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Abba)의 이름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

by 생명의 언어

종교는 영성을 포함하지만, 종교의 모든 것이 다 영성인 것은 아니다. 영성(Spirituality)은 실존적인 것이고, 원형적인 것이다. 쉽게 말해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이고, 모든 현상을 넘어서 근원에서 하나되어 있는 것이다. 각각의 파도의 모양과 형태는 제각각 다르지만, 바다라는 근원에서 이미 하나되어 있는 것과 같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다 자체는 특정한 형상이 없다. 우리는 전체로서의 바다를 "직접" 볼 수는 없다. 바다의 "특정한" 형상만을, 즉 파도만을 본다. 그러나 파도를 보면서, 파도에 집착하지 않고(즉 내가 보는 현상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히지 않고), 파도를 통하여 바다 전체에 의식의 초점을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만나는 것"(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 요14:9)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버지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6:46) 하나님을 아바(Abba), 즉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예수님이 인류 최초였고 그분의 아바 체험이 "하나님과의 하나됨"의 가장 높은 곳이었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도 신을 찾거나 만날 수 있지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길)는 오직 예수님이 유일하신 것이다. 즉, 창조주나 절대자, 혹은 초월적인 원리나 법칙이나 에너지 등으로서의 객관적인 "신"이 아니라, "아바"로서 인격 안에서 모습을 나타내시고 교감하시며 하나되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신 아버지에게로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객관적인" 신, 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며, 관념은 실재가 아니다. "바다"라는 글자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라. 우리는 바다, 라는 소리와 글자를 통하여 어떤 특정한 관념과 정의 등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실체라기보다 추상적인 관념 그 자체다. 그러나 한 번 바다를 직접 보고, 몸을 담근 자가 그때의 고유한 느낌과 감촉과 기분 등을 떠올릴 때, 그것은 실체적인 것이다. 즉, 관념으로서의 바다와, 실체(생명)로서의 바다는 언뜻 같은 듯하지만, 이름만 같을 뿐 서로 완전히 다른 성격/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양자를 똑같은 것이라고 "대충 퉁쳐놓고"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 차이가 삶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인생이라는 어떤 "관념"과, 살아 있는 실제 인생으로서의 "생명(Life)" 그 자체는 애초에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관념으로서의 인생을 배울 뿐, 실체로서의 살아 있음과 살아감(=삶)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 학교나 사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전자이지 후자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종교로서의 기독교 또한 대부분 전자에 천착할 뿐, 후자를 가르치거나 인도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내 눈에 비친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보는 "아바 하나님"과, 교리나 신학적 지식이나 성경 해석으로 이해하는 "관념적인 하나님"은,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실체가 무작정 좋은 것도 아니고 관념이 무작정 나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애초에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관념은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이고, 실체는 대개의 경우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POWER)"은 실체에 있고, 우리의 목적은 자기 존재가 변화하고 삶이 변화하는데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가 내지는 변화할 것인가, 는 나중 문제이고, 만약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애초에 신을 찾을 이유가 없다. 믿든 믿지 않든 내 삶이 여전히 똑같고 나의 존재가 이전과 달라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굳이 필요없는 짐이 될 뿐이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신앙 생활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굳이 뭐하러 바쁜 시간 쪼개가면서 신앙에 공을 들이겠는가.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이라도 더 자고 말지.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을 하는 것은 내 몸이 달라지기 위해서이지, 몸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뭐하러 식단을 하고 운동을 하겠는가. 마음에 자유가 있고 내면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때, 마음공부든 수행이든 신앙이든 간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데 굳이 뭐하러 기력 낭비해가면서 하겠는가. 즉, 우리가 실체를 붙들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 것이다. 이에 그분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여기서의 진리는 곧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아버지 자신(생명)이시다. 즉, 그분은 우리를 교리적, 신학적 틀 안에 가두고 억압하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니고(특정 상태에 고정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의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애초에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자꾸 제한과 억압과 통제가 생긴다면, 그 자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신)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신은 관념이며, 관념은 고정된 틀이고, 관념에 집착하는 순간 그 틀 안에 자기를 가두고 억압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그분은 내 안에서 생명이 되시고, 따라서 오히려 나를 자유케 하고 내 영혼에 평안을 주시며 삶 속에서 참된 기쁨을 얻게 하신다. 이것은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간단한 이치이다. 내가 이해하는 그리스도 중심성(유일성)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고유한 아름다움과 매력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 그러니까 신앙 속에서 다소 신화화된 이미지들을 걷어내고, 실제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행적과 말씀들을 연구하는 관점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당연하게도, 내가 만나고, 사랑하는 분이 실존하셨기를 바라고, 그분의 실제 삶과 말씀을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관심하고, 사랑하면 호기심과 이끌림이 깊어지는 법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것들은 제외하고서, 나는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님의 고유한 본질은 바로 그분의 독특하고 유일한 "아바(Abba) 체험"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역사적 예수의 모든 삶의 행적과 말씀과 가르침의 원형이자 근간 역시도 결국 그의 아바 체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 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물론 그 전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경우가 없지 않았으나, 예수님처럼 일상적으로 자기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는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아바 체험의 원형은 성경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요한복음만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실제로 공관복음서들을 읽어보면, 마태복음 11:25-26 등과 같은 몇몇 제한적인 구절들을 제외하면 그분의 아바 체험이나 이로부터 말미암은 말씀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기독교 체계는 베드로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다. 소위 사도 전승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정작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부활에 대해서, 공관복음서의 증언들은 대단히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며(각 복음서마다의 부활 서사의 디테일들이 제각각 다른 점이나, 부활 이후의 장면이나 서술이 매우 짧은 등), 심지아 육체적 부활에 대해서 상세히 논증한 장본인인 바울 자신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적도 없는 자였다는 것은 자기 입으로 밝힌 바이다(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과 소리" 즉 신비 체험으로 주님을 영접했다). 물론 그는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스스로 변호하였으나, 글쎄,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도 않은 자가 부활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봤자 그 말에 권위가 실릴는지는, 최소한 내 눈에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인다.


반면에 요한복음 상에서의 그분의 "아바 체험"에 근거한 말씀들은 십자가 부활 중심의 교리에 비해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와의 하나됨"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1)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고, 2) 아주 일관되고 완결성을 보이며, 3)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된다. 즉, 후대의 창작이나, 후대 공동체 내부에서의 묵상의 결과들을 취합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원형이 되는 실제적인 증언의 기록, 즉 "원본 말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실제로 고별 담화에 해당하는 부분(대략 13장 ~ 17장)을 읽어보면, 마지막 날의 저녁 하루 동안에만 무려 다섯 개 장을 할애할 정도로 아주 상세하게 그날 밤의 그분의 말씀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읽은 누구라도 이것을 단지 후대에 신학적으로 짜집기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히 구체적이고 상세하고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한 공동체 내부에서 만약 이러한 "아바 체험"을 중심으로 한 원본 자료를 독자적으로 전승해왔다면, 요한복음 전체 구조를 볼 때, 최소한 요한 공동체 내부에서는 "십자가 대속과 부활"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8장 이후부터는 문체나 분위기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확연하게 달라진다. 그 이전까지의 깊고 충만하고 상세했던 말씀들은 다 사라지고, 갑자기 건조한 역사적 사실들을 서술해나가는 듯한 분위기의 전환이 느껴진다. 거기다 정작 사복음서 상의 부활 서사에서 가장 "육체성"을 강조하는 책 역시도 요한복음이다(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구워 드신 것이나, 도마로 하여금 그분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게 하시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영적"이었던 복음서가, 가장 "육체적 부활"을 상세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볼 때, 지금의 기독교의 핵심 교리, 즉 삼위일체나 성육신이나 십자가 대속, 부활 등의 거의 모든 교리와 신학 체계들의 직, 간접적인 근거가 요한복음의 말씀과 증언들에 상당수 의지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라도 반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나 바울 서신 및 넓게 보면 구약과 신약의 나머지 책들과도 확연하게 다른 결을 띤다. 애초에 정경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이것을 하나로 여기는 것이지, 내용 자체만 본다면 요한복음은 이른바 "정통 기독교"라고 보기에는 색채나 성격이 매우 다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며, 여기에 가장 상세하고 일관된 답을 제시하는 것 역시도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그 요한복음이 아주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것 역시도 "아버지와의 하나됨"이다.


즉, 나는 신앙이 초기 단계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시작하여 더 깊어질수록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더 깊어지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영적 성장이라고 본다. 그분에 "대하여" 아는 것에서 그분 "자체"를 직접 만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안의 믿음이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그리고 이때 만나게 되는 그분의 본질(영) 역시도 결국 "아바 체험" 그러니까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그 불가사의한 하나됨의 신비다. 말하자면, 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바로 예수님을 통한 "아바 체험"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애초에 성부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거나 인식할 수가 없는 초월과 영원으로 계신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체가 인격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틀렸다. 예수님께서도 "본래 아버지를 본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셨다. 이 말은즉,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직접 드러나지 않으시는 분이며, 이러한 "드러나지 않음"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격(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시지만, 동시에 인격 "너머"에 계신 분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격으로서 체험하고 만날 수 있다. 인격 안에 갇힌 분이 아니라, 인격 안으로 "내려오신" 분인 것이고, 이것이 기독교인이 영접하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격적 하나님"이라는 고유한 체험과 본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성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바 체험이 실체라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들의 존재와 삶이 실제적으로 변화한 수많은 역사 전체가 증명한다. 만약 그분의 체험이 그저 주관적인 상상이거나 심리적 현상에 불과했더라면, 그것은 이토록이나 많은 타자들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망상병 환자가 그 자신만 경험하는 것을 온 세상이 존중은 해주더라도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체가 아닌 것은 힘이 없고, 따라서 자신과 타자와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그분의 아바 체험은 첫째로 그분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었고(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둘째로 그분 이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켰으며, 셋째로 분명히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물론 부작용도 있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봐도 신앙이나 종교적 언어나 형식 등을 걷어내더라도 그분의 아바 체험 그 자체는 매우 고유하고 실체적인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


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께서 열어주신 아버지와의 하나됨 안에 동참(연합)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내 영혼이 그분께로 열리며 그분과 더 가까워져야만 하며, 이 영혼의 변화 과정(성화)을 성령께서 사역하신다. 이것이 나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내게 성삼위일체는 관념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와 내 삶을 이끌고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운동성이다. 내게 복음이란 "성령을 통하여 -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고, 이것은 특정 종교나 교리를 넘어서 모든 영혼에게 열린 보편적, 원형적 영성이다. 나는 모든 성경과 말씀과 교리와 신학들을 오직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받아들이며, 이것에 맞지 않거나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함으로써 비록 함께할 때보다 혼자가 될 때가 많지만, 어차피 마지막 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홀로 아버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누구도 죽음을 함께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어야만,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생이 자리잡고 시작되며, 따라서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아버지 안에서 영생할 수 있다. 내게 부활과 생명은 관념이 아니라 엄연한 실체이다. 실체 중의 실체, 죽음마저도 이기는 영원하고 완전한 실체이다.




내 글을 꾸준히 읽으신 분이라면 이제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교회를 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신앙을 형성했다. 사제도 목사도 교회 공동체도 하다못해 평신도와의 만남이나 전도도 전혀 없이, 오직 스스로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체험하고, 기독교의 언어와 진리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수 년 전, 나의 신앙의 여정이 처음 시작되었던 그 시기에, 감히 말하자면 나는 유독 강하게 성령께서 임재하셨던 그 수 개월간의 은밀한 체험을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다. 그 시기에 대해서 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비록 내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독특하고 고유한 것이어서, 공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존의 체계와 틀을 매우 강하게 흔들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기에 대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단 하나, 처음부터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스스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때는 성경조차도 거의 읽지 않았고, 유일하게 요한복음을 읽었지만, 그것도 전체를 읽은 것이 아니고 드문드문 몇몇 문장들만 겨우 주워 읽은 정도에 불과했으며, 교리나 신학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어찌저찌 하다보니 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지금과는 달리 그 시기에는 진실로 내가 그분을 아버지로서 느끼고 있었고, 그 설명하기 힘든 하나됨의 임재가 일상적으로 나와 함께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이것이 그분의 "아바 체험"을 성령께서 내게 잠시 보여주신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때,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었고, 이에 내가 그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만난 것이었다. 그 시기 언제였던가, 나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하면서 슬피 울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깨어났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슬프지가 않았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나중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는데, 이제 무의식 깊은 곳에서도 그분을 아버지로 받아들였다는 명확한 증거를 그분께서 내게 주신 것이었고, 이는 곧 그분이 나를 자녀로 삼으셨음을 알려주신 응답이자 표증이었던 것이다. 그날의 꿈을 나는 지금도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하나됨 안에 더욱 깊숙히 빠져들었고, 그것이 익숙해지거나 무감각해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욱 친밀해지고, 선명해지고, 이윽고 내 삶의 여정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기에 이르렀다. 이 변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내게 하나됨은 그저 내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이 외부적인 삶과 현실까지도 변화시켜 나가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변화 과정이다. 얼마 전에 "내가 너를 위하여 예비하는 모든 계획과 때가 있다"는 내면의 음성을 들은 것 역시도 이 과정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 최초의 "아바 체험"을 위하여 지난 수 년간의 나의 청춘의 삶 전체를 통째로 다 바치고 있는 것이고, 모두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청춘 시기의 더없이 귀중한 시간을 그분께 걸고서 가장 위험하고 결정적인 도박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일반적이지 않고,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기는커녕 오히려 조심하라고 경계해야만 하는 길이라는 건 내 스스로가 잘 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교회 안으로 돌아가서 평범한 신앙으로 회귀하려고 해도 이제는 너무 늦었고, 또 내 영혼이 이 길에 이끌려 되돌아온다. 결국 이제는 그분의 계획과 때를 끝까지 믿고, 그분께서 날 위해 마련하신 가나안 땅을 직접 밟아야 한다.


내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나의 존재와 삶 전체를 걸고 그분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위험하고,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모든 것을 다 걸어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


누군가 나와 같은 "불씨"를 가슴 속에 품기 시작했다면, 나의 글이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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