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 신뢰와 순종

by 생명의 언어

한때 왕께 가장 반역했던 자가 회심하여 왕의 충직한 종이 되었다. 세상은 이것을 "드라마틱"한 멋진 이야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회심은 회개한 자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영광도 명예도 얻는 것도 없다. 세상은 반역자조차 너그러이 받아준 왕의 은혜만을 칭송할 것이고, 반역자를 향해서는 "언제 뒤통수 칠지 모른다"며 손가락질할 것이며, 그 꼬리표는 그가 왕을 위하여 그 어떤 선택을 해도 변함없이 뒤따를 것이다. 외려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분명히 무언가 숨은 뜻이 있다"며 더욱 의심할 것이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악의적이고 일방적인 그들의 논리와 주장이 마치 진실인 양 떳떳하게 세상 앞에 드러낼 것이다. 반역자는 왕에게 충성해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러다가 조그마한 실수라도 한다면 "그럴 줄 알았다"며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될 것이다.


이 선택은, 반역자에게는 평생의 십자가다. 끝나지 않는 언덕, 그리고 겨우 다 오르더라도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가장 치욕스럽고 두려운 죽음뿐.


나는 한때 반역자였다. 그리고 내 안에서, 그때의 흉포하고 악한 본성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비록 지금의 모습들을 세상은 왕을 향한 충성으로 봐줄지 모르나, 그것은 잠시 동안일 뿐, 나는 내 스스로마저 속일 수는 없다. 나의 형제들은 그리 쉬이 드리는 가장 단순한 순종조차도, 나는 그것을 드리기 위하여 매 순간 내 안의 어두움과 죄악의 굴레와 싸워야만 한다. 이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보았던 글귀처럼, "생은 다음 생을 예비한다." 하나의 주기가 끝나면, 이로부터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며, 이 길은 마침내 죽어서야 끝날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이 길을 선택했다. 이 언덕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 아니요, 죽음이란 것을.


왜냐하면, 나의 주인께서 걸어가신 길이셨기 때문이다. 주인이 그러하셨으니, 종의 길은 그때 이미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종의 운명은, 그 주인과 온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가셨던 그 길이 곧 나의 길이다.


여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나는 이 길을 "신앙"이라고 부른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형제들에게 오늘 문득 떠오른 것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몇 글자를 적어본다.


주께서는 내가 전혀 모르는 것,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 내게 생경하고 낯선 것을 가르치지 않으신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나의 과거, 내가 경험했던 것들, 내가 이루었던 것들, 내가 겪었던 것들, 그리고 내게 익숙한 것들과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 그러한 것들을 끄집어내시며, 그것들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시고, 그것들로 나를 성장케 하시며, 나의 영혼을 도약하게 하신다.


그분 안에서 나는 이것을 아주 오랫동안 겪어왔고,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세상은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할 적에 문제들을 아주 많이 낸다. 수능 시험 전체에서 학생들이 풀어야 할 문제, 질문은 수십 개나 혹은 수백 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오직 한 사람에게 단 하나의 문제만을 내신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고, 모두에게 다 드러나 있는 것이며, 언뜻 너무 쉽고 단순해서 처음 접하면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처음에,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질문이 너무 쉽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분께서는 문제를 내실 적에 정답도 함께 내어주신다. 이것이 참으로 그분다우신 방식이시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26) 이 말씀을 나로 하여금 그토록 강렬하게 영접케 하셨으면서, 그분은 내게 "죽음을 이기는 힘이 무엇이냐?", "사망을 완전히 이기는 승리가 무엇이냐?"하고 물으신다. 지금은 물론이고 그때도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교회를 가본 적이 없는 나조차도 알고 있는 것이므로, 아마도 교회 안의 형제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교리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너무 익숙해서 처음에는 무슨 특별한 정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이기는 힘은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에 있고, 그 생명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곧 영생이며, 그분 자신께서 곧 부활이요 생명 그 자체이시다. 이미 답은 주어져 있다. 달리 고민할 필요조차도 없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답안지를 그대로 그분 앞에 드리면, 그분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반응하지도 않으신다. 그저 고요히 침묵하신다. 침묵으로, 이미 뜻을 전하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다, 하시며. 그렇다면 그분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미 내게 주어져 있는 그 답을, 나의 삶으로 직접 살아낸 후에, 다시 그분께 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온 몸으로 겪고, 나의 존재 전체로써 처절하게 겪고 또 겪은 다음, 마침내 "체화"해낸 다음, 그 답이 온전히 내 안에 자리잡고 나의 것이 되었을 적에,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그 답을 그분께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이미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그 쉬운 고백을, 베드로가 진정으로 드리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한 과정을 겪었는지 우리 모두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이것이 그분의 방식이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졌다. 유다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그 길에서 도망쳤지만, 베드로는 주를 세 번이나 부정한 자기의 죄 앞에서 죽지 않았고, 치욕스럽게 살았으며, 살아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했고, 심지어 수천 년이 지나도록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죄가 읽히고 또 읽히는 모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에, 그분께서는 지금의 내게 하나의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계신다. 지난 수 년간의 여정에서, 그분이 내게 주시는 질문은 언제나 같았고, 그 질문은 내 안에 언제나 한결같이 그대로 있었다. "네가 나를 진실로 믿느냐?", "내가 너를 위하여 예비하는 모든 계획과 때를 신뢰하느냐?"


참으로 어이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분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입을 모아서 "중요하다"고 하는 지금 시기의 내 삶을 통째로 다 바치고, 그나마 이룬 내 손바닥 만한 성과와 업적도 다 버리고, 내 사람들까지도 다 떠나보내고, 세속에서의 풍요는커녕 수 년째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경제적 자유는 꿈조차 꿀 수 없고, 하다못해 영적 세계에서 성장하고 이룬 결실과 업적들마저도 다 내려놓고, 영적 권위마저도 다 사라진 채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하게 칭할 수조차도 없는 이상하고 외로운 신앙의 길을, 내가 미쳤다고 이 길을 걷고 있겠나.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제정신이랍시고 지금껏 이 길을 걷고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답이 아니셨다. 이에 이미 나는 알고 있다. 이미 아는 너무나도 쉬운 답을, 나는 온 몸으로 겪어야 한다. 나의 존재 전체로, 처절하게 찢어지고 피 흘리면서 겪어야 한다. 그 후에, 마침내 이것이 나의 몸에 체득된 후에, 뼈에 새겨진 후에, 칼날로 살을 찢어서 각인한 후에, 마침내 내 안에서 온전한 내 것이 된 후에...... 그분께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그 쉬운 답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답해야 한다. 저 베드로가 그러하였듯이.


"예, 진실로 당신을 믿나이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계획과 때를 온전히 신뢰하나이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그분 앞에 용서를 구한다. 이 두 문장이 내 심장을 찢어지게 한다. 이 쉬운 응답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께서 족하다 하심을 얻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이 길을 더 가야 할지, 끝이 보이지가 않는다. 나는 광야에서 날 부르시는 음성을 받았고, 이 길을 시작케 하신 것도 그분이셨으니 또한 끝을 맺으시는 것도 그분이심을, 절실하게 알고 있다. 나의 광야를 끝맺으시고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서는 그날이 언제인지는 오직 그분만이 아신다. 그분의 명령이 없으면, 내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상의 시간은 의미가 없다. 고작해야 4년, 5년에 불과한 지난 세월들이 내 안에서는 한 생애 전체보다도 더 길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 인내, 매일 밤과 새벽을 한숨과 눈물로 지새웠던 그 모든 시간들을 내가 내 가슴 안에서 선명하게 기억한다.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분께서, 여전히 침묵하신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신다.


그분의 의지에는 실수가 없으시다. 그분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내가 아직 그 쉬운 응답을, 내 몸으로 완전하게 새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어떤 심정일지를, 이 세상에서 오직 그분 자신만이 아실 것이다. 이 심정을 이 세상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나의 고통과는 별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끝까지 순종하는 것, 숨이 막힐 것 같고 심장이 불에 타는 것 같이 괴롭더라도, 결국 내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든 기어서라도 끝까지 가는 것.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찾고 그분을 부르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것.


처음부터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사치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기 위해서는, 나를 시험하시는 분, 나의 유일한 주권자이신 분, 그분께서 이제 되었다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셔야만 한다. 그분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만 한다. 그 전까지, 나는 광야를 벗어날 수 없다.


답을 몰라서 광야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다. 그분은 자비로우사 결코 자녀들을 무지와 어리석음과 공포 가운데로 내모시지 않는다. 가장 쉽고 단순한 하나의 문제만을 출제하시고, 그에 대한 답안마저도 처음부터 다 주신 다음, 그것을 다만 살아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리 걸어가는 모든 걸음들마다 내게 오셔서 함께 짐을 지시고, 함께 걸어가신다. 이것이 그분의 방식이시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경이로운 그분의 역사.




믿음과 신뢰는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믿음은 시작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 그리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신뢰"가 뒤따른다. 이 신뢰는 첫째, 나의 의지나 계획이나 판단이 아닌 그분의 의지와 뜻과 계획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고, 둘째, 이 모든 것들을 이루시는 그분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건대, 이 둘 모두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내 눈에 당장 죽게 생겼는데도 그분께서는 천하태평하신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파도가 넘실거리며 이 작은 배를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낼 것만 같은데, 그분께서는 배 한 켠에서 그저 누워 잠드신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내 안의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과 맞서 싸워야만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신뢰"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 이미 지금까지만으로도 나는 내 안의 어두움과 싸워온 매우 경험 많은 노련한 전사이지만, 내 힘으로 그 적과 맞서려고 할 때 한 번도 제대로 이긴 적이 없다. 사실, 나는 주기적으로 패배한다. 그러나 내 안에 그분께서 계시기에, 반드시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다. 이 길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알 수 없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알 수 없다.


믿음이라는 씨앗은 반드시 신뢰라는 열매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 그때, 마침내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광야의 시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며, "다 이루었다" 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하늘에 선포될 것이다. 그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며, 한밤 중에 갑작스럽게 찾아오시더라도 즉시 영접할 수 있도록, 언제나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분의 때가 되면, 그분의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반드시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의 역사가, 내 삶에 펼쳐질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분의 계획과 때를 신뢰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 정답을 살아내는 과정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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