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신비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
나는 지식이나 이론, 학문 등에 대해서 능한 편이 아니다. 내 길이 애시당초 그 쪽과는 정 반대되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분석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지닌 에고(ego) 안에, 가장 깊은 경외, 열망, 기쁨을 타고난 영과 혼을 개화(開花)케 하심으로써, 영과 혼으로써 신성을 영접하고 교류하며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경이로운 일인지를 고백하고 증거하도록 하신 것이, 지금까지 나의 길을 이끌고 안내하셨던 그분의 뜻이시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대 지금까지 내가 길을 걸어오면서 단 한 순간도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의심한 적이 없었고, 모든 순간 내가 글을 쓰고 말을 하면서 "나의 말"이 아닌 오직 "성령의 음성"에만 충실하겠다는 신념을 잃은 바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철저하게 "신성을 경외하고 열망하고 기뻐하는 것"(영혼의 개화)을 중심으로 나의 체계를 정립하고 형성해나갔으며, 이것과 관련없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들은 매우 엄격하게 분리하고 제거해나갔다. 그리고 오직 "실전"에서 필요한 이론, 지식, 개념들만을 남겨놓고, 이들을 하나의 "완성된 교본"으로 형성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다. 이 길이, 결국에는 지금의 나의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었고(남들이 어떻게 보든 간에), 내 안에서 "복음주의적" 신앙과 영성으로 귀결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나의 목적은 "완전하고 정교한 이론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내 글에는 이론적, 학문적, 지식적인 오류나 부족함이 많을 것이고, 이러한 요소들에 대해서 내가 게으르거나 나태하지는 않을지언정, 나의 길과 관련이 먼 영역임을 읽는 분들이 이해하시고 받아들여 주시기를 청코자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여정이 점점 더 내 안에서 완성된 영적 정체성과 그 결실로서의 신앙과 영성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서술할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나의 에고적인 욕심이나 욕망(특히 학술적이고 지적인)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나를 통하여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빛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을 섬기고자, 필요한 수단들을 예비하기 위함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목적성"에 부합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들은, 심지어 그것이 성경이나 교리나 신학이나 전통에 관련되었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가지치기"를 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내가 가장 먼저 언급하여야 할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정의해야 할 사실은, "나는 (공식적인 기준/관점에서의)기독교인이 아니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특정한 종교나 교단에 속하지 않는다. 실천적 신비주의의 핵심적인 글들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이는 내가 특정한 종교나 교리, 교회 등을 부정하려고 하거나 대체하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며, 단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있어서 기존의 종교나 교단, 교회 등에 속할 경우, 얻는 이익에 비해서 잃는 손실들이 너무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보편성과 내재성이 핵심이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집단적이고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방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더 많은 영혼들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진리를 찾게 될 것이고, 이 요구에 부합하기에는 오늘날의 오컬트, 신비주의, 종교, 영성 등은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현학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으로 치우쳐져 있기에, 그러한 "길 잃은 현대의 영혼들"을 진실하고 올바르게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길 잃은 영혼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야 하며(다른 말로 개인의 존재와 삶에 직접적이고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하며), 둘째로 내재적이고 의식적이어야 하며(각자의 의식과 내면에서 체험되고 교감되고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하며), 셋째로 보편적이고 원형적이어야 한다(깊고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면서도, 인류 보편에게 적용되는 것). 이 세 요소들에 부합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교가 지속적인 의미 있는 노력을 기울여오고 있음을 나는 개인적으로도 신뢰하고, 공식적으로도 인정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교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엄밀히는 '가나안 성도'들을 포함한다면, 인류 전체 중에서 기독교적 진리와 복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로 길을 잃은 영혼들의 비중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곳에서, 현대의 특성에 맞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점을 위하여, 나는 "배타적이고 특수한" 형태나 구조를 지닌 그 무엇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보편성, 내재성, 개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내 개인으로써는 기독교와 친밀하고 또한 기독교적 진리와 복음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면서도, "나는 (세상이 말하는)기독교인이 아니다"고 스스로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점을 단지 "편리한 변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거하고 고백하고자, <실천적 신비주의>의 작업을 포함하여, 앞으로도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형성되는 영적 정체성과 신앙과 영성에 대하여 상세하게 밝혀나가는 일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가장 먼저, 기독교 내에서의 가장 넓은 두 갈래의 구분, 그러니까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가톨릭에 더 이끌린다. 오랜 시간 이어온 전통과 체계와 권위가 가져다주는 부정할 수 없는 신뢰와 안정과 평화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본질적인 무의식적 두려움, 공포, 불안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대는 집단과 조직과 사회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적 흐름 가운데 있으며, 이로써 사람들은 "집단(체계)적인 것이 더 이상 개인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해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나의 길은 내가 직접 찾아야만 하는" 여건을 마주하게 되며, 이 흐름 속에서 전통과 체계와 권위라는 이름은 너무 낡은 것,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공하던 이점을 제외한 현 시대에 맞는 구체적이고 명료한 새로운 대안이나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좀 더 정확히는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요소들을 중요시하는 제도적 시스템이, "현대"에 맞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외적인 요소들에서 더 이상의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므로, "내면적으로" 파고들 것이다. 아마도 이 점에서, 가톨릭은 앞으로의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신비주의적" 관점을 좀 더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도 가톨릭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개신교보다도 더욱 강점을 가질 것이다. 다만 나의 길에 있어서, 개신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만인 제사장설", 그러니까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한다는 점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안에 "개인적이고 내재적이고 원형적인" 모든 특성들이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단, 이때에도 "복음"의 최신화, 그러니까 현대의 실존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실질적이고도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보편적-개신교적 정체성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자체에 대해서 매우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 종교개혁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 "만인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하여)하나님과 관계맺을 수 있다", 바로 이것 아니었는가?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은 오히려 개신교보다도 가톨릭을 더욱 "신뢰"한다. 물론 이러한 관점들은 순수한 영적인 것이라기보다 대부분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요소들이 많이 개입된 부분이긴 하지만, 결국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교회에 속하지 않은)평범한 사람들의 인식이나 관점이야말로,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교가 과연 "주님의 뜻대로 충실히 잘 나아가고 있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아니겠는가. 즉, 오늘날의 개신교가 너무 "대중으로부터 멀어져서" 또 다시 "보편적인" 개신교로써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종교개혁을 통한 개신교의 탄생 과정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온 세계에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비록 신앙과 교리의 핵심과 본질은 지키더라도, 그 방법론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맞춰서 능동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화함으로써,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즉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근본적 원칙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그 반대 급부로 "보편성"만을 위하여 교리와 신앙과 믿음의 핵심이나 본질을 외면하거나 감추거나 축소하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매우 엄격하게 비판한다. "본질"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방법론(현상, 수단, 매개)"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본질 자체를 잘 계승하고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유동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 개신교적 정체성, 이라는 것이 말장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이 점에서는 다소 예민한 주제이지만, 그럼에도 명확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다 : "특정 종교"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 즉,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진리를 현대에 맞춰서 (그 본질과 핵심을 잃지 않는 선에서)더욱 보편적이고 개방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그 범주 안에서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영적인 전통과 종교와 철학과 방법론 등과 적극적으로 연합하여, 궁극적으로는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갈등"은 결국 배타성과 폐쇄성에 있고, 이는 "특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께 계시고, 그리스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폐쇄성, 배타성, 특수성"을 비판하신 분이 아니시던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분의 말씀 어디에도 "특정한 종교, 교단에 속해야만" 구원받는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현대의 갈등과 상처를 봉합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연합"이 중요하며, 바로 그 연합을 위해서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 역시도 "순수한 기독교적 진리(복음)"의 원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 가능한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내 자신을 "보편적-개신교적 영성"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자 표본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서투르게나마 나의 삶 속에서 이를 실천하고 행하는 것을 사명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를 위하여, 나는 세 가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 첫째,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둘째, "그럼에도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한다." 셋째, "또한 복음적 진리를 믿고 실천한다(어차피 믿음에서 실천이 이어지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거의 모든 종교나 전통이나 철학이나 방법론들과 최소한 "교류"하거나 "협력"할 수 있게 되며, 이는 또한 인류 전체의 보편적 "영적 성장"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서도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보편성 때문에 "지나치게 원형적인" 형태의 진리가 되는 것 역시도 경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진리는 하나이다." 이런 식의 가르침들은 결국 그 "하나"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 때문에 또 다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살아서 걸어가는 길은 결국 각자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점에서, 나는 기독교적 진리의 성격에서 지나치게 벗어나는 형태의 길들은, 아무리 보편성을 지향하더라도 최소한 명확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같음"을 여는 것만큼이나 "다름"을 선명히 하는 것 역시도, 연합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보편적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적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 핵심과 본질을 해하지 않는 바로 그 "선"을 어디까지로 여길 것인가? 이 점에서 나는 "그리스도 중심성"이라는 개신교의 원형으로 되돌아갈 것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고 싶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예수님"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는, "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 드러난 그분의 신성"에 있다. 그리고 그분의 신성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에 있는 것이며, 이는 요한복음에서 특히 강조되는 부분이다. 바로 이 점, 그러니까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선"은 다름아닌 : "그리스도를 통하여 (각 개인이)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에 있다. 이것을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벗어나는 범주에 속한 그 무엇도, 기독교적 진리를 따르는 방향성에 대하여 "(상호)존중"은 가능할지언정, "협력"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이 점에서 나는 기독교 자체보다도 더 기독교적 진리에 심각하게 반하는 요소들은 철저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나 다신론이나 범신론, 양태론 등은 삼위일체 및 성육신과 같은 핵심 교리들의 관점에서 해석될 "여지"는 있더라도, 그 자체가 교류의 대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가장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의)하나됨"이라는 본질에서 어긋날 여지가 있는 그 무엇도 "선긋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중심성(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에 대해서도, "보편적-원형적 해석"의 여지는 열려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훼손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내가 선긋기, 라고 표현하는 것은, 갈등과 상처를 봉합하고 연합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대의명분을 최대한으로 존중하여, "비판, 배척" 등의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개신교적 정체성의 본질 중의 본질이요, 핵심 중의 핵심이다. 결국 기독교적 진리의 핵심은 복음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복음"이라는 진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본질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에 있으며, 바로 이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에 있다.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풀이하려면 자꾸 문장이 길어지긴 하지만 :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며, 이 본질을 위해서는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복음주의의 원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즉, "개인이 신과 직접 교감하고 연결되는 것", 이 자체가 본질을 지키면서도 최소한으로 교류하거나 존중할 수 있는 마지노선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심성" 역시 이 선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 "신"은 유일하고도 완전하고 영원하신 분이며, "인간 수준"에서 신을 "격하"시키지 않으면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본질을 왜곡,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그 원형 중의 원형인 "삼위일체"의 교리는 (설령 보편적이고 원형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열더라도)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성"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삼위일체의 교리보다도 더)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개신교적 복음의 새로운 방향성일 것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각 개인과 직접적으로 교제하고 연결되신다는 이 본질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 다른 모든 분야/영역들과 교류, 협력, 또는 연합할 수 있는 개방성과 유연성, 적극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또한 중요한 것은 수단과 목적의 정확한 이해이다. "복음주의",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의 하나됨"이라는 진리는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재해석을 통해서라도 이루고 달성하고자 하는 중대한 "목적"이 되어야 하며, 이 목적 자체가 훼손되거나 무너져서는 안 된다. 다만 이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 자체는 개방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관점에서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각 국가마다, 사회마다, 문화마다, 전통마다, 심지어는 개인마다 맞춤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으며, 이러한 방법론적 관점에서 목적이나 진리의 본질 자체가 훼손되지 않게 하는 중심축은 역시나 "그리스도 중심성"이 되어야 한다.
실천적 신비주의로서의 그리스도 영성은 결국 "보편적-개신교적 복음주의"라는 목적을 섬기기 위한 시종, 하인의 역할을 한다. 실천적 신비주의란 결국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만나고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실천적 신비주의 자체를 나는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그 글을 쓸 당시에는 지금처럼 목적성이 아주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여러 대목들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영지주의나 오컬트적 영역/분야들(예: 신지학, 카발라, 연금술 등)은 "오늘날의 절대 다수의 대중들이 자신의 일상과 삶 속에서 큰 어려움 없이 실천하여 행함으로써, 보편적-개신교적 복음주의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지나치게 어렵거나, 현학적이거나, 폐쇄적이거나, 특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에 대해서 나는 철저하게 배제되어야만 하며, 오직 "인간 존재의 원형적 토대" 위에서만 실천적인 신비주의적 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특정한 재능이나 자질을 타고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들은 보편적이지도 않고 따라서 실천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특정한 방법이나 수단만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로 보편적이지도 않고 실천적이지도 않다. 이와 같이, 목적에 해를 끼치는 수단/방법을 포함한 나머지 모든 것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야만 하며, 오직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것", 즉 "각 개인들이 자신의 삶과 일상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요소로 인한 제한이나 한계 없이 따르고 실천하여 행할 수 있는" 데에만 명확하고 선명하게 집중되어야만 한다. 이 관점에서는, 다양한 명상법이나 마음공부, 정신 집중, 혹은 기도, 묵상의 방법론이나 전통들과는 충분히 긍정적이고 유연하게 협력, 연합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개인적으로 교회나 개신교 자체에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현대의 영성을 "선도"해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신비주의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신(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감하고 소통하며 하나되는 것"을 달성하며, 이 과정에서 "각자의 안(내면)에 거하시는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신성(그리스도)"을 영접하고 눈을 뜨는 것, 곧 (지금까지 논의한 관점에서의)"그리스도 중심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영적 정체성은 바로 이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앙이란 특정한 행위나 형식이 아니라, 24시간의 일상 가운데에서 상시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어야 하며, 영성이란 특정한 종교, 교리, 형식을 따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적" 삶을 사는 것 자체(즉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것)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의 나의 영적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보편적 (개신교적)복음주의자로서, 실천적 신비주의적 방법론을 따르는 사람." 나는 앞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교육하고, 지도하고, 상담하면서, 내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나갈 것이다.