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17)
나는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은 대개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과 인간이 소통할 때는, 당연히 "인간적인" 방식을 버려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소통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더 나아가서, 신성과 교감하고 신과 하나가 되는 모든 과정들에서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과 이끄심과 가르치심과 시험하심과 구원하심의 모든 역사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LOGOS)"으로만 이루어진다. 그 신성한 말씀, 정확히는 신성 그 자체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의 이성이나 사고나 논리나 마음이 아니요, 오직 사람의 안에 깊고 은밀한 곳에 거하는 그의 순결한 영(Spirit)이다. 그 영이 감추어져 있다, 에고(ego)에 의하여, 정확히는, 죄와 악에 의하여. 그러므로 거짓에 감추어져 있는 사람의 영이 죽고 다시 태어날 적에,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언어나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글을 읽고 말을 하고 문장을 쓰는 것과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것을 넘어선 것이고, 듣는 것을 넘어선 것이며, "맞다, 아니다", "있다, 없다" 등을 애초에 넘어서 있는 무언가이다. "오직 영으로만 영접할 수 있다"고만, 겨우 표현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으므로, 주님께서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적에는 오직 영과 진리로만 기도하라"(요4:23-24)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절묘하고도 경이로운 가르침이다. 이 이상은 없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자체로의 진리이다. 단언컨대, 사람의 언어, 말, 지식, 논리, 이성, 자아, 마음 따위로, 그러니까 "사람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공부하고 성경을 읽고 문장을 이해하고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것과, 오직 순결한 영으로, 다시 말해 그 존재 자체로, 삶 자체로,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문자 그대로, "천지차이"이다. 애초에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전자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크리스천들은 언어와 말과 형식으로써 입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들이 영과 진리로만 하나님을 영접하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건 걸음마도 떼지 못한 유치원생에게 걷거나 달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걸음이 익숙해지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유아기적인" 방식에 안주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것을 너무나도 강조하고 싶다. 참된 크리스천은, "언어 너머의 언어"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이해해야 한다. 터득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이 기도여야 한다. 내 삶 자체가 곧 하나님께 대한 한 편의 아름다운 찬송이고 예배의 서사여야 한다. 나의 의식과 내면과 정신의 전체가 곧 묵상이어야 한다. 그리 되어졌을 때, "말씀"을 영접하고 이해하고 체험하는 수준이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내가 저 말씀을 인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주님의 저 말씀을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교리를 중요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를 통한 심판과 구원에 대한 교리를 이해하는, 다시 말해 지식적이고 관념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인간"은, 외적인 것, 형식적인 것, 관념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도록, 그리 정신과 의식의 구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안에서 빛나는 영만을 보신다(삼상16:7). 외적인 것들은 사람에게나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영으로 저 말씀을 영접하면, 무엇이 열리는지 아는가? 굵은 표시를 한 부분,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저 말이, 나의 존재를 온통 울리는 것이다. 신의 사랑이라는 것이 더 이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도처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체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것이며, 그 살아 있는 "신의 숨결"이, 온 세상을 비추어 밝히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목격하는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도 경이로운 신성이, 놀라울 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들에 함께하는 것을 내가 마침내 목격하는 것이다. 그거 아는가? 풀잎 하나에 담긴 신성이, 인류가 이성으로 사유하여 높이 세웠던 철학체계 전체를 압도한다. 나는 이것을 지금 함부로 대충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풀잎"이라는 건 너무 과도한 비유다. "원자 하나"마다 담긴 신성의 충만함이, 온 세계 전체를 압도하고도 능히 남음이 있다. 이것은 명백하고도 선명하게 체험 가능한 진리이다. 그것은 더 이상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더 이상 지식으로는 가르칠 수 없다. 사람의 것, 사람의 방식으로는 가리킬 수도 보여줄 수도 인도할 수도 없다. 영으로, 침묵으로, 고요함으로, 현존으로, 충만함으로...... 온 세상 천지 만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나의 경외로, 경이로움으로, 기쁨으로, 열망으로...... 마주하는 자는, 누가 가르치거나 알려주지 않더라도,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심으로 인하여 깨닫게 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의 가르침으로는 "검은 머리 짐승"을 회개하게 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 임하셔서 가르치실 적에는 무엇이든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적인 몸을 입은 존재다. 사람은 그러므로 마음과 자아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살아가야 한다. 영지주의자들이 물질을 감옥이라 부르고 부정한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놓쳤다. 신성의 영원하고 완전한 빛은, 오직 깊은 어두움 안에서 드러날 적에, 그것이 곧 추상적인 "영원성, 완전성"이 아니라, 영(Spirit) 안에서 꽃을 활짝 피워낸 경이로, 경외로, 기쁨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식물과 동물은 존재 자체가 "덜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있지만, 그런 만큼 그들은 죄와 악을 짓지 않기에, 반대로 식물과 동물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는 없다. 경외란,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란 담대할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람은 고작해야 다음 달 생활비 문제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비웃고 욕한 것을 두고두고 마음속에 새기면서 스스로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을 타인에게 투영하려 드는 존재이다. 그것이 인간 실체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어두움이 있다. 그 어두움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통과하여 지나가야만 한다. 그것은 각자에게만 주어진 시험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대신 전가하거나, 뒤집어씌울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리 걸어가는 길에서, 우리는 "첫 만남"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영으로써 하나님을 처음 영접했던 날의 기쁨을,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내 안에서 십자가를 지시되 사흘째 되던 날에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던 날의 그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경외를, 경이로움을, 기쁨을, 환희를, 눈부시고도 찬란한 그 어찌할 수 없는 심정들을...... 그리고 바로 그 "아버지"는 절대로 추상적이지도 막연하지도 관념적이지도 않으신 분이며, 너무나도 찬란하고 눈부시게 실재하시는 신성이시며, 그 신성이 천지만물을 본래부터 "사랑"하여 비추시고, 오히려 천지만물 전체가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존재하고 드러나는 것임이니, 우리가 우리들의 삶과 인간됨의 어두움 안에서 또 다시 그 초심을 잃어버렸을 적에, 다시 그 순결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아버지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 세상 안에서,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더욱 빛을 사랑하고, 빛을 증거하며, 그리 아버지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영혼들을, 아들들을, 자녀들을, "아버지께서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사랑하시며", 또한 그들의 영과 혼의 모든 여정들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신다." 성령께서 매 순간 나와 함께하시며, 내 삶의 여정에서 함께하신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전한 빛이시니, 그 어떤 어두움도 감히 빛 안에 거하는 영과 혼을 해칠 수 없다. 이것이, "믿음이 곧 실재가 되는 순간의 기적"(히11:1)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오랜 죄와 악과 어두움을 넘어서서, 매 순간 영과 혼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우리들의 존재와 삶 속에서 그분이 늘 함께하신다는 것...... 나의 여정이 곧 "동행하는 여정"이 된다는 것, 이것은 더 이상 사람의 말로는 어찌 가르칠 수 없는 단계이다. 이것은 오직 죽고 다시 태어난 순결한 영으로 인해서만 들을 수 있는 말씀이요,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이다.
말씀은 언어가 아니다. 말씀은 언어 너머의 것이고, 언어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의 영과 혼은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할 수 있으며, 그 말씀은 오직 죽고 다시 태어난 영(Spirit)으로 인해서만 들을 수 있는 신의 음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