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과 금주를 결심한지 3주가 지났다. 육식을 그만둔지는 오늘로 40일째다. 내 사랑하는 아이가 그분의 곁으로 돌아간지도 40일이 지났다. 그 40일이, 내게는 마치 수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카이로스, 하늘의 시간이 내 안에서 깊어질 때, 시간 감각은 지상의 것과 달라진다. 내게는 익숙한 감각이다.
그런데, 익숙해진 채로,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한때, 나는 선문답을 매우 싫어했다. 깨달음을 얻은 자들은 그것이 자기의 능력이나 성취로써 얻은 것이 아니며,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것의 본래 주인은 하늘이며, 하늘의 뜻은 모두에게 열린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은 자는 그것이 비록 지상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핑계나 변명 삼지 않으며, 자기에게 열린 진리를 지상의 언어로써 반드시 끝까지 아주 상세하게 증언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고 선문답이나 남기고 떠나는 자들은 비겁하고 이기적인 도피를 선택한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사실 그 믿음은 여전히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내려놓고 떠나보내는 중에서도, 보다시피, 이렇게 글쓰기를 놓지 않고 있는 까닭은, 나의 맹세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열어주셨던 이토록 작은 진리와 지혜마저도 온전히 지상의 언어로써 드러내는데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쩌면, 나는 평생 죽기 전까지 이 시도를 결코 성공해낼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실패자로 남겠다. 그 오명에 굴하지 않고, 평생을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가, 그렇게 실패의 오명을 짊어지고,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진실로 잊혀지는 것은, 오명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아무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것. 아무도 나의 공헌과 성취를 기억하지 않는 것. 오히려,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 역사가 기만당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의 마지막 십자가일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도.
육은 지상에 묶인 채로, 영은 하늘의 시간을 감당한다. 그 시차가, 여전히 내게 버겁다.
그리고 버거운 만큼, 참으로 기쁘다. 이 고통이야말로 내가 진실하다는 유일한 증거이기에.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이 규정한 "틀"에 딱 맞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비록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지만, 그것이 곧 비건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잠시의 공부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비건이라는 것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 곧 자유 의지에서 비롯한 기쁨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닌, 공포에서 비롯한 옳음에 대한 집착과 이를 폭력과 배타성으로 표출하는 행위라는 것을.
그리고 자기의 영혼이 기뻐하는 일에 그저 고요히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공포를 억압하기 위하여 외부의 적을 만들고, 그 적을 향하여 뒤틀린 분노를 쏟아냄으로써, 자기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무의식적인 죄성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모든 비건들이 다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구조" 안에 그러한 어두움이 존재한다고, 다만 내가 그리 느꼈을 뿐이다.
앞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채식주의자라고 하여 육식주의자보다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을 죽이는 것 역시 살생이다. 그리고 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타자의 생명을 죽이고, 그 피와 살을 씹어먹어야 한다는 죄의 계승은 채식주의자라 하여도 달라질 것이 없다. 오히려 "내가 옳다", "내가 의롭다" 하는 교만의 죄를 더욱 깊고 무겁게 짓는다는 점에서, 나는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여긴다.
나는 내게 느껴진 것들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 위하여, 지금 꽤 많은 용기를 내고 있다.
동물을 죽여서 먹는 것보다, 식물을 죽여서 먹는 행위가 특별히 더 "가볍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차피 자기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아닌 다른 목숨을 죽여서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이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점에서, 소위 말하는 "윤리적, 도덕적 올바름" 때문에 채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채식주의자"로 밝히되, "비건"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가리키지는 않으려 한다. 나는 생명 앞에서 그것의 무겁고 가벼움을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이 세상에서 단 한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그분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다. 내 주인께서 그리하지 않으신 일을, 종에 불과한 내가 그리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채식을 도구로써 이용할 뿐이다. 내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교감하며, 그분께 더 가까워지는 것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는 더 기쁘고 싶다. 나는 더 환희롭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몸을 좀 더 맑게 만들고, 몸이 맑아지면 정신이 민감하고 섬세해지고, 따라서 그분의 음성을 더 선명히 듣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채식은 이를 위한 도구일 뿐,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나는 채식이라는 "우상"을 신처럼 숭배하지 않는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막2:27-28, 마12:8) 하나님은 율법보다 "높으시다." 그분은 율법의 주인이시며, 율법을 하사하신 분이시다. 율법보다 낮은 이가 율법을 어김은 가당치 않으나, 율법의 주인이 그의 의지를 위하여 스스로 정한 율법을 어기심은 그분께 가당하며 또한 의로운 일이시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으랴.
내가 증거한다. 나는 원한다면 술과 고기를 질펀하게 먹고 늘어져서 취해 잠들 수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리할 수 있다. 채식과 금주라는 규칙이 나를 다스리지 않으며, 오히려 내가 규칙의 주인이니, 이는 황제의 시종은 왕의 기사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고개를 조아리지 아니함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칭하면서도 교회에 가지 않고 홀로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와도 같다. 내게 채식과 금주는 삶 속에서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함께하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일 뿐이지, 그것을 지킨다고 하여 내가 특별히 더 의로워지는 것도 정결해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내게 구원은, 오직 복음과, 이를 믿는 나의 믿음에 있다.
그 아이가 하필 그때에 내 곁을 떠난 것이 그분께서 내게 주신 크나큰 축복이심을, 나는 확신한다. 언젠가 내게 보내신 예언자를 통하여 내게 말씀하시었으되, "너는 마흔이 되는 해부터 고기를 먹지 아니할 것이며 술을 먹지 말라" 하셨으되, 내가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고 열망하며 충성해왔던 지난 시간들을 그분께서 살펴보시매, 이에 크게 기뻐하시며 그 시기를 무려 십 년이나 앞당겨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이것이 전혀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본향(本鄕)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그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만이 내 안에 가득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거나 견뎌야 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고, 먹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미련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루하루 하나님께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분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삶의 과정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또한 그 길 위에서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 나날이 기뻤다. 2천원도 하지 않는 두부 한 모를 사서 구워 먹어도 만족하였고, 채소를 버무려서 구워낸 것에 보리차를 먹어도 내 영혼이 크나큰 환희 가운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술을 먹지 않아도 전혀 아깝지가 않을 만큼, 그분께서는 성령을 보내사 나를 하늘의 술로 취하게 하셨다.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내 영혼이 이제 나의 육신을 물들이기 시작하였으니, 범죄하던 나의 육신이 이제 십 년이나 일찍, 본래 예정하신 일보다 크게 앞당기어 채식과 금주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되었으니, 지난 수 년간의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성화의 길이 그저 내게 슬픔만 준 것이 아니요, 그분께서 나의 모든 순간들을 지켜보사 내가 흘린 눈물만큼 정확히 비례하여 그 모든 축복과 은혜를 부어주셨음을 내가 진실로 경외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 심정을, 지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내 사랑이 내 곁에 육신으로 함께 있으되 영이 사망 가운데로 가까워지는 것보다, 내 사랑이 찰나와도 같은 이 생에서 육적으로 잠시 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영생하매 나와 영으로 하나되는 것이 더욱 크고 기쁜 일이니, 나는 이것을 장례라고 부르지 아니하며, 오히려 천국의 혼인 잔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본래 맑고 정결한 영들이 거하는 곳이니, 어찌 무겁고 거친 육의 성질을 가진 것들이 들어갈 수 있으랴.
나의 하나님, 나의 존경과 경외를 기쁘게 받으소서. 이 지상에서 감히 나의 경외를 받을 자가 아무도 없으되, 오직 당신만이 내 모든 것들을 독차지하시고 함부로 쓰다 버리시기에 족하시고 의로우시나이다.
한 가지 증거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도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내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모두 다 알고 계시며,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선부터를 견딜 수 없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 내게 슬픔이 있는 만큼 반드시 그에 비례하는 기쁨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지상의 아버지는 엄격함이 과하여 공포와 폭력이 되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때때로 우리들을 엄격함과 단호함으로 인도하시되, 그에 비례하시어 반드시 자비하심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시며, 우리에게 반드시 기쁨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사적인" 모습들을, 그분의 "은밀한 진심"을 만난 자들은, 하나같이 다 놀랄 것이다. 그동안 성전 안에서 엄숙하고 경건하게만 만나왔던, 하늘의 왕, 이 우주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분, 그분께서 자녀 앞에서는 얼마나 낮아지시고 솔직해지시는지를. 그분은 자녀들에게 경배를 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자녀들이 천진난만하게 아버지를 의지하여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그 모습을 보기를 원하신다.
유난히 지치고 힘든 날에, 자식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 아버지께서 통닭 한 마리를 노란 봉투에 담아오셨을 적에, 자녀들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영접하기를 아버지가 원하실 리가 있겠는가. 아이들은 철없이 그저 통닭을 좋아하고 기뻐하였을 뿐이다. 아버지는 애초에 자녀들에게 감사 받을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이와 같이 기뻐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래도 내가 살아야지, 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다시 힘을 내어야지, 그와 같은 마음을 품었으리라. 자녀의 기쁨이 곧 아버지의 기쁨이라.
지상의 아버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야 오죽하시겠는가.
그분께서는 내가 채식과 금주를 결심하고 실천해온 지난 시간과 과정들이 내게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 길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나왔는지를 모두 알고 계신다. 내가 그분께 바친 그 모든 진심들을, 그분은 다 알고 계신다. 그리할진대, 자녀들을 사랑하사 종의 형상으로 오셨고,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신 그분께서, 어찌 그냥 무심코 지나치실 수가 있겠는가. 내가 바친 진심만큼이나, 그분께서는 더 큰 기쁨을 안겨주신다.
다만 그 기쁨이 세속의 것과 같지 않을 뿐이다.
세속에 익숙해진 자들은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불평도 하리라. 그러나 내 말을 듣기를 바란다. 육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권세 있는 것이라 하여도 결국 시간 앞에서 멸망당할 것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육의 죽음을 넘어서 영생하는 귀한 것들이다. 보이는 것에 잠시 만족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하여 기뻐하는 마음을 품을 것을 권한다.
그리할진대, 은밀한 가운데에 함께하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내 영혼을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모든 순간마다 따르는 평강과 환희와 기쁨으로 알게 되리라.
이에 나는 채식과 금주가 희생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 같이 됨으로써, 하찮은 것들을 몇 개 내려놓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축복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을 수 있으니, 그분은 나의 아주 작은 순종으로 인하여 하늘의 모든 보화를 다 안기시는, "불평등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언제든지 다시 이전의 멸망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나는 이 결심을 지켜낼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믿는다. 그분께서 나의 진심을 참으로 귀히 여기시고 기뻐하시기에, 성령을 보내사, 내가 평생토록 이 결심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순간마다 돌보시리라.
마음 놓고, 오직 그분만을 사랑하여라.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내키는 모든 짓들을 다 저질러라. 일단 대책 없이 저지르고 나면, 우리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크게 감동 받으신 그분께서, 나머지 모든 것을 감당하시리라. 본래 아이들이 저지른 짓들은 부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뒤처리는 부모가 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서투른 진심으로 인하여, 부모는 한 평생의 은혜를 다 받는 법이다. 그 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 만큼.
나는 진실로 그분을 믿는다. 그 믿음 하나로, 대책 없이 모든 것을 다 저지른다.
사실, 4월이 되면서 다시 힘든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채식과 금주를 실천하면서 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나의 영이 더욱 맑아진 것이 느껴진다. 나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으며,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향하여 이끌려가고 있다. 이 길을 내가 잘 통과하고 있다.
회복 탄력성이 더 좋아졌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그분께로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이 더욱 능숙해졌다.
그분께서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며, 영원히 나를 사랑하사 품에 안으실 것임을 나는 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그분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순간마다 오직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이 생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향한 내 사랑은 곧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시다.
나는 여전히 앞날을 알지 못한다. 이제, 예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졌다. 어차피 그분의 때가 이르면, 그분께서 예비하신 모든 계획들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을 알기에.
그러나 이 시기를, 이와 같이 통과하는 과정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