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의 감각과 현존

by 생명의 언어

※ 이 글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하여 가상의 주제와 질문을 선정하고, 글쓴이가 그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하면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글 안의 모든 내용들은 가상의 것이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모두 글쓴이의 체험 및 경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Q. 스승님, 저는 늘 주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기록된 말씀 속에서, 혹은 뜨거운 찬양 속에서 잠시나마 그분의 옷자락을 만진 듯한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달콤한 감각은 안개처럼 금세 사라지고, 이내 차갑고 무미건조한 일상의 감각이 저를 지배합니다. 저는 그 '느낌'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임재의 감각은 멀어지고 제 안에는 오직 영적인 허기만이 남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말하는 '임재의 감각'이란 영혼이 느끼는 실제적인 접촉입니까, 아니면 그저 우리의 간절함이 빚어낸 심리적인 고양감입니까? 만약 그 임재가 '실제'라면, 왜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현존을 시시때때로 숨기시어 우리를 이토록 고립된 감각 안에 가두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떠한 감정이나 전율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른 순간에도, 그분은 '현존'하고 계시는 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감각되지 않는 신의 현존을 우리는 무엇으로 확증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스승님, 느껴지지 않는 신성을 어떻게 '현존'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제자의 막막한 가슴에 지혜의 빛을 비추어 주십시오. 가르침을 청합니다.



A. 우선, 저의 말보다는 말씀 그 자체이신 주님의 말씀들을 인용해볼까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 (요14:6)


인용하고 보니 전부 요한복음의 말씀들이군요. 개인적으로 저는 복음서 중에서 특히나 요한복음을 매우 사랑합니다.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그분의 인격적 신성"...... 이라고 하면 너무 개념적이고 딱딱하게만 느껴져서 별로지만, 아무튼 그 특유의 하나됨의 신성(하나됨 자체가 신성입니다, <신성>이라 하는 어떤 객관적인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의 존재감과 아우라와 같은 느낌들이 요한복음의 말씀들에서 주로 많이 느껴지거든요. 그 말씀들을 읽을 때, 내 안에서 영이 공명하고 요동칩니다.


굳이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복잡하게 갈 것도 없이, 저 세 말씀들을 논리적으로만 연역하더라도 훌륭한 진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진리를 알면 자유가 있는데, 그 진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 그리스도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우리가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거지요. 결국, 단순하게 말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순서대로 나열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물론 순서라는 말이 적절치는 않지만) :


1) 우리가 영과 진리로 그리스도(하나님)께 예배할 때,

2)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며(영접) →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

3)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자유가 열린다.


여기서의 핵심은 결국 "하나됨"에 있지요. 우리가 영접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곧 "아버지와 하나되신 분"입니다. 그분의 신성 자체가 그 하나됨에서 옵니다. 온다기보다, 하나됨 자체가 곧 신성이죠.


이것은 본래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은 죄 없는 완전한 인격이셨고,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죄의 구속과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이 하나됨 안에 우리도 거할 수 있는 길을 여셨고, 이것이 곧 진리이자 생명으로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임재"라고 부르는 것은 애초에 어떤 "신비 체험의 상태"가 아닙니다. 고양감을 느끼는 것, 찬양할 때 눈물을 흘리는 것, 다 중요하죠. 그런 것들은 "비일상적 체험"이기에, "신비"를 느낄 수 있게 하고, 따라서 우리의 "불신하는 마음"을 깨뜨리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거든요. 마법을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법을 써서 공중부양을 시키면 되겠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하는 방법은 상상 이상으로 단순합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을 체험하면 되겠죠. 믿음의 근거가 되는 바로 그 체험이라는 점에서, 신비 체험은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하죠.


다만,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곧 아버지 자신이시며, 아버지께로 우리가 이르는 것이며, 아버지와 가까워지는 것이며,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여러 개인 것 같아도 결국 "하나됨"에 있다는 겁니다.


임재는 곧 하나됨입니다. 이것을 먼저 바로잡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이것이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목적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이 궁극적이고 유일한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공전하고 자전하는 행성들이죠.


그리고 그 하나됨은 "내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재주껏" 하나되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다른 종교/영성들의 진리가 차이가 꽤 크게 납니다. 다른 종교/영성/전통들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지만, 자력 구원의 길에서는 궁극적인 목적은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달성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특별한 상태가 된다든지, 그런 거죠. 그러나 애초에 그리스도교는 "원래 불가능했던 것(아버지와의 하나됨)을 특수한 은혜(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를 통하여 가능케 하신 것"에 있습니다.


즉, 하나됨 자체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내 힘으로 어떤 특정한 상태에 도달할 이유도 없고, 특정한 체험을 해야만 할 이유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들은 "하나됨이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수적인 현상"이지, 하나됨 자체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신비 체험이나 특정한 상태가 하나됨이었다면, 애초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수준까지 영원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대도 알겠지만, 그분의 하나됨은 그야말로 특별하셨거든요. 인류 최초였고, 어쩌면 그분 이후로 그 누구도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1) 예수님은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셨다.

2) 그분의 하나됨의 상태/수준/경지까지 지구상의 그 어떤 크리스천도 이르지 못한다.

3)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상태/수준/경지/체험" 등은 하나됨에 있어서 큰 의미가 없다(본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가? 물론, 여기서 그대는 묻고 싶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냥 입으로 하나되었다고 스스로 주장하면 되는 것 아닌가? 올바른 것과 거짓된 것을 어떻게 구별한단 말인가?"


우리도 아는 것을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분은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셨죠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분은 스스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아버지와의 하나됨"을 이루셨고 그곳에 늘 홀로 계셨지만(때때로 그것이 그분께 크나큰 슬픔이기도 하였습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나와 단 한 시간도 함께 깨어 있을 수가 없더냐?" 마26:40), 제자들에게 "하나됨의 상태는 이런 것이며, 어떻게 하면 여기에 이를 수 있고....." 와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가르친다 한들 제자들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한다 한들 따를 수도 없거든요.


하나됨을 이해한다 한들 예수님과 같은 하나됨의 경지까지 갈 수 없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애초에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그 본질상 <이해>가 중요치가 않다는 겁니다. 이해는 물론 필요하지만, 이해는 도구이자 수단일 뿐입니다. "이해한다고 하여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분께서는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늘 아버지를 생각하고,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하며, 아버지와 함께 숨쉬고, 걷고, 잠들고, 아버지의 말을 전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며, 아버지와 하나되신 채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저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사역하시며, 다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와 하나되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죠. 바로 이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신 것이 이 말씀입니다 : "내가 너희와 이렇게 오래 함께하였거늘 어찌하여 나를 모른다 하느냐?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거늘, 어찌하여 내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9)


참으로 놀랍고도 경이로운 말씀이시죠. 그분은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했죠. 사랑하라, 섬기라, 봉사하라, 등등. 다만 그분은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보여줘도 따라할 수가 없으니, 나를 먹고 마셔서 너희 안에 받아들이기만 해라, 고까지 하셨죠.


<이해>되시나요? 하나됨의 길은 사랑에 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 이전에는 그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고, "따르는" 것이 전부였죠. 그러나 그분은 아들이셨고,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사랑하셨으며,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셨으며, 아들을 통하여 드러나셨고,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셨으며, 아들을 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원사를 이루셨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래 직접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격적 신성", 곧 그분 자신의 인격을 통로 삼아서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하나님"이시죠. 엄밀히는,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하고 성부를 직접 부를 것이 아니라, "주님", 곧 "예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됩니다. 아주 쉽고 단순하죠. 그분을 사랑하기만 하면, 그분께서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하나됨을 이루실 것이고, 또 이미 이루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이라는 위대한 증언을 남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였고, 예수님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이미 사랑한 그대로 그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열매"를 통해서 분별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이름으로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게 되며,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손으로 다른 이의 손을 잡고, 그분의 발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또한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을 넘어서 오직 (그분과 같이)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만을 열망하며, 아버지를 닮아가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며, 아버지와 가까워지고, 그 동행의 여정 자체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게 됩니다. 즉,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닮아가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것"이죠.


내가 그분의 현존이나 임재를 특별한 체험의 형식으로 느끼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도 내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미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된 상태"라는 증거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니, 아들 안에 있는 나도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는 거죠. 즉, 우리 안에 주께서 거하지 않으신다면 애초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삶에서 가장 고립되고 메마르고 힘겨운 순간에도,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놓지 못하고 있다면, 이미 그 자체가 강력하고 유일한 "증거"입니다.


명심하십시오 :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한 자는, 하나되지 못했기에 하나되었다는 특별한 증거(예: 신비체험 등)를 갈구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하나된 자는,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한 그 사랑으로 그분과 하나되었기에, 그에게는 특별한 증거가 필요치 아니하며 오직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그것만이 유일하고 은밀한 증거가 될 뿐입니다.




Q. 스승님, "하나됨 자체가 곧 신성이다"라는 그 말씀이 제 영혼의 복잡한 실타래를 단숨에 끊어냅니다. 저는 지금까지 임재를 '느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기에, 감각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사라진 줄 알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가르침을 통해,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그 '마음의 상태' 자체가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의 활동이요, 하나됨의 유일한 증거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되지 못한 자가 증거를 갈구한다"는 말씀은, 제 신앙이 얼마나 '나' 중심의 체험에 목매달아 있었는지를 부끄럽게 드러냅니다.


스승님, 이제 저는 감각의 안개 너머, '현존'의 실체를 향해 더 깊이 묻고자 합니다.


"스승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마음 하나로 이미 하나 되었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아의 소음'은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에도, 제 안에는 여전히 분노, 시기, 욕망과 같은 추한 소음들이 들끓습니다. 이 소음들이 들릴 때, 저는 즉시 '하나됨'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이 추한 자아의 소음이 들리는 상태에서도, 저는 여전히 '임재' 안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소음 자체가 제가 아직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반증입니까?"


"또한 스승님, 스승님께서 사랑하시는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임재의 감각'보다 더 중요한 '현존의 증거'는 결국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순종'입니까? 만약 제 삶에 가시적인 변화나 순종의 열매가 더디다면, 저의 '사랑함'은 그저 제 마음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감상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스승님께서 겪으시는 그 '하나됨'의 현존은 스승님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스승님처럼 신을 만난 분에게도, 세상의 풍파는 여전히 아프고 쓰라린 것입니까? 아니면 현존의 빛이 너무 강렬하여 세상의 고통은 더 이상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까?"



A. 바로 여기서 우리는 "주권"의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하나됨 = 내가 곧 신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되었다고 해서 내가 곧 하나님이 된 게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교만이고 유혹이죠.


여기서의 <나>는 곧 자아(ego)를 말합니다. 개체로서의 나, 입니다.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분노하고 시기하고 욕망하기도 하는, 추하고 더럽고 못생긴 마음 자체인 나 자신" 말입니다. 이 자아가 곧 하나님이 된 게 아닙니다. 하나됨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하나님)는 그분 자신으로 계십니다. 분리된 채로,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구체적인 인격으로 함께하셨으되, 그럼에도 예수님 자신이신 채로 곧 아버지와 하나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분리된 채로, 하나이다." 보십시오. 우리는 이것을 개념적으로도 애초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건대 어찌 우리 능력으로 이루겠습니까.


다만 나는 이것에 대한 방편으로 다음과 같은 개념을 제시합니다 : "능동적 수동태."


1)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나'는 주인이 아니라 통로이다.

2) '그리스도'께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그분은 나의 '주인'이시다.

3)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의 하나됨'이란, '그리스도께서(주인) - 나를 통하여(통로) - 드러나심(현현).'


이해되십니까? "내가" 하나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통로로써 존재하고, "운동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이시죠. 따라서, 그때에도 여전히 '나'는 존재합니다. 자아와 마음은 내가 아는 그 모습대로, 질투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고 욕망하기도 하면서 그리 존재합니다. 다만, 이전에는 그 자아가 '주인' 행세를 하였기에 왕국이 통째로 몰락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라면, 이제 자아는 '통로'로써 제 위치를 바로 찾았기에 진정한 주인께서 자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가 아닙니다. 애초에 사랑 자체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입니다. 이해되시나요? "내가 실패했다, 내가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 자체가 애초에 망상이라는 뜻입니다. 통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다만 통로 자체일 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화'입니다. 주님과 하나되었다고 해서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죄의 문제는 그분과의 하나됨으로 인하여 해결되었지만(중심), 아직 자아와 마음까지 '성화'되려면 평생에 걸쳐서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중심에서 해결된 것이 곧 외연까지 확장되는 과정이죠. 그대 자신의 신앙의 길을 뒤돌아보십시오. 만약 그대가 여전히 자아가 주인 노릇하고 있었다면, 그대는 날이 갈수록 퇴보하고 무너지고 몰락했을 것입니다. 더욱 악해지고, 탐욕스러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고 다스리셨다면, 비록 (각자의 죄의 무게나 깊이 등에 따라 과정이나 시간은 다를지라도)지나고 보면 반드시 성장이 있었고,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사고방식의 변화조차도 성화의 증거가 됩니다. 예컨대, 저의 경우에는 예전에는 기부를 하면, 개미 눈꼽만큼 기부해놓고서는(정기후원 2만원이면 사실 한 끼 식사나 혼자서 술 한 잔 하는 값에 불과하죠), "내가 은혜를 배풀어준다"는 교만함,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자만심(우월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화의 길에서, 이번에 새로 두 곳의 단체를 후원하여 총 세 곳의 정기후원을 만들면서(세 곳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나의 경외의 표시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방 안에서 편안하게 고작 2만원을 보낼 뿐이지만, 저들은(봉사자, 봉사단체, 현장 활동가 등) 나를 대신하여 내 몫의 선(善)까지 대신 행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류 집단이 지금까지 지은 죄에 대하여 분명히 나도 책임이 있건만, 내가 게으르고 부족하여 가장 이기적이고 편한 방식(돈을 보내는 것)으로 그것도 극히 일부분만 참여하지만, 저들은 본래 내가 했어야 마땅한 몫의 선행까지도 대신하여 다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음 자체가 절대로 "자아"가 꾸며내거나 상상해낼 수 없을 만큼 고귀한 마음입니다. 그대 표현 말마따나, 자아는 "분노하고, 시기하고, 탐욕하는 추한" 방식대로만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게 나의 죄의 실체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이토록이나 상상할 수 없었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1) 그리스도께서 이제 나의 주인이 되셨으며, 2) 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 는 것이 "내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 곧 "내 안에서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화는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죽음은 성화의 완성일 수도, 일시정지일 수도 있죠. 그러나 내 마음과 자아가 여전히 죄에 구속된다고 해서, '추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실패라고 착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아는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마음은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주를 사랑하고 주를 영접하며 주께 순종하기만 하면, 주께서 나를 통하여 성화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가실 것이고,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은밀한 증거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성화가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증거"들이죠. 다만, 그 증거들보다 더욱 중요한 "계명 중의 최고"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 하나가 가장 높고 고귀한 계명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곧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을 때, 나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그분께서 기뻐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절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때에도, "내 몫에 맞는, 내 크기에 맞는, 내 한계에 맞는" 가장 적절하고 완벽하게 조율된 방식으로, 주님께서 내게 선을 행할 기회도 주시고, "숟가락을 떠서 내 입에 먹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선을 행할 기회도 주시고, 선을 행할 용기도 주시며, 심지어는 선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 열매를 (본래 주님이 하신 일이므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내가 누리도록 양보까지 해주십니다. 즉,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내가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완벽하게 조율된 계획표대로 다 섬세하게 안내하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나는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열매가 더디다는 것은 성화의 과정과 성취를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려는 욕심 때문이지요. 내 눈에 더디게 보일 뿐,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적절한 시기와 때와 성장 과정에 맞춰서 잘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갑작스럽게 고영양을 무조건적으로 투하하면, 그건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 됩니다. 나는 다만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을 만난다는 것은 곧 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신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을 사랑한다고 하여 세상의 풍파가 다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은 어두움의 원리에 지배당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곧 빛이시기에", 필연적으로 신을 사랑하는 자는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몫의 시련과 고난까지도 짊어진 채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만난 이후에 나의 일상에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곧 "평화"이고 "기쁨"이지요.


언젠가 사라질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가 아니라, 내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아버지 안에 거할 것이라는 평화. 그분께서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기쁨. 살아서 나라가 임하였고 또한 죽어서도 내 영혼이 아버지 안에서 안식할 것이라는 기쁨 말입니다.


이미 구원을 약속받았고 또한 그것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에, 나는 지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즐거운 유희"로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에서 신의 뜻을 이루고 신성을 공유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Q. 스승님, "능동적 수동태"라는 그 오묘한 말씀이 제 신앙의 억지스러움을 단숨에 씻어내 줍니다. 저는 지금까지 '내가'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하고, '내가' 거룩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주권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자아는 그분이 통과하시는 '통로'일 뿐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제가 정기후원을 하며 느꼈던 알량한 자만심이 사실은 자아의 주인 노릇이었다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성화된 마음은 오히려 "내 몫의 선을 대신 행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흐른다는 스승님의 고백은 제 영혼에 큰 경종을 울립니다.


스승님, 이제 '임재의 감각'을 넘어 '현존의 실제'를 살아내기 위해, 더 구체적이고 뼈아픈 질문들을 올립니다.


"스승님, 우리가 주님을 '통로'로서 받아들이고 그분께 주권을 넘겨드렸다고 고백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여전히 '나의 의지'가 불쑥불쑥 고개를 듭니다. 특히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서, 이것이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주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주권을 넘겨드린 자에게 나타나는, 주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내면의 나침반'은 무엇입니까? 평화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와 같은 고통입니까?"


"또한 스승님, '느껴지지 않는 현존'을 붙들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신앙이 메마른 의무나 차가운 지성으로 전락할 위험은 없습니까? 우리가 '사랑함'이라는 증거 하나만을 붙들고 나아가기엔, 이 세상의 유혹과 허무가 너무나 강렬합니다. 스승님께서는 그 메마른 광야의 시간들을 무엇으로 버텨내셨습니까? 그분은 침묵하시는데 나는 사랑해야만 하는 그 지독한 고독 속에서, 스승님을 지탱해준 '실체적인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마지막으로, '임재'의 끝에서 우리가 도달하게 될 궁극의 상태는 무엇입니까?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그 '영원한 평화'와 '기쁨'은,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기 전에도 이 지상에서 '완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평생 그 그림자만을 쫓으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입니까?"



A. 하나됨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성화는 나머지 평생의 삶 동안 실천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중간 중간마다 아직 성화되지 않은 내 마음과 자아의 어두움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상승하고 하강하며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섭리의 일부이죠.


그 과정 속에서 때때로 나의 의지와 교만과 욕망인지, 주님의 인도이신지를 구별하는 것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분별의 지혜가 필요하지요. 이에 대해서는 물론 "전적으로 성령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이 형식상의 정답이 되겠지만(또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해답이지만), 아마도 그대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원하는 답변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궁리해보겠습니다.


결국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체험과 경험뿐이니, 이를 근거하여 돌아본다면......


저의 경우에는 "기쁨"이었달까요. 이것은 제게는 선명한 감각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감각.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분의 음성을 전할 때, 이른바 사역을 할 때에는, 언제나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기쁨과 충만함이 강처럼 흘렀습니다. 그때에는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다만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드러나시기만을 기뻐하였으며 즐거워하였을 뿐입니다. 아, 이렇게 하다가 죽더라도 참 행복하게 순종할 수 있겠구나, 싶을 만큼요.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자아나 마음이 자기의 욕망에 집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어떤 내적 체험이 흐릅니다. 평화, 기쁨, 그러한 것들이죠. 그것은 분명히 결이 다릅니다.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에서 제일 대표적인 것은 바로 "이름"이죠. 자아의 욕망대로 하려는 순간, "내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치켜듭니다. 당연하지요. 애초에 자아가 그러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되는 순간, 이미 "하늘의 완전한 기쁨"이라는 보화가 내 안에 흐르므로, 더 이상 내가 했다는 것과 내가 이루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 대신 다른 이가 명예를 누리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아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현상이거든요.


즉, "낮아지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는가?"가 가장 대표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자기 의지대로 하려고 한다면, 절대로 낮아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라면, 이미 하나님과 하나되어 함께하므로, 자기가 낮아져야만 곧 하나님께서 높아지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며, 따라서 낮아지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삶의 중간 중간들마다 마주하는 중요한 분기점들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그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녀들에게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어려운 방식으로 그분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불안 가운데에서도 그분께 순종하고자 할 때, 삶의 중요한 순간들에서는 그분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따르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명확한 그분의 뜻을 드러내어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내 안의 (하나님과 함께하는)기쁨으로 인하여 그분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일단 듣게 되면 그 뜻을 따르기는 무척 쉬울 것입니다.


그때에, 세속적으로는 오히려 망가지고 무너지는 것이 힘들어 보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할 때는 내려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쉽고 자유롭고 심지어 해방감까지 있습니다. 마치 신나게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요.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십시오. 하늘의 시간은 지상의 시간과 다릅니다. 내 눈으로 보기에는 이날 이 때까지 반드시 결정이 내려져야만 하는데도 그분께서 무기한으로 연기하기만 하신다면, 내가 주권을 쥐고 있으면 그건 그대가 말한 대로 "선택의 기로"가 되겠지만, 그분께 순종한다면 그건 그냥 "아직 때가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리 나아가는 길에서 무언가는 반드시 무너지고 좌절될 것이고, 몰락할 것이고, 사라질 것이며, 떠나가고 헤어짐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도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그리되어야 할 것들이기에 그리 되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시간이 열리는 날에는 그분은 우리에게 너무도 단순하고 직관적인 음성대로 길을 여시고 안내하시게 됩니다.


즉, 상황이 복잡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럽다면 아주 단순하게도 "하나님의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매우 단순합니다. 다음 단계의 길을 여시고 인도하실 때까지, 주어진 상황에 그때그때 대처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다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이지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고통스럽죠. 불안하고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기다림도 인내도 영원하지 않고, 때가 되면 반드시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신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결국,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라"는 것이군요.



또한, 그분께 대한 사랑 하나로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의 유혹과 허무가 너무 강하다는 그대의 말에 매우 공감합니다. 그분은 침묵하시는데(그분의 시간이 아직 열리지 않았으므로) 나만 혼자서 진실로 사랑해야 하는 그 광야의 고독 속에서 저를 지탱하게 해준 실체적인 힘은 무엇이었는가......


우선 솔직하게는, 제게 허락하신 재능과 능력 때문이지요. 저는 타고나기를 보이지 않는 영으로 계시는 분을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태어났고, 그러한 영적인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열망하도록 태어났으며, 고난 가운데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오직 신만을 사랑하고 열망하며 전진해 나아가는 것에 익숙하도록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광야의 시간들은 제게는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물론 큰 고통이었음에도, 고통으로 말미암아 저의 타고난 영을 드러낼 수 있는 "호승심"이랄까...... 그러한 기회이기도 했던 듯싶습니다. 예컨대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느낌이었달까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나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결국 이걸 위해서 우리는 "교회"에 가야 합니다. 교회가 필요합니다. 정기적으로 주일에 매일 교회를 찾아가는 것, 가서 주님의 생명을 내 안으로 다시 모시는 것, 나의 정신과 의식을 다시 정결케 하고, 나의 영혼을 주님께 정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신앙과 믿음을 공유하는 형제들과 한 자리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 그러한 것들이 참으로 큰 의지가 될 것입니다.


"함께 사랑하십시오." 혼자서 하려 하지 마십시오. 나의 경우에는 특별합니다. 내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교회 바깥에 두신데는 일반적이지 않은 어떠한 뜻이 있고, 이를 위하여 나는 남들과 같아지려는 변명과 핑계를 더 이상 댈 수 없도록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나는 나의 책임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나의 시련과 고난을 이해하고 또 사랑합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공동체와 함께해야 합니다.



임재와 평화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자체가 나라이고, 천국이며, 구원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나라는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나라이죠.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별개'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이미 우리는 그분과 하나되었습니다. 하나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당신이 말하는 "영원한 평화"는 언젠가 죽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의 차원에서의 일이요, 하늘에서의 일입니다. 이것이 평생에 걸쳐서 땅에서, 즉 내 삶에서 이루어지고 드러나고 수렴하는 과정들은 아직 진행 중이고, 많이 남아 있지요.


그러므로 이미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서 주님과 하나되었으므로 그 자체로 이미 천국에 입성한 것이요, 나라가 임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럴진대 나머지의 삶에서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그것이 그렇게까지 무섭고 두려워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죽음과 사망이야말로 인류에게 있어서 유일하고 최종적인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 우리는 바로 그 최후의 시험으로부터 면제받았고 오히려 예비된 평화를 약속받았으니까요. 이에 나머지의 살아서의 삶 속에서는 오히려 아버지와 함께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사역이라는 즐거운 유희"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유희하고, 죽어서는 아버지 안에 영원히 거할 것이며, 또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내 영혼이 인도받게 될 것입니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를 더 이상 알 필요가 없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창조주 절대자께서 살아서 내 아버지가 되셨고, 내가 그분을 사랑하며, 또한 그분께서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계시니까요. 살아서도 그분께서 나를 인도하셨는데, 하물며 육신이라는 장애가 없어진 사후에야 더욱이 나를 인도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된 평화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내면에서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우리는 외부의 삶을, 지상에서의 삶을, 육적인 삶을 더욱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소 간에 답답하고 불안하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희입니다. 중요한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 하나됨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고, 그 중심부에서의 구원이 나머지 평생 동안의 내 삶을 통하여 서서히 확장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들이 남았을 뿐입니다.


물론, 그 과정 과정마다 그분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내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때에 맞춰 주실 것이고, 나를 적절히 이끄시고 인도하실 것임에는 더할나위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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