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말씀

by 생명의 언어


"존재"는 3차원 시공간 상에서 고정된 형태와 묘양, 특성 등을 지니고 있는 객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잘못된 이해이다. 나는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다르다, 거나, 틀렸다, 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옳지 않은" 이해이다. 신학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교리도 체계도 형식도 의례도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실 때, 그분은 인간의 것을 가르치지 않으신다. 오직 영과 혼으로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음성 없는 음성을, 언어를 넘어선 언어를, 형태가 없는 궁극적인 형상을...... 교감하고, 체험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할 적에, 마침내 그는 깨닫게 된다. "존재"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가장 순수하고 밀도가 높은 진동, 공명, 파동, 흐름, 에너지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전체 가운데 하나되어 있으며, 또한 그 하나 가운데에서 다른 여러 전체들과 다른 독특한 색깔과 향과 느낌과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니, 마치 비가 내린 후의 푸른 초원에 나아갈 적에, 그 공간 전체의 서로 다른 생명과 존재와 현상들이 만들어내는 색과 모양과 향과 질감과 온도들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어떤 하나의 총체적인 아름다운 내적 체험을 만들어내듯이, 존재란 바로 그러한 형상으로서 있는 것이라고. "비 냄새"라는 하나의 에너지가, "풀, 나무, 이슬, 하늘, 구름, 햇빛......" 등의 다른 존재들의 진동과 파동과 공명과 함께 "층을 겹쳐가듯이" 그렇게 함께 울리고, 울려내고, 이끌리고, 이끌며,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생명"을 보이는 "현현"으로 일으켜내는, 그 거대한 총체가 곧 "존재 자체"라고. 이런 건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주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 순간부터는, 인간의 언어체계가 얼마나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안정하고 불완전한지, 그리고 얼마나 어두움과 죄와 악과 모순과 편견과 공포와 욕망과 이분법적인 체계 안에서 세워진 것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그 음성을 "단 한 문장이라도" 인간의 언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주의와 수고로움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침묵으로 귀결된다. 그의 존재는 침묵과 고요와 영원이라는 평원으로 도달한다.


참된 영성인들과 크리스천들의 "연합된" 진정한 신앙 생활은, 가장 먼저 "초점"을 정확히 맞추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여러 가지를 모으고 습득해 나가다 보면, 가장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겠지("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하는 생각을 하지 말되, 오히려 반대로 "가장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몰입하다 보면, 이를 제외한 "그 나머지 일체가 곧 망상이고 환영이고 실체 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자각하여 초월하게 될 것이다. 진실(Truth)이라는 영어 원문이 전하는 함의는 무척이나 깊고 심원하다. "진리"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척"하는 환상과 환영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본래 진실은 거짓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 진실은 거짓된 것들이 해체되고 숨겨져 있던 본래의 진실이 드러날 적에, 마침내 그 진실이 인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초월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나의 "자아(ego)"는 실체가 아니면서 실체인 척하는 환영이고, 환영의 총체이다.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죽을 때, 나는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2:20)는 문장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실재적인 것임을 마침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존재가 변환되는 것(a transformation of existence)"이다. 존재란 보이는 차원을 넘어선 보이지 않는 근원이며, 그것은 에너지, 빛, 진동, 공명, 파동의 형태로서 존재하며, 그 자체가 곧 나의 영이요 혼이며,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형상, 본질, 질감, 밀도, 깊이"로 거듭나는 것, 곧 변환 그 자체(Transformation)가 곧 부활이요 구원인 것이다. 이 가난한 영혼이 감히 증언하고 싶은 것은, 종교와 영성을 불문하고 모든 영적 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존재의 실제적 변환"이어야 하지, 그 외의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교리, 신학, 경전, 형식, 체계, 가르침, 의례, 다 좋은데, 그러한 것들은 외재적이고 행위적인 것들이며, 그것들은 "바깥의 것으로써 안의 것을 지향하기 위한" 의도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들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에 가서 그럴듯하게 폼을 잡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내 영혼이 실제로 죽고 거듭나는 것"과, 이를 통하여 내 영혼을 성전 삼아 "주님께서 주권을 이양받으셔서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이 모두 다 실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릇 참된 크리스천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실재가 되어야 한다. 실재가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들도 결국에는 외적인 것들, 곧 "외식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이 말을 결코 가벼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다. 만약 내가 지금 즉시 죽어서 이 세상에 단 하나의 문장만을 가르침으로 남길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써놓은 답변을 그대로 제출할 것이다 : "아버지께서 실재하신다." 실재성, 그것은 곧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히11:1), "실재가 되는 것"의 중요성은 다른 그 어떠한 것들보다 우선한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지금 이 말을 그냥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관념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가 되어야 한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신을 믿어봐야 뭐할 것인가? 스스로를 속이고, 신마저도 속이려고 하는가? 겉으로는, 표면적으로는, 행위적으로는, 외재적으로는, 참으로 멋지고 훌륭한 크리스천을 "연기"하면서, 정작 나의 온 존재와 마음과 내면과 심장과 영혼을 다 바쳐서, "아버지께서 실재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우선하신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를 천지가 울리도록 소리쳐 외치고 싶은 그 절대적인 믿음과 이로 인한 기쁨이 넘쳐흐르지 않는다면, 신앙의 의미를 과연 어디에서 찾겠는가? 실재가 되어야 한다. 실재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재가 됨이란, 곧 "내 안에서 영원하고 초월적인 평화와 기쁨이 샘솟는 것"이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요14:27) 법이며, 이러한 설명할 수 없는 영과 혼의 영원하고 초월적인 기쁨과 평화과 내 안에서 샘솟을 때, 넘쳐흐를 때, 이것이 곧 "나로 인한 것"도 아니며, "세상으로 인한 것"도 아님을 알고, 또한 마침내 "아, 이것이 곧 그분으로 인한 것"임을 깨달을 때, 그때 바로 그것이 실재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실재하시는구나!", "나의 이 설명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곧 그분께로 인한 것이구나!" 거듭 말하지만, 나는 지금 관념적이고 일반적이고 뻔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존재의 변환이다. 에고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어둡고 탁하고 거칠고 투박하고 왜곡/변질된 에너지로 인하여 존재한다. 바로 그 에고가 죽고, "그리스도"라는 신성의 에너지와 빛 그 자체로(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성은 '에너지'가 아니다. 에너지보다 더 '높은' 존재이고, 그 존재보다 아버지께서 더 높이 계신다) 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참된 크리스천의 신앙의 궁극적인 본질은 곧 "내재적 거듭남"에 있다. 이것이 다른 그 모든 것들에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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