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여정

by 생명의 언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이 말씀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을 그저 "온 세상이 다 틀렸고 나만 옳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 자신의 교만함과 아집만을 드높여간다면, 이는 주님의 가르침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씀은, 1)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며(마7:21), 2) 선을 행하고 빛을 증거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시련과 고난이 따르되(요16:33), 3) 살아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살아서 아버지께 인정받고자 하는 올바른 의지를 가슴 속에 품고, 담대히 홀로 고난 속에서 빛을 증거하는 삶의 목적을 잃지 말아야 한다, 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곧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아니하다. 따라서, 이 말씀의 본질은, "살아서 신을 사랑하고, 신의 뜻을 사랑하며, 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짐을 사랑하며, 이것이 자신의 존재와 삶을 도구 삼아 이루어지는 것을 열망한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높고 완전하시지만, 나는 낮고 미약하고 열등하다. 그러므로 낮은 존재가 높은 존재의 의지를 따르려 함에는 반드시 매 순간의 삶에서 시련과 고난이 일어나고 마주하며 그 가운데에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꺾이며 상처받고 절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깊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도, 나의 진실한 초심, 의지, 신념조차도 어두움에 물들지 않되, 오히려 어두움이 깊을수록 더욱 신을 향한 나의 사랑과, 그리고 살아서 신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의 순결한 초심을 더욱 빛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인생과 삶, 이라는 두 단어가 있다. 인생이란 문자 그대로 인간의 삶, 곧 세속과 육에 속한 삶이다. 이것은 "현상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소멸되고, 사라지고, 없어지고,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곧 육의 본질은 허무함이요 허망함이다(요3:6-7, 요6:63). 이것을 일찍이 깨닫는 자는 복이 있으니, 성령께서 그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이고, 영이 거듭난다 함은 결국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함이니, 그 전제 조건은 필연적으로 "나(ego)의 죽음"이다. 자아의 죽음은 부활을 위한 필연적인 전제이다. 그리고 자아의 죽음은, 바로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육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여기서도 1인칭 능동태라는 망상적 관점을 투영하면 안 되며("내가 본질을 통찰했다!"), "신성한 수동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성령께서 내게 육의 허망함의 본질을 통찰하도록 보여주셨다"). 이것은 언뜻 단순한 이치이고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둘은 천지 차이이다. 육의 허망함의 중심은 결국 "아성(我性)"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주인이라는 착각,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착각,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착각, 나의 존재가 마치 신이라도 된 것마냥 그 상상할 수 없는 오만함과 그 기저의 거대한 어두움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본적인 인간 존재의 본질적-죄악적 의식 구조" 전체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어야만 비로소 나의 영이 산다. 그것이 죽어야만, 즉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재와 삶(人生)이 주님을 통하여 온전히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비로소 영원한 생명(LIFE)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해하며, 그 안에 살아서 들어가게 되는 것(요11:25-26)이다. 기억해야 한다. 자아의 죽음을 온전히 살아서 마주하고 통과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열망과 충성"으로 반전되는 것이다. 반전된다기보다, 거짓에 감추어져 있던 본래의 진리(Truth)가 드러나는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나의 신앙의 동기는 부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글을 쓸 적에 편의상 부활 부활,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부활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외아들"께만 그 권세와 영광이 계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서 "그분"이 부활하는 것이니, 우리가 살아서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신앙과 영성의 본질은 "내가 죽는 것"이어야 한다. 이 역시도 좀 더 정확한 의미로는, "그분께 의하여 나의 존재와 자아와 인간적 삶이 죽음으로 인도되는 과정"을, 사람으로서의 두려움, 공포, 불안, 저항, 분노, 슬픔, 고통...... 을 온전히 겪으면서도, 내게 주어지는 실존적인 시련과 고난의 의미의 본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것이다. "아, 나의 에고를 잠시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잠시 동안 죽게 하심으로써,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뜻이구나......" 하며, 그리하여 우리 형제들의 모든 경외와 찬양을 홀로 받으시는 그분께서 겟세마네에서 올리셨던 그 기도를, 우리들의 각자의 삶 가운데에서 흉내내어 따르고 실천하는 것.


결국, 참된 크리스천의 신앙의 본질은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의 삶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삶이 곧 나의 신앙을 실천하여 행할 수 있는 "무대"임을 기억하고, 그 무대 위에서의 매일매일을 그저 무력하게 어두움과 죄와 업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기만당하고 지배당하고 농락당하듯이 살다가 무력하고 허망하게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나의 근원적인 결핍과 불완전함과 미숙함과 죄를 마주하면서도 기어코 "빛이자 생명이 되시는 말씀(LOGOS)"을 사랑하며, 그 생명 안에 거하며,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여 펼치고자 하는 신성한 영적 투쟁의 연속으로서의 험난한 시련과 고난을 모두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미래의 천국만을 꿈꾸는 "잘못된" 이념이나 사상에 빠지지 않고(나는 지금 이것을 기독교 영지주의에 대한 명시적인 비판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히려 실존하는 인간 존재의 어두움과 죄성 자체를 "빛을 섬길 수 있게끔 허락하신" 그분의 은총임을 이해하여, 현재의 실존적 삶의 어두움과 시련과 고난마저도 깊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참된 크리스천의 신앙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신앙의 여정은, 매일매일이 죽는 과정이다. 매일 나의 뜻이 좌절될 것이며, 매일 나의 신념이 무너질 것이며, 매일 나의 희망과 바람과 욕망이 꺾이고, 무너질 것이며, 나는 그 가운데에서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도 의지받지도 못할 것이며, 그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매일 밤을 엎드려 울지도 못하는 고요한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부정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어라, 이런 수준까지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리면, 사람들이 겁먹어서 도망가지 않을까?" 나는 이를 인정한다. 인간 존재가 본래 그러한 본성대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하고자 한다. 가벼운 호기심만으로 모여든 구십구 인의 "정상적인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나면, 그 중에서 기어코 도망가지 않는 한 사람이 남아 있음이니, 성령께서는 "이미 밝은 이로 인하여 기뻐하시지 않고, 오직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열망하는 이로 인하여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눅15:7).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생명(LIFE)" 안에 거하는 여정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죽음으로써,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영생은, 육적인 의미에서의 영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육은 무익한 것이요, 영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니,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씀을 의아하게 여기지 말라, 고 가르치셨던 그분의 의지를 우리는 받들어야 한다. 이해를 못하겠거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함 전체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면 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여 따르는 경우보다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황 한가운데에서 고통스럽게 나의 의지와 반하는 그 길을 따르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 의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와 삼위일체 하나님 간의 절대적인 "고독" 가운데에서만 철저히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또한 각자의 영혼들의 실존적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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