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반대편엔 외로움이 있다
홀로 있음(Aloneness)이란 마음의 문을 걸어닫고 혼자서 폐쇄적인 환경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수단은 바로 타로카드인데, 많은 사람들이 명상적 메시지를 위하여 오쇼젠이라든가, 그러한 종류의 특화 덱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우리의 내면을 위한 조언으로도 라이더웨이트의 메이저 카드들이 중대한 의미를 전달한다.
메이저 9번, 은자(Hermit)를 중심으로 한 주변 카드들을 살펴보자. 메이저 7번 전차(Chariot)와 메이저 8번 힘(Strength) 카드는 모두 어떠한 종류의 내면의 힘과 역량을 상징하는데, 전자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온갖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내면의 승리자로서의 자격(즉, 통제력)을 묻는 것이고, 후자는 고결하고 순수한 의지와 신념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심을 묻는다. 중요한 것은, 양자 모두 메이저 6번 연인(Lovers) 카드의 등장 이후에 배치된 카드라는 것이다. 즉, 이는 연인을 통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태초의 관계성을 회복하여 축복을 받은 이후에, 비로소 나(개인, 주관, 자아)로서의 힘과 역량을 갖춰가는 단계가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것이, 단순히 은자 카드가 이른바 독고다이와 같은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홀로 있음, 외로움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닌 이유이다. 더구나, 7-8번 카드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자아를 통제할 수 있는 존재만이, 은자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은자는 변화(Wheel of Fortune)를 예지하는 자이며, 갈구하여 기다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변화란 무엇인가? 우리의 자아의 가장 깊숙한 중심에 있는 존재, 마침내 은자가 그동안 기다려온 계시와 진리의 빛을 마주함에 따라 변화를 거친 이후에 드러나는 정의(Justice) 카드의 보라색 장막 너머의 바로 그 존재, 에고로서의 자아의 경계가 사라진 이후에도 그 감추어진 중심은 더욱 명료하고 절대적인 주관성으로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그리하여 나(I)라는 인칭을 제거하고 거꾸로 뒤집어야만이 비로소 세속의 논리를 뛰어넘어 내면의 신을 마주하는 단계로의 나아감(Hanged Man)을 나타내는 바 아니겠는가.
즉, 은자는 사회성을 결여한 미친 싸이코패스나, 혹은 진리나 계시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 매달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동시에 외로움 역시 이 카드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자아를 갖춘 이후에도 그 깊은 중심을 향한 탐구를 계속하며, 내면의 빛을 마주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수행은, 기본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 자아와 타자, 주관과 객관...... 모두가 하나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연인 카드는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진리>를 얻겠답시고 아무도 없는 산 속에 틀어박혀 고요히 물소리나 듣고 있거나 속세를 완전히 등지는 행위는, 진리의 어느 한 측면만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일 뿐 완전한 중심의 회복과 완성(Sun)을 향한 여정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신은 1인칭(I)이 아니다.
그것이, 은자가 중심의 빛을 마주하여 중대한 변화를 경험한 이후에도,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빛나는 주관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진리에 대한 은유는, 고작해야 점치는 종이조각의 그림 안에 숨어 있음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릇 자신이 추구하거나 달성하고자 하는 바를 가진 존재는, 이를 바깥에서 타자가 이미 이룬 무언가로부터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함이다. 현실에서는 동일한 도구를 바라볼 때에도 수천, 수만 가지의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음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찾고자 했던 바로 그 빛, 그것은 오직 당신의 목소리만을 기다리며 고요히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홀로 있음에 대하여, 오쇼젠 타로는 훌륭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외로움은 타자의 부재이지만, 홀로 있음은 자기 자신의 존재함이다.
타자의 부재를 기릴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외로운 존재가 된다. 심지어 낮 동안 친구나 연인을 만나서 즐거이 놀고 나서도, 저녁이 되면 헤어져야만 한다.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함께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죽음이라는 절대적 종결 앞에서 그 커다란 공백은 마음을 쓰리게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부모, 형제, 자식, 연인, 반려...... 내가 아끼는 것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여지없이 모두 사라지고 변화하고 없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 실재하는 고통이다. 특히나 현대인들에게 있어, 1인 가구가 점점 늘어간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개인적 영역을 타자와 어떤 경우에도 공유하지 않는 비율이 점차 전통적 관계성의 범주를 뛰어넘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 관계를 맺지 않는가? 왜 사랑하는 연인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하지 않는가? 이것은 비판이 아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사랑이 없으면 비록 외로움이 있을지언정 고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답변 앞에서, <메시지를 전파하려는 자>는 어떤 말을 꺼내어야만 하겠는가?
비록 그것은 실재하는 너무나 선명한 고통이지만, 당신이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것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고통은 반드시 경계를 찢고 자기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리고 성장한 만큼, 당신은 두 번 다시 이전의 고통에 의하여 상처 받거나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바로 과거의 구속과 억압과 괴로움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Judgement)을 뜻하는 것이다. 매 순간, 사람은 그 시기에 거쳐야만 하는 통과 의례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고, 준비를 하지 못했고, 남들은 잘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실패자이고 돌연변이일까 두려워하며, 그 시련을 홀로 통과해야만 하는 입장에서의 외로움과 쓸쓸함, 이루말할 수 없는 그 심경들에 대하여, 그 시기를 통과하여 지나간 자들은 어떤 말을 하여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기에, 그저 무사히 지나가기만 한다면 그 뒤엔 평화와 행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언급할 수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소위 어른의 의무이다.
통과의례가 그저 자라나는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시련을 통과했을 때의 성장과 그로 인한 대가가 분명히 존재함을 약속하는 것.
그것이 내적 경험이든 돈이든 무엇이든 간에.
오직 시련을 통과했던 경험만이, 신의 자녀들인 아이들과 빛나는 청춘들에게, 나이 먹은 어른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일 따름이다.
외로움을 피하지 말라.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모두 외로움, 정확히는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홀로 있음에서부터 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면의 신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관계에서부터 이를 찾을 수 있다고 언급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 관계성이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먼저 가장 근원적인 존재를 홀로 마주해야만 그 다음 순서를 진행할 수 있음이다.
외로움은 타자의 부재이다. 따뜻한 품을 내어주고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주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와의 기억의 부재이고,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며 이끌어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의 기억의 부재이며, 깊은 속마음까지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순수한 소울메이트, 친구와 그 친구와의 기억의 부재이며,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함께할 수 있는 연인과 그 연인과의 기억의 부재이다. 그리고 외로움이란, 그 모든 타자들의 부재의 총화이다.
이것은 환상이다. 에고가 설정한 <어머니>, <아버지>, <친구>, <연인>...... 등의 타자들에 대한 환상들의 총합일 따름이다. 에고는 왜 그러한 환상을 지어내는가? 그것은 결핍에서 온다. 자기 자신마저 대상화한 에고는 그것의 결핍을 판정하며, 그 결핍을 채우고자 끊임없이 달콤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꿈을 꾼다. 그러나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바깥으로부터의 그 무엇조차도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수는 없다.
홀로 있음이란, 그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모든 타자에 대한 의존과 망상과 꿈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다. 그것들 중 가장 강력한 환상들이 바로 종교, 신, 절대자, 깨달음, 진리, 영성...... 과 같은 것들이다. 꿈을 위한 꿈이고, 망상을 위한 망상인 것이다. 이 순간, 여기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그저 매 순간 존재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분명히 에고의 관점에서는 확인하거나 마주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내면에서 생겨나고 드러나기 시작한다. 꽃을 바라볼 때, 그것이 꽃이 아니면서, 동시에 더없이 완벽한 꽃이라는 것을 한다. 존재라고 이름붙이기 이전에,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한다. 깨달음이라고, 진리라고 이름붙이기 이전에,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다. 길은 방편일 뿐, 목적지는 결국 <나>임을 이해한 순간, 그 많은 <타자들>...... 에게서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아름다운 것들은 중심에서 환하게 빛나는 빛이며, 그것을 마주하려면 절대적으로 홀로 있어야만 한다.
외로움에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면, 그것은 곧 고요함이 된다.
고요함은 중심으로 머무름이다.
오직 중심에서 머무를 때, 곧 절대적이고 완전한 평화이고 행복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