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구조의 총체적인 전환
앞서 불의 기사 카드의 이름을 강렬함에서 열망으로 바꾼 것 같이, 물의 기사 카드 역시도 원래의 번역명인 신뢰에서 믿음으로 바꾼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역사의 작은 일부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나는 말장난을 싫어하므로, 이 변경의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하겠다.
'신뢰'라는 언어는 여전히 인간적인 것, 즉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성에서 근거하며, 이것은 '경험'적인 것을 근거로 해서 작동한다. 나는 너를 신뢰한다, 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지금까지 너와 살아왔던 삶의 경험과 이를 토대로 한 너와의 관계를 토대로 신뢰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 올라갈 경우에도 결국에는 마찬가지이다. 삶의 경험의 총합을 통하여, 각자는 여러 가지 명제들과 개념들에 대한 "신뢰"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예컨대, 내가 "제도와 형식"이라는 관념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믿음"이라는 언어는 명백하게 다른 의미로 쓰여진다. 사실, 영어 단어 자체가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나는 사전적인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실재를 드러나는 관점에서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뢰는 현상적이다. 자아가 대상을 지향하며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에서 기인한다. 반면 믿음이란 내 안에서 중심성이 바뀌는 것이다. 믿음은 총체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신이라는 특정 "대상"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신과 관계된 나의 모든 내적 구조 전체를 총체적으로 변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을 믿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졌던 내면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신을 믿는 것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재정렬하는 것이다. 나는 신뢰와 믿음의 차이를 이와 같이 이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뢰"라는 단어는 실존적 결단의 영적 에너지를 전달하기에 무언가 부족하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심", 즉 의지적인 것이다. 믿지 않기로 결심할 때, 그것은 곧 나의 존재와 삶의 구조적인 총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전제하며, 믿기로 결심할 때에는 그보다 더 큰 수준의 변혁을 동반한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들을 대충 흘려넘기겠으나, 이는 정신과 의식의 수준과 깊이가 더해질수록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실존적 결단"의 무게가 증가한다.
신뢰는 수동적이다. 대상을 믿기로 하고, 대상에게 무언가를 넘기고서, 나는 움직이지 않거나 신경을 쓰지 않기로 여긴 상태에 가깝다. 물론 '수동성' 자체가 곧 신뢰의 아름다움이며, 아마도 오쇼는 이것을 나타내고 싶어했겠지만, 나는 그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내면에는 빛보다 어두움의 지배력과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크다. 사람을 "선함"으로 움직이는 것은 매우 어렵고 가망이 없는 일이지만, 반대로 사람을 "공포"로 통제하는 것은 매우 쉬우며,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번번히 증명되어 온 결과다. 즉, 신뢰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다. 수동성은 영적인 관점에서 실질적인 방치, 방조, 외면이며, 오직 "의지적 결단", 곧 영의 에너지가 존재의 중심을 타고 흐를 때, 그때에 마침내 내 안에서 어두움과 빛의 주권이 완전히 전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뢰라는 수동성의 아름다움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내 안의 어두움을 의지적으로 전환코자 하는 능동적이고 희생적인 "믿음"의 과정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믿음은 능동적이다. 이는 곧 상태, 그러니까 현상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신뢰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경험적인 근거(주관적인 감정, 정서까지 포함해서)에서 비롯하거나, 물의 원소가 순수한 혼의 에너지라는 것을 고려할 때, 혼의 에너지가 순수하게 내면을 흐를 때 드러나는 영적 현상일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혼의 에너지가 사람 안에서 언제나 항상 아름답고 온전한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의 삶에는 유감스럽게도 행복하고 밝은 순간보다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유의미하게 많다. 이것은 시선이나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 중인 시기는 전쟁이 없었던 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길며, 이러한 유비는 각 개인의 실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약 특정 조건/상태/현상에 따라서 신뢰 여부가 결정된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흔들리는" 것이다. 반면, 한 번 믿기로 결정했을 때, 즉 믿음을 중심으로 내면의 구조 전체가 완전히 전환되었을 때, 이것이 곧 "거듭나는 것"이며, 따라서 어두움의 상태 또한 그 믿음 안에서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환한다. 이것이 바로 총체적 전환의 위력이다.
나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내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할 때만 내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여정은 지난 수 년간 날이 갈수록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낮아지고 무너지고 좌절되고 정리되어지는 과정들을 밟아왔고, 하나의 과제가 풀리면 이어서 나머지의 과제들이 줄지어서 나타나는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상태"로만 본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 할 그 어떤 근거도 없다. 오히려 나는 내 삶의 시련과 고난을 재료로 삼아서,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 신을 향한 나의 믿음과 사랑이라는 유일한 "불꽃"을 더욱 의지적으로 되살리고 키워오는 과정을 거쳐왔고, 내게 신앙은 그러한 것이었다. 그때, 어두움조차도 내게는 은혜로 변환된다. 삶의 시련 속에서 나의 믿음은 더욱 진실해지고, 고난의 정서 속에서 나의 사랑은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지점이다. 믿음은 의지이고, 의지적 결단이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며, 그 결심에 따라서 나의 존재와 내면과 삶의 모든 구조를 완전히 전환케 하는 것이다. 믿지 않았던 시기에는 아무리 귀중한 것이었더라도, 믿기로 결심한 이후의 삶에서 불필요하다면 기꺼이 다 버리는 것, 곧 "자아의 정화" 과정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점차 내 안에서 선명해져 갈수록, 놀랍게도, 가장 깊은 어두움에서조차도 신뢰라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중심을 통해서, 신뢰라는 현상이 실체화되며, 자아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진실이라고 믿으므로, 그 신뢰라는 현상을 통하여 또 다시 믿음이라는 구조를 강화한다. 즉, "빛의 통치", 그러니까 선순환의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어두움의 통치", 즉 악순환에서부터 선순환으로 나의 존재와 삶의 구조를 전환하는 것은 초기에는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한 역사를 거쳐야만 한다. 왼쪽으로 돌아가던 바퀴를 오른쪽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초기 단계에는 몇 배, 몇십 배의 저항과 고통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이것을 마주했을 적에, 사람의 반응은 딱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 "그럴 바에야 굳이 뭐하러 하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최소한 7할, 8할 이상일 것이다(이것도 후하게 쳐준 것이다). 반면, 그 나머지 2할, 3할은 다르게 "응답"할 것이다 : "상관없다, 그래도 하겠다, 이제는 달라져야만 한다." 이것이 그의 안에서 흐르는 영의 에너지다. 영은 의지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고난 속에서 피어오른다.
믿는 자에게, 빛으로 인하여 기뻐함은 당연한 일이되, 어두움으로 인하여 내 안의 빛이 더욱 밝아지고 아름다워지니 이 또한 기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게 커다란 기적이다.
믿음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들 중에서, 수동성에 이어서 "맹신"에 관한 오해가 있다. 사실, 이것은 수동성으로서의 신뢰의 부정적 현상에 대한 지점이다. 혼의 에너지가 정방향으로 흐를 때, 이는 곧 신뢰가 되지만, 거꾸로 흐를 때, 그것은 곧 맹신이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한끗 차이"이지만, 그 종이 한 장보다 더 미세한 것이 그의 내면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달라지게 만든다.
맹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마치 최면 상태와도 같다. 자기가 누구이며 어디로 향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 등을 알지 못하거나, 정신과 의식이 매우 흐리고 모호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자기를 관찰하지 못하며, 깨어 있지 못하며, 오히려 특정한 요소에 대한 전형적인 "어두움의 통치", 예를 들어서 열등감, 분노, 피해망상, 공포, 불안...... 등에 의하여 지배당하며, 그 결과 맹신 상태에 놓이게 된다. 쉽게 말해서, 맹신은 곧 흐리고 모호한 상태, 그리고 주권을 빼앗긴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다르다. 믿음의 구조 안에서,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을 해왔고 또한 무엇을 해나가야 하는지, 왜 그러했고 또한 왜 그러해야 하는지, 그 모든 것들은 선명하고 명확하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보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더 많다. 설명하려 들면 더없이 복잡해지지만, 믿음의 구조 안에서는 매우 단순하고 선명한 것들도 많다. 다시 말해, 믿음은 선명하고,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믿음이라는 "구조"가 한 번 형성되고 나면, 외부로부터의 그 어떤 조건이나 상황 등에 대해서도 믿음은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이고 세밀하면서도 일목요연하고 완결성 있고 굳건한 응답을 도출하게 된다. 이것은 자아의 이해나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맹신은 답할 수 있는 것보다 답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믿음의 구조 안에서는, 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답을 할 수 있게 된다(물론,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여 이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대개의 경우에는 답할 수 있음에도 침묵해야만 한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시험이다). 맹신은 의심을 품지 못하지만, 믿음은 의심을 넘어서 모순까지도 품는다.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진리와 명제들이, 믿음 안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이것은 모호하고 두루뭉실하게 뭉뚱그려진 상태가 아니라, 불과 물, 어두움과 빛, 의심과 확신 등 이원성이 상상 이상으로 정교하고 초월적이고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내 안에서 하나가 된 상태이다. 인간의 언어와 말이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므로, 그것의 극히 일부분만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통제"가 아니라 "내맡김", 즉 신뢰를 전제하게 된다. 믿지 않는 자는 힘이 없으므로, 소유에 집착한다. 가진 것이 많아야만 자기를 지키고 변수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이 있는 자는 굳이 번거롭게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자기를 지키고 변수에 대응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자유롭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온화하고 개방적이고 신뢰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절대적인 자는, 모든 것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 그러나 주에 대한 사랑이 없거나 적은 자는, 그나마도 부족한 사랑을 흔들거나 위협하는 외부의 변수는 가급적 거부하거나 제거하려 들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임기응변" 같은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믿음은 상상 이상으로 정교하고 입체적이고 완결성이 높다.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을 만큼. "내가" 반응해야 할 때는, 필연적으로 놓치거나 실수하는 것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내가 반응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 반응할 수 없는 것이 압도적으로 더 많기에, 항상 7할 이상의 실패 확률을 전제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응답하실 때에는, 완전한 신성이 나의 자아를 통하여 흘러나오도록 나는 그저 내맡기는 것뿐이므로, 자아에게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아도 무관하며, 모든 경우에 언제나 최상의 완전한 응답만을 얻고 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참된 신비, 곧 하나됨의 신비이다.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대개 관념이라는 것은 언뜻 보기에 명확해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실체가 없는 모호한 환상 같은 것이다. "사과"라는 단어에 대한 언어적 정의 자체는 더없이 명확해 보이지만, 그래서 그 관념을 내가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있는가? 심지어는 그 관념을 정신적인 차원에서 재구성하거나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가?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사과"라는 단순한 단어 하나조차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할 것이다. 정의는커녕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설명조차 못할 것이다. 원래 학문적 정의라는 것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애초에 관념과는 정반대의 작동 원리이므로 관념적인 "명확성"을 담지할 수 없으나, 반대로 믿음은 외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조차도 내 안에서 매우 단순하고 선명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통합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경우에 따라서 어찌하여 그렇게 통합되는지를 아주 일목요연하고 상세하게 서술하고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자아의 능력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기회와 여건만 주어진다면, 나의 신앙에 대하여 일주일 밤낮이라도 증언할 수 있다. 누군가 내 말을 받아적고 정리만 해준다면, 아마도 나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여러 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의지와 능력이 아니요,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것이기에, 모든 것은 성령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 그분께서 뜻하신 때에, 뜻하신 방식으로, 뜻하신 만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간이 임하실 때에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엄청난 것들도 능히 이룰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상상 이상으로 정교하고, 입체적이고, 총체적이며, 완전한 것이다.
관념은 "힘"을 갖지 못한다. 의심이나 불안, 혹은 맹신 등의 어두운 "현상"들도 마찬가지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힘도 없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어두움은 "공포"이다. 그런데 공포는 직시하면 힘을 갖지 못한다. 물론 표면적인 마음이야 무섭고 두려울지언정, 공포를 넘어서는 "확신"을 갖게 되면, 사람은 무서운 가운데에서도 확신에 따라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나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환영들이 자아에게 실체로써 "힘(지배력)"을 발휘한다.
즉, 내가 무지하기에, 내가 깨어 있지 못하기에, 어두움이 나를 "실효지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두움을 정복할 수 있는가? 이 자체가 이미 어두움의 전략에 넘어가는 것이다. "초점"이 어두움에 맞춰지게 되면, 어두움이 서서히 나를 지배, 장악할 것이다. 반대로 "빛"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나 구조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연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믿음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믿는 자들의 심리나 구조나 특성이나 공통점이나 장점이나 그러한 것들에 집중한다면, 그것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그 빛이 점진적으로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기 시작할 것이다. 어두움에 집중하면 어두움이 커지고, 빛에 집중하면 어두움은 자연스럽게 물러난다.
보라, 개념적으로는 간단한 이치이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간단한 이치 하나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해서 삶 속에서 어두움의 지배 하에 고통받으며 살아간다. 이는 인간 존재가 "이미" 어두움에 지배당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에고 중심성이다. 에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며, 어느 정도의 자아나 주권의식은 오히려 존재의 구조 하에서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육체가 없으면 살아가거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에고의 "구조"가 왜곡되고 뒤틀려 있다는 것이다. 이 구조를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구조를 전환하게 된다면, 그때, 어두움은 내 마음과 자아를 잠시 흔들 수는 있을지언정, 내 안의 믿음의 구조 자체를 건드리지는 못한다. 무지는 환영에 불과하므로 일시적인 것이지만, 믿음은 "실체"이므로 영원하고 완전한 것, 곧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의 평화는 "억지로"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구현된 믿음 자체가, 구조적이고 총체적으로 그러한 빛의 현상들을 출력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실체가 있다. 그리고 실체가 있는 것은, "힘(지배력,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권세다. 그리고 이 힘을 통하여, 실체는 주변의 어두움들을 비추어 밝히기 시작한다. 힘으로 말미암아 그 권역 하에 있는 것들이 밝아지고 자유로워지고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 이것이 곧 영광이다. 이 점에서, 사람의 영광은 철저하게 힘에 근거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영광이신 분은, 이 세상에 단 한 분 뿐이시다.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권세에서 비롯하지는 않는다. 권세가 없더라도 그분은 완전한 영광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세상에 "존재하기만" 해도, 무수히 많은 것들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변화하게끔, 절대적인 권세를 발휘하실 수 있다.
인간의 자아는 유감스럽게도 빛이 아니라 어두움에 의해서 전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와 능력과 노력대로 할 때, 그것은 당장은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두움은 마치 물고기를 낚는 것과 같이 적절하게 컨트롤하여 마침내 당신의 힘이 빠졌을 때, 낚싯줄을 감아서는 한순간에 낚아챌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산 채로 머리가 잘리고 살이 포떠서 접시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를 변화시키고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게끔 할 수 있는 유일한 "힘", 안전하면서도 전적으로 온전하고 선한 "힘",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누구라도 "믿기로 결심"만 하면, 그 힘을 자유자재로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오픈 소스"로 개방되어 있다. 다만 믿지 않을 뿐이다.
믿음은 실체이며, 따라서 힘이 있고, 내 존재와 삶을 변화시킨다.
마지막으로, 관념은 진리의 일부만을 드러낼 수 있다. 이는 이성 - 관념의 작동방식 자체가, "통제 - 억압"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꽃"이라는 존재가 있다. 언어와 말을 통해서 "관념"으로써 드러낼 수 있는 꽃의 형상은 매우 일부분이다. 꽃의 "정의"는 꽃의 존재의 극히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념으로는 감동받지 않는다. 그러나 감성과 체험과 직관으로써 꽃을 마주할 때, 꽃을 본다는 매우 평범한 행위와 현상이 내 존재 전체를 완전히 뒤바꾸는 거대한 사건으로 화한다.
애초에 관념은 온전한 존재를 특정 범주 하에 "제한"시키는 방식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이성과 관념의 세계에서 능숙하도록 태어났으나, 회심하여 "믿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과 관념으로는 어떤 존재나 진리, 혹은 대상의 "억압된 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발휘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장이 알바에게 일을 시킬 때, 사장의 입장에서는 "돈은 적게 주되, 일은 많이 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일하는 입장에서는, "돈은 많이 받되, 일은 적게 하는 것"이 최상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관점이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사장의 의지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통제와 억압"뿐이다. 규율과 메뉴얼을 정하고 감시체계를 작동하는 것.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람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없고,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영역(예: 마음, 집단적인 분위기, 능동적 자세 등)에서 예상을 넘어서는 손실과 손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것을 모른 채로 그저 통제와 억압의 방식만을 따르는 사장이라면, 그는 어리석은 것이다. 오히려 철저하게 이익을 따지고 계산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직원들이 "능동적으로 스스로 일하게 하는 것"이 총체적으로 더 큰 이익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음이란, 당장 눈에 보이는 차원의 이익의 크기만을 따지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손실이나 손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에서 발생한다. 무지한 자를 일깨워줄 수는 있으나, 무지에 집착하는 자는 약이 없다. 그는 넘어지고 깨지고 좌절해야만 깨달을 것이다. 혹은 그러해도 못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현명한 자는, 당장의 눈에 보이는 차원의 손실이나 손해에 집착하지 아니하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이익이나 성과에 밝은 사람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더 큰 결실을 거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이성과 관념으로는, 진리의 일부분만을, "마지못해"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때, 이성 안에서, 진리는 "일하기 싫은데 억지로 일하는 직원"처럼 움직인다. 사실이 그러하다. 일은 더 많이 시키고 실수하거나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격히 따지면서, 정작 돈은 최소한으로만 준다면, 누구라도 일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소극적이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반대로, 믿음이란 내 안에서 진리를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드러내게끔 한다. 믿음이 내 안에서 실체가 될 때, 진리는 "스스로 움직이면서" 자기를 드러낸다. 그때에, 이성과 관념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들이, 내 안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더 완전하고, 더 경이롭고, 더 아름답고, 더 총체적이고, 더 거대한 무언가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이성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이성이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믿음은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다.
무엇이 더 "이익"인지는, 계산과 이치에 밝은 냉정한 사람이라면 능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