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숲 너머를 직시할 수 있는 진실한 관점
아마도 이전의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쓸모도 없었을 어떠한 종류의 말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부터는 확연하게 다르게 들려오는 때가 있었다. 나는 경험했으므로 안다. 정확히 똑같은 내용의 문장을 마주하더라도, 이른바 꿈속에 있는 자와 꿈에서 깨어난 자에게 각각 다르게 들리는 종류의 말들이 있음을. 그건 이를테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와 같은 류의 말들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오랜 시간 마음공부를 위한 모임의 장소를 제공하셨고, 손님들을 맞이하여 음식과 상을 차리셨는데 어릴 때의 나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강의를 듣고서는 분명히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에 깃든 어떤 진리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던 터였다. 물론, 그건 그 시기의 나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언어를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름난 스님이나 수행가로부터 어떤 현실적인 증표 같은 것을 받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좋은 말씀>이 씌여진 종이나 부적, 그림 같은 것들. 물론 그건 그 시기의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도대체 내가 뭐하러 이것을 가지고 있지?" 하는 의문이 문득 뇌리를 스칠 때, 그 순간 이전에는 그저 <좋은 말씀>으로만 들어왔던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말들이 전혀 다르게 내면을 공명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타로카드의 메이저 2번 고위 여사제(High Priestess)의 본질이다. 진리는 본디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언어나 관념으로써 드러내보일 수 없다. 오직 지극히 깊은 개인의 내적 체험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여사제는 그러므로 침묵할 수밖에 없고, 입을 연다 한들 당연한 말들만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오랫동안 타로카드에 관심을 가져왔으면서도 정작 그 본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꿈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밥 먹고, 똥 싸고, 잠들었던 일상이 무슨 판타지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이 그대로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마음에서 어떤 특정한 포인트가 불현듯 달라진 덕택에 모든 것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실재하는 세계 앞에서, 그것의 그림자나 쫓고 있을 화려하고 복잡한 관념의 세계를 논하는 공허한 언어들을 흉내내어 떠들 수는 없었다. 다만 분명히 어떠한 종류의 메시지들은 진실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은유하거나 노래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언뜻 보기에 너무나 평범한 탓에, 이른바 <귀가 열린>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이자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들이므로 동시에 하나였으며, 하나인 것은 태초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의 초점에 맞추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무한의 프레임으로써 흘러가는 절대적 흐름이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눈앞의 당연한 일상들 속에 숨어 있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씨앗이 잉태함으로써 처음으로 세상에 눈을 뜬 그날로부터 수십 년을 살아온 지금까지, 한결같이 아침에 눈뜨고 밤이면 잠들었던 지극히 평범한 그 일상 전체가 곧 진리였고 빛이었다. 그 사실 앞에서, '진리'를, '신'을, 다른 먼 곳에서 찾고자 헤매는 사람들은 결국 두 눈을 부릅 뜨고서 꿈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정정한다. 그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것들이 정말로 의미가 있는 실재일 수도 있음을. 다만, 나는 이제 애써 그것들에 갈망하거나 목매달지 않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들었던 거였다. 그 모든 철학과 이념과 사상과 종교와 신비주의와 영적 비전과 지식과 언어들과 <위대한> 경전들과 그 안에 깃든 비밀들은, 놀랍게도 이전의 내가 그토록 원하고 갈구해왔고 메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모두 갑자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눈앞의 <이것> 앞에서, 그건 단지 알아들을 수 없고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오늘의 국제 정세>마냥 아무런 관심도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타자의 정보이자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것을 가슴으로써 명확하게 이해한 순간, 동시에 이전에 사로잡혀 있었고 스스로 족쇄를 채워왔던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거기에 분명히 자유는 있었다. 그것은 기쁨이었고, 놀라움이었고, 동시에 어처구니없음이었다. 이제 난 꿈속에 있는 자들과 꿈에서 깨어난 자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별 거 없는 단촐한 몇몇 단서들을 그들에게 <관념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주려고 노력하는 일들에 관심을 갖는다. 말하자면, 그건 여사제 카드의 본질을 마법사 카드와 같은 방식으로써 제시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함으로 인하여 단 1%의 흠결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하며 아름답다. 하물며 신께서 당신의 본영을 닮아 창조하신 인간은 더더욱 그렇다. 허나, 그 지식과 인식이라는 함정에 빠진 순간, 그것은 <절대적 결핍>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영원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 나의 생각이고 사고였다.
눈앞의 <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노란색의 십수 개의 꽃잎과 중앙의 많은 씨앗들을 거느리고 비스듬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눈앞의 이것을, <꽃>, 그 중에서도 <해바라기>라는 특정한 이름을 가진 하나의 단일한 개체라고 여겨왔고, 개체 - 대 - 개체로서 그것을 마주하며, 동시에 그것은 바깥에 있는 객관적 대상이고 이를 주관인 내가 마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해바라기들>은 각자 조금씩 다르다. 하물며 같은 <단일한 개체>인 해바라기조차도, 동틀 무렵의 새벽녘이나 오전이나 정오의 강렬한 빛이나 오후의 노란 빛이나 해질 녘의 노을빛에 따라서 모두 다른 존재가 되며, 또한 그것의 주변에 있는 흙이나 돌멩이, 나무뿌리, 잎사귀, 낙엽, 풀들, 벌레들과 나비, 나무, 햇빛, 바람, 이슬, 그밖의 모든 것들과 더불어 존재하며 그것들과 떼어놓는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모든 존재들은 존재라고 이름붙일 수 없음과 동시에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로서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개체가 아니기에, <이것>이라고 이름할 수 없었다. 이름을 붙이려는 순간, 그것은 공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인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것이 지닌 권력을 빼앗아 항복선언을 받은 순간, 그것은 모든 것들과 더불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 그 자체로서 여기 있었을 <나>와 하나되어 체험되었다. 일순간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체험, 그러니까 체험되는 대상도 체험하는 자도 없는 오직 체험밖에 없었고, 그것은 지나간 과거도 다가오지 않은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이었으며 동시에 공간에서 펼쳐지는 매 찰나의 흐름이자 변화의 물결이었다. 그것은 1초에 스물네 장의 정지된 프레임을 연속 재생함으로써 관찰자에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착시를 일으키는 영화 시스템과는 달랐다. 그것은, 나뉘어질 수 없는 무한의 프레임을 1초에 "모두" 재생하는 유려한 흐름이었으며, 동시에 시간(지금 이 순간)과 공간(여기, 전체, 체험)이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달리 불렀을 때의 이름은 결국, <일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의 관념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실재는 단 1그램도 전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저하게 한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깊이 체험됨으로써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이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동시에 존재 그 자체로서 온전하게 여기 머무르는 연습이었다.
아마도 한 어리석은 아이의 어설픈 철학적 아이디어는, 그것을 알아봐줄 수 있는 스승이 없었더라면 금세 사그라들었을지 모른다. 불행 중 다행히도 나는 예전부터 좋은 스승을 만나는 운은 더러 있어왔고, 철학과의 마지막 졸업논문을 쓰던 시기에 이러한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과 동시에 내 안에서 찾은 답을, 기존의 것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느낌으로 전개하려던 나의 시도를 그분은 이해했고 동시에 존중해주셨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본래 애매한 주제의식으로 수동적으로 논문을 대충 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더없이 엄격하고 철저한 철학적 탐구 과정을 요구하는 분이셨는데, 그 시기의 나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만큼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일부 세부적인 오류들만 제외하면) 거의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이 사실을 어딘가에서 자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애써 노력하여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우연히 냇가에서 물을 마셨는데 목마름이 해소되었고 기분이 상쾌했더라. 의 연장선일 따름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라.
오랜 관습과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라.
당연한 것들을 이질적으로 관찰하라.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단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