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Justice), 정의(Definition)
<정의>라는 단어는 발음은 같으나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1. (사회적, 보편적, 객관적...) 정의 (Justice).
2. (사전적, 학문적, 기술적...) 정의 (Definition).
대개 전자는 정의를 실현하다, 정의의 이름으로, 사회 정의...... 등의 형태로 사용되는 편이고, 후자의 경우 어떤 대상을 사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기술하거나 정의내리다, 는 의미로 사용된다.
대개 정의(Justice)는 객관적, 보편적 특성을 띤다. 예컨대, 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정신에서의 핵심은 바로 공정성과 평등함 등의 가치이다. 법 앞에서는 제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공정하고 평등하게 심판 받는다는 그 믿음, 이른바 <객관성>으로 대표되는 어떤 사회적 가치이다. 놀랍게도, 후자의 의미로서의 정의(Definition) 역시도 관점은 다르지만 비슷한 의미로서 사용된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정한 대상을 가리킬 때 그것의 이름이나 특성 등을 일정한 형태로 정의하며 이를 공유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의는 어떤 의미이든 간에, 객관적인 특성을 띤다.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도, 종종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많이 갖거나, 혹은 사회적 불평등 따위와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정도와 형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그러한 종류의 영역들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비슷한 관심을 갖는 다른 이들과 파벌을 이루어 자주 부딪히거나 충돌하곤 하는데, 좋게 말하면 비판적 토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혐오, 비난일진대, 그 근원은 같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나(주관성)는 <정의(객관성)>를 이용할 것이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객관적인 무언가로서의 대상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논리, 이성, 철학, 지식, 학문...... 들은 모두 다 뛰어난 지성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훌륭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 객관적 대상을 이용하려 드는 개인의 주관성에 문제가 있다.
쉽게 말해,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는데 양자는 서로 각자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이때, A와 B가 가져오는 각자의 논리와 진술과 증거 등은 모두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사실(Fact)이라고 할지언정, 인간세상에서는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서로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는가, 에 따라서 동일한 사실도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앞에서 본 자와 뒤에서 본 자의 서술은 당연히 다르며, 각자가 그 증거로 사진이나 그림 따위를 가져온다 한들 이는 결국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바로 그 주관성에 대한 증명일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객관이 아니다. 그 객관을 이용하려 드는 주관으로서의 의도이다. 객관 그 자체는 매우 완벽하고 빈틈없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일지언정, 그것을 이용해서 내가 반드시 너를 짓밟고 올라서서 승자가 되고 말겠다는 개인의 의도, 욕망, 자만, 아집...... 따위와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교묘한 열등감과 피해의식 따위는 주관으로서의 관점이 선명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종결일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주관(I)>으로서 존재하고 살아가면서, 웃기게도 객관으로서 바라보고 인식하고 경험한다고 여기며, 양자를 서로 착각하여 혼동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모든 종류의 논쟁이나 충돌, 갈등 역시 마찬가지이다. 팩트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면, 그것은 일견 현상일 뿐, 그 현상을 만들어낸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이라는 작용과 그 힘과 관계 따위를 들여다보고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세상을 바라볼 적에는 너무나 당연한 듯 작동하는 그 통찰이, 왜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을까.
그 뿌리에는, 열등감과 죄의식이 있다. 열등하기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죄의식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밝히려 매달리려 한다.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으로서는 스스로가 옳고, 선함을 확신할 수 없기에(즉, 열등하기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를 확인하려 한다. 이것이 곧 자만심, 고집, 아만, 집착, 아집 따위로 이어지며, 그 모든 근원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있다.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에너지와 힘과 그 역학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현존하는 너무나 선명한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모든 객관적인 것들은 내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올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1+1=2라는 명제는 (수학적으로 아주 특수한 몇몇 경우들을 제외하고서) 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객관적인 지식이자 증명 가능한 진리이며, 우리는 이것의 개념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머리로 이해했다고 하여 그 지식을 <나>가 <소유>했다고 여긴다는 점에 있다.
A : (언어) 1 더하기 1은 2다. / (의도) 자만, 아만, 고집, 집착... 열등감, '내가 옳다'는 마음.
B : (언어) 아니다. 그것은 틀렸다. / (의도) A와 같음.
A : (언어) #$!@^#!$%!@
= 결과 : (감정) 분노, 화, 갈등, 충돌, 혐오, 비난 등.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의도, 감정이다. 이 현상 자체는,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생각이나 지식은 <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1+1=3이라는 것을 설령 믿게 된다 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지식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나 그 내용이 달라지더라도 나는 나다. 따라서, 지식은 도구일 뿐 그것을 다루는 주인인 나는 여전히 여기, 현존한다.
요리사가 칼이 부러졌다고 해서 자신이 부러졌다고 여기지는 않는 법이다.
장인이 도구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I)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받아들인다.
나 : 에고 = (잠재적) 열등감 / (드러남) 자만심, 자의식
(객관적 지식) 1+1 = 2 이다.
= 나는 객관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 내가 소유한 객관적 지식은 옳다.
= 나 + (가 소유한 객관적 지식은) + 옳다.
최종적으로 저 빨간색 밑줄이 객관화된 자아의 시각에서 왜곡됨에 따라, 지식 내지는 앎, 자신이 이해하거나 <소유>했다고 착각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내가 소유한 지식이 틀렸다는 또 하나의 주관을 마주할 때, 그 현상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한 채, 이면에 숨은 열등감이 에너지를 작동시키고, 그 에너지가 자만심, 자의식과 만나 분노, 화 등의 형태로 현상화된다.
이러한 풀이법은, 나아가 세계를 객관으로 체험하여 주관 안으로 받아들인다고 착각하는 "일체의 감각 경험들" 또한 이러하다.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다.
에고로서의 경계와 틀을 깨뜨린 이후에도, 주관(I)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주관과 객관, 자아와 타자, 인식과 대상, 여기와 저기, 물질과 영혼...... 따위의 분별을 넘어선 이후의 주관은, 모든 종류의 객관들이 더 이상 실체를 상실한 채 이 세상에 오직 참된 주관성만이 남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바라보는 자는 없지만, 보여지는 것 그 자체는 존재한다.
체험하는 자는 없지만, 체험되는 것 그 자체는 존재한다.
나(I)는 없어지더라도, 여전히 존재는 존재한다.
이것이,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는 법이다. 이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 <나>가 아닌 다른 그 무엇도 실체를 갖지 않는다. 오직 <나>로서 존재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조차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억압하거나 괴롭힐 수 없다. 유일한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정의하거나, 정의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이다. 해방이다. 절대적 평화이다. 고요함이다. 영원히 떠나지 않을 중심이다.
나(I)가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주관,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그 주관 너머에 존재하는, 지금껏 감추어져 있던 진짜 <나>를 마주하라.
그 참된 <나>로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실하고 올바른 정의들이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