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자유로운 영혼으로
힐링(Healing)이란 단어는 오늘날 매우 함부로 망령되이 취급받고 낭비되고 있다. 이제 어딜 가든 <치유>, <힐링>...... 등의 말들이 붙지 않은 곳이 없다. 이는 그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상처를 입었다는 증거이며(치유되기 위해서는 일단 상처가 있어야 하므로), 또한 제대로 된 온전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며(만약 온전한 치유를 경험했더라면, 치유나 힐링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되풀이될 필요가 없으므로), 더 나아가 오늘날 치유받기를 원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야 할 책임을 가진 인도자, 전문가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먼저 반성과 사죄로써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지금의 나의 영혼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다. 비록 여전히 서투르고 부족하고 가난하며, 값을 치른 죄보다 치르지 못한 죄와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들이 더 많은 부끄러운 영혼이지만, 그럼에도 내 영혼이 이끌리는 대상은 오직 성(聖)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며, 그 점에서 나는 주의 자녀이다. 본래 모든 영혼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치유란 바로 "하나님께 지음받은 본래의 온전한 영혼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이는 종교적/제도적 의미를 넘어선 보편적 진리이다, 나는 지금 특정 종교나 교리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먼저 선택받은 자들"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고귀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목회자들만이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증거하며, 이로써 세상에 그 빛을 공유하고 전파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두움이 그 위세를 떨치며 수많은 영혼들이 여전히 빛으로 인도받지 못한 채로 "치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영적인 실태 자체가, 그리스도인이 지금까지 온전히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비록 지금의 나는 목회자도 사제도 아니고 심지어 "정통적인" 교회의 승인을 받은 기독교인도 아니지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분의 자녀로써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낀다. 상처 입은 수많은 영혼들이 오늘날 여전히 치유를 갈망하며 고통받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죄이고 내가 져야 할 짐이라는 것을, 나는 엄중히 인식한다.
그러므로, 나는 치유(Healing)의 본질적인 정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자 한다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바, 영혼들의 온전한 형상을 회복하고 되찾는 것." 오쇼는 이것을 "중심에서의 회복"이라고 정의했으나, 인간 존재의 내면의 깊은 중심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선문답으로만 흐렸을 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고 나는 여긴다. 지식(깨달음)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내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나고 자격이 있어서 허락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달은 자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 그 진리를 온전하고 상세하게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신성한 책임이 있으며, 이 책임을 거부하고 외면한 채로, 자기 혼자서만 깨달았답시고 산이나 숲 속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영혼의 평화를 누리는 영적인 이기주의자들은 죽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강요가 아닌 나의 개인적인 신앙이고 믿음임을 밝힌다. 그러므로 나는 내 영혼이 깨달음을 얻든 얻지 못하든, 지상에서의 나의 모든 형제들, 곧 인류 전체와 더불어서 우리들의 고통과 죄의 무게를 함께 나눌 것이며, 죽어도 함께 죽을 것이고, 살아도 함께 살 것이며,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들 모두가 살아서 천국에 입성하는 그날까지, 천국의 문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지이심을 감히 믿는다.
영혼이 온전한 형상을 되찾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서술이고, 이를 실제적인 과정으로 말하자면, 이는 "인간 내면에서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고 작용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빛이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받은"(창1:26 등)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중심축, 곧 영(Spirit)을 의미한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의 핵심은 "행위"가 아니라 "의도(초점)"에 있다. 망원경을 열심히 좌우로 흔든다고 해서 시야가 확보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처럼. 초점이 정확하게 맞춰지면, 오히려 행위가 아닌 무위(無爲)가 스스로 진리를 향한 길을 열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존재의 중심축인 영(Spirit)은 억압된 상태, 즉 "비활성화"된 상태이다. 이는 <나>라는 의식의 초점이 올바르게 정렬되지 않고 왜곡, 변질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에고(ego)가 최종 주권자라고 착각하고 있으며, 이 에고는 유감스럽게도 개체성이 아니라 집단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일시로 말미암아 작동한다. 다시 말해, "나"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꿈속에 취한 채로, 실상은 집단성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체의식들은 이러한 상태이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상태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는다. 물론, 이 경우, 에고는 "힘(POWER)"이 없기 때문에, 육신이라는 최후의 방어체계가 무너지고 나면, 순수한 에너지체가 되어버린 영혼은 더더욱 어두움에 속수무책으로 지배, 장악, 기만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는 바로 나의 존재의 중심부에서 영이 깨어나고 활성화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영의 "빛"이 중심에서부터 외곽으로 서서히 펴져나가면서 확장되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안에서 밖으로"의 방향성이다. 그러나 이때, "안"이라는 것은 에고의 소유물, 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에고를 완전히 넘어서 있는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무언가, 가 에고의 바깥에서 "침투"해 들어가는 작용에 가깝다. 이 점에서는, 또한 "바깥에서 안으로"가 된다. 침투 작용(밖에서 안으로)과 봉인 해제 및 활성화(안에서 밖으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순서대로"가 아니다. 동시에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이것은 진정한 "치유"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동시성의 원리이다. 에고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이 서울에 있으면서 동시에 부산에 있을 수는 없지만, 온전한 영의 세계에서는 부산 뿐 아니라 이 우주 전체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 영의 활성화는 곧 "주권 의식의 전환"으로 이해되며, 이것은 "동일시의 해체, 상승, 전환"이다. 쉽게 말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엄밀히 말해서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주권자가 누구인가?"의 질문이며, 더 나아가서 "누구여야 하는가?"의 형태를 띤다. 에고에게는 그 어떤 능력도 힘도 의지도 없다. 그러므로 에고는 최종 주권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mind)은? 그것은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기계장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깨어 있음, 자각, 그러한 것들 역시도 현상하는 것들을 비추는 거울이고 호수의 표면일 뿐, 그 자체로 "주권"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영혼(Soul)은? 그것은 우리의 육신과 같이 에너지로 된 몸, 즉 에너지체일 뿐, 그 자체가 주권자일 수 없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식의 초점, 곧 동일시가 낮은 단계에서부터 해체되고 상승되며,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할 때, 마침내 "영(Spirit)이 나의 주인이며, 영이 진정한 나이다"라는 답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며, "주의 자녀"로 부활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이론적인 학습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머리로, 지식으로, 개념으로 학습하고 이해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에고의 무장해제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단단한 껍데기를 강제로 찢어내고, 피가 흐르는 가운데 수술을 집행하며, 부드럽고 연약한 새 살이 돋아나고 새 피가 흐르는 길고 고통스러운 변화의 과정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이며, 이 성화의 과정은 지상과 하늘을 통틀어 오직 성령만이 집행하신다. 감히 그 어떤 영체도 귀신도 천사도 성화의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
영이 상승하기 시작할 때, 영이 깨어나기 시작할 때, 그 정도나 단계에 따라서 존재의 수직선 상에서 영보다 더 낮은 단계에 있는 나머지 모든 차원들은 자연스럽게 조율되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즉, 가장 깊은 중심부, 가장 높은 층위가 깨어나기 시작하면, 그 아래의 나머지 모든 차원들과 존재 전체가 연쇄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동일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가 평범한 삶과 일상 속에서 말하고 듣고 소통하고 살아가는 이 평범한 "나", 나에게 익숙한 이 "나"를 곧 에고(ego)라고 부를 때, 에고 자체는 없어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애고가 해체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적 죽음", 즉 에고는 1) 진정한 실체도 아니며(=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2) 오히려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실체 없는 망상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 3) 무엇보다도, 에고는 그 어떤 실체적인 작용이나 변화를 일으킬 "능력"도 "힘"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과, 4) 마침내 이로 말미암아 에고는 그저 관찰자, 수용자, 동역자일 뿐, 진정한 "나"의 주인은 바로 존재의 최상위 차원, 깊은 중심, 곧 영(Spirit)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깨달음이란, "나(ego)인 채로,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고, 이 자각이란 1) 개념적 이해, 2) 체험적 이해, 3) 영적 이해, 이렇게 세 차원 모두를 통합하는 것이다. 개념적 이해는 문자 그대로의 개념적인 이해이고, 체험적 이해는 신비 체험이나 내적인 체험, 변화 과정 등을 통하여 체득, 체화하는 것이며, 영적 이해는 내 영혼(Soul)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다. 이 중, 개념적 이해는 에고가 노력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되, 체험적 이해는 에고는 "소망"하되 이루는 주체는 영/영혼을 통하여 드러나는 성령(SPIRIT)이시며, 영적 이해는 소망도 역사도 모두 오직 성령께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참된 신비 체험과 망상/환영을 가르는 기준은, "에고의 존재 여부와 그 역할"에 있다. 만약 내가 체험한 것, 내가 만난 신이 "가짜"라면, 그는 에고를 제거하거나 없애려고 할 것이며,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어떤 자유의지도 선명한 자각도 순수한 체험도 다 박탈당한 채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때, 그는 그 어떤 우월한 신의 이름을 들먹이더라도, 그것은 그저 우상이고 가짜일 뿐이다. 반대로, 내가 만난 삼위일체 하나님이 "유일한 실체"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시며, "아버지"는 결코 자녀들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지 않으신다. 물론 아버지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으시되 이는 자녀들이 아직 어리고 어리석은고로 이해하지 못하며, 때로는 그 뜻에 반항하기도 하고 원망하고 억울해하기도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결코 자녀들을 강압적으로 이끌지 않으신다. 자녀들의 자유 의지를 온전히 존중하시며,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 신앙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까지, 우리 안에 잠들어 계시며, 권좌를 비우사 에고(ego)에게 스스로 내어주시며, 오래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오면, 탕아가 집으로 돌아오되 모든 것이 무너진 비참한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을 적에,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크게 기뻐하시며, 그의 모든 과거의 죄를 다 사하시되, 하늘의 모든 축복과 은혜들을 다 선사하실 것이다. 그때, 그는 마침내 회개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고귀하시고 의로우신 의지"만을 열망하게 될 것인 바, 아버지께서는 그제야 그의 주(主)가 되사,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늘의 수술"을 허락하실 것이다(그 이전까지는 준비가 되지 않으되, 그 상태에서 강제로 집행하면 영혼이 크게 다치거나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보라, 이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시다. 그분은 에고를 제거하지도 없애지도 않으시며, 에고를 종속하지도 지배하지도 않으시되, 다만 에고가 지배당하고 있는 어두움 전체보다 더욱 압도적인 하나님의 "빛"을 발현하사,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실 뿐이다.
"영(Spirit)"이란, 애초에 "나"가 아니다. "내 것"도 아니다. "나(ego)가 지배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완전히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도 아니다. 영은 나를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나와 깊고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 곧 "하나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 어떤 연인보다도 더욱 진실하며 영원하다. 이것이 바로 영의 신비이다. 동일시가 해체되고 상승, 전환될 때, 마침내 "거듭남", 즉 "나"라는 왕국의 주인이 에고에서 영으로 그 주권이 "자발적으로" 전환될 적에, 새로운 주인 되신 영은 자비로우사 에고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며, 영은 온유하고 온화하사, 오히려 에고를 그 자신의 영원한 반려이자 신부로 맞이하리니, 그때에 에고는 마침내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다. 즉, 에고가 더 이상 주인이 아니게 되었다고 하여, 에고가 무시당하거나, 억압당하거나, 혹은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상태로 전락해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평가절하" 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 안에서 에고는 "관찰자, 목격자, 증인, 동역자"로써 이전보다 더욱 고귀하고 높은 사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나인 채로, 내가 아니게 되는 느낌. 에고로서의 나는 (내가 아는 평범하고 익숙한)나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한 실체로서의)진정한 내가 아니며, 나를 넘어서 있는 영이 곧 "영원하고 완전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었다고 하여 내가 없어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무시당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나는 더욱 "온전하여진다." 전에 없었던 바, 에고가 주권을 쥐고 장악할 때는 에고의 무의식적인 어두움의 존재 상태, 즉 불완전성에서부터 비롯한 두려움, 공포, 불안이 언제나 의식의 기저에 흘러갔지만, 하나님 안에서 하나될 적에, 마침내 하나님의 성품, 곧 "영원성, 완전성, 창조성"이 에고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꽃을 피우되, 그 꽃은 이 우주에서 하나뿐인 것이다. 그 어떤 위대한 존재도,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하나됨이라는 꽃을 피운 나의 존재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대체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있어서, "나"는 그분의 정원에 피어난 유일한 하나뿐인 꽃이다. 그분은 매일 아침마다 정원으로 찾아오사, 나를 맞이하실 것이며, 나를 쓰다듬으실 것이며, 내게 신선한 물을 허락하실 것이며, 병과 해로부터 나를 보호하실 것이다. 행여나 내가 시들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시며, 천둥이 치고 폭풍이 부는 날에는 밤새 내 곁을 지키실 것이다. 보라, 이것이 나의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이시다.
존재의 중심에서 영이 해방되고 모습을 드러낼 적에, 마침내 그 존재는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을 내 안으로 받아 모시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어두움으로부터 그는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치유"이며, 한 번 치유된 존재는 다시는 과거와 같은 상처와 슬픔과 눈물 흘리는 것과, 죽음과 사망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되, 이는 곧 한 번 하나님의 품 안에 든 자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니, 전능하신 주께서 "단 하나도 잃지 아니하시고" 다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음(mind)과 영혼(Soul)의 위계에 관한 것이다. 이는 주권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 마음과 영혼은 모두 "보이지 않는 몸(Body)"이며, 실체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 스스로가 의지를 갖진 않는다. 우리는 대개 마음이 스스로의 의지를 갖는다고 착각하지만("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낀다"는 착각), 실제로 마음은 일종의 현상체일 뿐, 그 자체가 능동적인 의지를 일으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영혼 역시도 유사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주권자와의 관계가 핵심이다.
마음이라는 현상체의 주권자는 에고(ego)이다. 따라서, 에고의 존재 자체의 특성, 곧 이원성의 분열, 대립, 충돌과 이로부터 말미암은 두려움, 공포, 불안의 구조와 원리와 패턴이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감정, 현상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어두운" 것들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이때, 마음의 작동 방식은 적대적이고, 억압적이고, 충동적이며, 포악하고 흉포하며, 교활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곧 "내 잘못"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물론 그 행위의 최종 실행자는 바로 <나>라는 존재이므로, 그 죄에 대한 성화의 과정은 내가 짊어져야 한다. 다만, 에고는 원래 "주권자"로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강제로 주권자가 되어서 마음을 지배하려고 한 결과, "원래 호환되지 않는 것을 강제로 연결시킨데" 대한 필연적인 충돌, 갈등, 오류가 발생하며,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악(惡)의 실체다. 다시 말해, 주권자가 올바르게 교체, 전환될 때, 마음은 현상체일 뿐이므로, 다시 본래의 순수하고 온전한 형상을 회복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도, 결국 핵심은 "주권 전환"에 있지, 현상체 자체를 뜯어고치려고 하는데 있지 않다. 한 마을에 흉포한 살인자가 있어서 매일 밤 시체가 발견되는데, 시체를 수습하고 흔적을 열심히 지운다고 해서 마을이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 그 마을 안의 "주권자"인 살인자를 체포하고 감옥에 보내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물론, 그 살인자 역시도 악몽에 빠진 나머지 그곳을 전쟁터로 여기며,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한다고 믿는 왜곡/변질된 인식 상태에 빠져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영혼(Soul)은 순수하고 순결한 에너지로서의 몸(Body), 곧 나의 존재의 실질적인 실체이다. "나"라는 존재를 영속하게 하는 어떠한 실체적인 것이 무엇인가, 를 물으면, 바로 이 "에너지체"로서의 영혼을 말하게 된다. 이 영혼은 에너지이며, 따라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사물"이나 "고체"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멈춤이 없고, 언제나 흐르고, 자유롭고, 때에 따라 시시각각 색(色)과 향(香)이 변화하며, 아름다운 춤과 음율과 음성들로 매 순간 변화하는 그러한 무언가이다. 사실, 언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자연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휴일의 어느 아침, 오랜만에 산책을 나설 때에 처음에는 흐리고 약간씩 비가 떨어지되, 이 또한 아름답고 편안하지만, 이윽고 비가 멈추고 구름이 걷히며 그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드러나니, 길가에 핀 모든 꽃들과 풀들과 나뭇잎들이 반짝이고 부드러운 바람결에 춤을 추는 그 경이로움을 목격하니, 그 모든 변화와 흐름들이 너무나도 생경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와 같다. 에너지체로서의 영혼은 그러한 것이다.
다만, 영혼 자체는 "의지"를 가지고서 그러한 움직임이나 흐름, 변화 등을 집행하는 게 아니다. 영혼의 주권자는 영(Spirit)이며, 영은 "나"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인간 존재만이 품고 있는 가장 깊은 내면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영을 통하여 영혼은 "통치"를 받으며, 이것은 우리가 익히 이해하는 어떤 세속적인 방식으로서의 정치적, 외교적 행위라기보다, 차라리 "이끌고 인도하는 것"에 가깝다. 영혼이라는 신부를, 영이라는 신랑이 이끌고 인도하는 것이다. 결혼식의 모든 절차들 가운데에서 신부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동선을 안내하고, 정중하고 품격 있게 예를 표하며, 신부의 두 손을 잡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춤을 추며, 그렇게 모든 순간들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때, 영은 주권자이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의 통치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드러나는 주인공은 바로 영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상 속에서 영혼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과 고귀함의 빛과 음성들이 일렁일 적에, 이를 "가능케" 하는 그 너머의 영원과 초월의 영의 존재감을 희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이 주권자가 될 적에, 에고는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토록 경이로운 것들을 관찰하고, 기록/서술하는 증인이자 목격자가 되며, 또한 영과 영혼의 "영원한 결혼식"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안내하고,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맡은 동역자가 된다. 이때에, 마음은 현상체로써 당연히 영혼의 눈부신 빛과 음성들을 내보내고 펼쳐내는 스크린이 되며, 영혼은 본래의 영의 완전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라가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 먼 하늘 위에 있는 어떤 초자연적인 시공간 같은 게 아니다. 나의 내면에서, 나의 "존재 구조" 자체가 완전히 전환되는 것이다. 이때, 나의 내면은 영원 지옥의 형벌에서부터 너무나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천국으로 변화하게 된다.
어느새, 존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되는 것을 넘어서, "완전"해지게 될 것이다. 이때, 에고는 영혼의 움직임을 절대 통제할 수 없지만, 오히려 통제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게 될 것이다. 에고 자신이 상상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영혼이 더욱 아름답고 고귀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에고는 영혼과 영을 완전히 신뢰하며, 에고의 시각에서 보기에 매우 위험하고 위태로운 순간에서조차도, 영과 영혼을 신뢰하여 다만 주권을 내려놓고 내맡긴 채로, "상위 존재"의 이끄심에 따르게 된다. 그때에, 에고는 그 어떤 시련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은 그 어떤 고난 한가운데에서도 오히려 더욱 눈부시게 빛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이것을 얻는 길은 매우 쉽고 단순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