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환상을 깨뜨리는 것은 많은 슬픔과 고통을 동반한다. 그것은 지독한 상실이다. 심지어, 육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쉬울지언정 내가 가진 지식과 인식, 생각, 사고, 가치관...... 들을 내려놓고 포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보다도 더욱 두렵고 아픈 일이다. 나는 경험하였으므로 한다. 지식이란 근본적으로 <소유>되는 형태를 이룬다는 것을. 다시 말해,
1. 나는 지식을 안다.
2. 나는 (지식을) 안다.
1. 나의 (지식은) 옳다.
2. (지식은 사라지고) 나는 옳다.
1. 나의 (지식은) 틀렸다.
2. (지식은 사라지고) 나는 틀렸다.
모든 지식들은 근본적으로 1인칭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내가> 안다. 그 절대적인 시제가 붙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으며, 이때 지식은 세계에 대한 어떤 객관적 진술, 내지는 탐구의 결과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1인칭 시제인 가설된 <나>와 결합함으로써, 나의 마음과 교묘하게 뒤섞인다. 지식+마음. 그렇게 하여 낳은 결과물이 다름아닌 에고, 나, 아성, 아만인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이며, 따라서 <내가> 생각하고 사고하고 바라보는 것은 모두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이 된다.
그 말은 즉,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을 <틀렸다>고 전제하게 된다. 세계를 이것과 저것으로 구별하고, 자아와 타자로 분리함으로써, 자아를 타자와 대적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아가 마주하는 타자는 매 순간 피아식별이 되지 않은 경계 대상이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지식에는 모순이 있다. 그것은 분별에서부터 나온다. 앎의 반대는 무지(앎이 없음)이고, 좋음의 반대는 나쁨이고, 옳음의 반대는 그름(잘못됨, 틀림)이며, 빛의 반대는 어둠이고, 존재의 반대는 존재하지 않음(내지는 무)이며, 삶의 반대는 죽음이고, 주관의 반대는 객관이며, 하나(내지는 통합, 연결)의 반대는 객체(분리, 독립, 개체)이다. 인식의 세계에서, 우리는 알면서 동시에 알지 못할 수 없고, 이해하면서 동시에 이해하지 못할 수 없으며,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 없고, 인식하면서 동시에 인식하지 못할 수 없으며, 삶과 죽음은 공존할 수 없고, 주관과 객관은 결코 하나가 아니며, 하나인 것은 다수가 될 수 없고, 그 반대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꽃이 아닌 무엇일 수는 없다.
진리는 옳은 것이면서 동시에 그른 것일 수는 없다.
진리는 진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의 반증의 총합으로서 존재하며, 그 반대는 성립 불가이다.
......
진리를 <소유>하려는 순간, 그것은 또다시 분별을 낳는다. 진리와 진리 아닌 것, 그리고 진리의 옳음과 진리 아닌 것들의 그름(틀림)으로.
심지어, 우리는 깨달음, 의식의 전환, 영성의 깊은 메시지들조차도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한다. 깨달음이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깨달은 상태로의 전환, 내지는 <여기>에서 <저기>로의 나아감이다. 그것은 깨닫지 못한 상태의 나의 의식을, 깨달은 상태의 의식으로 바꾸는 것, 내지는 대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은 상태의 의식>을 머릿속으로 상상하여 가설한 다음, 그 상태가 1년 365일 24시간 내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만 그것이 비로소 깨달음 비슷한 무언가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진리를 터득한 자, 내지는 진리 그 자체는 후광이 비치고, 빛이 번쩍번쩍하며, 휘황찬란하고,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내려와 나팔이라도 불어제끼며, 세상만사를 초월한 저 드높은 지혜를 떠올리고 상상한다. 나아가 자신이 그러지 못한다는 데 대하여 괴로워하며, 거기로 건너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발버둥을 친다.
강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 강을 건너면, <저기>는 또 다른 <여기>가 될 뿐이다.
<저기>란 없다. <미래>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이다.
지식의 함정에 빠진 자는, 논리성의 괴물에게 먹힌 자는, 인식과 관념의 노예된 상태로부터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자는, 진실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머리로써 소유한 모든 지식들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 안에 자신을 가둠으로써 스스로 경계를 세우고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진실로부터 스스로 눈을 가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으로 대표되는 바로 그것은, 진정한 자유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행복을 얻기 위하여 극복되어야만 하는 최후의 적이요, 가장 강력한 장벽이고,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감옥이오, 경계이다.
왜냐하면, 꿈속에 빠진 자는 <꿈에서 깨어나라>는 꿈에 빠지고, <무아無我>라는 아我에 빠지며, <깨달음>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켰음에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에만 집착한다는 것은, 내지는 하늘 위에 뜬 달은 쳐다보지도 않고 수천 개의 강물에 비친 수천 개의 달들 중 어느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놓고서 그럴싸한 토론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지 그 자체보다도 지독한 함정이다.
그 모든 것들을 벗어던져야 한다. 지식이라는 괴물의 탈을 벗어내야만 한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다시 회귀해야만 한다. 인식이라는 감옥이 생겨나기 이전으로, <존재한다>는 인식도 없이 그냥 존재할 수 있었던 그때로 돌아가야만 한다. 단 1%의 흠결도 없이 100% 완전하게 존재하는 상태, 그것이 곧 절대적인 자유이고 행복이며 자각이고 전환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벗은 이후에 세상을 보라. 두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을 담으라. 두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아니 애당초 둘이 아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마주하라. 그리할 때, 그것은 이름도 없고 불릴 수도 없으며,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닌 모든 것들이며, 그 어떤 분별도 분리도 나뉘어짐도 없는, <존재> 그 자체만이 남는다. 존재 그 자체로 있을 때, 오직 존재만이 있을 때, 모든 것들은 환하게 빛나며, 매 순간이 기적이며,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우며, 마치 벙어리가 된 듯 침묵하나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넘쳐흐른다. 그 찰나의 경험은 <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꾼다. 한 번 변화한 자는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꿈에서 깬 자는 두 번 다시 꿈속으로 회귀할 수 없다.
진실로 중요한 것들은 언어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있음>조차도 초월한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 없는 것이 있음이다. 텅 빈 것이 있음이며, 있는 것이 텅 빔이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동시에 나는 없다. 꽃은 저기에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꽃이 아닌 일체이다. <저것>이라고 가리키기 이전에 저것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절대적으로 여기에 머무르지만, 동시에 정지되어 있지 않고 매 순간 변화하고 흘러간다. 모든 것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나는 존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전체이다. 거기에 경계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감히 인간의 볼품없는 언어와 지식으로서 가리킬 수 있겠는가?
여기 아닌 바깥에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찾은 것들은 절대적으로 <나>의 것이기에, <나>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도 공유하거나 나누어주거나 드러내보일 수 없다. 다만 자신이 아는 관념들을 총동원하여 은유할 수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그 소리 없는 목소리, 음성 없는 음성, 언어 아닌 언어를 들을 수 있는가?
모든 것을 내던져라. 절벽에서 기꺼이 몸을 던지라.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라.
<나는> 길가의 잡초보다도 못한 존재임을 수긍하라.
절대적으로 항복하고, 엎드리라.
존재함 없이 존재하고, 인식함 없이 인식하라.
버리고, 놓고, 떠나보내는 슬픔을 기꺼이 즐겨라.
그리하면, 언젠가 여행을 떠난 자는 처음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찾던 것은 처음부터 다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끊임없이 바깥에서 찾아 헤매던 자신의 과거에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마주한 자는 영원히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행복할 것이다.
문득 뒤돌아봤을 때, 당신은 스스로 달라졌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