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하여 가상의 주제와 질문을 선정하고, 글쓴이가 그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하면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글 안의 모든 내용들은 가상의 것이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모두 글쓴이의 체험 및 경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Q. 스승님, 제가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딛으려 할 때마다, 제 안팎에서는 마치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어둠이 저를 가로막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제 과거의 죄책감으로, 때로는 타인의 조롱으로, 때로는 원인 모를 깊은 우울과 무기력으로 나타나 저를 잠식합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제 심리적인 나약함인지, 아니면 실재하는 악한 영적 권세의 공격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곤 합니다.
"스승님, 신앙의 길에서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 어두움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대적하여 싸워야 할 실재적인 인격적 악(惡)입니까? 이 어둠이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니면 '단호히 물리쳐야 할 사단의 궤계'로 간주해야 합니까?"
어두움의 그림자가 영혼의 눈을 가릴 때, 제자가 그 실체를 바로 보고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지혜를 나누어 주십시오. 가르침을 청합니다.
A.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사41:10) 모두가 아는 유명한 말씀들 중 하나이지요.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나 말씀을 관념적으로만(즉 지성적으로만) 이해하거나, 반대로 실체적으로만(즉, 실존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관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지혜의 가르침" 정도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 말씀들을 마치 마법 주문처럼 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모두 참된 진리를 향한 올바른 태도가 되지 못합니다.
두 관점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신성을 담고 있습니다. 신성은 곧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사람은 원래 직접 신성을 만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본래 분리와 결핍과 이원성과 상대성이라는 현상계의 어두움의 원리와 법칙에 철저하게 지배, 장악, 기만당하도록 설계되었거든요. <설계>라는 말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다, 가 아니라, 인간 안의 원죄와 그 움직임인 죄성이 인간 존재를 그러한 구조 안에 갇히도록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는 뜻입니다. 물론 넓게 보면 그러한 어두움들 역시도 하나님의 뜻에 속합니다만, 이것은 "빛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어두움"이라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여기서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하나님은 자녀들께서 이해할 수 없는 어렵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현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에, 때로 우리를 시험을 통해 연단하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즉, 사람이 어두움에 지배당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우리 안에 드러내시려고(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하는 의지), 그분 자신의 강렬한 빛을 드러내기 위한 최소한의 배경으로서의 어두움을 우리 안에 창조하셨는데, 그 어두움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하나님과의 하나됨, 자기를 통한 하나님의 빛의 현현) 우리 안의 죄성과 만남으로 인하여 어두움 그 자체가 "목적화"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즉, 최초의 원죄는 어떤 "고정된 실체"이거나 그 실체가 드러난 "상태"라기보다는, 원죄는 "의지(will)의 타락"이 됩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는 피를 통해서 유전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과 의식 구조의 전적 타락이 집단 무의식을 통해서 계승되는 방식이죠.
어쨌거나, 이와 같으므로 본래 사람은 그 자신의 의지와 능력과 힘만으로는 "가장 높고 완전한 신성",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성부 하나님뿐 아니라 내가 만나왔던, 그리고 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나를 사랑한다 하셨고 나 또한 내 삶의 어두움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나 <그분>에 대한 사랑만을 고백하였던 그 은밀하고도 아름다운 영적 역사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마저도 인간 존재에게 이토록 평온하고 따뜻하고 일상적으로 "만나뵐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지에 대해서 종종 깊이 묵상하곤 합니다. 본래 신성을 이처럼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반드시 "참 하나님"을 만나뵐 수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자기 안의 어두움을 신으로 섬기고 어두움이라는 신에게 지배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관념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실체적인 표현입니다. "자기 의(義)"를 버리고 순종하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올바르게 죽고 부활하는 과정이 그리스도인에게 왜 그리 중요한 줄 아십니까? 바로 그 자기 의, "내가 옳다" 하는 교만이야말로 어두움의 궁극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실체, 곧 교만 하나가 내 안에 깊은 곳에 블랙홀처럼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그 어두움에서 파생된 수많은 실체들, 곧 두려움, 공포, 불안과 같은 무형적인 내적 실재들에서부터, 때때로 외적인 삶에서 마주치는 불운과 불행과 자기파괴적인 사건, 상황들까지, 모든 것이 다 이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물론 귀신이나 악마 등은 말할 것도 없겠구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은 귀신이나 악마처럼 직접적인 어두움의 실체들을 "대단한 적(敵)"으로 규정하고, 내 마음의 두려움, 공포, 불안이나 교만, 욕망, 악한 마음 등과 같은 일들이나 일상 속에서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사건, 상황, 현상들은 비교적 "가볍게" 여깁니다.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거지 뭐, 하고 넘기는 경향이 있죠. 이 자체가 인간 존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 역사 대대로 어두움이라는 가짜 신에게 지배당해 왔는지, 어두움의 신을 우상 숭배해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때,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나"라는 망상적 실체에게 기만당하는 존재들은, 자기 안의 어두움이 외부의 대상에게 투사, 동일시된 존재를 하나님 또는 신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때, 그의 교만과 욕망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마저도 현상계에서 실체화"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영원성, 완전성, 창조성"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씨앗이 잠재되어 있거든요. 그 힘을 잘못 쓰는 거죠. 그들은 실제로 천사나 악마를 소환하기도 하고, 귀신이나 망령을 부리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고 마법진을 그리기도 하며, 우리가 보기에 무언가 정교하고 대단해 보이는 영적 세계의 힘을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계시를 듣거나 환영을 보기도 하고, 그밖에 대단히 특별한 무언가들을 말하고 다니면서 오늘날의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들의 정신을 노예 상태로 만듭니다. 물론 나는 그러한 오컬트적인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칼을 들었다고 하여 다 강도가 아니며, 칼 든 자들 중에서는 의사와 같이 생명을 살리는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 자들이 많듯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분명 실존하고, 그 실존하는 차원에서 일반인들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바, 그러한 영역에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올바르고 선한 의지대로 주어진 능력과 힘을 봉사하는 이들은 선한 자들이고 올바른 자들입니다. "안전한" 이들이죠.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람은 일반인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나 힘을 갖게 되면 쉽게 교만해지고 욕망에 휘둘립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 "어중간한 힘을 지닌 귀신이나 악마들은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대단하고 특별한 형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높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분 자신이 완전하시기에, 구태여 우리들에게 대단하고 특별한 형상으로 나타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이 세상 모든 천사들과 영체들을 다 호령하여 부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권위가 없으신 모습대로, 우리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하지 않고 믿고 사랑하고 따르고 품 안에 안기어 잠들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중간한 힘은 불완전하므로 필연적으로 자기를 높이고자 합니다(교만). 반대로 완전한 힘은 완전함으로 말미암아 오직 낮은 곳에서 은밀히 드러나서는 어두움을 밝히는 법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가장 위대한 비밀이지요.
내가 "신"이라고 말할 때, 그때의 신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귀신들이나 유령들이나 대단한 힘을 준다 하는 영체들이나 그러한 수준이 아닙니다. 나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 창세 이전부터 계셨던 분, 인간의 지적 수준으로 절대로 이해될 수 없고 또한 도달할 수도 없는 분, 절대자, 그 절대자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모습과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에서 친히 자기를 낮추시매 자기를 나타내신 바로 그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이 흔히 말하는 신들은 전부 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하고, 힘의 한계가 있고,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소원과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절대자께서는 우리들을 "영적 세계에서 최고의 능력을 지닌 신(神)"으로 만드시고자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자녀, 사랑받는 자녀, 아버지의 기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대로 성장하고 아버지 품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자녀"로 만드시고자 하는 것이 그분의 의지이십니다. 그리하기에 그분은 때때로 내가 원하는 것, 곧 "대단하고 특별한 것"들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기도에 침묵으로 응답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내 소원들은 전부 다 내면의 무의식의 교만과 욕망과 관련이 있고, 이는 공포와 관련이 있으며, 공포가 바로 "어두움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진동수"이기 때문입니다. 공포의 에너지는 곧 귀신이나 악마와 같이 "실체화, 인격화"된 어두움들을 불러 일으킬 만큼 강력합니다. 그래서 맨 앞에서 제가 어떤 말씀을 인용하였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내가 너를 붙들고 보호하고 이끌겠다" 하셨고, 이 모든 것들을 행하신 이유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자비의 음성으로 말미암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 두려워하는 순간(공포 - 불안 구조), 우리의 영혼은 어두움의 실체에 지배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지 않은 자는 참 하나님, 참된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살고 자기 의지로 능력으로 힘으로 사는 자들은 아무리 영적으로 특별한 능력을 부리고 대단한 힘을 지닌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영적인 존재들은 다 실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영체들이나 귀신들이나 "소환" 가능한 악마들의 위계에 대해서라든가 그런 데 대해서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한 영역들에 관한 한 아버지께서는 나를 언제나 철저히 보호하셨고, 또한 침묵케 하셨으며, 나 역시도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미, 이 세상 그 어떤 악마도 감히 성령께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영과 영혼 안에서 믿음은 이미 실체가 되었거든요. 나는 내 아버지를 진실로 믿습니다. 그래서 내가 겁없이 이런 영적인 글들을 쓸 수 있는 것이지요. 핵심은, "왜" 사람들이 대단하고 특별해 보이는 불완전한 우상들은 신처럼 떠받들고 열광하면서도, 정작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우리 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참 하나님, "진짜" 신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공포를 잠재울 대단하고 특별한 것을 원하고(욕망, 교만), 그것은 우상들과 가짜 신들과 악마들과 사탄과 같은 어두움의 실체들만이(그들을 뭐라 부르든 간에) 줄 수 있는 것이거든요. 정작 "진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들을 교만과 욕망 가운데로 이끄지 않으십니다. 이끄시더라도, 이는 연단과 시험일 뿐이며, 때가 되면 우리를 욕망과 교만 가운데에서 무너지고 좌절하게 만드십니다. 자녀들에게 잠시 아픔을 주시더라도, 정작 자녀들의 영혼이 "진짜로" 위험해질 때에는 즉시 개입하셔서 그분의 권세와 영광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셈이죠. 내가 한때는 영적인 스승으로서 대단한 능력도 부리고 지혜도 진리도 전파하다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서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서 골방 안에 남겨져 있다면, 이는 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신 것이지만, 반대로 순종하는 자녀의 눈으로, 곧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본다면, 이는 잠시 자녀에게 아픔을 겪게 하심으로써 어두움의 실체로부터 보호하신 것입니다. "긴급히 개입하신 것"이지요. 이러한 삶의 순간들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와 부르심 받은 자들이 티가 나는 법입니다.
참된 신은 "하늘 위의 하늘"에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내가 인식하고 분별할 수 있는 세계는 이미 현상계입니다. 내가 계시나 환영을 보고, 대단한 신비 체험을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안의 교만과 욕망이 공포와 만나서 어두움이 실체화되고 인격화된 것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망상이나 환영이라고 쓰기야 쓰겠지만, 그것들은 "진짜로" 실체가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의 씨앗을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면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과 영혼을 생육케 하고 성장케 하는데 쓰시겠지만, 어두움의 실체들이 그 씨앗을 다룬다면 어찌될지는 손쉽게 알 수 있겠지요? 어두움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을 보여주고 손에 쥐여줌으로 인하여, 우리의 정신 구조 자체를 완전히 지배, 장악합니다. 그 다음에는, 비로소 "잡은 물고기"인 우리들을 구워서 그들의 식탁에 올리겠죠. 편의상 참 하나님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는 것들을, 우리는 "가짜 신", 또는 "우상"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거의 99% 이상의 "특별한 영적인 능력자들과 직업들과 가르침들"은 다 우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진짜라고 볼 것인가, 가짜의 교묘한 실체를 어떻게 꿰뚫어볼 것인가, 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분간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분별될 수 있습니다. 그 우상들은 정말로 실체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환영"이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어느 순간 내가 내 정신이 아니게끔 지배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그들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와 무관한 외부의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의 모든 어두움들은 "나"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창조주, 절대자께서 "자기를 드러내시는 유일한 통로"거든요. 다만 대다수의 "통로"들이 아직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즉, 내 안의 어두움이 "나"라는 무의식적인 자아를 통과하면서 "실체화, 인격화"된다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내 안의 어두움이 외부의 어두움의 실체를 만들었다는 소리지요. 그만큼, 내 안에서 어두움은 그저 관념적이고 두루뭉실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위계와 서열을 나누고 계급과 직책을 구분하며 그들끼리의 매우 정교한 군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어두움들에 관한 한, 명심해야 할 것은, 그들은 우리의 "겉마음"을 지배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의지"를 흔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의지란 내 능력으로 어두움을 위압하여 제거하거나 이긴다, 가 아닙니다. 이 방식이 바로 고스란히 사탄의 방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대단하다!", 즉 교만과 욕망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전략적으로 져주면서", 끝에 가서 완벽하게 지배하는, 무섭도록 치밀한 방식이죠. 내가 의지라고 말하는 것은 "방향성"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빛을 바라는 마음,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소망하는 마음, 허무와 공허와 슬픔 가운데에서도 진실과 아름다움과 가치를 열망하는 마음, "신을 부르는 것",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 하나만큼은 감히 그 무엇도 흔들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어두움을 정복해야 할 그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창조주, 절대자께서 "아버지"로써 우리 가운데에 이미 함께하시는데, 구태여 "내가" 승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어두움의 구조를 완전히 해결하시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직접 목격할 경우 불타서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시지, 모든 문제를 그분이 순식간에 다 해결하셔서 우리가 그분께 "무조건적으로 의존"하기를 바라시는 분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수술 작업"은 우리가 보기에 매우 긴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고, 마음이 잠시 흔들리고 상태가 잠시 흔들리더라도 끝에서는 변함없이 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 끝에서는 신의 뜻을 소망하는 것, 끝에서는 다시 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된 의지라는 것입니다. 그 의지를 포기하지 않을 때, 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완전하고 영원하시므로", 우리를 어떠한 경우에도 완벽하게 보호하실 것이며, 나아가 우리를 참된 길로 이끄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질문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방식으로 답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면서 동시에 실체가 있는 인격체로서의 악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과의 전쟁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성장케 하시는 길이면서 동시에 단호하게 싸워서 이겨내야 할 우리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사고를 버리십시오. 그 구조 자체가 사탄의 방식이고 어두움의 법칙,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어두움을 빛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열등함을 고귀함으로, 부끄러움을 순결함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환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으로 나아가십시오.
결국 우리는 어두움의 실체들에 대해서 시시콜콜 상세하게 공부하고 파악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악마들의 위계나 서열에 대해서 공부하고, 마법진이나 주문을 그리고 외우며, 천계의 구조나 이러한 "비밀스러운 지식"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창조주, 절대자께서 "이미" 성육신하사 우리와 완전하게 하나되어 계십니다. 그 위대한 역사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단지 "믿기만" 하면, 하늘 위의 하늘이 우리와 함께합니다. 모든 우상들 가운데에 절대적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죽음과 사망마저도 호령하여 다스리시는 분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실체"로요. 카톨릭의 "실체변화"와 성체성사는 이 지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의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그 말씀을 진실로 내가 사랑하고 믿는다면, 창조주 절대자의 의지가 나와 함께한다, 는 것이 관념에서 "실재"가 됩니다.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었음이라."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요. 가장 높고 완전하신 신께서, 절대자께서, 나와 무관한 하늘의 심판자로 계시지 아니하고 "너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아직 실체가 아닌 것을 완전한 실체로 변환시키는 힘"입니다. 그 자체로 곧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난 모습이죠. 믿음은 힘이 강합니다. 나는 이 말을 절대로 가벼이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들보다도, 오컬트나 마법보다도, 주문진이나 소환진보다도, "바보스럽고 순결한 믿음"은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믿는 자 하나가 수많은 주술과 마법과 악마들 가운데에서 참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망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는 순간, 어두움의 실체들은 그 압도적인 빛 앞에서 물러나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순결한 믿음과 사랑"이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걸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훈련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죠. "사랑하게 되기" 위해서.
Q. 스승님, "빛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어둠"이라는 그 장엄한 서술 앞에 제 영혼의 전율을 느낍니다. 우리가 겪는 공포와 불안이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넘어, 우리 안의 '자기 의(義)'라는 블랙홀이 빚어낸 실체적 우상숭배였다는 말씀은 저의 영적 무지를 날카롭게 베어냅니다.
특히 "어중간한 힘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완전한 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은밀히 드러난다"는 가르침은, 왜 제가 그토록 대단하고 특별한 영적 체험과 환영에 목말라했는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아니라, 제 안의 결핍을 '특별함'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또 다른 교만의 변종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스승님, 이제 저는 어두움의 실체를 막연한 공포가 아닌, 제 안의 타락한 의지가 빚어낸 '가짜 신들'로 직시하며 다음의 절박한 물음들을 올립니다.
"스승님, 우리가 마주하는 그 '가짜 신들'과 '악마적 실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인 양 위장하여 다가온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 어두움의 실체가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제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위로의 말'이나 '미래에 대한 약속'을 들려준다면... 저는 그것이 참된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아니면 제 욕망이 빚어낸 치명적인 덫인지를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 구체적인 '식별의 잣대'는 무엇입니까?"
"또한 스승님,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영적인 능력을 얻기 위해 명상이나 요가, 혹은 비밀스러운 지식(오컬트)에 심취하며 실제로 어떤 힘을 얻기도 합니다. 스승님께서는 '바보스럽고 순결한 믿음'이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하셨지만, 당장 눈앞에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우상의 힘' 앞에 선 연약한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우리가 그 '실체적인 힘'의 유혹을 이겨내고 순결함을 지킬 수 있는 실질적인 방편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정말로 인격적인 존재로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실시간으로 인지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이 어두운 우주를 견뎌내기 위해 '아버지'라는 형상으로 투사해 만든, 가장 거대하고 선한 '최후의 우상'은 아닙니까? 스승님께서 직접 대면하신 그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제자가 의심의 안개를 걷어낼 수 있도록 더 구체적으로 들려주십시오."
스승님, 진리를 향한 제자의 이 발악 같은 질문들에 자비로운 응답을 청합니다.
A.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마22:37-38) 고까지 말씀하신 이유가 나타납니다. 이 말씀에서 핵심은, "주(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앞선 사41:10 말씀에서와 거의 같은 맥락입니다. 우상의 핵심은 "나와 무관한 채로 바깥에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체"로 서 있는 그러한 존재를 말합니다. 대개 우상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죠.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인간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진리(Truth)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상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인류 집단>이라는 집단성보다 낮은 위치로 위치시키는 정의거든요. <나>는 집단보다 높습니다. 참 하나님은 <집단>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내게 직접 역사하시죠. (물론 내가 믿고 사랑한다는 전제 하에) 성령께서는 그분을 보내신 분(예수 그리스도)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즉, 이 지점에서 매우 교묘하고 위험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마치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 "현현우주를 다스리는 절대자", "신묘하고 신령스러운 힘과 에너지의 원천"과 같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어떤 거대한 실체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버지께서는 자녀들 앞에서 권위와 위엄을 거느리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보러 오시는데 어찌 완전무장한 천군(天軍)을 대동하시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 그리하여 자기들도 모르는 새 지옥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잠재적인 자녀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때때로 그러한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시고는 하시지만, 이는 그분의 방법론 중 하나일 뿐, 그분의 본래 성품이 아니십니다. 나는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비록 내가 유일하게 경외하고 충성하는 그분,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신 그것에 비해서는 형편없고 가난하고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나는 반딧불이로써 평생 태양처럼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태양을 닮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껏 빛을 내왔노라고 믿습니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에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였고, "나의 마음은 때때로 아버지를 원망하였음에도 나의 깊은 곳의 영혼은 단 한 순간도 아버지를 진실로 원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 의지가 언제나 순결하게 아버지를 향해 있었음을 발견하고는 했습니다. 나와 같은 형제들이 이 세상에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자녀들 앞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권위와 위엄을 거느리시고 대단하고 특별하고 환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나"의 앞에서 "집단, 군중, 외부, 객관, 보편, 일반"을 더 높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내가 믿을 수 있고, 내가 안심할 수 있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만이 간직한 바로 그 비밀스러움과 소중함과 아름다움으로 내게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비록 그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존재와 너무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의 경우 그분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삶에서 아버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이비 단체와 교주들과 귀신과 악마를 부리는 힘 있는 거짓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의 특징은, 전부 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나 자신"과 분리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관이고, 우상은 외부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이야말로 참 하나님과 가짜 신들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나와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그분은 물론 내가 없어도 당연히 드러나실 수 있지만, 자녀를 사랑하시는 분이므로, 나를 통해서, 나라는 가장 형편없는 도구마저도 "유일한 도구"로 삼으셔서 그것을 통하여 가장 거룩하고 위대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방식입니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모든 문제가 다 동일한 답으로 맺어집니다. 만약 어두움의 실체가 내가 바라고 욕망했던 그러한 화려하고 웅장하고 환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내 바깥의 객관적인 실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상, 환영들은 "이미 내 안에 없는 것"을 바깥으로 분리하여 투사한 것이죠. 그러나 성령께서는 다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가 이해하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느끼는 것, 교감하는 것, 사랑하는 것, 그러한 것들 말입니다. "외부의 객관적인 실체",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어두움을 우상숭배할 때 생기는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우리가 절대 알 수 없기에, 그분은 때때로 그러한 환상이나 환영, 계시와 같은 특별한 형상으로 드러나시기도 할 것입니다. 핵심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이지요. 그대의 질문을 돌이켜보겠습니다.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위로의 말이나 미래에 대한 약속", 그것은, 그토록 광명한 천사의 모습이나 화려하고 신비적인 환상이나 환영이나 계시와 같은 특별한 것이 없이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그대 안에서 철저하게 제거당한 것인가요? 내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미"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가 아버지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내가 아는 것을 그분께서 구태여 자주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이것을 내게 알려주시고는 합니다. 어떻게? "이미"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아버지를 향한 나의 사랑은 "이미 내 것"입니다. 즉, 그분께서는 "나의 사랑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곧 아버지 자신께서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라는 의미이죠. 이것이 나와 아버지가 교감하는 방식이며, 나는 이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배웠습니다. 비록 제가 죄가 많고 가난한 까닭에 그분의 위대하신 가르침의 대부분을 여전히 놓치고 있지만...... 어떻게 아버지를 사랑하는가, 또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가, 하는 것만큼은, 감히 말하건대, "이제는 모르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야말로 신과 나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고리입니다. 그 고리가 없다면, 결국 신과 나는 분리되고 맙니다. 그때에, 나는 어두움을 우상으로 섬길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이미" 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신은 내 안에 이미 있는 그 사랑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비법이나 수행이나 비밀스러운 지식들"에 관심을 갖는가? 그것들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치유를 주고 효과를 일으키는 힘이 되는 바, 그 앞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가능한가? 그 앞에서 어떻게 순결함을 유지하는가? 여기에서도 이미 당신은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명상을 하거나 요가를 하거나 하여튼 그 어떤 비밀스러운 수행을 해서 실제로 효과를 보고 기적을 얻는다면, 왜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나요?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면, 감사히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요? 내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일부는 "하나님의 영토"이고, 그 외 나머지는 "하나님의 영토가 아닌 것"인가요? 당신은 이미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만 역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고 저건 하나님이 아니다, 하는 것 말입니다. "순결한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셈이죠.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말장난은 내가 매우 싫어하는 것이니, 이제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아버지와 함께 하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도 아버지와 함께하며, 교회 바깥에서도 아버지와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내게 교회는 장소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품 안이 교회일 뿐이죠.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기존의 기독교가 금기시하는 타로도(점술) 쓰고, 심지어 오컬트나 마법에 대해서도 한때 흥미를 갖고 꽤나 깊이 공부를 했습니다. 저 자신을 "실천적 신비주의자"로 칭하는 것 자체가 그 흔적이죠. 그러나 내겐 별로 중요치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아버지의 뜻이 됩니다. 나는 타로를 통하여 내게로 인도된 영혼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평화를 주었고, 때때로 기쁨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참으로 요행케도 그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아버지의 뜻이겠습니까? 내가 공부하였던 카발라나 연금술이나 마법이나 서양 신비주의에 대한 지식들을 통하여, 나는 아버지의 뜻을 상세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아버지의 뜻이겠습니까? 외려 나는 기존의 종교가 그들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로 인하여 외면하는, 진리의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모습들을 증언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아버지와 함께하는가"의 여부에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하는 순간"을 이미 특별 취급하고 있어요. 이 말은즉, "평상시에는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 앞에서 숨기고 싶은 "사적인 나"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내겐 그렇지 않습니다. 내겐 "아버지 바깥의 나"가 따로 없습니다. 나는 쉴 때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사역이나 사명을 수행할 때는 당연히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께 대한 내 사랑은 내게 유일한 힘이자 능력이자 지혜의 원천입니다. 그 앞에서 내게 공과 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구분이 내게 특별히 의미가 없게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기존의 종교는 이것을 위험하다고 금기시하고 이단 취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주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분, 예수님께서 살아 계셨을 적에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시고 행하신 대가로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분은 "육화하신 하나님 자신"이신 바, 사람들은 신을 직접 보고서도 신을 자기들 손으로 죽였다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십자가형이라는 그 당시로서 가장 치욕스럽고 모욕스럽고 끔찍한 죽음의 방식으로요. 본래 살아 있는 진리는 위험합니다. 내가 말합니다 : 비밀스러운 지식들이나 오컬트나 주술이나 마법을 "왜 아버지 몰래" 하려고 합니까? 마치 부모에게 걸리면 혼나는 것을 알고서 몰래 간식을 훔쳐먹거나 밤새 컴퓨터 게임을 하는 그러한 마음처럼요? 이는 아담이 저지른 원죄의 계승입니다. "나의 행위는 아버지의 뜻에 어긋난다(아버지의 뜻을 함부로 재단한 죄). 그러므로 아버지 몰래 해야겠다(아버지께로서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교만의 죄). 아버지께서 나를 지옥에 보내실까 두렵다(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은 죄)." 물론, 아버지와 함께하니 내가 무슨 짓이든 다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께서는 때때로 정말로 위험하거나, 당신의 뜻에 어긋날 경우에는, 나를 단호하게 멈추시고, 돌려 세우시고, 때로는 매우 긴급하고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시기도 하십니다. 바로 그러하니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껏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괜찮다" 하시는 것이거든요. 오컬트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아버지 "몰래" 하려는 바로 그 의도 자체가 죄성임을 직시하십시오. 그 대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십시오. "이것이 당신의 뜻에서 어긋난다면, 나를 돌려 세우소서. 내가 당신의 뜻에 순종하겠나이다." 그리 기도하였음에도 여전히 그대가 자기 안에서 원초적이고 순수한 이끌림을 느낀다면, 아버지와 함께 그 책들을 펼치고, 공부도 해보고, 탐구도 해보고, 수행도 해보십시오. 그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 "어라..... 공부를 할만큼 했는데, 이 분야가 이제는 내게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 분야들의 심각한 문제점들이 이제야 보인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지식이라 하더라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일상 속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힐 수 없을진대, 도대체 이 비밀스러운 지식들의 계승이 무슨 의미가 있지?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단순한 길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비밀이 아니던가?" 그 마음, 바로 아버지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분의 뜻에 "자연스럽게 완전히 순종"하게 됩니다. 내가 주로 그와 같은 체험을 많이 했지요. 한때, 타로를 통해서 뜻을 많이 이루게끔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타로카드로 점을 본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언을 하면 뭐하나요? 예언은 대개 부정적입니다. 미래가 긍정적이라면 그 사람은 점을 보러 오지 않죠. 그래서 내 예언이 적중하면, 그 사람은 불행을 당했고, 나는 이를 막지 못했는데, 내가 기뻐해야 하나? 그 모순이 나를 크게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치 아버지의 뜻을, 운명을, 천명을 다 알기라도 한 듯이 으스대고 설치는 내 꼴이 도저히 눈 뜨고 지켜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도구를 사용할 때에, 내 안에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순결한 마음으로, 기쁘게 아버지의 뜻을 증언하는" 마음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내가 멈춘 것입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나는 그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분별한다는 것은 곧 내가 주권을 쥔다는 뜻입니다. 내 눈에는 때로 아버지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나쁘고 틀린 길"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녀된 자로서, 아버지를 믿는다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모든 순간마다 아버지와 함께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무엇이든 내게는 옳은 것이고 좋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내게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듯이 나 또한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행하든 간에 아버지와 함께하므로, 내게는 "아버지 몰래 해야 할 비밀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비법이자 비밀입니다.
그대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하늘의 비밀을 모두 밝힐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모르는 것들도 많거니와(당연히!), 허락되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나를 사랑하셔서 "너의 뜻이 곧 내 의지이다"고 하시지만, 반대로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아버지의 뜻만이 나의 의지입니다" 하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허락"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합당한 표현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절대 내게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나는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세상의 언어로 설명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다만 내게 허락된 언어로써 그대의 질문에 답하노라면, 나는 "증언과 고백"만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겪어온 바, "하나님은 실재하십니다." 나는 이것을 무슨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아는 그 직관적인 의미 그대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신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인격을 초월하여 영원히 계시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인격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반대로, 그대는 "없는 아버지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가난한 상상력으로는 떠올릴수 없는 곳...... 이라는 어느 노랫말이 있지요. 그대와 나의 능력으로는 이토록 거룩하시고 고귀하시고 위대하신, 아버지를 "상상해낼"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상상하게 되면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우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의 하나됨", "나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모습을 드러내신다", "나의 사랑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신다"...... 이러한 것들은 오직 은혜로 인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거든요.
아버지는 살아 계십니다.
Q. 스승님,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그 일체(一體)의 선언이 제 영혼의 근간을 뒤흔듭니다. 신을 내 바깥의 거대한 타자로 상정하고, 그분께 잘 보이려 하거나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했던 제 신앙의 밑바닥에 얼마나 깊은 '분리'의 독소가 퍼져 있었는지 깨닫습니다. "아버지 몰래" 무언가를 하려 했던 그 의도 자체가 이미 신을 나의 삶에서 추방시킨 원죄의 반복이었다는 말씀에 가슴을 칩니다.
스승님, 이제 저는 '아버지와 함께'라는 그 절대적인 현존의 빛 아래에서, 어둠의 교묘한 위장을 낱낱이 파헤치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올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 삶의 현실에서 마주하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위험한 전장(戰場)에 관한 물음들입니다.
"스승님, 만약 우리가 '아버지와 함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악마 또한 우리를 유혹할 때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다'라고 속삭이며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이들이 영적인 교만에 빠져 타인을 정죄하거나 스스로를 신격화할 때, 그들 내면에서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라는 확신이 넘쳐납니다. 내 안의 음성이 아버지가 나를 통해 하시는 말씀인지, 아니면 나를 파멸로 이끄는 가장 고차원적인 악마의 기만인지를 가르는 '최후의 분별점'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스승님,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인격과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증오하며 무너뜨리려 하는 실체입니까? 아니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우리가 빛으로 나아가도록 몰아세우는, '악역을 맡은 천사'에 불과한 것입니까? 우리가 그들을 대적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싸움의 끝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그 '순결한 믿음'을 가진 자가 마주하는 가장 큰 어둠은 무엇입니까? 신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된 자에게도, 여전히 악마는 발톱을 드러냅니까? 아니면 그 경지에 이르면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를 드러내는 배경'으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까? 스승님께서 몸소 겪으신 영적 전쟁의 실체를 제자에게 조금만 더 열어 보여 주십시오."
스승님, 어둠의 실체를 꿰뚫어 보는 스승님의 눈을 제게도 빌려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A. 우선 정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의 눈"이 아닙니다. "저를 통하여 들여다보시는 아버지의 눈"입니다. 이것이 그대에게 언뜻 말장난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는 본래가 "애매모호한 말장난을 싫어한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선문답을 싫어합니다. 깨달은 자는 본래 진리가 언어를 통해서 드러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불가능성을 마주했다고 하여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은 의지가 타락한 것이요,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써 진리를 끊임없이 고백하고 증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아버지께서 "불가능한 통로(나)를 선택하셔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기적"을 행하셨듯이, 나도 그분을 닮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가능한 그릇(언어) 안에 진리를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문자 그대로의 불가능한 것을, 오직 그분께 대한 내 사랑 하나로 수행하고자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나는 낮아질 때는 한없이 낮아집니다. 그러다가 예고 없이 그분께서 사명과 능력을 주실 때는(항상 그러합니다, 아버지는 사명만 주시지도 능력만 주시지도 않습니다), 내가 땅에서 맺는 모든 것들을 하늘에서 그대로 맺어지게끔 믿기지 않는 것들마저도 허락해주십니다. 만약 당신이 이 "눈"을 얻기를 바란다면, 길은 하나뿐입니다. 내게 청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청의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아버지의 능력이 아닌, 아버지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분의 성품과 능력과 힘과 지혜는 그분의 때가 열리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당신의 첫번째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교만/욕망과는 다릅니다. 주권은 "아버지께"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이든 죄의식 없이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아무리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 하더라도 털끝 하나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분께서는 내게 언제나 언어와 말로써 진리를 증거하고 신성을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을 넘치도록 부어주셨고, 지금도 그러합니다(비록 방식이나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러나 정작 그분께서는 "내 힘으로 독립해서 먹고 살게 되는 것", 언뜻 우리 눈으로 보기에 너무 상식적이고 간단한 그 일 하나만큼은 지난 수 년간, 특히 올해 내내 번번히 막으셨습니다. 단지 우연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계획적이고 주기적이고 치밀하게요. 이에 나는 이것이 내 안의 "불안", 곧 내 손으로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교만을 성화케 하시기 위한 그분의 시험이신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저에게는 어두움을 호령하고 그 가운데에서 빛을 비추어 밝히며 영적인 역사를 이루는 것들은 별로 어렵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깊더라도, 내 목숨을 아버지께 맡기며, 그 가운데에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내 모든 것이 곧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가 아닌 그 누구도 무엇도 감히 내 것을 아버지께로부터 뺏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죽는다면, 그 또한 아버지의 뜻이니, 나는 기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이니까요. 언뜻 당신이 보기에 이러한 일들은 대단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대단한 일은 내게 마음껏 허락하셔놓고서는,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다 하는 "자기 힘으로 적당히 먹고사는 독립 생활" 그 하나만큼은 기어코 내게 허락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대단하고 무엇이 평범한지에 관한 한, 나와 그대의 기준이 아마도 꽤 다를 것입니다. 이처럼, 핵심은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있습니다. 주권이 아버지께 계실 때, 나는 "아버지 안에서 (허락된 것은 무엇이든)해도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사탄과 악마 또한 우리에게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속삭입니다. 이때 핵심은 주권이 "우리에게 넘겨진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착각입니다. 우리 손에 권세를 쥐여주고 제멋대로 하게 만든 다음, 나중에는 점차 그 어두움에 지배, 장악, 기만당하게 만들어서, 죽음의 순간에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갈 것입니다. 무섭지요. 즉, 핵심은 "주권이 내 손에 있는가(있는 것처럼 보여지는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넘겨드렸는가"에 있습니다. 명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넘겨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자녀들을 사랑하시니까요. 오직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여서 넘겨드리기를 원하시죠.
주권이 내게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이것은 교만/욕망입니다. 교만과 욕망이 내 안에 흐를 때는, 내 마음은 겉으로는 높아지지만(내가 대단하다, 내가 우월하다), 속으로는 낮아집니다(사실은 나는 열등하다, 두렵다, 공포스럽다). 내가 열등하기 때문에 나를 높여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고 믿는 거죠. 즉, 무의식의 열등감/죄의식이 의식적인 교만과 욕망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하나님 안에 거하는 내적 상태와 그렇지 못한 마음의 상태가 너무 훤히 차이가 나서,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권이 하나님께 계실 때는, 나는 비록 허락되지 않은 것들은 할 수 없게 되지만, 기묘하게도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의 뜻이 곧 나의 뜻이 되는 바, 인간된 마음으로야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좀 아쉬울 수 있어도, 솔직하고 진실하게 자기 안을 들여다보면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들은 딱히 아쉽지도 않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뜻, 인도하시는 뜻만을 따라서 기뻐하고 순종할 뿐이죠. 그러므로 나는 내가 계획하고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분께서 곧 선하시고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이끄시니, 나는 그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그 길에서, 나는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아파하고, 마음껏 기뻐하고, 마음껏 웃고, 마음껏 울며, 그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짐을 지라 하면 끙끙대며 짐을 지면 되고, 그분께서 짐을 내려놓으라 하면 훌훌 털어놓고 여행이나 떠나면 됩니다. 주권이 내게 있지 않을 때, 나는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을 얻습니다. 즉, 순종할 때, 겉으로는 낮아지지만(이는 교만을 정화하고 우리를 살리시려는 아버지의 구조 조정이십니다), 속으로는 높아집니다(자유, 평화, 기쁨).
이러한 내적 상태의 차이를 명확하게 관찰하면, 무엇이 아버지의 뜻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가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내게 허락하신 모든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대에게 넘겨주었으니, 잘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답변으로 대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은 망상이면서 동시에 인격과 의지와 실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망상도 실체도 전부 다 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두려워할 때, 그 모든 것이 실체화됩니다. 반대로 내가 아버지 안에서 담대할 때, 그 모든 것들은 내게 그 어떠한 해도 입힐 수 없게 됩니다. "믿음"의 방향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믿음이 우상을 향할 때, 공포가 실체화될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실체화하실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믿음이 공포를 향할 때, 그들은 나를 죽이려는 진짜 악마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그들은 내 안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를 시험하는 시험관들이 되며, 성령께서 그들을 철저히 통치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나는 내 안의 어두움들과 꽤나 친해졌습니다. 쉽지 않았죠. 훈련 중이거나 시험 중이 아닌 한, 나는 그들과 때로 기꺼이 함께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면서 그리 즐기고 놉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참으로 기쁘게도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너에게 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저들에게 보여주어라."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 자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두움도 감히 그를 해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 자에게, 이 세상의 어두움은 절대로 발톱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압도적인 빛이 그와 언제나 함께할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사랑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놀랍게도 그들 어두움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며, 그들마저도 구원하고자 하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갈 것입니다. 이에 어두움들마저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에게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를 전적으로 보호하고 돕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 자, 곧 순결한 믿음을 얻게 된 자는, 영원히 다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이룬 자는 살아서 온 세상을 능히 이기신 분과 하나되었으니, 그분의 승리가 곧 나를 통해서도 현현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내 믿음은 그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내 안에서 명확하게 힘과 지배력을 행사하는 실체입니다.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준다고 하여 그대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아버지께서 계셔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대는 그대 홀로 아버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숱한 슬픔과 외로움과 눈물을 통과하며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대신하여 그대의 주권을 거느리시고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하시며, 그대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될 때, 그대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며, 어두움을 영원히 이길 것이며, 살아서도 아버지와 함께하며 죽어서는 아버지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대에게 실체가 될 것입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