성이 강하게 타고난 자가,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곧 매 순간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을, 그 처절한 분투를, 온 세상이 다 알아주지 않으며, 오히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냐?"면서 비웃고, 모욕하고, 조롱하며, 심판하고 재단하며, 자기들이 옳다고 정당화한다. 또 어떤 사람은 걱정하고 염려해주는 척하면서, 그 걱정과 염려를 통하여 자기를 높이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외로울 것이다. 그는 이제 남성성의 드높았던 모든 권위를 다 내려놓았으므로, 아무도 그를 영접해주지 않고, 아무도 그를 대우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쓸쓸하게 다 찢어진 허름한 옷 한 벌을 입은 채로, 자신의 화려한 영광을 쓸쓸히 되뇌이면서, 추위를 피해 길거리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한때 가장 드높은 남성성을 휘장처럼 거느리고 왕관처럼 쓰고 다녔던 자에게, 그리 살아가는 것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치욕적인 삶이다.
그 의지적 순종의 피와 눈물을, 전자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순종이 처음부터 너무 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믿음"이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질문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찬양"이, 너무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고통스러웠고,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으며, 그분의 의지에 "질문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고 따르고 순종하기"까지 지독하게 험난한 시험의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나의 신앙은 나의 상처와 슬픔의 역사이다. 내가 그분을 "찬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아(ego)를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했는지를, 온 세상이 다 모르되, 오직 그분 자신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께서는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자"로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비록 의심하고 거부하는 교만의 죄성을 타고났으나, 그럼에도 의지적으로 믿음과 사랑을 선택하고 결심하여 행하는 자"로 인하여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그분의 사랑을 받았고, 나의 존재가 그분께 기쁨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상처와 슬픔의 부끄러운 역사들은, 이제 그분의 뜻을 이루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자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내가 곧 죄인이었기에, "죄인 중의 괴물"이었기에, 나는 "의심"하고 "거부"하고 "따지는" 자들의 마음과 심정이 어떠한지를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제는 어떻게든 삶이 달라져야만 하겠다, 더 이상 지금처럼 살 수가 없다, 하는 절실한 의지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가서, 나의 상처와 슬픔의 신앙의 역사를 나누어줄 것이다. 본래부터 신앙이 능숙했던 자들은 그들을 향하여 "왜 이 쉬운 것이 안 되냐"면서 비판하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길을 밝혀줄 것이다. 내 자신이 그 쉬운 길 하나를 걷기 위하여 온갖 험난한 비탈길들을 돌아 흐르며 걸어야 했던 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좌절하고 절망한다면, 믿음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절망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분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리라.
주님,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과 나의 사랑을 저들에게 주노니, 저들의 의심과 거부와 불안을 내게로 옮기소서. 이제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나이다.
이것은 머리의 언어가 아니다.
이것은 가슴의 언어, 곧 영혼의 언어이다.
이해는 "생명"을 낳는다. 이 지점이,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사실이다. 최소한 신앙의 관점에서, "영성"의 관점에서, 여성성(가슴)은 단순한 정서나 감정의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영혼은 생명이다. 생명의 본체다. 한 존재가 살아 숨쉬게끔 하는 그 온전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에너지의 모든 생동감이 바로 영혼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영혼이 없다면, 사람은 살 수 없다. 사람이 지성만으로 산다면 그것은 기계나 컴퓨터나 인공지능과 별로 차이가 없게 될 것이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이미" 인공지능은 지성의 관점에서 인간을 넘어선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보라, "감정"의 수준을 넘어서서, 한 존재를 거듭나게 하는 힘, 교만했던 자가 순종케 하며, 욕망했던 자가 비우고 내려놓게 하며, 냉정하고 차가웠던 자가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며 그에게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언어와 지식과 관념과 철학과 형이상학의 덧없는 세계에서 헤매던 자로 하여금 살아 숨쉬는 생명의 따뜻함과 온기와 빛 앞에서 감동케 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영혼의 강력한 에너지이자 힘이며, 그 영혼의 힘은 지성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결코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나는 이에 대해서 너무나도 절실하게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나의 성화의 여정에서, 성령께서 가장 먼저 들려주신 그리스도의 음성은,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뻔한 한 마디였다. 그런데, 그 이전까지는 그것을 그저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바였으나 바로 그 순간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진실(truth)"이, 내 가슴을 울렸다. 가슴에 못을 박는 듯했다.
아, 나는 죽는구나.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로 지음받았구나.
이것이 나의 존재이구나.
아, 그제야 나는 마침내 "이해(Understanding)"했다. 내가 죽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죽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해로, 생명으로, 내 안에서 겨우 열리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열렸을 적에, 나는 또 하나의 진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 지금의 나는, 전혀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
만약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죽어가겠구나......
이것이, 지금의 나의 실체구나.
내가 죽는다는 진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전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진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평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깨달음, 이렇게 셋의 진실이 하나가 되어, 나를 일깨웠다. 결국 그 셋은 하나였다. 머리로만 알았을 때는, 그보다 더한 어두움을 알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가슴으로 이해했을 때에는, 고작해야 지극히 당연하고 뻔한 사실 하나를 가슴으로 체험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게 너무나도 선명해졌고 또한 내게 간절해졌고 절실해졌다. 바로 그때에,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언어와 지식과 관념은 나의 마지막 날에 나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평생을 철학과 형이상학과 언어와 지식과 관념들을 내 머릿속에 미어터져라 집어넣더라도, 수천 권의 철학서를 읽고 엄청나게 두꺼운 신학서적 같은 것들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더라도, 그것들은 죽음의 순간에, 예고 없이 찾아와서는 불쑥 : "오늘이 그날이야. 오늘이 너의 마지막 날이야." 하고, 그토록 무례하게 찾아올 죽음과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 앞에서, 그 순간에 나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그 진실이 내게 성화의 여정의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확정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그럴듯한 말로 잘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나의 절실함을, 나의 간절함을, 이렇게 보여줄 수만 있을 뿐이다. 지금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그 진실이 내게 선명해졌을 적에, 놀랍게도 내 안에서 "정렬"이 이루어졌다. 죽음 앞에서 의미 없고 허망한 것들이 내 안에서 선명해졌고, 또한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것들 역시도 선명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음 앞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빛을 내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목록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한다면, 어차피 그것은 누군가에게 관념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관념으로는 생명에 가 닿지 못한다. 이미 그분께서 말씀하셨지 않은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다"(요14:6) 라고.
이것을 관념으로 본다면, 철저한 오만이자 교만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사랑"으로 본다면, 그분께서 성부와 하나되신 그 하나됨의 신비는 오직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리라.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셨다. 그냥 사랑했다, 수준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전체를 걸고 사랑하셨다.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가 되었다. 그분의 하나됨은 곧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 이르고자 하는 자는 역시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 그저 관념으로만 믿는 것,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 신학적 이해, 그것들은 하나됨에 이르지 못한다.
성령께서 내 영혼을 성화케 하시는 그 여정들이 깊어져갈수록, 나는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변화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전에, 나는 "눈물을 흘려보는 것이 살아 평생에 소원"이었다. 그만큼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은커녕 노력해도 어림도 없었고, 수천 명이 죽든 굶주리든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영혼이 죽어 있었으니까. 시체가 어찌 눈물을 흘리겠는가.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실 적에, 나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는 것을 함께 보았고, 그들 안의 선(善)함이 얼마나 경이롭고도 아름다운지를 보았다...... 그때에, 내가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답고 고귀한지를 알면 알수록, 나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작은 자, 세상에서 소외받은 자들, 그들을 볼 적에 이제 나는 섬기는 자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아는가. 이전에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답시고 그들은 열등하되 나는 우월하다, 하며, 나의 교만과 욕망을 높이려 드는 무의식의 죄성이 얼마나 지독하게도 "빈틈없이 완벽하게" 작동되었는지를, 여전히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는 기도하며 울고, 묵상하며 울고, 또한 일상 속에서 때때로 그분의 뜻을 받들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길 수 있음에 진실로 감동하며, 그것이 내게 살아서의 소망이 되고, 내 존재의 환희가 된다.
그리고 그때에 나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온전한 가슴으로 이해된 것이며, 가슴으로 이해된 것들은 시간의 끝을 넘어서 영원하다는 것을. "영원과 초월"로 계신 성부 하나님께로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똑같이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뿐이며, 그때에, 사랑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영원히 함께하게 된다는 것을. 아, 이것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으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수천 년의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서, 현재의 삶 속에서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과 함께 걷고, 그분과 함께 웃고 울며, 슬퍼하고 기뻐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사랑하는 자에게, 육신의 있고 없음과 물질적인 조건과 환경의 한계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슴으로 이해된 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것이 곧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제 나는 그분이 말씀하신 "생명"의 의미를 안다. 죽어 없어질 허망한 육신과 자아와 관념의 탈을 벗고, 영원히 이어지게 될, 시간의 끝을 넘어서도 영원히 하나됨의 신비 안에 거할, "사랑", 이 하나만이 영원한 것이요, 초월하는 것이다.
내 육신이 죽더라도, 한 번 온전히 열린 "사랑"은 영원히 이어지게 될 것이다. 비록 형상은 달라질지언정, 그것은 영원히 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영속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나는 이제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죽음과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을.
"무엇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인가? 무엇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는가?"
이제, 나는 그 답을 깨달았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권세이며, 사망을 능히 이기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분을 사랑할 때, 나는 내 안에서 "확실한 것,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선명한 것"이 일어나며, 그것이 강물처럼 유려히 흘러가며, 나의 존재를 넘치도록 채우고 또 채우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에, 바로 "이것"이야말로 죽음과 사망을 넘어서 영원히 이어질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하여도, 아직 가슴이 열리지 않은 자들은 무심할 것이요, 시큰둥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의 나와 같이 절실하게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머리는 수단이자 도구이다. 도구는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도구는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가슴이다.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 마침내 가슴 안에서 온전히 체험될 때, 그때에 우리 안에서 죽음과 사망을 넘어서는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 이것이 "영생"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