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인 존재에게는 기준이 없다
에고ego. 자아, 나.
마음공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단어이다. 아니, 정정한다.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들었지만 오직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사람들만이 이 단어에 진심으로 집착한다. 집착은 애정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아끼고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즉, 이 또한 사랑이다.
하지만 뭐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하나를 오해한다. 마음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반복하여 듣게 되는 메시지들이 있는데, <무아無我>, <'나'를 버려라>, <'나' 없이 행위하라>...... 따위의 말들이다. 그 언어들을 평범한 사람이 듣게 된다면,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아, 지금 이 모습인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구나.
이 '나'는 가짜이고 거짓이구나.
지금의 내 존재도, 삶도, 버리고 버려져야만 하는구나.
일반적으로, 요즈음은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대단히 긍정적인 뉘앙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직 나는 나를 사랑해줘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대개의 경우 왜곡되고 변질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 내지는 물질(욕망)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쾌락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핍 때문이다. 모자라다고 느끼기 때문에 채워넣어야 한다는 갈증이 생긴다. 애당초 모자람 자체가 없으면, 채울 것도 비울 것도 없다.
자아에 대한 집착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타자로부터의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때로 삶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그것들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 머리로는 - 이해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버지의 인정, 어머니의 사랑,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 우정, 친구들, 소울메이트, 진정한 사랑, 그러한 것들에 매달리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행복이 개념화되고 유형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내면의 깊은 중심의 여성적인 속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는 서술할 수 있겠지만, 애당초 그러한 어떤 결핍과 열등감, 괴로움, 갈망들을 눈앞에서 실제로 겪고 있을 당사자에겐 그만큼 공허한 말도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진리를 담고 있는 말들이라고 할지라도, 삶을 살아가는 절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진의가 왜곡되어서 들려서는 안 된다. 메시지를 발설하는 자, 그러니까 메신저의 의무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메신저가 곧 메시지 그 자체라고 착각해서는, 메신저의 고유한 사상이나 가치들을 메시지 자체에 끼워넣으려고 드는 행위들에 대해서는, 그 자체가 대단히 좋지 않은 모습이자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에고>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에고>를 교묘하게 감추고 왜곡시켜 그것을 '참나' 내지는 '신성', '진리'...... 따위의 이름으로 변질시키려 드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인 이상, 모든 사람들은 완전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오직 완전하다고 불릴 수 있는 존재는 하늘, 신밖에 없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며, 결핍과 그로부터의 열등감, 외로움, 고통, 허무함, 그러한 것들은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것들이다. 심지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조차도, 실재하는 삶의 흐름 속에서 완전히 떨어진 채 마치 구름 위에 앉아 한가하게 바둑이나 두는 그러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음이다. 깨달은 이후에도 직장에는 출근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아야 하며, 주차 문제를 놓고 이웃과 말싸움도 간혹 벌여야 하고, 갑자기 날아든 벌금 고지서에 치미는 짜증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메신저에 의하여 왜곡,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감안하고서라도 그 메시지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이른바 진리가 담겨 있으며, 그 유명하고 오래된 격언대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어떤 존재가 깨달음에 가까워질수록, 이른바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할수록, 그는 점점 풀려나고 자유로워지며, 따라서 순수해지기 마련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는 고통, 괴로움, 그것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 또한 약속한다는 것이다.
<나>를 버리라는 말은, <나>를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로부터의 간섭과 영향을 모두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라는 뜻이다.
한 번 이 말의 의미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어떤 실체화된 환상 속에 갇혀 살아간다. 우리의 인식과 관념은,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대상화하며, 따라서 그것 역시도 분별하고 나눈다. 근본적으로 '지식'이란, 하나일 수 없는 것이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두움, 좋음과 나쁨, 행복과 불행, 결핍과 완전함, 하나와 여럿, 자아와 타자...... 만약 대상화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조차도 마찬가지이다. 그때의 <나>는 둘로 나뉘어진 채 왜곡되고 오염된 괴물일 뿐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괴물인지조차도 모른 채로 살아가는 바로 그러한 모습.
평생 동안 괴물은 저 어딘가에 있는 바깥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되돌아보니까 다름 아닌 나 자신이 괴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포스럽고 두렵고 기피하고만 싶었던 그 괴물은, 불현듯 너무나 불쌍하고, 못나 보이고, 어딘가 뒤틀리고 결핍되어 있으며, 외면하고만 싶고, 못생기고, 혐오스러웠으며, 결국은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외면한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한다.
걸핏하면 성질만 내는 이건 '나'가 아니야. 평화롭고 친절한 저것이 '나'야.
슬프고 우울하고 외로운 이건 '나'가 아니야. 혼자서도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사는 멋진 솔로가 '나'야.
어리석고 멍청하고 못 배운 이건 '나'가 아니야. 똑똑하고 학문적 소양이 깊은 저것이 '나'야.
......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의 실체이다. 우리는 자아를 대상화하며, 대상화된 자아를 둘로 나누고, 악은 혐오하고 제거하려고 들며, 선은 추종하고 갈망한다. 그러나 악은 제거되지 않으며, 선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는 양자 모두에게서 충족을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방황한다. 이것은 인간이 너무나 오래 전부터, 심지어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져왔던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꿈, 환상, 망상이다.
괴로움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선과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분별과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분별과 인식은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바로 기준이다. 기준이란 무엇인가?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고자 하는 지향성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여기', '이것'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드는 모든 행위의 총합이다. 이로부터 모든 괴로움이 발생한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순간의 <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요한 숲속의 어느 절간에 들러 고승으로부터 <무아>를 주제로 한 강연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경건해지는 마음으로 산을 내려와봤자 이놈의 집구석을 보면 성질이 나고 화가 나기 마련이다. <나>가 없다는 말은 마침내 왜곡된다. "여기 이렇게 부족하고 못나고 열등한 내 모습은 내가 아니야. 그러므로 이건 없어져야 해." 아아, 색안경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에게 색안경을 벗으라고 말해봤자 어떻게 이를 이해한단 말인가.
그것은 둘이 아니란 뜻이다. 대상화된 자아의 악의 측면이 없다, 내지는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회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바로 그 <자신>의 모습까지도, <하나>라는 뜻이다. 애초에 대상화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밖에 없으며, 따라서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들도 딸도 없고, 자식도 형제도 자매도 없고, 친구도 없고, 직장 상사나 동료나 부하들도 없고, 선배도 후배도 없으며, 나아가 심지어는 신도 없고, 하늘도 없고, 우주도 없고, 세계도 인간도 없고, 오직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로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 사고, 체험, 경험, 현상들까지도 전부 <나>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선도 악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열등하고 부족한 나는 '악'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거하려 들거나, 스스로 괴롭히거나, 억압하거나, 구속하거나, '개선'하려 들거나, '변화'할 필요가 없다. 하나인 것은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 태양은 단 하나뿐이다. 태양은 선인가, 악인가? 결핍되었는가, 충족된 상태인가? 하나인 것은 판단할 수 없다. 자기 자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식에 목말라하고, 남들에 비해 어리석어 보이며, 아는 것에 집착하고, 모르는 것에 화를 내는 이 받아들이기 싫은 나조차도, 오직 <하나>인 것이기에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일 뿐, 이 세계의 그 누구도 나를 심판하거나 단죄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외로움이라기보다, 자유로움이다.
더 이상 타자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억압하거나 구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의 신호이다.
내가 이 순간 무슨 해괴망측한 모습을 하든, 그 누구도 나를 심판할 수 없다는 유일성의 회복이다.
자아를 버림으로써, <나>를 해체함으로써,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없는 내 마음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이 전부 <나>이며, 그것은 선도 악도 없기에 모든 것들이 다 좋고, 사랑스럽고, 행복하며, 기쁨이고, 자유인 것이다. 오늘 밤, 갑자기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이 일어 밤중에 드라이브를 나가서는 강변에서 가만히 음악을 듣고 있는 그 공허함도 행복이고 사랑이다. 별 것 아닌 일로 연인에게 화를 내고는 자책하고 힘들어하는 그 괴로운 감정도 자유이며 유희이다. 마치 게임을 할 때 장애물 하나도 없으면 아무 재미가 없듯이.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거나 객관화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절대적인 주관>으로서 존재할 때, 모든 것들이 하나이기에 타자와 사회의 그 어떤 기준에도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대상화할 필요가 없기에, 자신을 둘로 나눌 필요도 없으며, 자기 자신을 (타자의 기준에 의해) 검열하거나, 억압하거나,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뜻이며, 나의 모든 행위와 모든 감정과 모든 느낌과 모든 체험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살아 있음과 모든 삶이 다 좋다는 뜻이며, 그리하여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삶 자체가 유희이며, 심각한 것은 지구상에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즐거운 축제일 뿐임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놓고>, <흘려보낸> 이후의 바보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다.
나의 열등함과 괴로움과 고통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하려 하지 말고, 괴로움 자체와 하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하나이며, 하나인 동시에 전체임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하늘 아래 땅 아래, <나>밖에 없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