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진짜가 아냐

불현듯 찾아온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

by 생명의 언어

어려운 말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말 그대로, 이전의 내가 생각하고 사고하고 세계와 나를 바라보았던 모든 관점과 시야들이, 어떠한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위는 아래가 되었고, 아래는 위가 되었으며 좌우는 뒤엉켜 뚫리고 닫히고 재정렬되어, 마침내 방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나는 답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지독한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분명히 건질 것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그토록 기다리고 기대했던 철학 공부가 왜 갑자기 나에게서 모든 빛과 온기가 꺼져버렸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를 알아야만 비로소 그 맞은편의 진실한 무언가에 대한 방향과 기준을 설정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옛 버릇을 결국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철학적 사고로서 철학을 해체하려 들다니, 아마도 내 은사님께서 그 시절의 나를 보셨다면 그냥 웃고 말지, 가르침을 내리시지 않고 끝내 침묵하셨을 것이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중심'이었다.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


철학의 탐구 대상은 무엇인가? 가장 광범위하게 좁힌다면 결국 인간과 세계이다. 내지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일 것이다. 더 간단하게 줄이면,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바로 그 단순하고 기초적인 관념조차도, 내 가슴 - 새로운 '나'의 진실의 재판관 - 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 판결은 너무나 단호했다.


눈을 떠라.

꿈에서 깨어나라.

진실을 똑바로 보라.


도대체 '인간'이란 게 어디 있는가? 여기엔 세 개의 특정한 한자로 이름붙여진 '나(이것은 결코 에고가 아니다)'가 있었고, 짧은 단발머리에 차분하고 총명한 눈을 가진 나의 여동생이 있었고, 지긋한 흰머리가 잘 어울리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어머니가 있었으며, 순박하지만 성실하고 이제 제 뜻을 펼치고자 하는 친한 동생도, 얼마 전에 취직하여 일을 시작한 오랜 고등학교 동창도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인간>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 서늘하고 부드러운 흐름, 햇빛의 따뜻한 온기,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빛의 황홀함, 손끝의 감촉, 풀잎과 꽃들과 나무들의 춤, 밝게 웃으며 떠들고 옹알거리는 웃음소리와 목소리들, 발걸음, 고요히 낮잠을 자는 고양이에게서 느껴지는 설명할 수 없는 아늑함과 평화로움, 가슴 속에서 넘쳐 흐르는 눈물이 날 듯한 이 감각, 체험들의 모든 것들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그 어디에도 <세계>는 없었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아니, 애당초 '나'가 의식적으로 분석하거나 판단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물속에 손을 담갔을 때의 선명한 감각처럼, 가슴에서 확연히 느껴지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처럼 중심이 옮겨지자, 진실한 언어들과 공허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헤쳐모이며 재구성되었고, 이제 나는 <진실하지 않은> 모든 사유와 지식과 언어들은 단 한 글자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아, 그것은 처음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오직 나만이 꿈속에 사로잡혀 망상 속에서 살아오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언어는 관념이었고, 관념은 다시 수많은 관념들과 연결되며, 그 연결들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지만, 그것들 중 단 한 개도 실재하는 '이것'과 연결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념은 관념일 뿐이었고, 실재는 관념으로는 절대로 표현하거나 담아낼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나의 가슴이 나로부터 철학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빼앗아갔는지. 책 속에 틀어박혀 열심히 <존재>에 대하여 탐구하고 지식을 쌓고 관념의 탑을 구축하려고 들어봤자, 도서관 앞 공원의 의자에 앉아 오후 세 시 즈음의 햇빛 속에서 "그냥" 있는 것의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 생동감, 살아 있음의 선명한 감각들에 비할 바 아니었다. <존재(관념)>는 껍데기였지만, <존재(실재)>는 너무나 황홀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들로 가득 찬, 그야말로 신의 언어였다. 햇빛을 받으면서, 감히 한줌도 안 되는 인간의 언어로서 신의 언어를 포괄하려 한 짓거리가 얼마나 허무하고 허황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불현듯',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을 반 강제로 나에게 '설치'했다. 마치 윈도우(Window)에서 OS X(Mac)으로 갑자기 전환된 것처럼. 아니, 어쩌면 아예 가상 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부서져내린 것처럼. 그것은 새롭게 주어진 것이지만,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관찰하여 발견한 것이었지만, 내가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한 말들 가운데에서도 진실한 언어는 살아 있었고, 이제 나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머리(이성)가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가슴(중심)의 판결에 순응해야만 했다. 철학과에서 보낸 마지막 학기 내내, 나는 졸업논문 안에 담아낼 <진실한> 아이디어를 가공하고 담아내려고 노력했고, 과연 그것은 <재판관>의 마음에 들었는지, 지금까지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었던 이전과 달리 무언가가 손끝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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