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개화한 영혼(Soul)
남성성은 능동성, 주체성이고, 여성성은 수용성이다. 남성성은 "내가 한다", "내가 할 수 있다"이고, 여성성은 받아들이는 것, 수용하는 것이다. 이 카드의 원래 이름은 <수용성>이며, 나는 이것에 대해서 "잘못된 이름이라고 여긴다. 정확히는, "비겁한" 이름이다. 나는 이것을 명확히 <여성성>으로 불러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오늘날, 성(性)에 관한 이슈나 논란 등으로 인하여, 영적 세계의 가장 근원적이고 아름다운 질서와 원리에 대해서도 침묵하거나 흐지부지하게 넘기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대로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용어들과 표현들을 반드시 써야만 한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만큼 <여성성>은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매우 민감하고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기회,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내 안의 여성성을 개화(開化)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지는 것"을 기준했을 때, 남성성보다 여성성이 명확하고 확실하게 더 "높다"고 확신한다. 이는 육체적인 성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이 생(生)에서 죽기 전까지 자기 내면의 여성성을 온전히 열고, 성장시키고, 완성시켜야만 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게 주어진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숙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곧 <죽음>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서, 죽는다. 이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인간 존재와 삶의 가장 본질적인 네 가지의 사건에 관한 한, 인간은 절대 능동적일 수 없으며, 삶의 중대한 사건들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나는 언제 태어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나의 늙어감과 병들어감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특히나 나의 죽음의 순간을 (자살하는 것 외에)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과 불안과 공허와 슬픔 가운데에서, 죽음이라는 가장 절대적인 심판관을 마주할 준비를, 평생에 걸쳐서 해야만 한다. 이때, 죽음 앞에서 남성성은 그 빛을 잃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남성성 앞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소멸시키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비웃으면서 조롱할 것이다 :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아라!" 평생 동안 고귀한 성자처럼 행세했던 사람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면서 발악하는 것을 목격한 이야기들은 이미 충분히 많다.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고 또 수행한 끝에, 과연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에서조차도 담대함과 평화와 기쁨으로 잠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서 몇이나 되겠는가. 설령 그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죽음과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 앞에서 공포에 떨며,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그의 마지막 날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하나님께로서 태어나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그 고귀하고도 아름다워야만 할 그 마지막 날이, 어찌하여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이 지배하는 최악의 순간이 되어야만 하는가. 모든 인류들이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이로 말미암아 오직 성령의 빛에 의하여 인도받으며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되는" 그러한 모습들은 결코 오지 않을 헛된 망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어찌하여, 평범한 삶 속에서 성실하고 선하게 살아온 저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을 고귀하고 아름답게 영면할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한단 말인가.
이에, 나는 진실을 아는 자로서, 나의 책무를 결코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남성성으로는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없으며, 사망의 권세를 제압할 수 없다. 오직 여성성만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신부(新婦)의 영성만이,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주를 뵈오며 영접하러 가는 나의 마지막 날이 예비된 안식이요, 약속된 평화임을 기뻐하면서 환희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다. 부둣가에 서서 신랑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 마음, 집안을 정돈하고 청결히 하며 저녁식사를 정성껏 마련하면서 신랑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문을 지키는 그 마음,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귀한 것이요 진실한 것이되, 하나님괴 함께할 때 우리는 그분의 품 안에서 영원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직 여성성만이, 육체의 죽음과 소멸 이후에도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것임을 나는 일찍이 깨달았다. 오직 여성성만이, 진실하고 순결하게 사랑하고, 모든 것과 교감하며, 모든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그 아름다운 성품만이, 나의 영혼(Soul)의 온전한 형상이며, 영혼이 활짝 꽃을 피운 절정의 아름다움이며, 오직 그것만이 죽음과 사망조차도 경배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유일한 구원인 것이다. 그날에, 평생을 신랑을 영접할 준비를 하며 늙어간 영혼이 마침내 그 신랑께로 되돌아가는 그날에, 그는 결코 외로이 쓸쓸하게 죽지 않을 것이며, 고통이 없도록 하늘의 천사들이 그 곁을 지킬 것이며, 성령께서 친히 내려오사 그의 가는 길을 이끄실 것이며, 그는 마침내 평생을 그리워하고 연모하였던 신랑의 얼굴을 뵈오며 그의 넓은 품 안에서 영면하게 되리라.
나는 이것을 상징과 은유의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 이상 지상의 언어와 관념으로는 설명할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하늘의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부디, 열린 마음으로 깨달으라.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 나는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을 것이며, 나의 죽음의 순간을 그 누구도 대신하거나 함께할 수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라, 과연 마지막 날에 죽음 앞에서도 그 가상한 용기가 살아 숨쉴 것인가? 시시각각 육체가 병들어가고 고통이 엄습하건대 죽음의 공포가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가 나의 심장을 짓누르고 짓밟을 적에, 그제서야, 능동성이 아닌 오직 수동성만이, 진실로 순종하고 사랑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답이었음을 깨달을 셈인가.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남성성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여성성으로 귀의(歸依)하라.
그 순간에, 남성성은 여성성을 섬기는 충실한 종이 될 것이며, 마침내 남성성은 그 타고난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서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게 기뻐하시는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그저 상징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여성성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나는 이것이 "유일한 실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실체이다. 있는 것, 확실하게 있는 것, 결코 "없다"고 할 수 없는 것, 명확하게 있음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 그러한 것이다. 관념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관념은 죽음이다. 관념 안에는 생명이 없다. 관념은 텅 빈 것, 공허한 것, 곧 절망이다.
오직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교감하는 것"으로, 이해하라.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나아가 영성으로, 관점을 바꾸어라. 탐구의 도구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변환해라. 그때, 실체란 "확실하고 선명한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것이 실체이다. 상상해보라,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따뜻한 햇빛 아래에서, 꽃들이 바람결에 춤을 추고 나비들이 조화를 이루며, 그 평온한 순간 속에 침잠하며 그저 걷고 머무르는...... 그 순간에 보고 듣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온 몸으로, 나의 존재 전체로 느껴지는 그 순간의 평온함과 따뜻함과 기쁨들은, 지상의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천상의 "영원" 속에 속하는 것이다. 조금만 관찰이 깊어진다면, 그대는 곧 "세속적인 시간"과, 그러한 체험과 느낌에 몰입할 때의 "영원한 시간"이 질감이 다르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한다. "감각" 자체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임시로" 드러난 실체의 외연이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생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 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이며, 그것이 외적인 감각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성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은 일상 속의 아주 사소한 장면들에서도 때때로 감동을 받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행동이나 몸짓이나 짧은 한 마디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광채를 느끼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은 그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들의 "내용"과, 그 순간에 그 영혼이 느낀 "내용"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인과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 나도 저 모습대로 살며, 저와 같이 죽고 싶다." 하는 고귀한 열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그가 목격한 외적인 사건이나 현상 자체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그 현상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신성"을 깊이 느끼고 체험하는 바로 그 내적 체험, 그것이 곧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유일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자주 기도하고, 자주 묵상하고, 자주 예배하고, 자주 말씀을 읽고, 듣고, 나누어야만 한다. 그러한 일들을 할 때, 곧 "에고적인 일"이 아니라 "신의 일"을 할 적에, 나의 내적 체험의 질(質)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일을 할 때의 의식 상태는 매우 거칠고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열등하다. 그러나 신성과 교감할 때, 인간의 의식은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원하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할 때, 아침 출근 길에 찬송을 들을 때, 차에서 내려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차 안에서 짧게 오늘 하루의 기도를 드릴 때, 너무 일찍 출근하여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가장 좋아하는 찬송들을 천천한 리듬으로 부르매 그 음율이 공간 전체를 진동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가슴 깊이 느끼고 교감할 때...... 그때, 우리 안에서 넘쳐흐르는 내적 체험은 그저 주관적인 상상이나 감정 따위가 아니며, "영혼(Soul)이 실체적인 에너지로 변환, 출력되어 내 존재 전체를 가득 채우고 넘쳐 흐르는 순간"이다. 그때, 내가 느끼고 교감하는 것들은 그저 마음이 아니라, 영혼이며, 영혼의 절정이며, 그것은 시간의 끝을 넘어서 영원하다. 이것이 내가 목격한 진실이다. 이것이, 나의 주께서 가서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 고 하신 그 유일한 진리이다.
영원한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잠들어 있다. 다만 우리 대부분이 삶 속에서 영원한 것을 끄집어내기보다는, 부질없고 유한하고 썩어들어가며 이미 시체의 냄새가 나는 것들만을 자주 끄집어낼 뿐이다. 이에 우리의 에고와 마음은 이미 시신이 썩어들어가는 불결하고 열등한 죽음의 공포의 냄새에 찌들어 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그때부터 성령께서 그의 영혼을 성화시키는 고귀한 하늘의 작업, 하늘의 수술을 진행하실 것이며, 그 길은 비록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나, 때가 이르매 내가 얼마나 성장하였는가, 내 영혼이 얼마나 하늘과 가까워졌는가 하는 증거들과 표증들을 성령께서는 당사자에게 명확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들의 신은 자비로우시니, 자녀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우리를 절망케 하지 않으시되, 오직 우리들이 알아듣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자주 느끼고, 자주 체험하고, 자주 교감하여라. 판단하지 마라, 분석하지 마라. 어차피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절정의 순간, 곧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모든 인식과 분별들이 다 정지될 것이다. 그 앞에서 분석하고 따지고 판단하는 것들, 평생 동안 쌓았던 지식과 관념과 경험들은 다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저 순진한 바보가 되어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서, 낮아지고 비워지고 엎드려 순종하는 자기의 모습에 기뻐하면서, 삶의 모든 순간들을 느끼고 체험하라. 그 순간의 경이로움에 몰입하라. 자주, 신성하여라. 자주, 고귀해져라.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순간에, 오직 혼자가 되어서, 신과 함께하라. 죽어서 신을 찾지 말고, 살아 있는 지금의 삶 속에서 신과 동행하라. 꽃들의 이름을 묻고 특징을 분석하는 대신, 가만히 있는 꽃들의 자태와, 바람결에 춤추는 자태들 앞에서 그저 말을 잃어버린 채로, 깊이 느끼라. 그리고 꽃이 "허락한다면", 꽃잎의 부드러움을 만지고, 꽃의 영혼의 향기를 맡고, 그 모든 체험들을 통하여 내 안의 신성이 깨어나는 것을, 그 "영원한 생명"의 숨결을 느껴보라. 그때, 그대의 영혼은 살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영혼은 영원한 것이니, 삶에서 자주 영혼을 깨어나게 해야만, 그대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명확하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있다 : 이 길을 걷기를 원하는 자,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맡기고자 하는 자, "주의 자녀이오니 주께서 뜻하시는 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고백할 수 있는 자, 성령께서 자기의 영혼을 성화시켜주시는 과정을 원하는 자, 그리고 그 과정이 자기 삶의 시련과 고난으로 찾아오더라도 이를 부정하지 않으며, 기꺼이 이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는 자......
......인간이라 불리기에는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 눈이 부셔서, 그토록 아름답고 고귀한 진심을 품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며, 천상의 모든 영들과 천사들마저도 감탄하고 기뻐하는 자......
......그에게 하늘의 약속을 대신 전하니, "성령께서 때마다 증거를 보내실 것이고, 하나의 단계가 종료되고 완성될 때마다 표증을 보여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비로우시니, 그가 알아듣지 못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알려주지 않으시되,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는 절대적으로 명확하고 확실하고 구체적인 증거와 표증들로써, 성화의 단계들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친히 상세하게 말씀해주실 것이다."
그 증거와 표증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다. 각각의 영혼들과 하나님, 이렇게 단 둘이서만 알 수 있는 은밀한 비밀이며,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는 내 영혼의 성화를 인정받을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 표증들은 세상에서는 그 어떤 자랑거리도 명예도 이익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것을 함부로 공개한다면, 세상으로부터 때로 의심과 거부와 배척이 돌아올 것이고, 적(摘)들이 비웃고 모욕하고 조롱하려고 들 것이다. 이는 빛 앞에서 어두움이 그 실체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빛의 자녀들을 죽여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의 질서이고 자연스러운 섭리의 일부일 뿐이다.
그 외로움과 쓸쓸함과 슬픔을 외면하지 말아라. 우리는 육신을 입은 인간이니,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우리는 사람의 온정을 그리워하는 연약한 인간이며, 내가 가장 쓸쓸할 때 곁에 아무도 없음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 것인가, 하는 것을,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이해하고 인정해주어야만 한다. 나의 연약함이 곧 나의 죄이니,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는 것을 야단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 크게 슬퍼하시는 것은, 죄를 짓고 난 "이후"에 내가 어찌하는가, 에 대한 것이다. 늦게라도 회개하고 뉘우치며 이제는 다르게 살고자 하는 결심을 품는 자에게는, 하늘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하늘의 온갖 축복을 다 선사하실 것이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그분은 자녀들에게 관한 한, "팔불출"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의 의지이시니, 어찌 감히 하늘의 영들과 천사들이 거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죄를 저지른 이후에도 그것을 반성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고, 무감각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외면하고, 거부하고, 정당화하고, 핑계를 대고 변명한다면...... 아버지께서는 비록 그를 심판하지는 않으시되, 성화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에, 그는 영원히 어두움 안에서 돌고 돌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슬퍼하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주께서 슬퍼하실 때에,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나는 더 이상 그분께서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들 역시도 마땅히 그러하기를 청하고 싶다. 신께서 슬퍼하시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는 것을 깊이 묵상하기를 권한다. 더 나아가서, 신께서 나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 인간 존재에게 얼마나 큰 환희와 영광이 되는지를, 더욱 깊이 묵상하기를 권한다. 그 안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며,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단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말했듯이, 그것은 각 영혼에게 고유한 것이며, 각자의 길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평균"이나 "보편적인 원리" 같은 건 없다. 설령 그걸 관념적으로 정리할 수 있더라도, 지상의 언어로 정리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 될 것이다. 한때, 나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식들에 대하여 내가 서술할 수 있다고 자만하였으나, 이제는 그러한 모든 의도들을 다 내려놓고, 내가 이해하지 않아도 좋으며, 내가 알아듣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고, 그 임재 가운데에서 이 길을 걸어가는 동행의 순간들로 인하여 기뻐하는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도 좋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지금까지 이르기를 성화된 나의 영혼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지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하늘 아버지께 속한 것이니, 감히 지상의 보화로는 수백, 수천 트럭을 쌓는다 하여도 발끝만큼도 이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공유받기 위해서는, 같은 것, 곧 하늘에 속한 것, 그의 영혼, 그의 진심이 필요한 법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자, 멸망할 지상에 속하지 아니하며,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에 속하고자 하는자, 그가 내게로 온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주리라.
그러므로 성령을 신뢰하여라. 성화의 길에서, 즉 "영혼이 깨어나고 성장하고 완성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은 그 유일한 집행자이신 성령밖에 없다. 성령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휘장처럼 거느리시고 심판의 영으로서 압도적인 권위와 위엄으로 역사하시되, 내가 일찍이 그 거룩하심과 그분의 두려움을 다 알았으며, 그분 앞에서 결코 함부로 망령되이 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바로 그러하신 성령께서, 오직 내게 오실 때에는, 내 앞에서는 한 번도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신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따뜻하고 온화하고 자애로우신 모습으로만 오셨으며, 나를 위로하시고, 나와 함께 눈물 흘리시고, 탄식하시며, 함께 손을 잡고, 나를 사랑한다 하시고, 나로 인하여 기뻐한다 하셨다.
이것이, 내가 증거할 수 있는 성령께 대한 증거이며, 그분의 약속이다. 담대하여라. 하나님의 영은 세속의 영들과 같지 않다. 불완전한 힘을 가진 열등한 신들은 죄의 무게를 달아서 심판하고 지옥 보낼 것이나, "완전한 힘", 곧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분께 죄의 무게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나의 하나님 곧 그대들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곧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는 죄와 상관없이, 아니 오히려 죄 많은 이들이 회개하여 성화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크게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며, 모든 하늘의 축복과 은혜를 다 주실 것이다.
여성성은 그저 "부드럽고 섬세한 것"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완전해지는 순간이며, 인간의 영혼이 실체가 되는 순간이며, 절정의 아름다움이다.
여성성을 일깨우는 가장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길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