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기사 : 싸움

행위자에서 동역자로

by 생명의 언어

기사는 "빌려온 힘"을 자기 것처럼 다룬다. 기사의 전투력은 갑옷과 무기와 말의 힘에게서 비롯하는 것이다. 즉, 기사는 여전히 "도구"에 속박되어 있다. 비록 시종(page)보다 더 능숙해지고, 독립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해진 단계이지만, 여전히 기사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기사가 원하는 독립은 결국 "주체성", 그러니까 도구나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 나의 존재 자체의 본질적인 힘을 현현케 하는 것이다.


나의 "이성"은 도구이지, 내가 아니다. 만약 내가 교통사고라도 당해서 뇌에 충격이 가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및 추론 등의 기능과 영역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최소한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으며, 이것은 현실의 삶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때에, 이성은 나의 도구였지 내 존재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성이 다루는 무기인 "지식(관념)" 역시도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내려온지 얼마 되지 않은 존재는 어린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좋아하면서도, 그 동심에게로 이끌리면서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 있었던 영혼"으로서는 인식하지 못하며, 따라서 경외하지 않는다. 그 어린아이는 순수한 영(Spirit)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맑고 투명하다. 이것이 존재 자체의 힘이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하면서 오히려 그 에너지가 육화되기는커녕 억압당하고 봉인당하며 퇴보하고 변질되고 왜곡된다. 이른바 "사회화"라는 명목 하에, 어른이라는 억압 안에 갇혀 수십 년, 내지는 평생을 구속당한다. 유감스럽게도 절대 다수의 "어른"들이 이러한 문제들이 문제라는 기초적인 이해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깨어난 소수의 영혼들을 "사회화"라는 명목 하에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집단성이라는 틀 안에.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그들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다가올 적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더 늦지 않도록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 진리를 찾으라.


내가 자기 것처럼 부리고 있는 "지식" 중에서, "관념" 중에서, "언어" 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나의 존재 자체에 속한 고유한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이 바깥에서 학습한 것이고, 입력당한 것이고, 누적된 것이고, 받아들인 것이다. 즉, 외부에서 온 것이다. 지식을 내려놓고, 관념을 벗어나서,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도, 온전히 나의 존재 자체에만 속하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찾고,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기사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다. 기사의 의식 수준은 아직까지 충분히 깊어지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러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임무들을 감당해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그는 극도로 지치게 될 것이다. 말고삐를 쥘 힘조차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갑옷이 유난히 온몸을 짓누르며, 손에 쥔 창검이 천근, 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때에 그는 마침내 도구를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기사는 여왕(Queen)으로의 승급을 열망하게 될 것이다.




의식의 초점이 아직 표면적인 단계에 머무를 때, 의식의 주체는 이원성의 분열, 대립, 갈등의 원리로써 작동한다. 주체는 자아와 타자와 세계를 "인식"하려고 하는데, 이 인식 자체가 인식주체인 "나"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그렇게 인식된 것을 "분별"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으로. 이 또한 이분법적 사고, 즉 분열과 대립을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이, 기사의 의식 수준은 이원성을 전제로 해서 "개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개체성이라는 것은 에고(ego) 단계에서는 환영에 불과하다. 잘 생각해보라, 에고가 생각하는 개체성이란 결국 자기를 제외한 세계의 나머지 전체를 통째로 적대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개체성이란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이것은 영의 완전성, 존재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죄성적 본성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은 딱히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냥 사실 그대로이다. 모든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인간을 완전하지 않게끔 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본성(소위 "죄"라 부르는 것)이 내 안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주체의 의식의 초점이 아직 표면적인 수준에 머무를 때, 행위자이자 주체로서의 "나"가 모든 것을 통제, 장악한 채로, 손에 움켜쥐고 나면, 그제서야 나의 존재가 완전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바, 유감스럽게도 이는 망상에 불과하다. 애초에 자기 마음조차도 통제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이에 타자는 더욱 통제되지 않고, 세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때에, 좀 더 깊어진 의식은 반드시 자아(ego)의 한계를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어떠한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 바, 이것이 바로 "신"이다.


"개체"라는 건 없다. 그건 망상이다. 가장 흔한 착각이다. 육적으로 본다면, 나의 생물학적인 몸(body)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나의 육신이 그 한계인가? 그렇다면 내 주변의 공기들은, 내가 숨을 들이마시기 전까지는 내가 아니었다가, 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나면 나의 일부가 되었다가, 내쉬고 나면 다시 나로부터 분리되는가? 그리고 나의 육신의 경계를 원자 단위까지 쪼개고 또 쪼갠다면, 그때에도 내 육신이라는 "경계"는 거기에 존재하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 몸의 모든 세포들은 수 개월 단위로 대다수가 교체된다. 그렇다면 그 수 개월 전의 나의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과 지금의 나의 성분은 거의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이 확실한 바, 자아의 연속성을 육신으로 담지할 수 있는가? 있다 치더라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육신 안에 있는가? 있다면, 어디인가? 찾아낼 수는 있는가? 찾아낸다 한들, 어찌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육신이 "나"라는 착각은 참으로 가여운 망상일 뿐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에 의존하며, 그것들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다. 더욱이, 나는 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생명들을 죽여서는 그 혈과 육을 섭취해야만 한다. 이것이 인간 존재에게 크나큰 비극이며,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일이다. 가슴이 아픈 일이다. 고기를 먹는 자들에게 이르노니, 그대들이 즐겨 먹는 그 고기를 업수이 여기지 말지어다, 그대가 죽고 나면 그대의 피는 선지가 되고 고기는 해체되어 정육점에 걸릴 것이니. 또한 채식을 한다고 교만하고 우쭐대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동물 대신 식물을 죽인다고 해서 당신들이 살생을 하지 않는 것 같은가? 어차피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다. 당신 손에 묻은 피가 육식을 행하는 자들의 손에 묻은 피보다 덜하다고 해서, 그 양적 차이가 그대의 죄를 사하여줄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


죄를 부정하려 들지 말아라. 담담하게 받아들여라. 육식을 하든 채식을 하든, 심지어 내가 광합성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햇빛의 구성 성분이 나에게 도달하기 전의 상태로부터 내 안으로 흡수되어 특정한 영양 성분으로 전환되는 그 시점에서 이미 그것은 "죽은"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의 살생이다. 우리들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정확히는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과 나의 힘으로는 절대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이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영이 깨어날 때, "자비(慈悲)"라는 신의 성품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니, 그제야 비로소 그 빛으로 말미암아 나의 어두움(무지, 망상, 교만)이 비추어 밝히어지매 내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죄인이다. 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는 결국 나 아닌 타자의 생명을 짓밟고 죽여서 그 육을 섭취하고 그 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내가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은 죄가 타인이 지은 죄보다 덜하거나 가볍다고 하여 이를 위안으로 삼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그러기에는 내가 신께로부터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에 대한 내가 치러내야 할 값은 바로 "깨어 있음", 곧 진리를 아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모른다 부정하지 않는다.


육신에 집착하지 마라.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대 육신은 "개체"가 아니며, 특정 개체의 "소유"도 아니며, 더욱이 그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 전체와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독자적인 존재도 아니다. 애초에 이 우주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건 내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망상적 실체다.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존재에서 발생한 진동은 모든 존재들과 공명하며, 이로부터 모든 것이 순환하고, 그 순환이 영원히 반복되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께서 정하신 이 우주의 신성한 통치 질서다. 나는 이것에 때로 깊이 경외하며, 이에 내가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고 자비하심인지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나는 일반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다. 나는 그들만큼 순진하지 않다. 교회가 알려주는 것만을 진리라고 받아먹는 사육장 안의 동물들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광야다. 비록 그곳에서 내가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여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갈 수 있으나, 또한 그러하기에 나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얽메이지 않으며, 완전하게 자유롭다. 이는 내가 광야에서 오직 단독자로서, 홀로, 하나님을 마주하고 그분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성이라는 건 없다.




에고의 단계에 의식의 초점이 머무르는 상태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아무리 해봤자 결국 의미가 없다. 그는 완연하게 "세뇌"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나, 의심하는 자기 주체 자체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이 이성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자기 존재의 확실성의 한계다. 꼭 누군가를 짚어서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애초에 사유라는 것은 에고에게 있는 힘이 아니라, 영(Spirit)의 존재 자체에게서 발현되는 빛이며, 에고는 그 빛의 일부를 받아서 반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성"이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사유"이다. 즉, 영은 태양이고, 에고는 달이다.


그러나 묻건대, 달이 태양을 무시하고 비웃고 조롱하면서, 태양 없이도 자기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어찌되는가? 태양은 달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완전한 존재이므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사, 끝까지 달의 조롱을 견디고 또 견딜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결국 어리석음과 교만과 아집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태양은 달을 사랑하므로, 달의 의지를 존중할 것이다. 그렇게 빛이 꺼져간다. 밤하늘을 비추었던 참으로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웠던 그 빛이 점점 사라져 간다...... 별들이 빛을 잃어간다. 암흑이 깊어진다. 영이 잠든다. 이윽고 모든 빛이 사라지매, 지독한 빙하기가 찾아오니 모든 생명들이 절멸하고 에고는 칼날 같은 눈보라 속에서 영원과도 같은 형벌을 받으니, 그제야 그는 크게 뉘우치고 후회하면서 태양을 그리워하게 되리라.


기사보다 더 높은 단계는 "더 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로 올라갈수록 그 증거는 "약해지는" 것에 있다. 이전에 진리라고 굳게 믿었던 나의 모든 관념들이 산산조각나는 것, 분별이 덧없음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주체의 자기 확실성이 허망함을 받아들이는 것. 에고라는 거짓 권세가 만인이 다 보는 앞에서 무너지고 몰락하는 그 수치를 있는 그대로 견디어내는 것...... 한때 천하를 호령할 것만 같았던 그 에고라는 거짓 왕권이 끌어 내려지고, 권좌에서 내려와서, 담담히 사형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것...... 그제야 에고는 깨달을 것이나, 그때는 이미 늦었으므로 자기가 지금까지 손에 묻힌 수많은 피들을 다 어찌하겠는가, 숱하게 지은 그 모든 죄들을 다 어찌하겠는가. 그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요, 다만 형(刑)이 집행되는 순간에 고통이 짧기를, 그거 하나만이라도 하늘에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리니, 하늘이 열리되, 이 우주의 창조주, 절대자,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께서 "빛"을 비추어주시리라. 온 세상이 다 버리고, 심지어 자기 스스로마저 자기를 버렸던, 그 에고를 다시 일으키시리라.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리 말씀하시리라. 내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알고 있으나, 내가 네게 묻지 않겠다, 하시리라. 더 나아가서, 네가 이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낮추니 이것이 곧 나의 의지라, 하실 것이며, 내가 너를 사랑하며 너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노라고, 믿기 어려운 말씀을 전하시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너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 자리를 허락하시리라.


내가 약해질 때에 곧 강함이라, 고 증거했던 그를,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지 않지만(그에게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가 그 주인의 말보다 그 종의 말을 더 권위 있게 여기는 실태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참으로 진리이다. 약해져라. 낮아져라. 짓밟히고,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며, 조롱당하라. 거기서 덤덤한 척하지 마라.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고, 통곡하고, 오열하라. 땅 위의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욱 낮게 엎드려라. 고개조차 들 수 없으리라. 십자가의 길은 고상한 게 아니다. 품격 있는 수행이 아니다. 에고의 목을 확실히 베지 않으면, 그 목에서 아흔아홉 개의 독사의 머리가 새로이 자라나게 될지니, 마음을 독하게 먹어라, 가장 혈기왕성한 나이에, 가장 교만한 자아를, 독하게 마음먹고 단칼에 베어내야 하리라.


그제야, 마침내 부활이 있을 것이다. 에고는 드디어 "주권자"라는 거짓 오명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이제 영이, 진정한 주인이 권좌에 오르사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나의 주(主)께서는 참으로 자비하사 나를 버리지 않으시되 오히려 당신 곁에 두사, 당신의 모든 의지와 말씀과 통치와 역사를 다 기록하고 증언하는 귀중한 역할을 맡기실 것이다. 이에 에고는 참으로 크나큰 자유를 허락받을 것이며,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안식과 평화를 경험하게 되리라. 더 나아가서, 주인의 종으로써 살아가는 그 모든 시간들이 이전의 착각과 달리 결코 치욕과 좌절과 실패가 아님을, 오히려 주인께서 그의 종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넘겨주시되 그것을 다루게 하실 것임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종이 자기의 참된 실체를 깨달았으므로, 다시는 전과 같이 반역하지 아니하리니, 그때에 마침내 태양과 달이 완전한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은유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재이다. 본래 가장 높은 차원의 진리는 오직 상징적 은유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법이며, 그것은 이성에 집착하는 자는 듣지 못할 것이요, 오직 "들을 귀 열린 자"들만이 이해할 것이다.




전투의 방향을 바꾸어라. 외부의 대상을 정복해봤자, 도처에서 반역의 싹이 자라나리니, 이는 그 자신이 반역자이기 때문이다. 반역자에게서 반역자의 씨앗이 샘솟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차라리 내면으로 들어가라. 가장 혈기왕성한 나이에,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진 자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고, 순종할 적에, 오직 그 더운 김 오르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그 심장으로 말미암아,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께서 크게 기뻐하시리라.


착각하지 마라, 신은 인간이 아니시다. 그분은 신이시다. 아무리 내 곁에 임재하신다 하더라도, 애초에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수준과 인간의 이해로 그분을 이해하거나 오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과 교감하고 소통하려면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나야 하며, 제정신이 아닌 상태, 곧 온전히 깨어서 미친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싸움의 끝은 결국 덧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정복되어야 할 대상은 곧 내 안의 죄의 근원, 바로 "원죄"이며, 이것은 내 힘으로 결코 정복되지 아니하되 오직 내가 자기를 내려놓고 비움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하나님의 빛이 드러남으로 인해서만 정복되리라.


죽기 전까지 이것을 깨닫고, 삶 속에서 체화하는 자에게는 영생이라는 예비된 하늘의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에게는 죽음이라는 약속된 평화가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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