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이 순서는 언뜻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무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기도하라"(마6:9) 하시며 친히 우리에게 정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이시고, 따라서 그분의 존재와 인격으로부터 말미암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통로이다. 그분의 행동들은 상징이 되고, 일으키신 기적들은 표적이 되며, 함께하신 사건들은 성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명확하고 확실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셨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뜻이 아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본질이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존재를 내게로 불러들인다는 뜻이다. 이때, 부르는 자와 부름 받는 대상의 위격에 따라서 그 관계가 설정되는데,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신다는 점을 나타내신 것이다. 즉,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보다 낮은 존재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명백하게 더 높은 위격적 권위를 가지신 분을 "초환(招喚)"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청(請)이다. 명령에는 낮은 차원의 위력이 실리지만, 청에는 "경외"의 진동과 파장이 공명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감히", 이 우주의 창조주, 절대자를 우리 앞에 나타나주십사 하고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짓인지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일상적으로 부르는 그 이름이, 본래는 얼마나 위대하고 경이로운 사건인 것인지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을 향한 경외는 곧 그 이름에 대한 경외와 본질적으로 같다. 아버지는 존재를 초월해 계신 분이며, 우리가 그분을 직접 볼 수 없고, 따라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이름"이라는 통로를 반드시 통해야만 한다. 주기도문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부르는 자의 의식과 정신을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께 완전하게 정렬시키고 고정시키는 의식이다. 명심해야 한다. 이름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는 실로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외부의 객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이름은 곧 내 안에 계시고 드러나시는 분에게 나의 존재를 완전하게 정렬시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오해한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아버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영원과 초월로 계신 분이며, 완전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 외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구하는 무엇이든 내가 행하리라"(요14:13) 하시며 우리에게 "열쇠"를 쥐여주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녀들의 찬양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자녀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셔야만 하는 "의무"가 생긴다. 사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가당찮음을 잘 알지만, 이 이상 달리 지상의 언어로 설명할 길이 없어서 이와 같은 불경스러운 짓을 범하는데 대하여 그분께 용서를 구한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것을 주기도문의 두번째 문장으로 열어주신 까닭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부른 다음에는 우리의 영(정신)을 아버지께 완전히 정렬시켜야만 하며, 이 정렬은 오직 "경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즉,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찬양함으로써, 우리들의 의식과 정신을 그분께로 온전히 정렬시키게 되며, 바로 이 과정을 통하여 "나"와 "아버지"가 하나가 된다(길이 열린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만,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야만 한다. 아버지를 경외하는 것은 아버지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경외하는 자, 나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 통로가 열릴 때, 마침내 "나라가 임하시오며" 천국이 내 안에 임하게 된다. 이때의 천국은 사후에 가는 어떤 초자연적인 특정한 공간이나 차원을 의미한다기보다, 나의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실제로 임재하시고, 그분께서 나의 존재의 중심부의 권좌에 앉으사, 나의 존재와 삶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사건이다. 존재 전체의 "구조와 질서"가 완전히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한 번 태어난 이상 육은 거듭날 수 없지만, 영은 성령 안에서 거듭날 수 있다.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길이 열려야만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께 경외함으로써, 아버지와 나 사이의 길이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 자체가 바로 예수님이다. 여기까지 오면,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왜 예수님이 그토록 절대적으로 중요한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게 되면, 아버지의 "뜻", 그러니까 그분의 의지가 하늘에서 완전하신 것이 곧 땅에서도 드러나고 이루어지게 된다. 아버지의 의지가 지상에서의 나의 존재와 삶에서도 적용되고 실현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나열된 관념적인 말들이 아니라, 이 단순한 기도문을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며, 아버지로 인하여 살아가며, 우리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드러나시는 것, 그러니까 예수님만이 누리셨던 그 "생명"을 우리로 하여금 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우리에게 유일한 "권능"으로서의 기도는 주기도문 하나밖에 없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마치 전화선을 뽑아놓고 전화기에 대고 떠드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마음속으로든 입으로 소리내어 하는 것이든 간에, 우리가 아버지께 드리는 모든 기도들은 사실상 우리의 정신과 의식과 내면을 온전히 아버지께 연결하기 위한 일종의 반복 훈련일 뿐이지, 그 기도의 내용 자체는 거의 의미가 없다. 유일한 "의미 있는" 기도는 주기도문 하나뿐이다. 그러나 주기도문만 무조건 반복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사건들 가운데에서 실제적으로 아버지와 연결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기도는 훈련이다.
여기까지가 주기도문의 전반부이며, "권능"을 열어젖히는 핵심이다. 그 이후로 이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 삶에서는 1)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고, 2) 나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줄 수 있고, 3) 이로써 나의 죄도 그분께로부터 사함을 받으며, 4) 모든 시험으로부터 보호받고, 5)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의 거대한 주기가 "완성"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토록이나 경이로운 하늘의 비밀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이토록이나 쉽고 명쾌하고 단순한 기도문으로 아버지와 그의 나라의 가장 위대한 비밀을 밝히신 것에서, 그분의 신성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가늠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기를 소망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매우 솔직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욕망이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 무언가를 소망하는 것, 무언가에게 이끌리는 것, 간절히 구하고 싶은 마음, 절실히 얻고 싶은 의지, 그러한 총체적인 것들이 나는 욕망이라고 여긴다. 욕망은 "운동하는" 것이다. 점잖게 앉아서 학문적으로 욕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욕망 자체가 강렬한 운동성을 불러 일으킨다. 자기 존재를 그 욕망의 대상을 향하여 다 쏟아붓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힘, 이것이 바로 욕망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아직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정확히는 통제라기보다, "다스려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원초적인 상태의 욕망은 그만큼 강렬하지만, 거칠고 위험하며 초점이 어긋나 있다. 이것을 인간의 의지로는 다스릴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욕망을 다스릴 수 있었더라면, 이미 오래 전에 이 세상은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욕망이 결국 만악의 근원이다. 정확히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그 욕망을 자기 의지대로 "통제"하려고 하는 어긋난 의도 때문에 그것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폭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을 다루는 일을 우리보다 더 "높이 계시는 분"께 넘겨야 한다. 우리는 이 흉포한 괴물을 다룰 수 없지만, 그분께서는 그저 나타나시는 것만으로도 그 괴물을 순종케 하실 것이다. 우리 앞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을 그분 앞에 드러낼 것이다. 이것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아는가. 그 괴물이 얼마나 흉포하고 위험한지를 잘 아는 나인데, 정작 그분께서 그 앞에 섰을 적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쁘게 스스로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하므로 운동하지만, 그분은 완전하시기에 운동하지 않으신다. 그저 존재하신다. 그저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그분은 모든 것을 운동케 하신다. 그러므로 욕망은 결국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 욕망이 잘 다스려질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 의하여 욕망이 다스려질 때, 그것은 마침내 "열망"으로 변화한다. 욕망이 열망이 되는 것이다. 열망은 여전히 뜨겁고 강렬하지만, 정렬되어 있고, 다스려지며, 고요하고, 평온하고, 선명하고, 진실하며, 아름답고, 고귀하다. 영원한 불꽃, 다시 말해 영(Spirit)이 내 안에서 거듭나는 순간이다. 욕망에 집착할 때, 흉포한 괴물이 우리를 난도질할 것이다. 욕망을 충족하고 욕망에 지배당할 때는 그 순간에는 좋은 것처럼 느껴도 결국 그 괴물이 나를 완전히 잡아먹을 것이다. 그러나 열망이 나를 이끌 때, 나의 존재는 더욱 아름답고 고귀해지며, 내 삶은 더욱 진실하고 경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비밀이다. 성화의 유일한 동력이 바로 열망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결국,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이고 복잡한 말들은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변화하고자 함이었지 않은가.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 이제는 내 삶에 자유가 있기를 원한다. 이제는 내 안에 평화가 있기를 갈구한다. 이제는 내 영혼 안에 기쁨이 있기를 애타게 부르짖는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나아가서 무릎 꿇게 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내가 묻건대, 솔직해지자, 우리의 무릎이 얼마나 비쌌던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나의 흉포한 교만이 마침내 누그러지며, 교만이 순종에게 스스로 기쁘게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경배하기까지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던가. 우리는 그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깟 무릎 한 번 꿇는 사건이, 얼마나 힘들게 일어났던가. 그 무릎을 꿇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희생을 감수하였는지를 그분께서 다 아시오며, 이에 그 순간에 그분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우리 모두가 잘 알지 않은가. "크리스천"이라는 인침을 그분께로서 받은 그 순간의 그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환희를, "이제 됐다! 이제 살았다!" 하는 함성이 내 안에서 터져나왔던 그 순간을 기억하지 않는가.
나의 존재와 내 삶에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왜 신앙 생활을 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께 순종하고 뭐 그런 거창하고 고상한 것들은 솔직히 이제 내려놓고서라도, 나의 과거의 어두움과 그 죄성으로부터 진실로 해방되고 싶어서, 나의 오랜 악우(惡友)인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진실로 평화가 있기를 갈망해서, 존재의 깊은 곳의 슬픔과 공허로부터 진실로 기쁨과 환희가 있기를 애타게 갈구해서......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그랬더라면, "작동하지 않는" 신앙의 방식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작동하는" 신앙을 찾고, 홀로 되더라도, 모두에게 버림받더라도, 부러 고난의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내 존재가 변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나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도 펼쳐지고 드러나고 완성되기 위해서, 이 하나만을 위해서 우리가 신앙을 붙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나는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진실하게" 아버지를 경외하며, 이로부터 "실체적으로" 나라가 임하고, "영광스럽게"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그 본질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계신 분이셨지만, 그럼에도 결코 어렵거나 복잡한 말로 가르치지 않으셨고, 모든 사람들이 능히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신 분이셨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하고 말하지 않으시되 다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분이셨다. 이것이 그분의 방식이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우리를 절망케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그분의 자비가 그토록이나 크셨거늘, 어찌 우리의 슬픔과 절망을 외면하실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것들 안에 하늘나라의 모든 비밀이 다 있다.
그 뒤엔, "순전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진실로 믿는 것, 끝에서는 결국 "믿음",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없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사후세계로서의 천국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보았다 하는 자들 역시 완전히 죽은 다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상태였을 뿐이다. 진정한 "사후 체험"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라는 영토라기보다 "구조"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나머지 전체를 변화시켜 나가는 그 동력과 구조와 질서, 이것이 곧 나라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는 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내 삶에서, 일상에서, 삶의 구체적인 현장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생은 "지금" 시작되는 것이고, 믿는 자 안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천국 입장권을 얻는데 힘 빼지 마라. 살아서 영생을 누리는 자는 어차피 죽어서 하나님과 하나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고, 따라서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 들어간다(=하나님과 하나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되지도 못했는데, 어찌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천국에 관심이 없다. 사후세계에 전혀 관심이 없다. 어차피, 살아서 영생을 살아가는 자는 죽어서 어디로든 어떻게든 "빛"으로 인도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영원"은 곧 하나님의 존재이며, 그리고 그분의 존재는 육의 모든 한계를 "초월"케 한다. 이것이 내가 "영원과 초월로 계시는 분"이라는 상징적인 언어로써 그분을 부르는 이유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내게 구원이 된다. 그분이 무슨 "일"을 하지 않으시더라도, 그저 내게 오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영혼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면, 그저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하시는 것만을 구하게 된다. 그분의 "역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를 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살아 평생에 내 삶에 아무런 기적도 일으켜주지 않으신다 하여, 나는 지금껏 수 년간 엄청나게 그분을 사랑했고 그분께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그분과 나만이 기억하는 은밀하고도 아름다운 교제의 경험들이 소중하게 내 안에 간직되어 있다. 이것이 내게 구원이다. 그분의 존재는 영원으로 계시고, 또한 그분이 임하실 때, 나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육신과 자아의 한계 곧 죽음과 사망으로부터 초월하여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창세 이후의 세상이 모두 소멸하고 없어지더라도,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은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내게 중요한 것은, 육의 삶을 살아가되(하나님과 함께하는 무대가 바로 내 삶과 일상이므로), 살아서 영생을 이루는 것, 곧 살아서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 바로 이것이다. 그분과 정렬할 때,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생"을 얻는다. 형태와 조건과 방식은 중요치 않다. 사후에 어떤 상태에 있든, 어떤 과정이 있든,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이미 살아서의 삶 속에서 영원과 초월로 계신 분,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과 하나가 되었는데, 그분과의 하나됨을 이 세상 그 무엇도 감히 흔들거나 끊을 수 없음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내 안에 이루어진 나라는 마침내 나의 육신이 허락된 수명을 다하는 그날에, "지상에서의 나의 마지막 날"에, 내게 천국이라는 실체로서 실현되고 완성될 것이다.
"하나됨의 신비" 안에 참여하고 연합하는 것. 이것이 모든 믿음의 형제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