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시종 : 마음(mind)

by 생명의 언어

내가 글을 쓸 때 마음이라는 단어 옆에 (mind)라는 괄호 표기를 병행하는 것은 그저 습관이거나 겉멋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마음, 이라고 말하지만(예: 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 사실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 더 명료하게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항상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로써, 나는 언제나 마음(mind)을 좀 더 명료하게 지시하고 가리킨다.


구름의 원소로 접어드는 순간, "실체화", 즉 육화의 단계에 접어든다. 구름의 원소의 주된 대상은 바로 "의식" 그 자체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은 마음(mind)을 의식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대다수 사람들이 보이는 차원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아주 정밀하게 분석하여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소리"와 "향기"는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내면세계 역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공유할지라도,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와 차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정렬되는가, 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첫번째는 바로 마음 자체에 대한 것이다. 마음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이 글에서는 앞선 글들보다 훨씬 더 실체적이고 정밀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마음에 관하여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마음이라고 하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따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어떠한 고정된 "바탕" 같은 것이 있고, 그 바탕 위에 각각의 생각, 감정, 느낌, 인식, 분별...... 등의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는 마음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오류이다. 물론, 마음이 실체가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마음은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희로애락 등의 감정을 느끼며,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실체적인 것이다. 내가 기뻐할 때, 이것은 내게 절대로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다. 내가 슬퍼할 때, 이것은 결코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처럼, "현상 그 자체"는 매우 명료하고 선명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단일한 고정된 실체로서의 "마음" 안에 가두고 정리하려고 하니까 문제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고정된 틀을 기준으로 해서, 매 순간 시시각각 흘러가는 내적 체험들(생각, 감정 등)을 "통제"하려고 하니까, 그것들이 계속해서 충돌과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다.


기쁠 때는 기쁘면 된다. 슬플 때는 슬프면 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중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따위는 없다. "제거해야 하는 것" 따위도 없다.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도 없다. 남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아무리 추악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현상은 그저 일어난 것일 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분별"을 통하여 내가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어떤 틀 안에 고정시켜 버리려는 그 시도 자체, 그것이 악한 것이다. 특정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즉시 "거부"하고 "억압"하려 드는 어떤 무의식적인 관점, 그 자체가 바로 악한 것이다.


충분히 두렵고 나면, 곧 평온해질 것이다. 충분히 욕망하고 나면, 곧 고요해질 것이다.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곧 회복될 것이다. 충분히 방황하고 나면, 곧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신성한 질서이니,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내맡길 때, 우리의 능력으로는 절대 통제되지 않는 마음이 어느 순간 제자리를 잡아가며, 순리대로 흘러감을 목격케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의 마음이라는 어떤 고정된 것은 없다. 마음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망상 속에서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고(애초에 마음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망상이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다. 흘러가는 강물더러 거꾸로 흐르라고 명령한들, 그것은 본래부터 안 되는 것이며, 안 되는 것을 붙들고 애써봤자 불행해지는 건 강물이 아니라 나다.


이것은 이성으로 지식으로 관념적으로 이해해봤자 아무 부질없는 것이다. 마음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그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마음에 대한 동일시"가 해체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망상이 풀릴 때, 여전히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마음을 마음대로 해야 한다는 그 망상에 갇힌 채로,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매 순간 괴로워했던 그 부질없고 허망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왜 자력구원이 불가능한지 아는가? 마음 자체가 애초에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하려는 것은 곧 1인칭 능동태이다.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한다, 의 존재 방식. 그러나 이것은 곧 통제, 억압의 태도이고, 이는 곧 불안에서 근거하며, 불안은 곧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근거하며, 마침내 이것은 무의식의 깊은 곳에 뿌리내린 공포로부터 말미암는다. 당연히 공포는 가장 깊은 근원적인 어두움이다. 따라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들 때, 나는 애를 쓸수록 더욱 어두움에 깊이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서둘러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명심하라, "내가 한다"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가 정확한 존재 방식이다. 이것은 차라리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하면 훨씬 쉽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 내가 묻건대, 불교의 경전이나 가르침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듯하여 우상처럼 숭배하면서, 정작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자들의 오만함과 나태함을 직시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또한 묻건대, 지난 수천 년간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목숨을 걸어왔던 그 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신비주의자들과 순교자들이 죄다 바보 멍청이여서,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진리로 믿었단 말인가? 고작해야 책 한두 권 주워 읽고서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것마냥 타자를 비판하는 당신 수준만도 못했기에, 그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착각한단 말인가? 제발 꿈에서 깨어나라.


자기가 전교 1등이면, 학교에서 제멋대로 해도 된다. 그러나 1등은 한 명일 수밖에 없고, 그 외 절반은 중위권이고, 나머지는 다 하위권이다. 중위권 학생들은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 비교하지도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스스로의 성장을 위하여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위권들만이, 자기들이 마치 1등인 줄 착각하면서, "먼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꼭 자기가 옳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


이는 종교 불문하고 진리이다. 불교의 예를 들겠다. 도대체가 당신들이 먼저 깨달음을 얻으신 여러 부처님들을 업수이 여길 만큼 그리 잘났는가? 그분들만 못하면, 그냥 그분들이 시키는 대로, "예 알겠습니다" 하고 냉큼 하면 될 일이다.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친절하게 그 길을 다 열어주고 있는데, 일단 중위권에라도 오르고 나서 제 나름의 길을 찾을 일이지, 지금껏 평생을 성장은커녕 퇴보만 되풀이해놓고서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성장하지 않은 자는 질문할 자격이 없는 법이다.


기독교의 예를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초심자, 하위권에게 요구하는 것은 절대 어렵지가 않다. 기도하라. 묵상하라. 성경 말씀을 읽어라. 교회 참석해라. 이 중에 하나라도 해라. 그게 그리도 어렵단 말인가? 걸음마조차 안 되면서 복잡하고 그럴듯한 교리나 신학에 집착하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마냥 굴어서 도대체 내 영혼에게 무슨 이익이 된단 말인가? 실천하여 행하면서 하는 질문은 의롭고 옳으나,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지식에 천착하는 것은 죄악이다. 행하지 않는 자는 질문할 자격이 없는 법이다.


교만을 내려놓는 것은 최우선 과제이다. 그것은 대단한 경지가 아니라 애초에 영적 성장을 위한 전제 자체이다. 교만하면 성장할 수 없다. 교만한 채로 영적 세계에 입문하면, 지식과 경험이 쌓일수록 그 교만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내가 마음공부 10년 했는데", "내가 교회를 20년을 다녔는데", 인간에게나 그 세월이 긴 법이지, 하나님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은가? 그분께 인간의 전 생애조차도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죽기 직전의 늙은이나 갓 태어난 어린아이나 하나님께는 차이가 없다.


받아들여라. 순종해라. 질문하지 마라.


믿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기쁘게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멘>이다.


맨날 습관처럼 하루에 백 번씩 아멘 외친다 한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천국에 다 갈 것이 아니듯이, 진실로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은 내 영혼을 썩고 부패하게 하는 죄악일 뿐이다.


어떻게 교만을 내려놓는가? 보라, 질문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아는 선에서 자꾸 더 많은 앎을 얻으려고 하는 그 태도 자체가 애초에 교만이다. 교만은 드러나는 게 아니라 감추어진 것이다. 남들 앞에서 으스대거나 무시하는 등 외적인 행위를 보여야만 교만이 아니다. 교만한 마음 상태가 있는가 없는가, 가 중요하지 않다. 겉보기에 마음이 아무리 정상처럼 보여도 무의식에 교만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는 선에서, 주어진 선에서, 질문을 멈추고 일단 해라. 잘 모르겠거든 뭐라도 해라. 봉사나 기부를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남을 돕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교회나 절에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가서 기도하거나 절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책을 읽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일단, "따르고,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하면 어느 순간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열릴지니, 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축복이고 은혜다.


문 앞에 서서 왜 열리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자에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으로 다가가서 문고리를 쥐고 돌리는 자에게, 문은 열린다.




"하려는" 의도를 빼야 한다. 진정한 능동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애를 써서" 천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이루어졌다." 이것이 진정한 능동이다. 참된 능동, 완전한 능동은 곧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가야 한다. 내려놓고 받아들일 때, 나는 비워지며,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빛이 흐르매, 그때에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하느냐, 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손으로 인생을 사는 게 성공 확률이 높겠는가, 나를 통하여 신께서 이루시는 것이 더 잘 살 가능성이 높겠는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 내 손에 움켜쥐거나, 아니면 성공하거나. 대개의 경우 욕심이 문제다. 이 세상은 원래 둘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 성공하고 싶거든, 내려놓아야 한다. 움켜쥐고 싶거든, 실패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묻건대, 굳이 내 손으로 직접 돈을 벌어서 성공하는 것과, 로또 당첨돼서 쉽게 성공하는 것 사이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면서, 순종이라는 쉽고 빠르고 확실한 길을 버리고, 굳이 아득바득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은 깨닫지 못한다.


"내가 하늘을 본다"가 아니다. "하늘이 나에게 보여진다"이다.


"내가 기쁨을 느낀다"가 아니다. "기쁨이 나를 통하여 흐른다(드러난다)"이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매우 중요한 차이다.




그 다음은, 동일시의 해체다. "나"와 "마음"은 전혀 다른 존재다. 잘 보라, 길을 걷다가 어디선가 아름다운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은 "내 안에" 있는 것이고, 소리는 "내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한다. 즉, 소리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마음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깨어 있음, 관찰, 자각이 깊어져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언뜻 나인 것"처럼" 보일 뿐이지, 내가 아니다. 같은 내면을 공유하는 존재들이지만, 한 덩어리는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서울과 부산이 속해 있지만, 그렇다고 서울이 곧 부산인 것이 아니다. 엄연히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존재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 전체 안에서, 자아(ego)와 마음(mind)은 서로 다르다.


대부분은 마음이 나, 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관찰하여 해체해야 한다. 마음은 내가 아니다.


만약 길을 걷다가 누군가 내게 욕을 한다면, 당연히 나는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분노와 화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이다. 그런데 마음은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타인이 내게 욕을 했다는 데이터값이 입력되면, 마음은 자동으로 분노와 화 등의 출력값을 뱉어낸다. 거기에 내 "의지"는 없다.


내 마음이 화가 났기로서니, 왜 나까지 화가 나야 하는가? 마음이 그렇게 움직인 것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어났기로서니, 왜 나까지 고통받고 괴로워야 하는가? 이것이 너무나도 이상하고 억울하여야 한다. 나는 나다. 그런데 왜 마음의 시시콜콜한 움직임에 일일이 다 흔들려야 한단 말인가?


이것을 이해할 때, 마음 자체와, 마음을 인식하는 주체는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정당한지 잘못되었는지 등을 분별하고, 또한 그 마음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드는 "시선"이 있다. 마음 자체는 내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영화관 스크린처럼 현상하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그 화면을 보면서 시시콜콜 분석하고 따지고 드는 "관찰자"가 나다.


그런데 마음에 대한 동일시가 해체되면, 내 마음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든 사라지든 간에,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 된다. 물론 마음이 시끄러우면 그 앞에 서 있는 나도 썩 불편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지경까지는 되지 않는다. 마음이 불안하면, 나 역시 편치는 않겠지만(마음과 자아는 같은 영역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자각이다.


동일시가 해체되면, 자유가 있다.




마음은 주체가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중용한 문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이 "스스로" 움직이고 결정한다고 여긴다. 마음이 스스로를 움직여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그렇게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마치 영화 스크린이 스스로 영상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스크린은 그저 비출 뿐이고, 실제 영상은 정반대에 위치한 영사기가 비추는 빛에서 만들어진다. 마음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도 일으키지도 사라지게 하지도 않는다. 마음은 그저 비출 뿐이다.


만들어내는 것은 마음에 무언가를 "투사"하는 그 "맞은편"에 있다. 이것이 누구인가? 바로 자아(ego)다. 자아는 무의식에 지배당하며, 무의식의 근원은 공포다. 곧, 어두움이 자아의 구조를 형성하고, 그것이 마음을 통하여 투사되는 것이다. 당연히 그때에 마음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은 다 부정적이고 왜곡되고 변질된 것들뿐이다.


영화 스크린을 열심히 닦는다고 해서, 영상이 바뀌지 않는다. 영사기에 입력된 데이터값을 바꿔야지, 화면 속의 영상의 내용이 바뀐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아무리 닦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마음에 비추는 "주체"를 바꿔야 한다. 주체가 자아로 남아 있는 한, 화면에는 끊임없이 어두움이 재생될 것이다.


이제, 주체를 전환해라. 자아는 행위자가 아니라 관찰자로 남아라. 그 대신, 더 깊은 곳의 나, 곧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그 존재에게 주도권을 넘겨라. 그때에, 영혼은 자아보다 더 온전하고 깊고 충만하니, 마음에 재생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변화할 것이다. 어두움이 아닌 빛이 마음에 투사되어 재생될 것이다.


간단한 이치이다. "무엇을 어디에 연결하는가"가 중요하다.


올바르게 정렬된다면, 마음은 굳이 애써 닦을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속지 마라. 마음은 자아보다 낮다. 그리고 자아는 영혼보다 낮다. 그 말은즉, 만약 영혼이 자아에게 무언가를 지시한다면 자아는 순종해야 하지만, 마음이 자아에게 보고한다고 해서 자아가 곧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소리다.


상황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에서는 불안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며, 이는 곧 자아에게 보고된다. 이때, 자아는 똑같이 불안해하면서 어서 빨리 상황을 다시 통제하려고 온갖 발악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애를 쓸수록 어두움이 돌고 돌면서 문제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져만 간다.


착각하지 마라. 마음이 불안을 보고했다고 해서, 자아까지 불안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역할은 마음의 보고를 상세히 관찰하고, 분석하고, 정리해서, 상급자 곧 영혼에게 넘기는 일이다. 마음에서 이러저러한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중 이것은 진실이고 저것은 거짓에 가깝습니다. 이에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자아의 역할이다.


그때, 진정한 주인인 영혼은 곧 자아에게 응답을 보낼 것이다. 대개 그 응답은 침묵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는, "굳이 말할 것이 없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문제 없음"이라는 표시다. 유심히 잘 관찰하면, 마음은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부풀려서 확대 보고를 하는데, 자아가 관찰자로서 마음에 대한 동일시가 해체되어 있다면, 이것을 냉정한 관점에서 충분히 "정리"하여 실제로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영혼은 자아를 굳이 거치지 않더라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자아)의 존재는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혼이라기보다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관찰자로 남아라. 영혼이라는 진정한 주인의 뜻에 따르고, 마음에 대하여 관찰자로 남아라. 자아는 마음의 편이 아니라, 영혼의 편이다. 누구 편인지를 선명히 하라.


의식적으로, 마음보다는 영혼을 더 신뢰하라.




마음은 화면일 뿐이다. 화면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화면과 연결된 컴퓨터이지, 화면 그 자체가 아니다.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때, 마음으로 인하여 겪는 많은 문제들은 저절로 풀릴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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