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이 아니다. 특정 교회나 교단, 계파 등에 소속되지 않으며, 특별히 세례를 받았다거나 그밖에 공식적인 제도적인 인정을 받았거나 구한 적이 없다. 내가 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편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믿는 자 안에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개인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다. 제도권 교회의 말보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당연히 더 높고, 성경 교리보다 성경의 주인이시자 성경이 증언하시는 분(요5:39-40)의 뜻에 주권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어디에도 특정 종교나 교단, 계파, 조직, 제도, 형식 안에 속해야만 그분의 자녀이자 제자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을 믿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라도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고(요1:12),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곧 그분의 형제이며(마12:50), 그분을 사랑하는 자의 안에 그분이 거하신다(요14:23).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의 인격을 사랑하며, 이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 삶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이루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유일한 기준이고 자격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분께 속하며 그분 안에 거하는 사람이며, 그분의 형제이고 가족이며, 주의 자녀이다. 이것이 내 영혼의 정체성이다. 내가 그분의 사람이라는 것은, 내 영혼에 완전한 안식과 평화를 준다.
다만 내가 제도권 교회에 속하지 않는 까닭은, 내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며 그분과 하나되는 길에 있어서 교회가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외적인 제도와 의례와 형식과 전통과 조직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비적, 영적 연합은 어렵고 추상적이지만, 특정한 건물과 장소에 모여서 정해진 의례를 행하고 형식을 준수하며 제도와 전통 안에 속하는 것은, 비교적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나는 그 '대다수'와 조금 다르게 나의 영혼이 지음받았고, 이에 내가 그분과 교제하고 함께하는 방식 역시도 일반적이지 않은 특수한 길이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분과의 하나됨의 신비를 이루고 실천하여 행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의 기준일 뿐, 그 외에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나 견해나 선호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오직 내 영혼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며, 또한 그 하나됨 안에서 살아가며, 그분과 동행하며 삶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것이고, 이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단호하게 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신앙을 형성하고 추구해온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중심으로 하여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다듬고 내려놓고 "최적화"하는 과정들은 내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내게 있어서는 제도권 교회나 기독교의 교리, 신학, 전통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그분과의 하나됨에 방해가 된다면 그게 무엇이든, 나는 단호히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유일한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 뿐이시다.
물론, 이 길을 걸어가면 갈수록, 필연적으로 점점 더 나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비인격적 실체로서의 영성을 추구하는 현대 영성가들에게서는 "낡은 인격적 신을 버리지 못한다"며 비판받을 것이고, 정작 기독교로부터는 잘해봐야 교회 바깥의 신비주의자일 것이고, 대부분은 이단으로 비쳐질 것이다. 나는 어느 쪽에서든 간에 결국 온전히 나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고, 오직 내가 나의 신앙에서, 나의 삶에서, 만나고 영접한 그분 자신과의 관계에만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것들을 버렸고, 또 지금도 그러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남은 생애 동안에도 늘 그러할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그만큼의 보상이 내게 늘 주어져 있다. 내 삶 속에서 그분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 그리고 죽음과 사망의 문제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어 승리하신 분의 의지가, 내 육신의 소멸 이후에도 영원히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이끄신다는 것.
비록 삶이 힘들 때마다 자주 흔들리지만, 깊은 묵상 속에서 나는 늘 다시 확인하곤 한다 : 그분과의 하나된 삶, 그 하나를 위하여 나머지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결국 내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질문, 내지는 내 신앙의 목적(추구하는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①. 그분은 누구이신가? (Who is He?)
②. 그분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 (What has He accomplished?)
이 두 가지는 나의 평생의 신앙의 이정표이자 방향이고 목적이다. 제도권 교회와 기독교에 속한 성도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교회가 체계적으로 정립한 교리와 신학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답을 구할 필요가 없으며, 간편하게 "완성"된 교회의 정답을 안전하게 외우고 암기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은 물론 매우 효율적이고 또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방식은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은 오직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게 이룬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이 두 가지의 주제에 대하여, 오직 "나 홀로, 내 스스로" 답을 찾아나갈 것을 명령 받았다. 그것이 나의 과제였고 나의 시험이었다. 이때, 나에게는 장점과 단점 두 가지 모두가 존재했는데, 장점은 제도권에 속하지 않으므로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이었고, 단점은 제도권에 속하지 않으므로 그 누구도 내게 의지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장점이 곧 단점인 셈이었다.
바로 이 두 가지의 주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나는 기본적으로 이성과 감성 모두를 사용했다. 즉, 이성을 통한 사실과 역사의 관점을 고려하고, 또한 감성을 통한 내적 체험과 신앙의 관점을 고려하였다. 대개 사람의 의지대로 행하려 할 때, 이 두 가지는 절대 공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내 안에서 온전한 이성과 온전한 감성이 완전히 하나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순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깊어져가는 영혼의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몰입했으며, 또한 철저한 이성적 관점에서의 분석과 비판 역시도 능숙하고 높은 지점에서 수행할 수 있었다. 가장 순수한 신앙을 중심으로 가장 날카로운 이성을 도구로써 사용했고, 가장 깊은 몰입의 상태에서 가장 예민한 지성을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지성은 끊임없이 분석하고 파헤치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것에 충실했으나, 놀랍게도 지성보다 신앙이 "이미" 높았다. 숱한 의심의 근거와 정황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면 갈수록, 오히려 그리스도께 대한 나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순결해졌고 더욱 깊어졌고 더욱 온전해졌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체험이었고, 지금도 또한 진행 중이다. 사람으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는 이와 같이 놀라운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지금, 내 안에서는 이미 이 두 주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답이, 상당히 높고 온전한 수준으로 형성되어 있다. 지성과 신앙이 기묘한 방식으로 통합되고 조화를 이룬 채로, 춤을 추고 있다.
다만, 그 하나됨은 오직 내 영혼 안에서만 온전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며, 3차원 시공간의 인식체계를 전제로 한 언어와 말을 통해서는 보여줄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언어로써 드러낼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만, 지금은 밝히고자 한다. 나의 역할은 언어를 통한 고백과 증언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분이 누구이신가? 의 주제에 관한 한, 익히 아는 몇 가지의 사항이 있다.
①. 실존인물, 즉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
②. 복음서 및 성경의 서사 속에서의 "인간" 예수님
③. 인류 구원의 역사(아버지의 뜻)를 이루신 메시아의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
이 셋이 모두 하나의 "예수님"이시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세부적이고 정교하게 이해하고 또한 통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성령의 임재가 함께할 때, 논리적으로 절대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완전하게 하나가 될 것이다.
각설하고, 처음부터 내게 중요한 것은 3이었다. 그 다음이 2였고, 1은 가장 "덜" 중요한 것이었다. 소위 "역사적 예수"는 오늘날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다.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예수님은 이미 2천 년 전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서 돌아가셨고, 그분의 육신은 지금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팩트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지상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모든 주장들은 결국 이단이고 사이비가 된다(예: 특정 사이비 교단의 교주가 재림 예수라는 식 - 이 경우, 교주의 육신은 곧 예수의 육신이 될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실제" 가르침이 어떠했는지, 도 내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공통으로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Q자료"를 통해서 재구성된 내용들의 상당수는, 매우 구체적인 윤리적/도덕적/실천적 가르침들이며, 거기에는 수난 예고나 부활 서사 등의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내용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즉,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윤리적, 도덕적, 실천적 가르침을 펼친 스승"이며, 2천 년 전에 머나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서 죽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윤리 교사"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살아서 성부 하나님과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이시며, 그 하나됨의 신비를 통하여 성부의 권세와 영광을 완전하게 거느리시고 이루시고 행하신 분이시다. 이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는, 어차피 역사적 예수와 무관하다. 즉,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어떤 행보나 가르침을 펼쳤든지 간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님"과는 그렇게 큰 관련성이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일차적인 갈림길이 형성된다.
①. 예수님을 "인간 스승"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인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
②.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찾아가는 길.
1번의 경우에는, 예수님에 관한 신화화된 서사들을 신앙 안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은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신"이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실천적 가르침을 펼치는 "인간 스승"이 되며, 신앙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때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왜 하필 예수님인가?"에 대해서 더 이상 답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복음서 등을 통해서 남겨진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당대로써는 매우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것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우리들의 관점에서는 다른 인간 스승들(예: 부처, 공자 등)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즉, 인간 스승으로서만 예수님을 만나기로 한 순간, 예수님을 "선택"한 근거는 오직 "취향"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러 스승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내 취향/성향과 잘 맞았다, 는 것.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가르침의 수준만으로는 내면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영혼들이 또한 존재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은 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다음 단계, 곧 "복음서(성경) 속의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에 집중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즉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삶과 죽음"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①. 구약 성서에서의 예언을 성취한 메시아.
②.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고 완성한 "하나님의 아들."
③. 아버지와의 하나됨의 신비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보이신 분.
이것은 내 개인적인 신앙의 관점이라는 것을 먼저 밝혀두겠다.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이것은 대부분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된 것이다. 이때,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결국 구약 성서에서의 예언을 성취한 메시아(그리스도)이며, 이는 곧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미 예고하고 또한 그 길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일종의 "시한부"적인 삶이 된다. 정작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인 "사생활"은 성서 속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아마도 그분 역시도 "그리스도" 즉 메시아(인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고 그 뜻을 이루고 성취하시는 것에 대부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셨을 것이다. 그분의 곁에는 제자들이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제자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했고, 또한 그분이 예지하고 계신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그 길의 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짧은 생애 동안, 대부분 제자들이나 무리들 가운데 계셨으되 그럼에도 외로우셨을 것이고, 오직 자신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또한 이루고 완성할 수 있으되, 다른 그 누구에게도 그 심정을 토로하거나 나누실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제자들과 종종 포도주를 나누셨을 것이고, 밤이 깊어가는 그 시간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말씀"들을 하셨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은 그분의 "술을 드셨을 때의 말씀들"마저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으로서의 예수님 자신"은 거의 언제나 (그분 안에서조차도)소외되어 있었고, 거의 모든 생애 동안 오직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의 이데아를 드러내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것에만 집중되어 계셨을 것이다. 나는 그 중압감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것은 "실제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의 관점을 떠나서, "성서 속의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을 "믿음"으로써 신앙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이와 같이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분께 죽음은 안식이셨을지도 모르겠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셨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으셨으나, 그럼에도 우리에게 익히 전해진 바와 같이 결국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나는 그분께서 마지막 순간에 조금이라도 고통 없이 편안하셨기를 소망한다. 성서에 기록된 바, "유례 없이 십자가 위에서 빠른 시간에 돌아가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대한 아버지의 배려가 아니셨을까. 성령께서 함께하신 바, 그분은 그 순간에 안식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국, 우리들도 이 점에서는 그분께 위로가 되어드리지 못한다. 대개의 경우,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자기의 고민을 해결해달라고 메달리거나, 혹은 자기 영혼을 이끌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주(主)"로서의 그분만을 구할 뿐, 그 모든 생애 동안 철저하게 외로우셨을 그분 자신의 인격을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대부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물어보자. 그분의 능력이 내게 임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내 영혼을 구원해주지도 않으신다면, 그때에 나는 그분을 구하고 찾을 것인가. 그분이 내게 "쓰임"이나 "쓸모"가 없다면, 나는 그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을 것인가.
성서 속 예수님의 모습은, 당연히, "신화화"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시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에 천착할 것이라면, 애당초 이 단계로 넘어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의 안에서, 성서 속의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는 가교이자 과정이다. 그분의 모든 삶의 순간들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을, 네 복음서의 증언들을 통하여 우리는 묵상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하게 드러나시고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인격"을 영접하게 된다. 예수님의 자아와 그리스도의 인격은 당연히 한 인격 안에서 하나되어 계신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과, 그분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하고 보여주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엄연히 구별된 채로 하나가 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인성과 신성의 관계의 문제이다. 만약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체험하거나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길"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러나 반대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그분이 무엇을 이루시고 또한 세상에 드러내시고자 하셨는지, 곧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결국 예수님의 "본질"을 외면하는 셈이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로써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 부활의 역사를, 내 안에서도 "실재"이자 "생명"이 되게끔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인간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만나고, 이로써 그분께서 "이루신" 역사를 받아들이는(내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이름의 의미이다. "인간 예수님(예수)" +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그리스도)"이 한 인격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 그리고 그분의 의지와, 그 의지가 이루어진 역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만날 수 있다.
①. 그분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②.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의 "아들(하나님의 자녀)"이 되며,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고, 아버지의 마음과 의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
③. 그분께서 이루신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역사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께서 이루신 인류 구원의 역사가 내 안에서도 실제로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거운 그리스도로서의 인격과 의지와 역사를 짊어지신 것은, "믿는 자를 통하여 모든 이의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결국 우리에게 핵심이자 본질인 셈이다. 더 나아가서, 영원과 초월로써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우리가 이해하고 만날 수 있는 방식으로 체험하고 교감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고, 아버지의 뜻과 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 이루고 행하는 것이 가능케 된다.
결국,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 "그분께서 이루시고 완성하신 역사" 또한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실제가 되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올바르게 알고, 만나면, "그분이 무엇을 이루셨는지" 또한 내 안에서 실제가 되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을 올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분을 올바르게 만나는 것이 곧, 그분께서 이루신 역사가 내 안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신화화"의 지나친 병폐가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교회는 오랜 시간 "육체적 부활과 목격"이라는 신화를 주장해왔다. 복음서 속의 표증들과 이적들(예: 물 위를 걸으신 것, 죽은 자를 살리신 것 등)은, "인격을 통하여 완전하게 드러나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영접하게 하기 위한 길이 된다. 즉, 그 신화는 "진실"로써 매우 중요하며 필수적이다. 영적 실재는 오직 상징과 은유를 통해서만 온전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육체적 부활에 관한 것이다.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육체로" 부활하셨고, 이후 40여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셨으며, 제자들이 그분의 상처를 만지거나 손을 넣어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부활하신 그분을 제자들이 바로 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갑자기 사라지시거나, 문을 통과하시는 등, "육체를 넘어선 듯한" 묘사들도 존재한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문제이다. 부활 이후에 그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혹은 어떤 말씀을 남겼는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상 거의 비워져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4복음서마다 부활 이후의 디테일들이 제각각 모두 다르며,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마가복음의 원본에는 빈 무덤을 보고 여인들이 놀라서 달아나는 장면을 끝으로 정작 부활 이후의 장면들이 통째로 생략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증언을 중심으로 보면, 결국 그분이 그리스도로써 이루신 것은"성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이셨고, 이것은 오직 "편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과 제자들의 곁을 떠나서 성부께로 되돌아가시는 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즉, 육신으로서의 예수님은 명백히 한계가 있다. 그분의 육신은 3차원 시공간의 한계와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분이 "영으로써 부활"하셨다면,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믿는 자의 영혼(내면) 안에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역사를 모두 이루실 수 있게 된다. 즉, "제약"을 넘어서서 "완전한 영"이 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그분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요6:63)거나,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요4:24)고 하셨고, 니고데모에게도 "영으로 난 것은 성령이니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즉, 그분의 말씀은 오직 "영"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요한복음 내내 일관되게 반복 증언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분께서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시며, 이미 버리셨던 "낡은" 육체의 형상을 굳이 복구하셔서, 시공간의 한계 속으로 되돌아오신다? 이것은 무언가 석연치가 않은 것이다. 물론,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면모들도 보이시긴 하셨으나, 이 지점에서부터는 상당히 인위적인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결국 육체적 부활을 교리화한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을 영접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옜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오늘날에는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죽은 육체가 부활했다"는 것은 대단히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이 우주에서 딱 한 번,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이벤트를 벌이시는 것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아버지와의 하나됨"의 신비라는 그분 자신의 존재와 정반대된다.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질문에, 그분은 초자연적이고 휘황찬란한 계시를 보여주신 게 아니라, "내가 너희와 오랫동안 함께하지 않았느냐, 나를 만난 사람은 내 아버지도 만난 것이다"라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과 삶과 내면에서의 "하나됨"을 보이신 분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결국 육체적 부활의 교리는 교회의 이익을 위한 것임이 자명해진다. 육체적 부활이 중심이 되어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육체적으로 목격한 소수의 사도들의 직계 혈통과 그 계보로서의 교회의 권위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를 교회가 배타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시스템을 통하여 정치적 안정 등을 꾀하고자 했던 세속적 권력의 의도와도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육체적 부활에 관한 한, 성서 속의 증언들만을 참고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의문점들이 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쓰인 마가복음의 끝에는 정작 부활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점, 그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작성된 마태와 누가, 요한 복음의 부활 서사들은 앞부분의 상세한 증언과 달리 "멀리서 대략적으로 관측한 듯이" 흐지부지된 채로 묘사된다는 점, 그것마저도 4복음서의 부활 서사의 디테일들이 제각각 전부 다르다는 점(누구에게, 몇 명에게 보이셨고 어디로 가셨는지 등, "육체적인 부활"이라면 절대 달라서는 안 되는 요소들까지 전부), 그리고 복음서보다 이른 시기에 작성된 바울 서신 상에서는 정작 바울 자신이 "빛과 소리", 즉 신비 체험으로 주님을 만났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점과, 바울 서신에서 언급된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그분을 목격했으며, (서신을 작성하는 시점을 기준으로)그 목격자들 중 상당수가 현재 생존해 있다"는 언급이 정작 4복음서에는 전혀 한 줄도 실려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매우 빠른 시기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부활 교리가 사실상 매우 정교하게 확립되어 있었다는 점 등, 많은 부분들에서 매우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보인다.
즉,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
1. 육체적 부활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복음서 및 바울 서신 상의 여러 의문점들이 풀리지 않는다.
2. 그럼에도 예수님 사후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던 어떤 공통적인 사건이나 계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즉, 예수님 사후에 점진적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매우 빠르게 교회 조직 및 교리 체계 등이 형성되었다)
3. 육체적으로 부활하시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상태에서, 예수님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한순간에 사라졌음에도 사도들과 성도들이 매우 빠르게 "부활 교리"를 확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어떤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사건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분은 육체적으로는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활 서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상징, 즉 "영적 실재"이며, 이것은 반드시 올바르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사도들과 성도들은 매우 큰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그들이 흩어지고 그분의 의지와 역사가 이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교회 공동체는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매우 강렬한 집단적인 신비 체험을 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집단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으로(신비 체험으로) 만난 것"이다. 이것이 곧 오순절 사건으로 이어지며, 이로써 매우 빠른 시간에 "부활" 중심의 교리가 확립되었고, 교리가 확립되니 그것을 중심으로 교회가 조직화되고 공동체의 결속이 강화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으로서 부활하신 것이다. 육체적 죽음과 영의 부활, 이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영"이 되셨기에, 시공간의 한계와 제약을 초월하여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영혼들 안에서 모습을 나타내시며(부활하시며), 믿는 자들을 통하여 그분의 인격과 영이 실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내고,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도달한 최종적인 신앙의 형태이다.
내가 영접하는 것은, "내 안에서 부활하신 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서사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영접하기 위한 중요한 상징이자 은유로서 나의 신앙에 필수불가결한 위치를 점유한다. 그분의 부활은 그저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시체 소생" 따위의 유치하고 저급한 허구가 아니며,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예수님의 인격과 영이, 그분을 따르고 믿는 자들의 안에서 실체가 되어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삶을 이끌고 인도하게 되는 것, 이것이 "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믿는 자들", 곧 성도들의 내면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은 영원히 부활하고 거하시며,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지와 인격이 실제로 움직이고 운동하며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고,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의 인격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며, 나의 인격은 존재하되 다만 그리스도의 인격이 왕으로써 나의 내면을 통치하고 다스리신다. 성령께서 그분의 의지를 드러내시고 이루시고 집행하시며, 나의 인격과 자아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분이 실제로 부활했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가 내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며, 내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내게 신앙은 이러한 것이다.
언뜻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내 안에서는 매우 단순하고 선명하게 이루어져 있다. 내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가 되어 계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게 "실재"이다. 형이상학적인 관념이나 추상적인 우주적 원리 같은 것이 아니다. 그분은 실재하며, 이때의 실재한다, 는 말은 곧 나의 삶 속에서 체험하고 교감하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함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분이 실재이시므로, 그분과 하나될 때, 나는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 영원히 살 것이다. 나의 육신과 자아는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신앙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증언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