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것

'그냥' 살아도 괜찮습니다

by 생명의 언어

어스름한 빛무리가 사그라들 무렵, 모닥불이 튀어오르는 소리와 잔잔한 파도가 해변을 쓰다듬는 소리가 들리는 어느 장소에서, 한 소녀가 해변가를 즐거이 뛰어다니고 있다. 그리고는 간혹 멈춰서는 조개껍질이나 반짝이는 돌멩이 따위를 주워 치마폭에 담는다. 아이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 자신이 '즐긴다'는 생각조차도 없이. 그러나 어른들은 시계를 쳐다보며, '이십 분 후에 저녁을 먹고 이따 고속도로 밀리기 전에는 출발해야지' 따위의 생각을 한다.


그 이들은 정확히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는 신의 보호 아래 낙원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하지만 어른은 고되고 힘든 삶이라는 징벌을 감당하느라 애를 쓴다.

양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오직 마음, 마음이다.




<철없는>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향하여 '무지하다'고 생각하며, 그 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사회의 구성원이자 적절한 상식과 개념 등을 갖춘 <인격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놀랍게도 그들은 사회성이라는 얼굴 없는 괴물과도 같은 자기의 모습을 인식하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아이들에게 그 괴물의 가면을 씌우려고 하고 있다. 어른들은 똑똑하고 현명하며, 아이들은 어리석고 악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다못해 그 <생각>이라는 것, <지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이 벌여놓은 결과가, 세상을 이토록이나 악하고 괴로운 곳으로, 모순과 결핍과 희생과 불행이 넘쳐나는 곳으로 만들어놓았단 말인가. 그러면서 인식과 관념이라는 감옥과 족쇄와 쇠사슬을 아무런 반성도 없이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려고 한단 말인가.


어른들은 성년이 되고 나이를 먹으면서, 태어날 적에 천사로부터 선물 받았던 귀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십대 중후반 나이 즈음, 아니면 늦어도 이십대 초반 즈음에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사회성이라는 괴물의 노예가 되면서 자신이 처음에 누구였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삶>이라는 괴로운 짐덩어리를 스스로 만들어 짊어지면서 끊임없이 불평, 투정하면서도, 결코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마음을 여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세상이 바뀌어야지!

신께서는 그런 당신의 불평과 모순까지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언젠가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 꿈꾸는 시간까지도 존중해줄 것이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은, 점점 순수함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법을 잊고,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이 낡고 병들고 구속받는다는 것이다.

주인의 입장에서, 왕의 입장에서, 전락하여 노예와 하인과 시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낙원에서 추방하여 걷어차놓고,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갈구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어리석어지고, 무지해지며, 아집과 아만의 지독한 쓰레기만 키울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어른들은 인정하여야 한다.

우리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음을, 그 소중한 것을 다행히 아이들은 아직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들이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하며, 신 앞에 엎드려 그 무지를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신의 소중한 자녀들인 아이들을 스승으로 섬기며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순수해져라. 머릿속에 한가득 집어넣었던 인식과 관념과 지식과 생각과 앎과 상식과 수많은 사물들의 이름들과 망상과 꿈과 실재하지 않는 헛된 것들과 고집과 아만과 아성과 괴로움까지도. 머리를 써서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똑똑한 척, 그것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안다는 듯, 그렇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가 가장 어리석은 바보라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사실을.


한 번 바보가 되고 나면, 지금껏 당연했던 것들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기적이 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꽃피어날 것이다.


순수함을 회복하면, 마음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일체가 하나이며, 하나가 곧 일체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당신이 만약 조그마한 것이나마 존재를 체험하게 되었다면, 이제 책들은 갖다버려도 된다. 수천 권의 마음공부와 깨달음과 영성에 관한 책들은 이제 무의미하다. 오직 의미 있는 것은 체험, 그 순수함, 모든 것들과 하나되어 즐거이 노니는 것, 그뿐이다. 책은, 그 안에 담긴 지식은, <길>일 뿐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어느 방향을 바라보아야 하고, 또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담은 안내서이다.


그토록 방황하던 탕자는 결국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그가 찾던 것은 결코 바깥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삶>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았다. <나>는,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모양이 똑같은 다수의 부품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신의 하나뿐인 자녀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이 그토록 귀한 자녀에게 <삶>이라는 무의미한 괴로움을 얹혔겠는가? 그것은 스스로 불러들인 착각이요, 망상이고 아성이 만들어낸 꿈일 뿐이다.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그 어떤 제한도 억압도 한계도 징벌도 의무도 책임도 지우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 그저 매 순간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처럼, 순수한 존재처럼, 매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하든 신은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포용한다. 그것이 자유이고, 행복이다.


바보처럼 살아도 된다는 것. 아이처럼 아무렇게나, 그 무엇을 해도 절대적으로 사랑받는다는 것.

아니, 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빛을 환하게 밝힌다는 것.


순수함의 관점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바라보라. 모든 것이 기적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기 이전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너무나 아름답기에 그 자체로 기적이다. 꽃, 나무, 풀잎, 흙, 돌멩이, 이슬, 낙엽, 바람, 햇빛, 하늘, 구름, 벌레......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이 이토록 아름답고 완벽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오늘 아침 눈을 뜨고, 햇빛의 온기를 느끼며, 세수할 때 물의 차가운 감촉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나>가 여기 이 순간,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가슴으로 마주할 때, 우리의 모든 일상은 곧 축복이 된다. 우리의 삶은 곧 즐거운 유희요, 축제가 된다.


내가 알던 모든 지식을 버려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바보가 되어라.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나는 단 1%의 결핍도 없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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